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물길은 고구려 전성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걸림돌(!)'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장수왕 대는 북위와 외교적인 접촉을 시도하면서 고구려를 어떻게든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고, 문자명왕 대는 부여를 공략해서 부여 왕과 그 일족들이 고구려에 투항하게 되지요. 그런데 종래의 통설대로라면 이 문자명왕 대의 부여성 함락이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아주 심대한 타격으로 해석될 소지가 큽니다. 장수왕 대 고구려가 실위와 지두우 방면으로 세력을 뻗칠 수 있었던 것은 북만주의 부여가 안정적인 배후지역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 지역에 물길의 세력이 뻗쳤다면 고구려가 눈강이나 대흥안령 지역에서 세력권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부여성 함락의 의미를 축소시켜 물길이 부여 궁성에만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힌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자명왕 대 북위에 파견된 사신 예실불이 '섭라와 부여' 운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물길의 부여 공격은 '점령' 비슷한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기존의 학설대로라면) 부여가 있었던 북만주 일대가 일시적으로나마 물길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만약 물길이 공략한 '부여'가 만주의 부여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즉 북부여수사의 영향 아래 있던 '북부여'가 아니라, 광개토대왕 20년에 국체(國體)를 완전히 멸한 것으로 인식되던 '동부여'라면? 광개토대왕비의 동부여 정벌 관련 내용을 보겠습니다.
...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20년(410) 경술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 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시마압로(卑斯麻鴨盧), □사루압로(□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한 성(城)이 64, 촌(村)이 1,400이었다...
비문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동부여가 고구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거나, 그 왕실을 멸하고 왕과 그 일족들이 모조리 고구려 국내성으로 끌려갔다느니 하는 기록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투항하였다'는 해석이 걸립니다만, 원문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맥락상의 추측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널리 이야기되는 '동부여 완전 병합'은 역사학적인 '의미 부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설령 410년의 기록이 동부여를 완전히 병합한 기록이라고 해도 광개토대왕이 동부여 왕가의 맥을 끊었다는 확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약 동부여 왕과 그 일족들을 국내성으로 압송했다면,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을 때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비문에 새겼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동부여 왕실이 왕으로서 기존 영토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잃었을망정 존속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즉 고구려는 동부여가 있던 연해주 남부지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했을지라도 그 지역의 지배층인 동부여 왕실을 살려두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아니면 이들을 통해서 이 지역을 지배했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물길의 부여 공격 기사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410년 이후에도 동부여 왕실이 훈춘 일대에 명목상으로나마 존속해 있었다면, 물길의 공격 대상은 '북만주의 부여'가 아니라 '연해주 남부의 부여'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둘 다 부여인데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유목지대와 수렵지대로 나아가는 통로인 북부여 지역을 적대세력인 물길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고구려 입장에서 국가적인 위기로 여겨졌을 것이고, 조속한 시일 내에 탈환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제가 아는 한' 이지만^^;) 고구려가 부여지역 재점령을 시도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요. 사료의 누락일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예실불의 사례에서 보듯이 고구려 입장에서 그처럼 주요한 지역을 빼앗기고도 그것을 태연스럽게 북위의 조정에서 이야기할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물길의 부여 점령 건은-만약 그것이 정말로 북만주의 부여였다면-동아시아 질서의 한 축인 고구려로서는 국가적인 망신이었을텐데, 그것을 그렇게나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은 고구려가 입은 전략적 타격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구체적인 이유는 물길이 공격한 부여가 동부여였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물길, 부여의 북위 입조 기록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만... 능력부족으로 거기까지는 미처 검토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고견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동부여일 가능성을 배제할수는 없으나 원부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는데 1. 문자왕때 북위로간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쫒겨나고 라고 말하고 있는것으로 봐서 삼국지 부여전에 부여인은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할 정도로 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서물길전 또는 북사 물길전등을 볼때 중국과의 사신파견횟수가 다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물길의 부여공격기사는 훈춘일대의 동부여가 아닌 원부여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어차피 저 자신도 '물길이 공격한 부여=동부여?'를 단순한 문제제기 차원으로 생각하고 글을 올렸으므로 두 가능성 모두를 염두에 두고 kamando 님의 근거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황금과의 밀접한 관계'가 곧 '물길이 공격한 부여=북부여'라는 강력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부여인들이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는 위지동이전의 기록은 부여인들의 '성향'인데다가 동부여의 왕과 귀족들도 원부여와 같은 계통의 사람들일 터이니 설령 그들이 두만강-연해주남부 지역에 있었다 해도 생활풍습은 그대로였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혹은 고구려 왕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 부여 왕실이 그같은 사치
가 가능할지 그 자체가 의문시되므로 예실불의 '부여 황금' 운운은 그저 물길에 대한 지배권 재확립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수사적 발언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만 두번째 증거로 제시하신 위서물길전, 북사 물길전의 입조 기록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물길 입장에서는 본래 북위와 교섭하기 위해서 거란 서부 지방을 따라 먼 길을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물길의 (원)부여 점령은 장수왕 대 지두우가 분할(혹은 그것이 단순히 분할 '시도'였다 할지라도)되어 자신들의 대(對) 북위 교섭로가 완전히 가로막히자(혹은 그럴 위기를 경험하자) 그것을 돌파하려는 승부수였을 수도 있었다는 거지요.
만약 물길이 원부여를 공략했다면, 문제는 역시 그같은 상태가 언제쯤 극복되었는지 하는 것일텐데, <고구려의 발견>에 실려있던 504년에서 507년 사이에 고구려가 물길을 재정복하고 세를 뒤엎었다는 기록의 근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군요. 물길의 입조가 그 이후에 갑자기 팍 줄어들었다든지 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도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