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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구려 토론방 문자명왕 대 물길이 공격한 '부여'의 정체?
광개토태왕 추천 0 조회 581 09.01.22 01:40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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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1.22 22:59

    첫댓글 동부여일 가능성을 배제할수는 없으나 원부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는데 1. 문자왕때 북위로간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쫒겨나고 라고 말하고 있는것으로 봐서 삼국지 부여전에 부여인은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할 정도로 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서물길전 또는 북사 물길전등을 볼때 중국과의 사신파견횟수가 다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물길의 부여공격기사는 훈춘일대의 동부여가 아닌 원부여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 작성자 09.01.23 12:18

    어차피 저 자신도 '물길이 공격한 부여=동부여?'를 단순한 문제제기 차원으로 생각하고 글을 올렸으므로 두 가능성 모두를 염두에 두고 kamando 님의 근거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황금과의 밀접한 관계'가 곧 '물길이 공격한 부여=북부여'라는 강력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부여인들이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는 위지동이전의 기록은 부여인들의 '성향'인데다가 동부여의 왕과 귀족들도 원부여와 같은 계통의 사람들일 터이니 설령 그들이 두만강-연해주남부 지역에 있었다 해도 생활풍습은 그대로였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혹은 고구려 왕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 부여 왕실이 그같은 사치

  • 작성자 09.01.23 12:10

    가 가능할지 그 자체가 의문시되므로 예실불의 '부여 황금' 운운은 그저 물길에 대한 지배권 재확립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수사적 발언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만 두번째 증거로 제시하신 위서물길전, 북사 물길전의 입조 기록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물길 입장에서는 본래 북위와 교섭하기 위해서 거란 서부 지방을 따라 먼 길을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물길의 (원)부여 점령은 장수왕 대 지두우가 분할(혹은 그것이 단순히 분할 '시도'였다 할지라도)되어 자신들의 대(對) 북위 교섭로가 완전히 가로막히자(혹은 그럴 위기를 경험하자) 그것을 돌파하려는 승부수였을 수도 있었다는 거지요.

  • 작성자 09.01.23 12:16

    만약 물길이 원부여를 공략했다면, 문제는 역시 그같은 상태가 언제쯤 극복되었는지 하는 것일텐데, <고구려의 발견>에 실려있던 504년에서 507년 사이에 고구려가 물길을 재정복하고 세를 뒤엎었다는 기록의 근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군요. 물길의 입조가 그 이후에 갑자기 팍 줄어들었다든지 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도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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