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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길의 시인' 혹은 '길과 강의 철학자' 등의 치사가 붙는 문화사학자인 신정일 선생이 쓰는 글들을 남들이 그렇게 불렀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쉽게 가져다 쓰는(?) 그런 평범한 구句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쨌든 멋지지 않습니까?
'길 위의 인문학'.
그러니까 그런 계통을 연구하거나 실행에 담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者' 혹은 '가家'라는 접사가 붙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인문학자도 그냥 인문학자가 아닌 '길 위의' 인문학자이니 책상에 사람과는 아무래도 차별이 될 것 같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이론을 직접 현장에 대입한다는 가만히 앉아서 담론을 펼치는 의미가 짙을 것이니 아무래도 생동감이나 생생함 그리고 현실감은 더할 것 같습니다.
비록 학교는 많이 다니지 않았지만 홀로 공부를 하여 다방면에 상당한 전문지식을 축적하고 계신 '우리땅 걷기운동 본부' 신정일 대표님 이야기입니다.
70여 권의 책을 쓰셨고 인문지리와 역사자리가 상당한 양이니 어쩌면 그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라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선생께서는 일찍이 산줄기와 더불어 물줄기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셨습니다.
우리땅을 걸으면서 '강' 가령 한강, 낙동강, 금강 등도 차례로 다 걸으셨으니 어쩌면 이 분야에 관한 한 태두泰斗라 할' J3클럽'의 배병만 방장보다 선구자였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중환의 택리지를 선생의 '새로 쓰는 택리지'로 읽었고 이어 '신택리지'나 '한국사의 천재들'이란 책들도 관심있게 읽었으니 저도 신정일 선생 팬인가요?
어쨌든 그런 인문학 특히 인문지리학에는 여러 가지 분야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문적 요소가 역사에 방점을 찍으면 '역사지리학'이 될 것이며, 문화일 경우 '문화지리학' 정치일 경우 정치지리학, 도시지리학.......
이참에 '신정일 평전'이나 한 번 써볼까?
낙남정맥 출정식
명산과 산줄기 산행 그리고 해외 원정 산행까지 두루 진행하고 있는 분당·수지의 명문 산악회인 '해밀'에서 이번에 금북정맥을 마치고 이번에는 낙남정맥에 든다고 합니다.
그 출정식이 2018. 12. 23. 토요무박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산줄기학파의 맹렬한 신도인 제가 그 출정식에 참여하는 당연한 얘기겠고.....
낙남정맥이라!
일단 낙남정맥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기로 하죠.
낙남정맥은 다른 정맥과는 좀 다르게 어려운 산줄기입니다.
산행 얘기가 아니고 이론 얘기죠.
시작 뿐만이 아니라 끝도 학자에 따라 다릅니다.
천천히 봅니다.
1. 산경표가 본 낙남정맥
산경표란 무엇인가?
산경표는 1800년 이후에 발간된 지리서로서 우리나라의 산줄기들의 명칭과 거기에 속하는 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자 표이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이 산경표는 두 가지 본이 전해진다. 하나는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 산경표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학중앙연구원(舊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 중인 ‘여지편람輿地便覽’ 중의 산경표가 그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크지 않다. 즉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15개로 본 것은 해동도리보의 산경표나 여지편람의 산경표가 모두 같다. 다만 해동도리보의 그것이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본 반면 여지편람의 그것은 1대간 2정간 12정맥으로 봤다. 여지편람의 신경표는 낙남정맥을 낙남정간으로 본 것이 두 본의 차이점이다.
왜 여지편람은 낙남정맥을 낙남정간으로 봤을까? 또 장백정간 역시 정맥으로 해도 좋을 것을 굳이 정맥 대신 정간이라는 품계를 사용했을까? 생각건대 사실 백두산이 조종지산이 아니었다면 백두대간은이라는 나라의 최장 줄기의 한 쪽은 두만강으로 가야하고 다른 하나의 줄기는 낙동강으로 가는 게 맞다. 그렇지 않나? 간幹은 줄기이며 맥脈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 아니던가!
그래서 그런가? 낙남정간의 배치 또한 백두대간- 장백정간에 이어 세 번째 편제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간이라고 해서 그것이 지리인식에 기여하는 역할은 그다지 커 보이거나 달리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관념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줄기의 대장인 백두대간의 시작을 백두산으로 봤고 그 끝을 지리산으로 고정시켰기 때문에 사실상 더 길게 갖고 가야할 그 아쉬움을 정간으로 이름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니 정간도 사실 산줄기 요건 가령 합수점으로 향하고 그 줄기가 30km가 넘는다면 정맥의 한 가지로 보면 될 것이지 이를 굳이 정간으로 분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런 필자의 논지는 그 이하의 줄기 분류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가령 기맥이라는 줄기를 둘 필요 없이 그저 지맥으로 단순화하자고 그 이론을 변경한 지 이미 오래이다.
산경표를 보자.
위 표에서 보듯 해동도리보를 원전으로 한 최성우 본에 의할 경우 낙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지리산 구간 중 취령('나')에서 가지 침을 알 수 있다.
그 상황을 산경표는 白頭大幹至於智異自鷲嶺以下則爲傍支故今作南洛正脈(위 '가') 즉 '백두대간은 지리산에서 끝나고 취령 이하는 곁줄기를 이루므로 낙남정맥이라 한다.'고 했다. 물론 여기서 南洛正脈은 洛南正脈의 명백한 오기일 것이므로 무시하기로 한다.
이쯤되면 '취령'이 어딘가에 눈이 쏠린다.
취령이라......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이 가지 치는 그 분기점이 취령이라....
물론 당시사람들의 산을 보는 시각이나 관점이 지금의 과학적인 그것과 같을 리 없다.
또한 그 때의 지명이 지금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물론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지명 뿐만 아니라 선인들의 사고를 느껴봄으로서 옛 것에서 나는 그 향취를 같이 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지리 99'팀에서는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 일과'를 거론한다.
"빈발암을 떠나
영신암을 지났다. 서쪽 산 정상을
거쳐 숲 속 30리 길을 걸어서 의신암(義神庵)에 다다랐다. 이 암자의 서쪽은
온통 대나무 숲이었다. 감나무가 대나무 숲 중간 중간에 섞여 있었는데, 햇빛이 홍시에
부서지고 있었다. 방앗간과 뒷간도
대숲 사이에 있었는데, 근래에 본 그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이에 비할 것이 없었다.
법당 안에는 금칠한
불상 한 구가 있었다. 서쪽 방에는 승려의
상(像) 한구가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물으니 한 승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분은
의신조사(義神祖師)인데, 이곳에 이르러 도를 닦았습니다. 도가 반쯤
닦여지자, 이 산의 천왕(天王)이 조사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길 권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초료새가 되어 길을 인도해, 선사가 그 새를 따라갔습니다. 큰 고개에 이르자
초료새가 수리새로 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그 고개를 초료조재라고 부릅니다.
수리가 또 길을
인도하여 하무주(下無住)에 이르렀습니다.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라고 하니, 수리새가 말하기를
'21일이면 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선사는 너무
더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선사는 다시
중무주(中無住)의 터에 이르렀습니다.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라고 하니, 수리새가 말하기를
'7일이면 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선사는 그것도
더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수리새는 또다시
상무주(上無住) 터로 인도하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리새가 말하기를
'이곳은 하루면 도를 이룰 수 있으나, 여인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명(僧名)을 바꾸어 무주조사(無住祖師)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허풍이 심하였다.
나는 점심을 먹은
뒤 암자 앞에서 한숨잤다.
대숲을 지나 큰
내를 세 번이나 건너 내당재(內堂岾)에 오르니, 북쪽으로 초료조재가
보였다.
풀숲을 헤치며
남쪽으로 30리 길을 내려가 칠불사(七佛寺)에 이르렀다."......(하략)
초료조는 우리가
흔히 촉새 또는 때까치라고 부르는 뱁새의 학명이며, 한국의 텃새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는 우리나라 속담에 나오는 그 뱁새를 말하며
소설 토지의
초반부에서 작가 박경리는 뱁새를 때까치라고 표현을 했다.
그러니 초료조재는 수리재가 수리는 곧 鷲이니 곧 鷲嶺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리산의 남부 경계를 삼신봉 정도로 보는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님은 취령을 삼신봉 부근으로 본다.
아무래도 낙남정맥 정도의 산줄기가 가지 칠 정도의 고개나 산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분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산 아니냐는 생각인 것 같다.
생각건대 남효온은 의신사에서 칠불사 방향으로 서진을 하면서 북쪽으로 초료조재를 보면서 지났다고 하니 지금의 영신봉 정도에서 서진을 한 고개이다.
그리고 30리를 걸어 칠불사에 도착을 했다고 하니 화개재 까지도 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다니던 고개는 신작로가 뚫리지 않는 이상 같은 곳일 가능성이 높다.
'지리 99'팀에 한 표를 던진다.
예전의 취령은 지금의 벽소령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영신봉으로 보는 게 타당하고 또 그게 과학적인 눈으로 보는 지금의 산경학과도 일치합니다.
그렇게 낙남정맥은 삼신봉 ~ 고운동재 ~ 옥산 ~ 계리재 ~ 천황산 ~ 여항산 ~ 무학산 ~ 용지봉 ~ 동신어산 ~ 고암나루터로 진행하여 도상거리 약 232km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산줄기의 끝을 들여다 보면 낙동강과 남해 바다의 합수점이 아닌 그저 고암나루터라는 낙동강의 한 강가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됩니다.
참고도 #1 낙남정맥, 신낙남정맥과 그 지맥들
낙남정맥을 처음부터 끝까지 개관해 봅니다.
흐름이 보이시죠?
위에서 보시다시피 삼신봉과 옥산 그리고 용지봉이 중요합니다.
삼신봉과 옥산은 지맥과 관련하여 특히 옥산은 신산경표에서는 신낙남정맥의 분기점 역할을 하는 곳으로서,
용지봉은 낙남정맥과 신낙남정맥의 분지하는 문제의 봉우리로서 각 중요한 곳입니다.
지맥은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참고도 #2
통설에 의한 낙남정맥의 끝.
그렇죠?
우리 팀도 아마 이렇게 진행할 겁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갔을까요?
저도 9정맥을 졸업할 때 바로 이 코스 즉 용지봉 ~ 황새봉 ~ 신어산 ~ 동신어산 ~ 고암나루터로 진행을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사전에 이 줄기를 예습할 때 용지봉~불모산~화산~굴암산~보배산~봉화산~노적봉~녹산마을 구간이 눈에 걸리더군요.
이 능선이 낙남정맥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낙동강과 남해가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고 있으니 소위 '산자분수령'의 원칙에도 부합해 보이니 말입니다.
더욱이 이 동네 김해는 옛 가야의 도읍지가 있던 곳입니다.
모름지기 산경표가 편찬되던 조선시대에는 유교 정신이 팽배해 있던 시절인지라 나라의 큰 산줄기는 무조건 도읍을 통과하게끔 그려졌습니다.
가령 한북정맥의 경우 한양을 통과해야 했고 그래서 그 끝이 장명산으로 갔으며, 금남정맥의 경우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가야의 도읍지가 있던 이곳 김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산경표는 어떻게 표기하고 있을까요?
확인해보죠.
참고도 #3 산경표 낙남정맥 끝 부분
산경표는 불모산 ~ 구지산 ~ 분산에서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산경표가 원전으로 삼았다고 보는 문헌비고 여지고 산천총설은 지리산에서 시작한 산줄기를 불모산(佛母山·지금의 용지봉까지 불모산으로 보고 있다)을 지나 구지봉에서 끝을 맺고 ‘구지봉에서 남쪽으로 몰운대를 마주보고, 몰운대 북쪽에 세 갈래진 강이 있다(龜旨之峯南對沒雲之臺於三叉之北)’라고 산줄기의 끝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줄기에서 가지 친 산줄기 들을 차례로 기재하면서 맨 끝 부분에 ‘구지봉에서 남쪽으로 분산(盆山·지금의 분성산326.9m)에 이르고 그 아래에 김해부 관아가 있다(龜旨峯南至盆山有金海府治)’고 했습니다.
이쯤에서 존경하는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 선생님의 얘기를 들어 봅니다.
참고도 #4 용지봉에서 갈라지는 낙남정맥과 신낙남정맥
산경표는 낙남정맥을 불모산-구지산-분산으로 끝을 내어 산줄기의 흐름은 그 끝이 낙동강에 닿도록하고 따로 龜旨峯(구지봉)이란 독립된 난을 만들어 산천총설1과 똑 같이 ‘南對沒雲之臺於三叉之北’이라고 덧붙여 낙남정맥의 끝이 구지봉임을 밝히고 있다.
중간에 龜旨山을 넣은 것은 산천총설1 처럼 불모산 다음에 구지봉을 기재하면 이미 산줄기의 끝에 이르렀으므로 산경표 체계상 그 다음에 盆山을 기재할 수 없다. 그래서 산경표는 구지봉으로 내려서기 전에 龜旨山이란 분기점을 나타내는 임시 명칭을 사용하여 盆山으로 이어준 다음 되돌아 구지봉을 별도로 기재하여 낙남정맥을 마무리한 것이다.
龜旨山이 임시명칭이라는 것은 표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경표에 나타난 거리를 보면 龜旨山은 김해 북쪽 5 리에 있고, 龜旨山 남쪽에 있는 盆山에서 남쪽으로 3 리를 가면 김해 관아가 있다고 했으니 龜旨山에서 분산까지의 거리는 2 리다. 10 리를 5.4km로 본다는 견해에 따르면 盆山은 김해도호부관아(현 김해 동상시장 일원)로부터 1.6km이고 盆山에서 龜旨山은 1.1km이니 이를 현 지도에서 보면 盆山은 분산성이고 龜旨山은 김해천문대가 있는 분성산 정상이다.
분성산 정상에서는 구지봉과 분산성으로 가는 산줄기가 나뉘고 있다. 그러니 龜旨山이 임시명칭이 아니고 실존하는 산 이름이라면 본줄기를 龜旨山에서 둘로 나뉜다하고 그 아래에 龜旨峯을, 그리고 가지줄기인 盆山을 龜旨峯 옆에 나란히 기재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낙남정맥의 끝은 구지봉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종주자 들은 신어산으로 가고 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나전현(현 나밭고개)을 지난 산줄기가 신어산을 지나고 있고, 현지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 산줄기가 끝나는 곳까지 바다였다고 하여 낙남정맥의 끝이 신어산을 거쳐 김해시 상동면 매리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나왔고, 지금도 낙남정맥 종주자들은 거의가 이 주장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어 이 주장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첫째, 대동여지도와 산경표는 산줄기 구분 방법이 다르다. 대동여지도는 산세에 따라 그 굵기를 달리하여 산줄기를 그린 것이지 주요 산줄기라고 해서 굵게 그리지 않았다. 산의 세력이 강한 백두대간의 대부분은 굵게 표현되고 대간이나 정맥이라도 산의 세력이 약한 구간을 보면 다른 지맥들과 다름이 없다.
대동여지도는 산세를 따라 생긴 대로 그린 지도다. 산이 높으면 산줄기를 넓게, 그리고 산이 낮으면 산줄기를 좁게 그렸다. 그래서 수치표고자료와 위성영상을 이용하여 산의 세력만을 감안한 산맥체계를 연구한 사람은 그 결과물이 대동여지도의 산줄기체계와 매우 흡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대동여지도는 산줄기를 특정한 기준을 정해서 구분하여 그린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그린 지도이기 때문에 아무리 첨단장비와 자료를 사용하였다 하여도 산세만을 위주로 만든 산맥체계는 이와 크게 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산경표는 10대강의 울타리를 기본으로 하여 생활권을 구획하는 산줄기를 주요 산줄기로 하는 구분 기준이 있기 때문에 대동여지도에 굵게 표시된 산줄기도 이 기준에 해당되지 않은 것은 이름 없는 가지 줄기로 기재되었다.
둘째, 신어산의 산줄기가 끝나는 상동면 매리의 낙동강 변은 강이 끝나는 바다가 아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부편에서는 부 남쪽 10리에 있는 죽도와 부 남쪽 12리에 있는 덕도는 둘 다 강 중앙에 있다고 했고 양산군편에서는 바다가 칠점산 밖 2리에 있다고 했으니 이를 현 지도에서 보면 김해국제공항의 북쪽은 바다로 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산경표가 편찬되었다고 추정하는 시대에 살았던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 총지리 편의 낙동강 하류 쪽을 보면 ‘또 동쪽으로는 삼랑창이 있고 남쪽으로 흘러 왕지연 황산강이 된다. 또 남쪽으로 양산의 동원진이 되며, 또 남쪽으로는 세 갈래 물이 되어서 김해부 남쪽 취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 기록하여 취량을 낙동강의 끝으로 보고 있다.
이 부근을 대동여지도에서 보면 황산강. 동원진. 삼차하. 취량이 차례로 보이고 취량 서쪽에 금단곶(金丹串) 이 있고 서낙동강은 태야강(台也江)으로 기재되어 있다. 낙동강하구둑으로 이어지는 2번국도가 지나는 성고개 부근에서 금단곶보(金丹串堡)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 당시에도 낙동강의 끝을 현재 하천법시행령에서 규정하고 있는 녹산수문에서 낙동강하구둑으로 이어지는 낙동강의 종점과 비슷하게 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신어산을 거쳐 동신어산에서 내려선 산줄기나, 분산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선 산줄기 모두가 바다에 이르기 전의 낙동강으로 내려서고 있는 것이다.
산경표의 정맥은 반드시 바다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바다 또는 강, 즉 물을 만나 끝난다. 물을 만나지 않고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한남금북정맥이나 금남호남정맥을 독립된 산줄기로 보는 것은 산경표를 잘 못 본 것이다. 한강권의 경계인 한남정맥은 속리산에서 문수산으로 이어지고 금강권의 경계인 금북정맥은 속리산에서 안흥진으로 이어진다. 한남금북정맥은 표의 구성상 이 두 산줄기가 중복되는 구간을 따로 떼어서 기재한 것이다.
셋째, 주장을 달리하여 세력이 강한 산줄기를 따른다고 한다면, 영운리고개 이후의 산줄기는 무척산과 신어산으로 가는 두 개의 산줄기가 있는데, 무척산(702.5m)이 신어산(630.4m)보다 높고 무척산 산줄기가 신어산 산줄기보다 4km 이상 더 길다.
이와 같은 기록과 사실로 볼 때 산경표를 따라 낙남정맥을 간다면 구지봉으로 가야할 것이고, 산경표의 끝을 무시하고 산세를 따라 더 이어 간다면 무척산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리고 낙동강이 끝나는 바다로 간다면, 용지봉에서 불모산을 거쳐 봉화산에서 녹산교로 내려서거나, 봉화산자락에서 임바위로 가야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녹산교에서 이어지는 낙동강하구둑이 강과 바다의 경계가 되고 있지만 위성사진에서 보면 강의 세력은 그 아래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임바위로 간다면 그 이남의 산업단지는 강이나 바다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매운 곳이므로 여름철 파라솔이 빽빽한 백사장 정도로 보고 도로를 따라 물가에 이르면 될 것이다.
이상으로 낙남정맥과 신낙남정맥을 살펴봤습니다.
한편 이 멋진 낙남정맥에서 두 개의 지맥이 갈리는 것을 봅니다.
횡천지맥과 동섬진지맥입니다.
지맥이 무엇입니까?
3. 지리산의 지맥枝脈
지맥은 대간과 정맥의 하위개념이다. 즉 대간大幹〉정맥正脈〉지맥枝脈이니 지맥은 산줄기 계급 체계의 제일 하위에 있는 개념이다. 물론 기맥, 분맥, 단맥, 여맥도 상정할 수 있지만 너무 세분시키는 것이기도 하며 논란만 부추기는 격이니 여기서는 언급을 피한다.
지맥이라는 계급이 붙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①‘산줄기 요건’으로 백두대간이나 정맥 그리고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지맥에서 가지를 친 줄기여야 한다. 그리고 ②‘물줄기 요건’으로 그 줄기가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와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합수점형)여야 하며, ③마지막으로 ‘산줄기의 길이 요건’으로 그 도상거리가 30km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들이다.
다만 ②요건의 경우 산줄기를 조금 더 유용하게 쓰기 위하여 특별한 경우에는 예외를 두는 바, 가령 관련된 물줄기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울타리형)이나 반도의 모양새를 가진 땅에서 호수나 강 혹은 바다 등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산줄기형)의 경우 등이 그것이다.
즉 정리하자면 ㉮합수점형, ㉯울타리형, ㉰산줄기형 등 세 가지가 유형에 해당되어야 한다. 좀 어려운 내용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산줄기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니 차근차근 살펴보자.
㉮ ‘합수점合水點’형의 예
좌측 개념도는 백두대간 지리산 입구인 여원재에서 고리봉을 지나 만복대 ~ 반야봉으로 진행하는 대간능선과 대간길의 만복대 바로 앞에서 가지를 쳐 밤재 ~ 견두산 ~ 형제봉을 지나 서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33.2km의 가지줄기 개념도이다.
이를 위 지맥의 3요건에 대입시켜본다.
보다시피 이 가지 줄기는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줄기이니 ①요건에 합당하다. 그리고 이 줄기가 백두대간 만복대 부근에서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 서시천이라는 물줄기가 발원을 하는데, 이 서시천이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물줄기인 섬진강과 합류되는 합수점인 개념도 ‘A'의 곳에서 이 줄기의 맥이 잠기게 되니 이 역시 ②요건에 합당! 그리고 이 가지줄기의 도상거리는 33.2km가 되므로 기본 요건인 30km를 넘으므로 이 역시 요건 ③에 합당하다. 그러므로 이 가지줄기는 枝脈이라는 계급을 얻게 되고 그 이름은 강 이름인 서시천을 따서 ’서시지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이는 고유명사가 된다.
㉯울타리형의 예
합수점형에 비해 설명이 조금 복잡해진다. 산줄기가 여러 개 나오긴 하지만 원리는 같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
좌측 개념도의 주主줄기는 역시 백두대간이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백두대간에서 큰 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이 가지를 쳐 나가는 모습이다. 그 가운데에서 보청천이 발원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정맥 이름이 암시하듯 이 산줄기는 금강의 북쪽을 진행한다. 그러므로 이 보청천이 10대 강 중 하나인 금강과 만나는 합수점을 보면 된다.
그런데 이 보청천과 금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두 개의 산줄기가 잠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산경표 상으로는 팔음지맥과 금적지맥이 그것이며 대한산경표 상으로는 보청지맥과 보청북지맥이 그것이다.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필자가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대한산경표의 이름으로 얘기를 이어가겠다.
똑같은 물줄기로 들어가는 두 산줄기의 우선권은 그 산줄기가 속한 주산줄기의 계급이나 세력에 따른다. 이 경우 백두대간〉정맥이므로 이 물줄기는 백두대간 몫이다. 따라서 보청천과 금강의 합수점으로 잠기는 줄기는 대간에서 분기한 줄기이므로 ①의 요건을 충족하고 합수점으로 갔으니 이 역시 ②의 요건을 충족한다. 마지막으로 이 가지 줄기의 도상거리가 57.7km가 되니 지맥이라는 계급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이 지맥의 이름은 물줄기 보청천의 이름을 따 보청지맥이라 명명한다.
이렇듯 ‘합수점’형인 이 보청지맥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보청천으로 들어온 다른 줄기가 문제이다. 즉 이 줄기 역시 한남금북정맥이라는 정맥에서 분기 되었으므로 ①요건은 충족하며 이 산줄기의 도상거리가 약 49.6km가 되므로 이 역시 ③요건을 충족한다.
다만 합수점은 합수점인데 주主산줄기가 아닌 부副산줄기이기 때문에 위 보청천에 밀리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보청천의 북서쪽 울타리 역할을 하므로 이런 경우는 지맥의 유형 ‘②울타리형’으로 보아 지맥에 편입시키기로 한다. 엄격한 해석보다는 산줄기를 유용하게 사용하자는 취지이다. 따라서 보청천의 북쪽으로 잠기는 산줄기이므로 이름은 ‘보청북지맥’으로 명명한다.
㉰산줄기형의 예
위에서 반도의 모양새를 가진 땅에서 호수나 강 혹은 바다 등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의 유형을 ‘산줄기’형이라고 분류한다고 했다. 이는 혹시나 합수점형이나 울타리형으로 분류될 경우 모두 잔가지 가령 여맥이나 단맥 등으로 처리되어 지맥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게 됨에 따라 선조들이 물려주신 이 소중한 산하를 유용하게 선용하지 못하는 불합리함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라 이해하면 된다.
산자분수령의 대원칙인 합수점으로 가지 않는 특수한 경우니 이를 산자분수령의 예외 유형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이나 하천을 동원할 수도 없으니 물줄기 이름을 붙이기가 곤란하다. 따라서 그 산줄기가 마무리되는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을 따서 명명하기로 한다.
물론 이 경우도 ②의 합수점 요건에만 예외가 되기 때문에 ①, ③조건은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위 참고도의 경우 금북정맥의 구수산에서 3.2km 진행한 곳에서 가지를 쳐 태안군 이원면 내리의 후망산 부근에서 잠기는 산줄기는 ‘이원’면의 이름을 따서 이원지맥이라 하고 같은 방법으로 금북정맥의 솔개재에서 1.2km 진행한 곳에서 가지를 쳐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 부근에서 잠기는 산줄기는 대산읍의 이름을 따 대산지맥이라 명명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낙남정맥의 지맥인 횡천지맥은 도상거리 34.6km가 되므로 '가'유형인 '합수점'형에 해당되어 횡천지맥이라는 이름을 갖게되며,
옥산부근에서 갈린 산줄기는 ①대한산경표에 의할 경우 '나'유형인 '울타리형에 해당되어 섬진동지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②그러나 신산경표에 의할 경우 영신봉 ~ 옥산 ~ 금오산 ~ 노량의 줄기는 신백두대간에 포함되므로 지맥을 논할 형편이 안 됩니다.
이 정도면 얼추 산줄기 공부는 다 끝난 거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제 얘기나 하죠.
오늘 구간의 경우 다른 이들이야 9정맥을 하기 위해서 그 첫 구간인 영신봉 ~ 삼신봉 ~ 고운동재를 한다지만 두 번이나 그 구간을 진행한 저로서는 자칫 무미건조하게 느꺼질 수 있습니다.
일정 구간 함께는 하되 나름 지리를 즐길 수 있는 구간을 그려봅니다.
팀의 들머리가 거림이라고 합니다.
백무동에 비하여 훨씬 수월하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에는 부득불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백무동행 버스를 타고 백무동 ~한신계곡~세석대피소를 이용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산악회의 경우는 버스를 대절해 가니 내용이 달라집니다.
변화를 줍니다.
거림에서 영신봉으로 오르는 길중간에 '자빠진골'로 들어가 '한벗샘'을 지나 무선통신 안테나가 있는 곳에서 정맥길에 접속하는 루트가 있습니다.
산죽 밭이 빽빽하게 들어찬 곳이라고는 하지만 길은 명백하니 그 루트를 이용할 요량이었습니다.
그 봉에서 좌틀하여 삼신봉까지 진행한 다음 거기서 낙남정맥을 버리고 횡천지맥에 접속하여 지맥을 타고 쇠통바위 ~ 하동독바위를 오른 다음 상불재에서 불일암 ~ 쌍계사를 보고 다시 돌아나와 상불재 ~ 삼성궁으로 내려와 청학동을 관광한 다음 느긋하게 고운동재로 와서 대원들과 합류할 생각이었습니다.
00:20
수지구청에서 차에 오르고...
잠에 듭니다.
그런데 04:00 정도.....
거림에 도착을 하니 비가 차창을 때리고 있습니다.
여름도 아닌 겨울철에.....
"비 맞고 산죽밭을 헤치며 오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 그림이 싹 지워지고 다시 새 그림을 그립니다.
대중교통 여건상 어차피 쌍계사는 틀렸고....
그렇다면 여기서 덕산으로 나가는 첫 버스가 07:30경 있으니.....
덕산으로 가서 남명 선생님을 만나 뵙고 이번 기회에 중산리 부근의 토속 신앙 실태도 살펴보고.....
대원사로 가서는 연기조사의 체취도 느껴보고....
즉 매일 밤에만 다니느라 제대로 보지못했던 것들을 몰아서 다시 보자는 그림입니다.
영신봉으로 향하는 대원들을 보내고 저는 버스에 다시 올라 간단하게 한숨 더 잡니다.
07:32
덕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거림으로 약 500m 정도 되돌아 올라갑니다.
어제 거림에서 민박하신 분.
버스 승차 장소를 몰라 내려오다가 저를 만나서는 다시 back.
그러고 보니 이 버스는 완행버스로 덕산을 지나 원지 경유 진주까지 가는 버스로군요.
그렇다면 덕산에 내릴 필요 없이 이 차로 곧장 덕문교까지 가면 되겠군요.
지도 #1
덕문교 가기 전에 좌측으로 입덕문이 보이는군요.
기사님께 얘기해서 대충 내립니다.
지도 #1의 '다'의 곳입니다.
백운동 바로 옆이죠.
경의敬義는 남명 학문의 양대 지표
백운동까지 왔으면 이제 남명의 고장 덕산에 다다랐다는 얘기가 된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지리산이 배출한 걸출한 선비. 바로 남명 조식(1501 ~ 1572)이다. 남명의 사상과 삶은 실천을 강조한 ‘경의敬義’로 대변된다.
즉 안을 밝히는 것을 경敬, 밖을 결단 하는 것이 의義라고 보아 이 경의敬義를 그의 학문의 양대 지표로 삼았던 것이다.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살았으니 늘 가까이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은 그에게는 구도의 극처極處였다. 독실한 수신修身의 방법으로서 경敬’을 중시한 것은 퇴계 이황과 같으나 철저한 실천의 방법으로서 ‘의義’을 강조했던 조식의 유풍儒風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남명학파를 일구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경상대학교는 지리산은 물론 남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최석기 교수나 최원석 교수 그리고 강정화 교수 등의 연구 활동 덕일 것이다. 짐작건대 그들의 지리산에 대한 열정은 남명 조식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됐을 것 같다.
그들이 안내판에 소개한 남명의 시 한 수를 감상한다.
天下英雄所可羞 천하영웅소가수 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하는 바는
一生筋力在封留 일생근력재봉류 일생의 공이 유(留)땅에만 봉해진 것 때문
靑山無限春風面 청산무한춘풍면 끝없는 청산에 봄바람이 부는데
西伐東征定未收 서벌동정정미수 서쪽을 치고 동쪽을 쳐도 평정하지 못하네.
대부분의 중국 한시漢詩가 그러하듯 우리나라의 한시에도 여러 가지 얘기가 곁들어 있어 그걸 이해해야 올바른 감상이 가능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얘기라는 것도 대개 중국인들에 관한 얘기들이다. 이른바 중국 고사故事다. 이 시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그 해설을 본다. 예상대로 중국 얘기다. 그것도 한나라 때 얘기다. 얘기인즉슨 한漢나라 고조가 공신功臣들을 책봉할 때 장량張良에게 제齊나라 땅 3만호에 왕을 봉하였다. 그러나 장량은 유留 땅에 봉해지는 즉 유후留侯만으로 충분하다며 사양하였다. 그 후 장량은 모든 걸 다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신선술을 배워 일생을 깨끗이 보전하였다. 그러나 사양할 줄 몰랐던 한신과 팽월 등은 천하를 평정하지도 못하고 결국 토사구팽兎死拘烹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을 두고 한신이나 평월 같은 천하 영웅들은 장량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라는 얘기다.
명종의 등용에 자신의 무능을 내세워 상소문 즉 이른바 단성소丹城疏를 올리면서까지 애써 벼슬을 고사하는 남명과 비견되는 대목이다. 결국 장량을 닮고자 하는 선생의 뜻을 읽을 수 있는 한 수의 시이다.
계곡의 물이 너무도 맑고 물가의 너른 반석이 꾼을 붙잡는다. 이 물은 백운천이 되어 덕문교 아래에서 덕천강에 흡수될 것이다. 백운폭포를 위시하여 목욕을 하면 모든 걸 알게 된다는 ‘다지소’, 다섯 개의 폭포와 담이 있다는 ‘오담폭포’, 물살이 하늘로 오른다는 ‘등천대’가 있는 이곳은 사실 남명 선생의 놀이터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백운동을 달리 삼유동三遊洞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 민박집이나 식당이 있는 백운마을 까지는 약 2km를 더 내려가야 한다. 백운마을은 백운산 아래에 있으니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사실 이 백운동은 남명이 산천재에 터를 잡기 전 말년을 지낼 자리를 물색하러 다니던 중, 한 번 들렀던 곳이란다. 산천재에 터를 잡은 후 두 번 더 들렀다고 하니 무던히도 백운계곡에 갈증을 느꼈던 듯싶다. 그래서 삼유동이란다.
백운동은 남명 선생 놀이터?
그런데 사실 이런 말은 믿기 어렵다. 선생은 이 백운동을 유람하며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시의 소재로까지 삼았음은 물론 후학들이 선생이 쉬던 곳이라 하여 각자까지 해놓았다. 시를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자연을 즐기는 선생이 그 더운 여름의 복날 이곳을 뿌리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산천재에 터 잡은 때가 선생의 말년이니 거동이 예전만큼 했겠냐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선생의 지리산 사랑은 남다르지 않았겠는가! 그저 삼유동三遊洞의 ‘삼三’은 유별나게 ‘3’이라는 숫자를 즐기는 우리 민족이 습관적으로 쓰는 숫자라 생각하고 넘기자.
바쁜가? 좀 바쁘더라도 여기까지 왔으니 20분 정도만 더 시간을 내서 백운동 아래로 내려가자. 그러면 ‘남명선생 장구지소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둘레꾼을 반겨 준다. 남명 선생은 지리산으로 오르기 위해 이곳을 한 번 찾았다고 유두류록에 적고 있다. 선생이 유두류록을 쓴 해가 1558년으로 선생의 나이 57세일 때이고 4년 후 산천재에 뿌리를 내렸으니 굳이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아니더라도 그 후 10년 간 지척인 거리에 있는 백운동의 답사 횟수는 헤아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가 바로 이 각자이다. 선생이 여기 와서는 지팡이를 놓고 신발을 벗고 쉬어갔다는 ‘南冥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刻字이다.
사실 남명 선생은 “바위에 이름을 새겨 자신을 만고에 알리려는 선비의 정신”을 비판했다. 지난 구간 자세히 본 부사 성여신 역시 스승인 남명의 제명題名에 대한 비판을 언급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피력했다. 반면 점필재 김종직은 쑥밭재를 지나면서 바위에 이름을 새기게 했으며 감수재 박여량은 상류암 암자의 벽에 일행들의 이름을 썼으니 남명과는 생각이 좀 달랐던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이 별로 내키지 않아했던 각자 행위는 누가 했을까? 살펴보니 백운동칠현이라는 선비들의 이름이 나온다. 1893년 단성 법물에 거주하던 백운동칠현 중 1인인 물천 김진호(1845~1908)는 스승의 문집인 선재집 장판각을 마치고 백운동에 들어와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남명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러고는 기억 속의 문창대 같이 ‘南明先生杖屨之所’라고 그 각자를 흉내 냈다. 이게 그 각자인 것이다.
08:12
우측으로,
문을 닫은 휴게소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주유소도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된 것 같고.....
08:15
이제 비는 그쳤고 상쾌한 아침 공기가 폐부 가득히 들어옵니다.
능선을 타신 분들은 영신봉을 내려와 정맥길에 들었을라나?
신발은 젖지 않았고?
9시 정도부터는 갠다고 했으니....
좌측으로 덕문정이라는 간판이 보이는군요.
어디 들어가 봅시다.
우측으로는 정자.
좌측으로는 비석 두 기가 서 있습니다.
상량문입니다.
1995년 추석에 지은 글이군요.
남명선생이 덕산에 머물기 위하여 드어올 때 도구 이제신이 입덕문이라는 각자를 새겼다는 얘기 등 여러가지 내력을 쓴 글이고....
입덕문 보승계를 결성하게 된 경위가 적힌 글.....
밖으로 나갑니다.
두 개의 비석을 봅니다.
덕문정 건립할 때 성금을 내신 분들.....
보승계주 벽진 이두기의 공적비.
덕문정을 좌측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좌측 덕천강을 봅니다.
................
오솔길을 따라 갑니다.
.................
아주 운치 있죠?
에전에 이 길로 다녔을라나?
이런 너른 반석을 보면 한량들이 모여서 한 잔 꺾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술상 받아놓고 시 한 수 읊기 딱 좋은 곳이군요.
하지만 여기는 덕산이니 좀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을 그립니다.
남명 선생을 그리며
雲岑十上振蘿彩 구름 낀 산 열 번이나 올라 흉금을 털었으니,
山海高風絶世凡 남명 선생 높은 풍도 범인들과는 현격히 다르네
玉色千年休恨隔 천년토록 아름다운 모습 멀어졌다 한하지 마라
天王萬仞尙巖巖 만 길의 천왕봉이 아직도 여전히 높으니
정필달(1611~1693)
08:34
입덕문 각자를 보기 위해서는 20번 도로 위로 올라가야죠.
교통 표지판이 입덕문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오랜만에 봅니다.
좌측은 수준점 표지판.
가운데가 표지석
그리고 우측이 입덕문 보승계를 결성하게 된 내력과 위 각자에 대한 설명이 씌어 있습니다.
................
입덕문은 스승을 만나러 들어가는 문
둘레길은 우회전 하여 인도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만 외도를 해야겠다. 중요한 공부거리를 놓치기 아쉬워서이다. 이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덕산교를 지나 지리태극종주의 끝이자 시작인 시무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곡점13km, 시천4km’의 교통 표지판 좌측으로 수준점(105.6m, 점의 번호01-00-31-02) 옆에 ‘입덕문入德門’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표지석이 보인다.
예전에는 덕천벼리德川遷라 하여 좁은 석문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일반 백성들은 이곳을 두류산 온갖 골짜기로 드나들 수 있는 입구로 여겼겠지만 남명을 흠모하는 선비들은 스승의 체취가 남아 있는 덕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여겨 몸가짐을 새롭게 하는 곳이었으리라. 그 우측 덕천강을 따라 덕산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너른 반석은 남명 선생이 처음 덕산동을 찾았을 때 지리산 대문 격인 이곳에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갓끈을 씻었다는 탁영대濯纓臺와 제자들과 시를 나누던 곳인 덕암德巖 등이 옛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0년 경 도로공사를 하면서 자연석문인 입덕문은 없어졌다. 이를 1960년경 후학들에 의해 결성된 ‘입덕문보승계入德門保承契’의 계원들이 도로변에 새워놓았던 ‘入德門’이라 새겨진 표지석을 1982년 확장공사를 하면서 안쪽으로 다시 옮겼는데 이런 내용을 담은 ‘입덕문기’도 함께 세워져 있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가자. 마근담골 입구를 지나 우측 인도로 올라서면서 뒤를 보면 지리산 국립공원사무소가 보인다. 이제 덕산 시내로 들어서게 된다. 덕산은 곧 남명 마을이다. 비단 남명기념관, 산천재,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덕산 문화의 집 그리고 원리교 건너 덕천서원 등 굵직굵직한 남명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서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고 거기서 흘러내린 물줄기 두 개가 어우러지는 산자수명한 자연의 경개景槪가 돋보여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사실 덕산德山은 지리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덕산이라는 마을 자체가 남명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敬과 의로움義이 깃들여져 있는 곳이다. 거기에 더하여 비록 늦은 나이인 61세 일 때이더라도 선생이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재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자연스럽게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 때문일 것이다.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세 개의 산줄기 중, 써리봉~구곡산을 잇는 황금능선이 덕산 서쪽을, 하봉 ~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덕천지맥의 수양산 줄기가 북동쪽을 그리고 영신봉을 지나 주산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줄기가 남쪽을 감싸고 있고 그 사이로 청정지수인 덕천강과 시천(살)천이 흐르니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이곳이야말로 이상향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남명의 13대손 조재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수준점을 보고.....
설명을 봅니다.
이곳을 찾기 위해서는 중요한 포스트가 되는 이정표입니다.
다시 강가 오솔길로 내려갑니다.
바위들이 많이 널부러져 있고....
.................
그리고 탁영대를 봅니다.
멀리서 보면 이 바위 에 각자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른 반석.
그렇다면 이곳이 덕암일텐데.....
각자를 찾으려 아무리 두리번 거려봐도 또 못 찾습니다.
결국 찾지 못하고.....
이제 길은 끊기고....
다시 도로 위로 올라갑니다.
이런 것들도 누군가 이름을 지어줬을 법도 하건만.....
이게 포트 홀?
09:12
소리담 올라가는 길.
소리교를 건너,
단성면을 빠져 나옵니다.
단성은 신성한 마을의 의미이다
단성이라. 예전에는 단성현이었다. 단성면의 옛 지명 단성현은 신라시대에는 적촌현과 궐성현이었다. 결국 ‘赤’이 ‘丹’으로 바뀐 것이다. 무슨 뜻일까? 이 ‘丹’이나 ‘赤은 우리나라의 ‘ᄇᆞᆰ’사상의 산물이라 봐야한다.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의하면 신라의 개국 당시부터 ‘박朴’이란 제사장을 뜻하는 계급이었다. 남자무당인 ‘박수’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ᄇᆞᆰ’의 변형이 곧 ‘박’, ‘밭’, ‘불’, ‘발’ 등인 것이다. 그것들이 한자가 들어오면서 ‘光’, ‘明’, ‘赤’, ‘朱’, ‘足’이 되었으며 ‘붉을 赤’의 경우 단순하게 같은 색깔의 한자어인 ‘붉을 丹’으로 바꿔 쓴 것이지 그 뜻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리산을 신성시 하였던 신라인이나 가야인들은 ‘赤村’ 즉 지리산 아래의 신성한 마을인 ‘赤村’을 ‘丹村’으로 바꿔 부르게 된 사연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백두대간 상의 소백산을 끼고 있는 충청북도 단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단양의 옛 이름이 赤山이었으며 ‘陽’은 산이나 고개를 나타내는 말이니 적산=단양이므로 이 단성의 옛 이름이 적성이었음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덕천강의 유래...
주절주절.....
20번 도로에는 인도가 없어 걷기가 조금 위험해 보입니다.
아!
천왕봉.
그리고 중봉.
우측의 써리봉에서앞 줄 황금능선으로 가지를 쳐 내려오는 산줄기.
멋집니다.
이 사진을 몇 명에게 카톡으로 날립니다.
산천재를 나와 원리교로 향한다. 좌측으로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덕산 문화의 집’을 보면 그 뒤로 구곡산961m이 크게 보이고 그 우측 뒤로는 천왕봉이며 중봉이 연이어 보인다. 구곡산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줄기가 바로 구곡능선이라 불리던 황금능선이다.
40여 년 전 세석산장 관리인이었던 정원강은 낫 한 자루를 들고 산죽 밭으로 악명이 높던 써리봉~구곡산 등로 개척에 나섰다. 그 가을 어느 날 오후 해가 저물 무렵 써리봉에서 마지막 작업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며 땀을 닦을 때, 써리봉에서 국수봉을 지나 구곡산으로 갈‘之’ 자 모양으로 휘어져 가는 능선이 덕천강가로 이어지면서 누런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황금능선이라 이름했다. 당장이라도 구곡산으로 올라 써리봉으로 뛰어 올라가고 싶은 마음만 그득하다. 황금색으로 물결치는 산죽밭의 지루함이 오히려 멋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빛의 조화로 그 이름도 구곡능선에서 황금능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구곡산은 천왕봉에서 중봉, 중봉에서 서흘산, 서흘산에서 구곡산이니 산이 구곡의 충단으로 포개져서 마치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다. 덕천서원의 뒷산이다.
좌측으로 국립공원공단사무소가 자리해 있고.....
좌측 구곡산과 황금능선.
여기서는 아홉봉이라고 부르더군요.
우측이 치밭목대피소 뒤에 있는 비둘기봉인가요?
사리마을회관 앞의 지리태극종주 들머리.
낯 익은 표지띠가 날립니다.
잽싸게 또 한 장 카톡으로 날립니다.
답글이 오는 데는 별로 시간도 걸리지 않는군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일 하세요."
이제 본격적으로 안으로 듭니다.
좌측 사리마을회관.
지리산 둘레길.
웅석봉에서 마근담을 거쳐 덕산으로 내려오는 길입니다.
남명 조식선생 기념관입니다.
정문을 성성문惺惺門이라고 부르는군요.
성성문은 선생께서 늘 지니고 다니던 성성자에서 따온 말이겠군요.
선생의 석상에 묵념을 드리고.....
명종이 내린 관직을 뿌리친 단성소는 역시 천하의 명문장이고.....
안으로 들어가니다.
이 성리학의 학맥이 우리나라를 요모양 요꼴로 만든 장본인이고....
남명학파는 결국 동인 중에서서도 북인이며 북인 중에서도 대북.
그 중에서도 골북이라 할 것이니......
오죽했으면 선생께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겠는지...
그러나 그 자체로서 학파가 되어 버렸으니...
우라질....
경의검과 성성자.
제1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입니다.
‘경의敬義’는 성리학의 수양공부를 대표하는 주요개념입니다. 이 검의 손잡이에 ‘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새겼는데, 이것은 ‘경으로 안을 밝히고, 의로 밖을 단정히 한다’라는 실천을 중시하는 의미입니다.
남명이 운명殞命을 하면서 김우옹에게는 경敬의 표시로 ‘성성자惺惺子’를, 이 사람에게는 의義의 표시로 검을 주었을 때의 그 내암 정인홍이다.
남명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내암 정인홍입니다.
수많은 남명의 제자들 중에 합천 사람 내암 정인홍(1535~1623)이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당파 싸움의 여파로 남명학파가 한때 위축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등극으로 살아나는 듯싶던 남명학파는 1611년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싸잡아 비판한 이른바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 사건이 터지면서 거의 궤멸의 위기까지 처하게 된다. 그러다가 인조반정과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으로 남명학파의 본산인 강우지역은 반역향으로 지목되면서 더욱 위축되었다.
회퇴변척소라.... 내암 정인홍을 알기 위해서는 기축옥사己丑獄死 사건을 얘기해야 한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1546~1589)을 비롯한 동인東人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이다. 기축옥사를 두고 혹자는 조선왕조의 정치·사회적 구조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귀결이라거나, 지역 내 사림 사이의 갈등과 개인적인 감정 대립의 결과 또 어떤 사람들은 정여립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지 모반사건이 아니라고도 하며, 한편에서는 모반을 하기는 했는데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라고도 하는 등 설이 갈린다.
어쨌든 1589년 무려 1천여 명이 희생당한 기축옥사 사건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기축옥사로 인해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은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묘향산에서 끌려와 선조로부터 직접 국문鞠問을 받았으며,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많은 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의 뒤처리는 서인西人에서도 강경파에 속했던 좌의정 정철이 담당하였는데 정철은 동인東人 중 평소 과격한 언행을 했던 인사들을 죽이지 아니하면 귀양을 보내는 등 매우 가혹하게 다스렸다. 그 때문에 그는 사건이 끝난 후 동인들에게 ‘동인백정’이라는 말로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세자 책봉 문제로 실각하여 유배를 가게 된다.
정철이 귀양 간 뒤에 영의정 이산해는 동인 가운데에서 정철에게 쫓겨났던 사람들을 불러들여 조정의 관직에 앉히고, 또 정철을 따르던 서인을 쫓아냈다. 이것이 신묘년에 있었던 일진일퇴의 정국이었다. 이로부터 동인이 국정을 전담하게 된다.
한편 이 동인은 서인에 대하여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南人으로 나뉜다. 이 중 퇴계의 제자들이 남인인 반면 남명의 제자들은 북인北人으로 분류된다. 이 북인도 광해군의 책봉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대북은 또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으로 갈라지는 바, 이는 학통이 당파가 되는 성리학의 특성 때문이었다.
위와 같이 광해군이 등극함에 따라 대북이 집권을 하게 되고 이 세력의 산림山林이었던 정인홍은 앞장서서 스승인 남명의 추중推重작업에 나서게 된 게 바로 이 ‘회퇴변척소 사건’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공훈을 세웠던 정인홍은 학자이자 정치가 그리고 의병장으로서 곽재우, 최영경, 오건 등과 함께 남명학파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는 민생, 민심을 중시하여 왕권 강화를 주창하였던 바, 기축옥사로 인해 광해군 2년(1610년) 이른바 5현이라 불리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을 문묘에 종사하자 스승인 남명이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1611년에 이른바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렸던 것이다.
회퇴변척소 사건 이후 사류士類들의 공론이 정인홍에게서 멀어져 가자 이탈하는 숫자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결국 1620년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처형되면서 김우옹, 정구 등은 아예 남명학파를 이탈하기 까지 하였다. 이후 남명학파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더욱이 1728년 무신란이 안음(함양의 옛 이름)과 합천을 중심으로 일어나자 강우지역은 아예 반역향反逆鄕으로 찍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인홍에 대해 평가 또한 제각각이다. 율곡 이이(1536~1584)는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맹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라고 폄하하였으나, 단재 신채호는 “정인홍의 평전을 쓰지 못한 게 아쉽다.”고 그의 행적을 높이 평가했고, 근자에 들어 이이화는 동인 그 중에서도 북인 나아가 대북의 영수領袖였던 그를 두고 “당색으로는 소북과 남인 그리고 서인의 적이 되었고, 사림士林으로는 퇴계 이황과 회재 이언적의 제자들과 적이 되었고, 이념으로는 사대주의자와 주자학파의 적이 되었다. 이것을 두고 망나니로 몰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그의 적들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면 도가와 유가, 자주파와 사대파, 혁신 세력과 보수 세력, 산림처사 세력과 권력 추구 세력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정인홍은 남명의 출처관出處觀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산림의 대부로서 국가에 대한 의리(의병), 왕에 대한 의리(광해군), 스승에 대한 의리(조식)를 일관되게 지켜나갔다. 특히 그의 삶에 있어서 스승 남명과 국왕 광해군은 그가 존재하는 목표이자 이유였다. 정인홍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언적과 이황에 대한 문묘 출향(黜享 - 위패를 거두어 치우는 일)을 주장하고, 토역(討逆- 역적을 토벌함)의 논리를 전개하면서 궁중에 피를 부른 것은,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왕에 대한 의리와 충성의 발로였다. 그러나 그의 급진성과 과격성, 반대세력을 조금도 용인하지 않는 비타협성은 오히려 반대세력을 결집시켜주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남명과 이순신이 없었으면 그 옛날 임진왜란 때 일본에 먹혔을 이 나라 아니었습니까!
선비도 항상 칼을 차고 다니게끔 하였고 왜구의 침략을 미리 알고 대비했고 그의 제자들 가령 곽재우, 정인홍 등이 전부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으니 이만한 학파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강우지역을 지켜 왜구가 호남의 곡창지대를 넘보디 못하게 한 장본인이 남명학파였으며 바다로 침공을 하지 못하도록 지킨 이가 바로 이순신이니......
또한 선조가 이순신을 체포하여 죽이려 할 때 오로지 단 한 사람 남명의 제자 정탁만이 구명운동을 벌여 결국 백의종군하게끔 만든 학파이기도 합니다.
남명기념관을 나와,
길 건너에 있는 산천재로 듭니다.
그 유명한 시를 보고.....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원컨대 천석들이 큰 종을 보고 싶었네
非大扣無聲 비대고무성 큰 공이로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만고불변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은 울리어도 오히려 울리지 않는다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보는 천왕봉이 큰 종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그렇게 큰 종을 울리려면 거기에 걸맞은 큰 공이 혹은 북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는 저 천왕봉. 세상의 모든 근심과 바람을 다 받아주는 천왕봉. 저 천왕봉보다 더 큰 정신세계를 이루겠다는 남명의 결연한 의지에서 지리산과 같은 너그러움과 자애로움을 배우고 싶다.
안으로 듭니다.
길을 건너 산천재로 간다. 안으로 들어가 산천재와 남명매를 본다. 남명은 그가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한 곳을 산천재山天齋라 이름했다. 산천이라는 말은 주역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사辭에 해당되는 간괘艮卦와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乾卦가 합쳐진 모양이라는 것이다. 괘사卦辭 즉 그 말을 풀어보면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니 남명은 이러한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로 지리산 천왕봉을 택한 것이며 산천재는 지리산 천왕봉을 가장 가까이 두고 좌로는 수양산502.3m을, 우로는 검음산(현재의 비룡산554.6m으로 추정)을 각 둔 천혜의 길지로 자신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산천재山天齋란 이름을 이렇게 복잡하게 보는 것보다 그저 선생이 평소 경외해 마지않던 지리산의 ‘山 ’과 천왕봉의 ‘天에’서 가져온 이름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한가? 물론 필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해석이긴 하다.
남명매는 지난 구간 단속사에서 본 정당매를 떠올리게 된다. 남명이 손수 심었다는 수령 440년의 매화나무는 남명매로 불리며 원정 하즙이 심었다는 원정매, 정당매와 더불어 ‘산청 3매’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얘기했다.
남명의 고향은 합천 삼가이다. 처가인 김해에 '산해정'을 세우고 문인들 양성에 힘을 기울이던 남명은 12차례에 걸친 지리산행을 통하여 지리산을 경외하며 지리산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고는 백운동 등 세 곳 정도를 물색하다 결국은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진주 일대는 남명학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 덕산은 구도의 극처極處인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이상적 장소였다. 물론 덕산이라는 명칭은 그 이전에도 사용되고 있었겠지만 조식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하게 ‘덕이 있는 인물이 사는 골짜기’로 인식되었을 게다. 그런 남명은 12회에 걸친 지리산 산행을 바탕으로 유두류록을 씀으로서 지리산을 그의 삶에서 영원한 지주이자 표상 그리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쯤 되면 남명의 시 한 수를 들어봐도 크게 사치스러울 것 같지는 않다. 그 유명한 두류산가頭流山歌이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남명의 지리산에 대한 경외심의 일부가 위 시에 담겨 있다. 도화나 무릉 같은 시어詩語는 굳이 노장사상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당시의 유학자들에게는 만연한 풍조였을 것이니 우리는 둘레꾼 혹은 산꾼의 입장에서만 파악하면 될 것이다. 당시 관인官人 즉 벼슬아치들 또한 도연명(365~427)의 귀거래를 '물러남'의 가장 모범적인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그들의 탈속의지脫俗意志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말이며 양단수는 좁게는 시천천과 덕천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지리산이라는 큰 산을 중심에 놓고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는 남강과 섬진강을 이르는 시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 세속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참고서參考書的 풀이는 '실천'을 중시한 남명에게는 사치스러운 단어의 나열이며 사실 어울리지도 않다. 다만 그런 시어는 지리에 대한 경외심의 다른 표현이라 이해할 수는 있겠다.
............
산천재.....
산천재를 나와서.......
10:34
남명선생 묘지 입구를 지나.....
올 여름 그 무더웠을 때 이곳으로 웅석봉을 올랐었죠.
덕산 선비문화원.
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고 중산리로 들어갑니다.
매일 새벽이나 밤 늦게 내려오느라 보지 못했던 무속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함입니다.
11:00
덕산터미널에서 천왕봉 입구인 중산리로 갑니다.
중산리 터미널에 내려 산채비빔밥으로 이른 점심을 먹은 후 길을 나섭니다.
11:28
주차장 우측으로 '빨치산 전투 기념관'이 있군요.
입장료는 1,000원.
입장권을 사서 들어는 가보는데 별로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실외에는 이런 조형물이 몇 개 있습니다.
장갑차와 전차도 있고.....
안에는 그저....
예전 반공기념관 같은 곳이었습니다.
내용물도 별반 없고.....
기념관을 나와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바로 천왕봉이 보이는군요.
좌측은 제석봉.
그리 높아 보이질 않는 걸 보면 이곳 자체가 상당한 고지 일 것 같습니다.
11:53
내려오면서 만나는 첫 번째 굿당인데 지금 막 굿이 끝난 모양입니다.
제물 중 일부를 택시에 싣고 무녀인 듯한 흰옷을 입은 여자는 분주하게 당을 드나듭니다.
11:57
예전에 초등학교 분교였을 이곳에 무속대학원이 문을 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집하면 이곳보다는 사실 백무동 쪽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남악은 신라 오악五嶽 중 하나로 지리산을 가리킨다. 그 남악에 지리산 산신 즉 선도성모를 모시는 신사를 두었으니 아주 오래 전에는 남악하면 반야봉般若峰 혹은 길상봉吉祥峰이 곧 지리산이었을 것이다. 이는 곧 남악사가 지리산 산신을 모시는 신사神祠이니 당연히 성모를 모신 사당이라는 말일 것이고 그 사당이 처음 있던 곳이 길상봉이니 그 사당에 있던 제단이 노고단인 것이다.
국제신사인 남악사와 사설신사인 성모사
지리산 신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즉 나라에서 주관하는 국제신사國祭神祠와 민간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설신사私設神祠 등이 그것이다.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는 지리산신이 백성에게 공덕을 베푼 것에 보답하는 일종의 답례 성격의 제사였다. 이는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제사가 주主이기도 했지만 반면 나라에 재앙이 생기면 기우제 · 치병제 · 여제厲祭 등을 부정기적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사설신사에서 무격巫覡을 통하여 성모천왕에게 비손이나 굿과 같은 무속 의례를 올렸다. 성모천왕의 신통한 영험으로 개인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었던 것이다.
이럴 때 그 국제신사가 남악사였으며 사설신사는 성모사, 제석당, 용유당 등이었다. 또한 초기 신라시대의 남악사에서는 박혁거세이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모셨겠지만 신라가 망하고 불교나라인 고려로 넘어가면서 남악사는 ‘智異山之神’을 모시게 됐고 천왕봉으로 간 성모는 위숙황후나 마야부인이 되어 성모사를 지키게 됐을 것이다. 이렇듯 지리산 성모신앙은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을 바탕으로 발전했고 전통신앙과 결합하면서 산악숭배신앙과 밀착하게 된다. 다만 16세기로 들어오면서 당시 중봉이라고도 불리는 제석봉에 제석당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제석당에서 모시는 신은 천신으로 이 천신은 남자 신이었다. 이는 어쩌면 조선사회가 철저한 가부장적 유교 사회임을 시사한다 하겠다.
이쯤에서 이동한의 방장유록(1790년)에 실린 당시 그들의 무속행위를 볼까? “삼남 지역의 무당들이 봄, 가을이 되면 반드시 이 산에 들어와 먼저 용담의 사당에 빌고, 다음으로 백무당에 빌고 또 제석당에서 빌고 그러고는 상당까지 올라가 정성을 바쳐 영험해지기를 빌었다.”고 적었다. 여기서 용담은 둘레길 제3구간에서 살펴본 지금의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에 있던 용유담龍遊潭이니 용유담 부근에 있던 사당이 곧 용유당이다. 백무당은 백무동에 있는 당집이며 제석당은 제석봉에 있는 사당 그리고 상당은 바로 천왕봉의 성모사일 것이니 상-중-하당으로 위계를 이룬 사설신사의 면모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남악사가 있던 노고단은 마고할머니와 선도성모의 영역이다. 제석당에 가서 다시 보기로 하자.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물인 시천천.
남명의 덕천서원 앞에서 덕천강과 만나 남강으로 흘러가게 되겠죠.
그래서 양단수입니다.
골짜기 하나하나에 굿당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천왕봉에는 성모사라는 당집이 있어 기도처와 숙박시설을 함께 했었습니다.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은 이런 모습을 어떻게 그렸을까? 계속하여 그의 유두류록을 보자.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였다. 사당 안에 석상 한 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흰옷을 입힌 여인상이었다. 이 성모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말하기를 “고려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어진 왕을 낳아 길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높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영남과 호남에 사는 사람들 중에 복을 비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떠받들고 음사淫祠로 삼았다. 그래서 옛날 초나라∙월나라에서 귀신을 숭상하던 풍습이 생겨났다. 원근의 무당들이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산다. 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보며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속에 몸을 숨긴다. 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
봉우리 밑에 벌집 같은 판잣집을 빙 둘러 지어놓았는데, 이는 기도하러 오는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려는 것이다. 짐승을 잡는 것은 불가에서 금하는 것이라 핑계하여,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소나 가축을 산 밑의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 무당들이 그것을 취하여 생계의 밑천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성모사∙백모당∙용유당은 무당들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 참으로 분개할 만한 일이다.
이는 제석당에서 본 바와 같이 ‘혹세무민’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들 기도처 특히 상당인 성모사나 가까운 제석당 주위가 극성 남녀 기도객의 풍기문란 장소로 변한 탓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옷차림으로 이곳에 올라온 기도객들은 지리산 천왕봉의 새벽 추위를 이길 방도가 없었을 터, 남녀노소 양반·상민 가릴 것 없이 성모사 혹은 바위틈 여기저기에서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음사란 淫祀일 수도 있고 淫事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장면은 택리지에까지 실렸을 정도다. ‘산수’편을 보면 지리산에 관한 기사 중, "지리산 북쪽 자락 물이 모여 임천이 되어 용유담을 이루며 함양군 남쪽 엄천에 이르는데 시내 따라 강돌이 모두 아름답다. ...(중략)... 또 온 산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아 매년 봄·가을에 각지 무당이 모여들어 기도를 올린다. 이때 남녀가 서로 섞여 같이 잠을 자기도 하고 술과 고기 냄새가 낭자하여 불결한 곳이 된다."
당시 민중들이 신령스러운 지리산에 잡신을 섬기고 무당들과 어울리는 것을 개탄하였던 것이다. 한편 한여름인 1472년 8월 15일 성모사에서의 밤 추위를 점필재 김종직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 삼아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이와 같이 지리산 성모신앙의 중심에는 성모석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성모석상이 적어도 네 번이나 수난을 당하였다. 그 처음이 고려 말이다. ①황산대첩으로 이성계에게 대패한 왜구 잔당들은 화개재로 올라 영신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와서는 천왕이 자신들을 돕지 않았다고 하면서 성모석상의 목을 두 동강을 냈으며, 두 번째가 ②조금 전 얘기한 16세기 경 관서지역의 시승詩僧이었던 천연 사건인데 이 천연이 천왕봉으로 와서는 성모사 안에 있는 성모상을 보고는 이를 끌어내 부수고 바위 밑으로 던져 버렸던 것이고 그리고 ③1945년 11월 누군가가 성모석상을 보쌈하여 새끼줄로 감아서는 어디론가 버려졌는데 산청군 삼장면 ‘최기조’란 농민의 집에서 발견되어 두 달 뒤 다시 천왕봉으로 올라왔으며 ④마지막 하나가 1972년 2월 일어난 사건으로 이번에는 종교분쟁이었다 즉 타종교의 광신도가 천왕봉 노천암대에 있던 성모상을 보고는 우상숭배를 한다며 어딘가로 유기한 것이었다. 그것을 이듬해인 1986년 1월 12일 두상 부분은 진주의 비봉산 기슭 과수원에서, 몸통부분은 같은 해 5월 9일 천왕봉 아래 통신골에서 각 발견되었다. 이를 찾아낸 이가 바로 천왕사의 주지 혜범이었다. 혜범은 그때까지만 해도 수행만 하던 승려였는데 꿈에서 천왕 할매를 만났고 그 천왕 할매가 정확하게 장소를 알려줘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혜범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천왕사로 지었던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사건이었다.
한때 덕산의 두류산악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성모상을 훼손시키지 못하게 철창을 만들어 성모석상을 천왕봉으로 복귀시키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혜범스님은 요지부동이다. “성모할매에 대한 해코지가 반복되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또 천왕봉으로 올려드립니까?”
이런 조형물도 간간이 볼 수 있고.....
또 굿당.
12:20
버스가 내려올 시간이 되었군요.
여기서 기다리다 12시 30분 버스를 타고 덕산으로 나갑니다.
덕산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대원사 들어가는 버스를 이용합니다.
13:12
대원사에 도착합니다.
내년 새해맞이 저의 첫 산행은 화대종주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날 볼 대원사를 미리봅니다.
방장산 대원사로 적혀 있군요.
그 쌍계사로 들어가 보자. 쌍계사의 일주문은 다른 사찰의 그것과는 달리 일주一柱가 아닌 쌍주雙柱로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일주문의 현판에는 ‘삼신산 쌍계사’로 적혀있다.
그런데 지리산은 방장산일까? 아니면 삼신산일까? 아니면 방장산이면서 삼신산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필자는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을 엮어 삼신산이라고 하는 견해에 반대한다. 오직 방장산만이 지리산이요 삼신산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쌍계사 일주문의 현판이 그걸 얘기해 준다.
지리산은 방장산이요 삼신산이다. 생각해보면 삼신산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산으로 봉래산, 방장산, 연주산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기史記’에 처음 언급되었는데 이곳에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다 하여 시황제와 한 무제가 이것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으나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사마천이 방장산을 언급한 후, 어딘가에 있을 방장산은 사마천 이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한번은 필히 가봐야 할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모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나라 사대부에게 그곳이 어찌 그런 대상이 아니었겠는가?
다행히 그 방장산은 우리나라에 있었다. 이 방장산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당나라 사람 두보(712~770)였다. 필경 그 시작은 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기이십운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보는 그 시의 초장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 바다 밖 삼한三韓에 있다 즉 方丈三韓外’라고 읊으면서, ‘방장산은 조선의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는 방장산이 없고 대방군은 남원의 이전 이름이니 방장산이 두류산임에 틀림없다고 한 남계 신명구(1666~1742)의 말이 이해를 돕는다.
이쯤 되면 조선의 사대부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이 방장산을 그들의 유식遊息의 길이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향한 배움의 길 그리고 공자나 남명 조식을 닮아가고자 하는 목적을 향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지리산을 방장산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삼신산 즉 중국 전설 속의 신성한 세 개의 산 중 유일한 산이니 이참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삼신산으로 못을 박는 게 나을 성 싶다.
대웅전으로 올라,
작은 정성을 보고.....
삼신각으로 오르면서 뒤로 내원능선을 봅니다.
비구니들이 살아서 그런가?
장독대가 아주 예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
굴뚝에서 뿌리를 내린 소나무.
얼만큼 클 수 있을런지....
쌍계사와는 안 되지만 별로 볼 게 없군요.
13:25
덕산으로 나가는 차가 14:30에 있다고 했으니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군요.
그런데 최근 이곳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대원사 주차장~유평마을을 잇는 약3.7km 구간에 '대원사 계곡길'이 생긴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길을 포장도로 위로 걷는라 불평불만도 많았고 지루하기 까지 했는데 이제는 계곡의 물을 보면서 둘레길로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걷는 이들이 많군요.
우선 덕천강을 새로 만든 다리로 건넙니다.
공단에서 만든 신뢰해도 좋은 안내판을 봅니다.
이름하여 방장산교.
포트 홀 얘기겠고....
다리를 건너면서,
너른 반석을 봅니다.
이 대원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일대를 장항동이라 불렀습니다.
조금 이따 대원교를 건너면서 다시 보죠.
유평마을로 올라가는 길.
냄새만 캍고 돌아서 내려옵니다.
대원사 앞 찻집.
음식도 팔고...
1333
대원사 안내문을 보고
내려가면,
이렇게 '대원사 계곡길'을 만들어 놨습니다.
예전같이 도로로 내려가는 지루함과 위험성 대신,
이렇게 계곡을 즐기며 내려갈 수 있게 됐습니다.
차량은 대원사 주차장에 놓고 걸어 올라오라는 얘기!
이렇게 계곡을 즐기다 보면,
얘기를 들으면서,
13:41
내려오다 보면 금방 일주문에 도착합니다.
대원교....
연기조사가 창건한 양대 사찰은 산청군과 구례군을 대표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화엄사는 544년, 대원사는 548년으로 창건 연대는 각 다르지만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종찰로, 대원사는 선불간경도량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은 비구니 도량으로도 유명한 대원사가 있는 유평계곡은 지리산 중봉과 새봉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은 덕천강이 흐르는 계곡으로 그 길이만 해도 약 12km 정도 되니 그 계곡의 아름다움이란 필설로 다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 대원사 앞 덕천강을 건너는 대원교 앞에 노루목 같이 쑥 고개를 내민 곳이 있다. 그 고개를 장항치라고 부르니 이 부근이 장항동인 것 같다. 그런데 진양지에서 보는 장항동은 이곳만을 특정해서 이르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삼장리 탑동塔洞 서쪽에 있다. 골짜기 입구가 아득하고 깊어 30여 리나 된다. 산수가 기이하고 험준하여 산속에서 더욱 절경인 곳이다. 시내는 지리산 동쪽에서 발원하는데 구름에 스며들고 바위에 부딪히며 동쪽 삼장리로 들어간다. 10여 명이 앉을만한 반석이 있다”
그러니 장항동은 지리산 동쪽의 산수 기운이 모인 곳이다. 장항동은 남명 조식의 문집에도 실려 있고 또 겸재 하홍도(河弘度 1593-1666)가 읊은 시에도 나온다. 처음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오로지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힘썼던 겸재의 시를 한 번 들어볼까? 그는 장항동을 이렇게 노래했다.
天秋日暮肅無雲 (천추일모숙무운) 가을 하늘 해가 지고 구름 없이 맑은데,
洞別巖奇絶世紛 (동별암기절세분) 골짜기를 구분한 바위 기이하여 어지러운 세상과 끊어주네.
禹稷若知山水趣 (우직약지산수취) 우와 직이 만약 산수 맛을 알았다면
無人陶鑄舜乾坤 (무인도주순건곤) 아무도 순임금의 세상 만들지 못했으리.
이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항동은 그윽하고, 깊고, 고요하며 인적이 없어 우왕이나 직왕이 이 장항동을 알았더라면 이곳에 푹 빠져 세상살이도 잊었을 정도로 평화롭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계속해서 월촌月村 하달홍(1809~1877)의 얘기를 그의 장항동기에서 들어보자.
“금년 봄 내가 두류 동쪽 기슭에 놀러 갔을 때 장항동이라고 하는 곳을 물어보았지만 산속 늙은이나 마을 노인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잃어버린 것 같아 몹시 서운하였다. 대원암에서 자는데 벽에 쓰여진 시를 보고는 비로소 바로 여기가 장항동임을 알았다. 암자 앞에 장항치獐項峙가 있어 그런 이름을 얻은 것 같다. (대원암은) 강희(1662-1722)연간에 승려 운권이 세웠다고 법우화상이 말하였다. 암자의 북쪽에는 계곡물이 부딪쳐 폭포가 쌓여 있고 (폭포의) 웅덩이는 맑고 투명하며 거울 같은 바위는 모두 흰색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뻐하여 종일토록 떠나지 못하게 한다. 또 양쪽 계곡은 푸른 산이 천길 벼랑으로 서 있어, 추연惆然히 선생의 기상을 다시 보는 것 같다. 두류에는 숨어 있지만 칭할 만한 곳이 많은데 한녹사의 삽암이나 최문창의 쌍계 같은 곳이 그것이다. 신라 ‧ 고려 이래로 그윽한 곳을 찾는 무리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지만, 이 골짜기를 특별하게 뛰어난 곳으로 여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며, 반드시 명옹이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그래서 이 땅과 선생의 조우遭遇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다만 대원암만 알고 장항동은 모르니 이 땅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땅의 행 ‧ 불행에 관하여 진실로 사무치는 감정이 있는 자이며, 또 선현이 이곳에 남긴 아름다운 향기가 사라져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에 기록한다.”
여기서 선생은 명옹이라 하였으니 남명 조식을 말하며 한녹사는 고려 때의 한유한韓惟漢을 말하는데 한유한은 벼슬을 마다하고 가족과 함께 지리산에 숨어들은 인물로 도교사상과 연관하여 둘레길 제13구간 하동 악양을 지나면서 이미 자세히 봤다.
이 반석과 관련하여 송정 하수일은 '유덕산장항동반석기'에서 “덕천서원에서 시내를 건너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자 장항동이 있었다. 위아래에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곧은 모습이 화살 같았다. 여기에서 작은 암자를 지나 동북쪽으로 수십 보를 걸어가니 네모지고 넓으며 평평한 반석이 있었다. 좌우에 물을 두르고 있었는데 패옥佩玉이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예전에 남명이 소 옆구리처럼 생긴 지리산을 답파하면서 여기에서 시를 짓고 이곳을 사랑했다. 이런 까닭으로 제군이 사모하여 곧은 소나무를 보면서 그분의 기상을 우러렀고 패옥 같은 물소리를 들을 적에는 그분의 말씀을 상상했다.”고 적었다.
“남명의 소 옆구리 운운"은 남명 조식이 유두류록에서 산행을 마치고 난 후, 함께 산행을 한 일행들과의 헤어짐 그리고 지리산에는 들었으나 자신의 뜻한 바를 일구어 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등을 표현한 말이다. 즉 남명의 "누렁 소 옆구리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가 바로 그 글귀다.
그렇다면 장항동獐項洞은 유평리 입구에서 유평리를 거쳐 새재마을에 이르는 유평계곡 전 구간을 장항동이라 부른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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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치밭목입구’라는 명찰이 붙은 유평마을의 이정목에서 대원사까지는 차도를 따라 1.5km를 더 내려가야 하는데 있다. 산꾼이 포장된 차도를 걷는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그것도 42.7km를 걸은 산꾼이....
그렇게 산꾼들은 44.2km를 마무리하고 기념촬영을 하면 그 긴 거리를 걸었다는 고단함보다는 상상으로만 걷던 ‘화대종주’가 현실이 되었다는 만족감이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버킷리스트bucket list' 중 하나였을 ’지리화대종주‘.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화대종주가 주는 만족감을. 그런데 이런 뿌듯함에 약간 초(?)를 치는 일이 남아 있다. 버스정류장까지는 2km를 더 걸어야 한다. 그것도 또 포장도로로 말이다. 이럴 때는 실컷 푸념을 하면서 걸어도 뭐라 그럴 사람 없다. 그러니 맘껏 불평불만을 털어놓자.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
“내 앞으로 이 지리산 다시 오나봐라!”
사실 예전에 이 루트를 도로를 따라 걸어내려 갈 때 누구나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군요.
이 대원사 계곡길 때문입니다.
한결 많은 사람들이 대원사 계곡 즉 유평마을을 찾을 것 같습니다.
덕산으로 나와 목욕탕으로 가면서 천왕봉응 봅니다.
약초하시는 두 분을 우연찮게 만나 많은 얘기를 듣습니다.
지리산은 너무 많은 것을 안겨주는군요.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일행들을 만나 뒷풀이를 하고 올라옵니다.
계획된 루트는 아니었지만 오늘 진행한 곳 역시 지리산이니 별 불만일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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