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 8:2).
앞의 1절에서도 보았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해방"은 영적 할례와 관련된 개념이다. 영적 할례, 곧 혼이 구원받는 성령의 수술은 거듭날 때 한 번 받고 마는 것이다. 그때 일종의 "해방"이 일어나고 우리가 전혀 의식은 못하는 영적 관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죄의 몸에서 우리의 혼이 분리가 된다. 그 "해방"은 성도의 일생에서 두 번 받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사건이고 거듭날 때 끝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거듭난 크리스찬 앞에는 "교훈적"으로 말해서 두 개의 길이 여전히 존재한다.
1.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길 - 정죄가 없다.
2. 육신을 따르는 길 - 정죄가 있다.
좁은 길, 넓은 길의 양극성 논리에 빠진 "행위구원론" 목사들에게 있어서 바울의 가르침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들이 볼때 좁은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이미 성화를 담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듭났지만 "넓은 길 신자"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의 자식으로 보일 것이다.
크리스찬은 두 개의 길을 걸을 수 있는데 그 길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이쪽이나 저쪽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그 선택은 일평생 한 번 하는 게 아니라 수십 번, 그 이상으로 노선 변경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평범한 크리스찬들은 두어번 노선을 바꾸지 계속 바뀌지는 않는다.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롬 8:3).
육신 자체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육신은 제어할 줄 알아야 가치가 있지 육신을 빛내는 어떤 일도 영적으로는 파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을 학대하거나 일부러 추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육신을 주된 규제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인간의 죄 문제가 마음에서 시작되어 육신으로 열매 맺기 때문에 육신에서 죄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제한다는 것은 구약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끝나지 않는 괴로운 숙명이었다. 그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죄를 온전히 제거하시고 해방시켜 주신다는 소망을 갖고 구약 사람들은 견뎠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 이편에 사는 크리스찬들에게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으니 그것은 육신이 이미 "처리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신의 육신은 이미 죽었고 매장되었다, 단 영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어떨까? 육신이 무기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넓은 의미에서 육신은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이 아닌가? 아무리 노력해도 육신의 한계로 인해 죄를 짓고 정죄에 빠지곤 한다. 이 육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 영적으로는 죽었기 때문에 여러분의 속사람에 대해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좀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3절에서 유의할 부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과 "그 육신에 죄를 선고"라는 부분이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아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영적으로 죄가 없었을 뿐 육체적으로는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으면 부패하고 파리가 꼬이는 그런 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기 때문에 구주가 된다고 궤변을 풀어놓는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이 썩지 않는 몸을 지니셨다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에 방부처리를 해서 무덤에 안치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방부처리되어 매장되셨으므로 썩는 몸을 지니셔야만 한다라고 그 고지식한 목사님들은 믿는 것인데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 만에 숨을 거두실 이유도 없었다. 주께서 초자연적으로 그 기간을 늘리고자 하시면 2천년 동안 매달려서 안 죽으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은 아담의 부패한 씨가 아닌 성령의 씨로 말미암아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 몸이 인성을 갖추셨고 아담과 같은 몸일지라도 썩는 몸이 아니다. 썩어짐은 죄로 인해 오는 것인데 예수님은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죄인들을 살려주시려 오신 것이다.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히 1:14-15).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에 죄의 유전 인자를 품고 계시지 않았고 그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 곧 여러분과 나와 같은 겉모양은 가지셨지만 몸에 실제 죄가 없으셨다. 그래서 행위 면에서 죄를 안 지으신 것 뿐 아니라 그 분의 존재 자체가 무죄성 안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면 그 십자가는 구속의 효력이 없는 종교 마크에 불과해졌을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 이유는 자기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의 죄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주님 자신에게 죄의 오염이 깃들어서는 안 되었고 단지 우리와 같은 모양, 아담의 모양과 아담과 똑같아 보이는 붉은 피(그러나 죄성은 들어있지 않은 피)여야 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사기꾼 교주들, 예수 워너비들이 2천년 동안 비참한 실패를 반복하는지 아는가? 그들은 영원히 살 수 없는 썩을 몸을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죄없는 체 하며 자칭 그리스도라 한다 해도 자신들의 육체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가증스러운 악을 몸으로 저지르건, 안 저지르건 자칭 예수들의 몸은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고, 또 썩어서 벌레가 먹어치운다. 그 사람들의 몸 안에는 구속의 능력에 있어 원천이 되는 "보혈"(죄 없는 하나님의 피)이 흐르지 않는다. 그들 안에는 여러분과 나와 동일한 아담의 적혈구, 아담의 백혈구, 아담의 혈소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는 여러분의 죄 문제를 결단코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예수님께서 갈보리의 사역을 마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죄 없는 육체에 "매우 부당하지만" 죄를 선고하는 일이었다. 논리적으로 말해 죄 없는 사람이 죄인이 되기 위해서는 남의 죄를 덮어 써야만 한다. 주님은 덮어 쓰는 쪽을 택하셨고 그것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타르처럼 진하고 독한 세상 죄의 진액을 덮어쓰셨고 그 죄악들은 주님의 존재 자체를 가득 채워서 "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 "옛 뱀"이 저주받아서 배로 기는 신세가 되었고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올렸을 적에 명확히 그것은 사탄을 상징하는 것이었듯이 주께서는 허물벗은 뱀처럼, 벌레처럼 되셔서 사람이 아닌 모양을 하고 인류의 죄를 거기에 덮어쓰셨다.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
영지주의자들은 죄의 뿌리가 육체에 있다고 오인해서 육체와 분리되는 것이 죄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도 유죄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예수는 자기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렸고 예수와 합력 사역하던 그 안의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건 전에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점에서 코란과 마호메트는 가증스런 사기를 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적이 없다고 거짓말하고 그 이유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죄로 인해 심판받는데 죄가 없는 예수가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겠느냐, 그렇게 생각해서 갈보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세상 죄들로 인해 자기 육신에 죄를 선고받으시고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는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롬 8:4).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과 전혀 다른 모습(영적인 체계)을 하고 있다. 그들은 몸, 구원받은 혼, 부활한 영, 성령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 구원받은 혼이 속사람이고 그 속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율법의 의는 원래 행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결국 행함이 없으면 그 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라는 것은 구약적으로는 언어도단이다. 구약적으로는 "율법의 의가 우리 밖에서" 이뤄져야 맞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 거듭난 혼이 있고 그 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창조된 우리의 속사람이다. 그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닮았을 뿐 아니라 그 분의 History를 공유하는 내력이 있는 몸이다. 우리는 직접 당사자로서 십자가에 달린 적이 없지만 속사람으로 인해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시어 <죄없는 삶을 사시다가 죄없는 구세주로서 인간의 허다한 죄들을 위해 죽으신> 그 역사가 우리 속사람 안에 등록이 된 것이다.
우리의 속사람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판정되어 그리스도의 날이 올때 휴거될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육체"(부활하신 33살 반의 그리스도 부활체)를 갖고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몸 안에 있다. 4절의 하반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육신을 좋게 가다듬고 수련해서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행실을 상대적으로 죽이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은 우리 속 사람 안에 있는 라이선스를 우리의 모든 행실들에 대해 하나 하나 "유효" 마크를 찍어서 적용하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속사람은 모든 해답을 알고 있고 모든 키를 갖고 있으며 막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겉사람은 그 법을 알지 못하고 따를 의사도 없다. 육신은 그것의 욕망을 그대로 갖고 있기에 화근이 되지만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그대로 살아가면서 성령의 일을 하는 것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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