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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52,13―53,12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 4,14-16; 5,7-9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5,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18,1―19,4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 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물으셨다.
“누구를 찾느냐?”
5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9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0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12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13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14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16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17 그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아니오.”
18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19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21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2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말하였다.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24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
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나는 아니오.”
26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27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
28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29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물었다.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30 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저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31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그러자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32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34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물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8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39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내가 파스카 축제 때에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소.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
40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외쳤다.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바라빠는 강도였다.
19,1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2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3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4 빌라도가 다시 나와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5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 사람이오.”
6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
7 그러자 유다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8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9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12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외쳤다.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13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15 그러자 유다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수석 사제들이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16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17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18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다.
19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다.
21 그래서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말하였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
22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
23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것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24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래서 군사들이 그렇게 하였다.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목마르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인간의 역사와 보이는 역사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보이는 역사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우리는 흔히 신비라고 부릅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 악이나 죽음 등은 심각한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 혼란과 비참함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부당한 처사나 불의의 사고나 재난 등은 참으로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고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요,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하여 할 때입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옵니다.
곧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위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여!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요한 18,42)
주님!
가슴이 이토록 쓰리고 아픔은 당신께서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계신 까닭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채 말입니다.
이토록 제 영혼이 떨고 있음은 당신께서 제 안에 동굴을 파고 들어와 좌정하고 계신 까닭입니다.
당신의 상처에서 젖을 먹이시느라고 말입니다.
깊은 침묵의 함성으로 속삭이는 그 사랑의 숨결을 듣게 하소서.
십자가에 걸려 있는 완성된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다>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존재하지 않으며, 십자가는 제대 위에 항상 놓아두어야 하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그분 스스로 짊어지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됩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는 패배요, 절망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차마 피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쳤고 의인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악의 고리를 끊어야만 하였기에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길이었기에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이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님은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하고 콜로새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거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일상에서 오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성녀 쥴리 빌리아르)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하고 기도한 순간들이 헛구호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의 시선으로 신비로운 십자가 사건을 관찰합시다>
또다시 성금요일입니다.
이 특별한 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신앙의 시선으로 신비로운 십자가 사건을 관찰하는 일입니다.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 열렬한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성은 골고타 언덕에서 최종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골고타에서 완성된 십자가 죽음은 아무런 영적 노력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영혼에게만 그 참된 가치, 무한한 은총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니 고통을 묵상하는 일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가장 깊이 참여하는 일이자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려는 노력이며, 우리 영혼을 위해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무고한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일상 안에서의 작은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감내하고 수용해야겠습니다.
1. 사형선고 받으심
밤새 계속된 채찍질로 인해 예수님의 몸은 이미 피투성이입니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인 예수님께 빌라도는 사형을 선고합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이 빚어 만드신 한 피조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철저한 순명으로 새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정말 이해 못할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비의 십자가 앞에 그저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2. 십자가를 지심
군인들이 십자가 나무에서 손을 떼자마자 예수님의 몸이 심하게 휘청거립니다.
총독관저에서 출발해서 골고타 언덕에 이르는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나와 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당신 등에 지고 힘겹게 골고타 산을 오르십니다.
우리 깊은 상처를 싸매주기 위해 또 다른 십자가를 지십니다.
3. 첫 번째 넘어지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그만 바닥으로 넘어지고 맙니다.
병사들은 빨리 일어나라고 맹수처럼 으르렁댑니다.
겨우 일어나신 예수님, 이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다시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예수님을 넘어지게 만든 것은 십자가의 무게가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죄의 무게입니다.
4.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심
사랑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처참한 얼굴로 말입니다.
아들 대신 십자가를 졌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늘이 내려앉는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혼절하지 않습니다.
당신 아들 예수님이 건네는 시선에서 지금이 ‘그 때’라는 것을 압니다.
그저 예수님의 시선에 고개만 끄덕거릴 뿐입니다.
5.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심
병사들의 채찍에도 예수님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합니다.
마음이 급해진 병사는 시몬을 끌고 와 돕게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와 땀으로 얼룩져있지만 그 와중에도 나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보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그대의 친절을 꼭 기억하겠노라고.
6.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처참한 예수님의 얼굴과 베로니카의 시선이 마주합니다. 그녀는 저지선을 뚫고 용감하게 예수님을 향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수건을 꺼내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립니다. 하얀 수건에는 혈흔으로 그려진 예수님 얼굴이 생생히 새겨집니다. 저도 오늘은 또 다른 수난 예수님을 위해 깨끗한 수건 하나 마련해야겠습니다.
7. 두 번째 넘어지심
예수님께서 또 다시 넘어지십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직립(直立)입니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일어섬으로 자신의 생명을 발현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구세주 하느님께서 또 다시 넘어지십니다.
세상의 폭력 앞에 수시로 넘어지고 나뒹구는 가련한 영혼들과 함께 같이 넘어지십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십니다.
저도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습니다.
8.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제대로 된 인간대접 해주신 분,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신 분이 내 앞을 지나가십니다.
이렇게 가셔서는 안 되는데, 그 큰 사랑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뭐라 위로의 말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오히려 그분께서 위로의 말을 건네십니다.
나는 괜찮단다.
나는 곧 죽겠지만 내 죽음으로 인해 너희가 살겠구나.
내 십자로 인해 너희가 구원되겠구나.
9. 세 번째 넘어지심
3이라는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3번 넘어지셨다는 것은 완전히 넘어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겸손이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신 예수님께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와 함께 다시 일어서자고, 나와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10.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초와 쓸개를 마시게 함
구세주 하느님께서 인간들에 의해 옷 벗김을 당합니다.
세상에 이런 큰 반역과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극도의 수치심이 눈에 선합니다.
내 이 큰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의 극점에 서신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됩니다.
11. 십자가에 못 박히심
치욕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진해서 십자 위로 올라가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만 생각하신 예수님, 그분의 순명으로 이 세상에 구원이 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12.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심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완수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모든 것을 획득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왕권의 첫 출발을 알리는 깃발입니다.
구원의 서막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저 역시 죄에 죽겠습니다.
거짓된 자아에 죽겠습니다.
쓸데없는 우월감과 교만함에 죽겠습니다.
13.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십자가에서 내려진 차가운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견뎌내야 했던 성모님의 영적인 고통은 십자가상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능가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에 당신의 영성적 죽음으로 동참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14. 무덤에 묻히심
예수님께서 지금은 비록 무덤에 묻히시지만 그 무덤은 곧 빈 무덤이 될 것입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진정한 부활을 선포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만왕의 왕임을 드러내는 확증입니다.
빈 무덤은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겨냈음을,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이 죽음을 물리쳤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표징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 고통 받는 것을 즐기는 종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온갖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그리고 영원하고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금요일에 십자가 경배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구원과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힘없는 약자의 패배’가 아닙니다.
목숨을 빼앗기신 일이 아니라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체포되실 때의 장면을 보면,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뽑아서 저항하는 베드로 사도에게(요한 18,10)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마태 26,52-54)
천사들의 군대가 ‘열두 군단’이 넘는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전체 군대를 제압할 수 있는, 즉 인간 세상의 군사력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군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묵시록을 보면, 미카엘 대천사가 지휘하는 천사들의 군대가 사탄과 마귀들과 추종자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묵시 12,7-8).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라는 말씀은 로마제국의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박해자들의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당신의 승리를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승리자 편에 서는 일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십자가 수난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이 아니라, ‘참 사람’으로서, 즉 인간 예수로서 겪으신 일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서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은 대강 짐작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잘 모릅니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피땀을 흘리셨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는데, 그 기도는 인간들을 대변하기 위해서, 또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바치신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멸망이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고통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들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자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과 승리를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게 되지만, 어떤 종류의 십자가든지, 또 어떤 크기의 십자가든지 간에,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항상 부활과 승리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마태 27,46).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절망하신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본문인 시편 22장 전체를 보면 ‘절망의 시편’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의 시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시편 22장 전체를 기도로 바치셨는데, 들은 사람들이 첫 구절만 기억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시편 22장 전체를 기도로 바치시려다가 끝까지 바치지 못하시고 숨을 거두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생기면, 그래서 철저하게 외롭고 절망적인 처지에 빠지게 되면, “혹시 하느님도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에 필요한 것이 믿음과 기도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리고 나를 미워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또 내가 하느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과 용기를 달라고 청하는 기도.
4) 살면서 겪는 고통들을 무조건 다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통들이 전부 다 십자가인 것은 아닙니다.
고통 중에는 그냥 ‘악’인 경우가 있습니다.
‘악’은 물리쳐서 없애야 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전쟁 같은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그냥 ‘악’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전염병도 십자가가 아니라 ‘악’입니다.
고통 중에는 지은 죄에 대한 ‘보속’이 있습니다.
보속이라면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통 중에는 ‘선’을 실현하다가 겪는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물론 고난과 시련 자체는 ‘선’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처럼 ‘악인들’의 ‘악’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선’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이기 때문에 십자가이고, 우리는 그 ‘선’만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는 분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파스카 예수님 - 날마다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필리 2,8)
마지막 봉헌이자 순종인 거룩한 죽음입니다.
평상시 봉헌의 여정, 순종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마지막 거룩한 죽음의 봉헌이요 순종입니다.
아주 예전 어느 목사님의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드린 즉각적인 대답이 생각납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대답하고 내심 만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물어도 똑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죽음 준비입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안해도 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해도 충분합니다.
오늘부터 하루하루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탕한 다음 제 좌우명 고백시입니다.
묘비명을 하라면 두말할 것 없이 이 기도문을 택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사부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평상시 삶이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의연하게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제1독서 이사야서에 예고된 주님의 종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네 번째 노래에 속합니다.
그대로 오늘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분명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 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짊어지리라.”
“우리를 위하여” 바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닮는 길만이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수난은 혼자 겪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난복음 후반부에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잘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제자가 상징하는 바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바로 성모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야 할 자리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두 임종어는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 묘비명이 있다면 이 두 임종어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마르다.”
평생 하느님을 목말라했던, 목마르게 생명과 진리의 하느님 아버지를 찾았던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진리에 따라 진리를 증언한 예수님의 전 생애였습니다.
앞서의 빌라도와 나눈 문답이 생각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평생 진리를 목마르게 찾았던 진리 자체이신 주님과의 일치만이 우리의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시켜 줍니다.
생명의 진리는 물과 같고 밥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미사를 통해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셔야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찾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임종 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임종어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진인사대천명의 삶의 고백입니다.
죽기까지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책임을 다했기에 예수님의 이런 고백입니다.
과연 평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이루려고 노력을 다한 우리의 삶이었는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날마다 실행하려고 분투의 노력을 다했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참으로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기에 이런 주님의 고백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예수님을 장엄하게 고백하며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로 삼을 것을 권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라보고 배우고 따라야 할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종이자 대사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아버님은 2011년 5월 5일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영정사진은 헌팅캡을 쓰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창신부님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이야기하면서 아버님은 이 세상 소풍 잘 마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고 강론 하였습니다.
5월 5일이라서 아버님의 기일은 기억하기 쉽습니다.
어린이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제서품 받을 때입니다.
아버님은 저의 서품 성구인 시편 126장을 ‘족자’에 붓으로 써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느덧 아버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간 지 12년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입니다.
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아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금주’를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품으로 갈 때까지 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혜안입니다.
제가 본당 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아버님은 담장 안에 있는 은행나무의 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부러져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혜안이 부족했습니다.
어머님은 2020년 9월 10일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영정사진은 순교복자수녀회 제3회 회원의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하지 못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엄중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 장례미사에 강론을 하였던 동창신부님이 어머님의 장례미사에도 강론을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자상함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사랑하였던 아버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어머님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따뜻함입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면 늘 따뜻한 밥을 장롱 이불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면 따뜻한 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어머님의 모습에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루가 복음 15장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나.”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실천하였습니다.
많은 대녀들이 있었고, 어머니는 대녀들을 자상하게 챙겼습니다.
저는 그런 자상함이 부족했습니다.
오늘은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에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7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유언’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일곱 가지 유언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 번째 유언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되는지 물었을 때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유언은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배반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과 아픔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과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유언은 “목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목마르셨을까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을 멀리하는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사람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사제들의 위선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사제의 직무를 충실하게 지키지 않는 사제들의 게으름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처럼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다면, 주님 얼굴에 흐르는 땀과 눈물을 닦아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시원하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네 번째 유언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봄 누에는 죽기까지 실뽑기를 그치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야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기름을 준비했던 처녀들이 신랑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열 개로 만든 종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품으로 갈 때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유언은 “아버지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입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여섯 번째 유언은 “어머니,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아,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을 따라서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유언을 따라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나약한 우리들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우리들 또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 유언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절대평가입니다.
우리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빛은 어둠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는 지인이 주신 난을 키우면서 화초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정성을 쏟을수록 푸르름을 드러내는 화초의 모습에서 생명의 소중함과 그 생명을 바라보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씨앗을 심어서 키우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꽃씨를 사다가 화분에 정성껏 심었습니다.
아침마다 물을 주면서 살피던 어느 날 드디어 싹이 돋아난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이제 곧 잎이 나고 줄기가 생기면서 꽃을 피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지요.
그러나 저의 기대감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돋아난 싹이 시들더니 그냥 죽고 만 것입니다.
하나에 씨앗에서 싹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싹만 트고 곧 시들어 죽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씨앗에서 싹이 튼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시작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분명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고 원하는 결과입니다.
이를 위해서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싹만 튼 것을 모두 이뤘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시작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 미사 한 번 참석한 것만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쩌다 기도 한 번 하고서는 열심한 신앙인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약간의 기부와 작은 봉사활동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싹이 튼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께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십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당신이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싹만 맺어버리고 그냥 시들어버리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거름이 되어 우리를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도, 또 많은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도록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결과인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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