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치찬란했던 유격장의 추억
철원에서 보낸 군대 생활 삼 년 동안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는데, 그중에 하나가 유격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회에서도 별다른 운동을 해본 일이 없는 내게 일 년 중 가장 두려워하면서 피하고 싶었던 것이 일 년에 한 번씩 다가오는 유격훈련이었다.
우리 부대가 유격장에 가서 유격훈련을 해야 하는 기간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어떻게 하면 빠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러나 운 좋게 휴가를 가는 사람 이외에는 빠질 수가 없었다.
유격장에 가면 계급도 상급자도 없다. 모든 사람이 다 몇 번 올빼미였다.
그 가열 찬 PT 체조와 유격 훈련도 훈련이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보, 유격, 유격 하면서 뛰다가 보면 어느새 죽여, 죽여로 변하던 그 구호소리, 유격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넓은 저수지로 뛰어내리는 하강코스였다.
나 같이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죽음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하강코스다. 그런데 이상하지, 오늘은 다 모이라고 하더니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은 잘 못하면 사고를 당할 우려가 있으니, 하루조일 PT체조로 대치하겠다는 것이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3분의 1정도가 오전 내내 죽기 살기로 PT체조를 했는데, 주력군이 다 끝내자 조교들이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자, 여러분들은 수영을 못하니까, 떨어질 때에 애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맥주병, 맥주병!’ 하고 떨어진다. 그러면 여러분을 물속에서 구해줄 것이다. 단 물속 깊이 들어가면 양손을 벌리고 허우적거리다가 하면 물위에 뜰 수 있다.”
이게 무슨 날 벼락인가, 하강을 피하기 위해 오전 내내 PT체조로 버텼는데, 방법이 없지,
하강하기 전에 물속에 빠지면 떠오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두 손으로 허우적거리면 물 위로 올라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지옥의 아가미처럼 푸르게 입을 벌리고 있는 저수지를 향해 줄을 잡고 내려가면서 맥주병을 두세 번을 외쳤을까? 저수지 가장 밑바닥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당황한 내가 허우적거리다가 보니 물위에 떠올랐다. 바로 위에 조교들이 탄 배가 보였다. 살았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조교들이 “이런 수영도 못하는 놈 봐라,” 하고는 나를 다시 물속으로 들이미는 것이었다. 얼마나 물을 먹었는지, 몇 번 ‘들어갔다’ ‘나오다’를 반복하고서야 나를 보트에 태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땅위로 올라가자, 우리를 기다린 것은 대형 뻘밭이었다. 수영을 못한 죄로 그 뻘밭으로 들어가 두어 시간을 앉은 포복 높은 포복, 철조망 통과를 하고 났더니, 눈만 빼놓고는 새카만 검둥이가 되었고, 온 몸은 파김치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던 기억, 그렇게 유격을 세 차례나 받고서야 유격이 두렵지 않는 대한민국 국군이 되어 있었다.
유격 훈련 중에 모처럼 한 나절 부대원들만의 시간이 있었다. 포대 부관이 백여 명쯤 우리 부대원들을 데리고 한적한 산자락으로 갔다. 뭐가 즐거운지 싱글벙글 하더니 우리들에게 우리 가곡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야 원래 가곡을 좋아했으니, 지겨운 유격을 안 받고 가곡을 배우겠다는데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리 모두에게 옷을 다 벗으라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어 자연과 같은 우리 가곡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신은 안 벗고 우리들만 벗으라니, 참, 상관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고, 주저주저하는데, 장난스럽게 몇 사람이 옷을 벗자,. 너도 나도 옷을 다 벗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다 벗고 4 열종대로 섰다. 이름도 희미한 그 부관의 말이 이어졌다.
“반동 준비, 지금부터 나를 따라 노래를 배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그래, 그 ‘비목을 백여 명의 젊은 시내들이 발가벗고 좌우로 몸을 흔들며 배우고 있었으니, 처음엔 부끄럽고 슬픈 일이었지만, 나중엔 서로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우리는 네 시간 동안이나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지금 같아서는 당장 성희롱性戱弄 죄로 걸려야 할 일이겠지만, 그러한 일이 묵인되고 자행되던 때가 1970년대 말 대한민국 군대였다. 그가 관음증 환자였는지, 아니면 군복 아래에서 자유를 갈구하던 젊은 청년들에게 숨통을 트여주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시절을 회상하며 빙긋이 미소를 지을 때가 있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그렇게 <청산에 살으리라.>를 부르던 그 전라의 청년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서 살고 있을까?
2025년 1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