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리에 대한 생각 ●
어렸을 적에 교회에서 치리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 때에는 치리를 받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통회하는 심정으로 죄를 자백하고 근신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 죄라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가뭄이 심한 어느 주일 날, 하늘에서 비가 내렸는데 한 집사님이 천수답(저수지에서 물을 끌어 올 수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과 밭)에 물을 대었다고 당회에서 치리를 했다. 그 기록이 당회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직분자의 자녀가 불신 결혼을 했다고 해서 대표기도 금지와 수찬 정지를 시키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았다. 실제로 내가 겪은 일 중에 주일 오후에 뒷산에서 공놀이를 하고 놀다가 내려 왔는데 그날 학생회 헌신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는데 주일을 거룩히 지키지 않았다고 예배 시간에 나와 함께 몇 명이 손을 들고 벌을 선 적도 있었다. 그 때는 그것이 죄라고 여겼기에 당연히 벌을 받아 마땅하고 생각했다. 지금이면 어떻게 받아 들일까?
나는 목사가 된 이후에 내가 주도적으로 치리를 한 적이 없었다. 잘못한 것이 분명했을 때는 개인적으로 불러서 지적하고 같이 기도하면서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고 했다. 그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조용히 다른 교회로 가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치리를 한다고 해서 받아 들이지 않는 시대에 벌을 준다는 것이 과연 당사자와 교회에 어떤 덕을 가져다 줄까 싶어서이다. 교회의 3대 표지는 올바른 권징이라고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목회 현장에서 사람을 겪어 보면 생각할 점이 많은 일인 듯 하다.
이런 차원에서 주변에서 가끔 기가 막히는 길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실수와 허물이 있긴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열불을 내면서 의인인양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라는 의아심이 든다. 나는 치리를 하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는데 고의적이 아니라면 그리고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난다면 벌을 주기 보다는 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벌을 주는 것이 정의일까? 사랑으로 기다려 주는 것이 은혜일까? 내 생각으로는 평소에 신뢰할 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그 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정답이지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을 잘 하는 것과 말이 힘이 있으려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논리와 다수(설득)와 성품이라고 했다. 성품, 즉 삶을 멋있게 살아온 분의 말이 가장 힘이 있다는 뜻이지 싶다. 이 시대의 혼돈은 존경할 만한 의인이 없기에 우리 모두가 고통을 당하는 듯 하다.
천석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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