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정에서 임꺽정을 추억하다.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고도 부르는 승일교는 두 개의 아치형 교각이 이색적인 모습이다. 승일교 아래에 한탄강의 명숭 고석정(孤石亭)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고석정의 내력을 보자.
“고석정은 부의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바윗돌들이 솟아서 동쪽으로 못물을 굽어본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일찍이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고려의 중 무외(無畏)의 기에 ‘철원군의 남쪽 1만여 보에 고석정이 있는데, 큰 바위가 우뚝 솟았으니 거의 300척이나 되고 둘레가 10여 장이나 된다. 바위를 기어 올라가면 한 구멍이 있는데 기어 들어가면 방과 같다. 층대에는 사람 여남은 명이 앉을 만하다. 그 곁에 신라 진평왕이 남긴 비석이 있다. 다시 구멍에서 나와 절정에 오르면, 펀펀하여 둥근 단壇과 같다. 거친 이끼가 입혀서 돗자리를 편 것 같고, 푸른 소나무가 둘러 있어서 우산을 바쳐 놓은 것 같다. 또 큰 내가 있는데, 손방巽方으로부터 온다. 벼랑에 부딪치고 돌을 굴리는 소리가 여러 가지 악기樂器를 한꺼번에 연주하는 것 같다. 바위 아래에 이르러서는 패여서 못이 되었으니, 내려다보면 다리가 떨어져서 두려울만 하여, 마치 그 속에 신물神物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물이 서쪽으로 30리 남짓 가서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에는 다 바위산이 벽처럼 서 있고, 신나무와 남나무와 소나무와 싸리나무가 그 아래 섞여 나 있다. 맑고 서늘하고 기이하여서 비록 문장文章이 공교롭고,, 그림일 잘그리는 자라도 방불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석정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한탄강 한복판에 치솟은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우뚝하게 솟아 있고, 그 양쪽으로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그 옛날 있었다던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수수한 모양새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고석정은 조선시대에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3대 도적이라고 명명되었던 임꺽정이 활동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벽초 홍명희의 소설 속에서 고석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임꺽정은 황해도 금천현의 제석산 산줄기의 영향으로 지형이 삼태기 속 같은 천연의 요새 청석골을 근거지로 삼아 1559년부터 62년까지 3년에 걸쳐 조선조정을 괴롭혔다.
임꺽정, 일명 거정(巨正)은 양주의 백정(白丁)이었으나 정치적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명종 14년(1559) 불평분자들을 규합한 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곡식창고를 털어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하여 관원을 살해했다. 개성에 쳐들어가 포도관 이억근(李億根)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에 형 가도치(加都致)와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명종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적혀 있다.
조선시대 중기 암울했던 그 시기는 양반, 평민, 노비 등 각 계층의 삶과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때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의 천민들을 모아 의적 활동을 벌린 백정 임꺽정을 통하여 민중들의 애환과 해방의 염원을 극명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우리 문학사상 손꼽히는 역작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고석정 중간쯤엔 임꺽정이 몸을 숨기기 위해 드나들었다는 뻥 뚫린 구멍이 있는데, 그 바위 속으로 들어가면 대 여섯 명이 너끈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한다. 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관군에게 쫓기던 임꺽정이 피할 재간이 없게 되면 재주를 부려서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하여 한탄강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고 한다.
한편 임꺽정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홍명희가 임꺽정을 소재로 한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면서부터이다.
고석정에서 다시 길 위로 올라 한탄강을 따라 걷는다. 강은 땅 아래에 있고, 먼 듯 가까운 듯 보이는 명성산도 금학산도 다 옛날 어느 시절에 궁예가 다스린 땅이었다. 그렇다 이 땅은 미륵의 나라를 세우려 했던 궁예가 왕건을 비롯한 토호들의 배신으로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던 곳이기도 하다.
궁예가 지금의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금학산(金鶴山947M)을 안산으로 정했더라면 300년을 갈 수 있었는데, 고암산高巖山을 안산으로 하는 바람에 3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 풍수 설화가 전해져 오는 금학산을 바라보는 사이에 “함경도로 가는 길 수백 리, 안팎의 온 강산이 또렷이 내 눈 안에 들어오네.” 이이만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2025년 1월 17일,
첫댓글 여기 작년에 고교 백합산악회에서 가 봤었는데 풍광이 정말 아름답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