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드, 상식 이상의 삶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세 과부, 시어머니 나오미와 그녀의 두 이방인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유다땅을 향해 돌아가는 여정에 오르고 있습니다. 며느리들의 인생을 불쌍히 여긴 나오미는 그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결국 오르바는 돌아갔고, 룻은 끝까지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 땅으로 들어옵니다. 룻의 이러한 선택은 상식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을 부정한 존재로 여기는 유다땅에서 그것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과부의 신세 그것도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룻기 1장 8절은 이러한 룻의 선택을 “선대(kindness)”라고 표현합니다. 한국어로 선대, 영어로는 kindness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본래, 히브리어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충성을 의미합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충성하고,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헤세드입니다. 이 헤세드는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 그 이상의 것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에게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기까지 사랑의 충성을 다 하신 거룩한 행위 그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놀랍게도 이방여인 룻은 지금 나오미에게 그 헤세드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유다 땅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자신을 알아보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진 자신의 이름을 이제는 마라(쓰다, 고통)라 부르라 합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처절하고 비참한 인생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텅비어 버렸다는 탄식 속에서 나오미가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사랑의 충성-헤세드를 행하고 있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룻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룻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작은 존재이기에, 나오미가 룻을 곁에 두고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난 텅빈 인생이다! 라고 탄식했던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보잘 것 없는 한 사람 룻의 헤세드를 통해서 나오미의 인생에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룻기 4장 17절 다윗의 조부 오벳을 낳은 사람은 분명히 룻인데, 룻기는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룻기 저자의 의도입니다. 텅비었던 나오미의 인생이 그리스도의 예표인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는 그야말로 꽉 찬 인생으로 놀랍게 역전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 아닐까요? 가장 작은 한 사람의 사랑의 충성-헤세드로 말입니다.
룻이 행한 헤세드는 단지 나오미라는 한 여인의 텅빈 삶을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룻을 통해 훗날 다윗 왕국을 여시어 사사기 시대의 암흑을 물리치시고 민족 전체를 놀랍게 회복시키십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회복의 키(key)는 헤세드입니다.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행하는 룻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헤세드를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나오미처럼 내 인생은 텅비었다하는 탄식이 터져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룻기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보잘 것 없는 한 과부 이방 여인의 헤세드를 통해서도 다른 인생의 텅빔과 한 민족의 텅빔을 채우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우주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헤세드를 통해서 우리의 텅빔을 채워주시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언제나 헤세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저 역시 누군가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룻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권도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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