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암菩提庵 / 박용환
늦은 봄볕이 한가로운 날
역병을 피해 윤달 속으로 달아난
연등燃燈을 맞으러 금산錦山을 오른다
겨우내
벌거숭이로 부끄럽게 움츠려 있던
참나무 숲은 환한 초록으로 빛나고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짠내를 머금은 해무海霧는
길도 없는 산등성을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암자로 향하는 시멘트 포장길은
순한 디자인의 밝은 회색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산 고개를 굽이돌아
매표소가 어렴풋이 보일 쯤
귀에 익은 청아한 염불소리에
숨 가쁘게 겨우 도달한 어르신들의
합장이 눈부시다
한 숨 고르고 계단을 따라 내려간
암자의 처마 밑으로 한 톤 높아진
염불소리가 강물처럼 흐르고
작은 마당엔 능선을 타고 올라온
해무가 자욱하다
흐릿한 계단을 한 층 더 내려서면
불현듯 나타난 듯한 해수관음상이
우뚝하다
뚜렷해진 염불소리는
누군가의 합장으로 끊임없이 돌고
해무 속에도 바다를 향한
해수관음의 인상은 꽤 아름답다
비단을 깔아놓은 듯한 금산에
바다 가운데서 일어난 해무가
순식간에 나무를 삼키고
바위를 삼키고
급기야
늦은 봄에 취한 초록의 숲마저 삼켜버리니
연등도 간 곳 없고
십지十地의 지혜가 가득한 보리菩提도
찾을 수가 없다
연등을 찾으러 간 보리암에
금산을 삼켜버린 해무의 깊은 아가리 속
염불소리만 가득하다
사바세계로 돌아오는 길은
꿈길처럼 모호하고 흐느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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