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마르8,27-35)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하고 물으셨습니다. 바깥 떠도는 소리,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1) 세례자 요한. 2)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3)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여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얘기는 그것으로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소신과 확신에 찬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나의 신앙과 다른 사람의 신앙은 확실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1). 그리스어로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인데 2).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3).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약 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하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주변 강대국의 속박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세주를 보내주시어 선택받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1).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2). 사제와 같은 인물로 3).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임금, 사제, 예언자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장차 하느님이 보내주실 메시아를 1).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하길 원했고, 2). 사제처럼 율법에 충실하며 3). 예언자들처럼 죄인을 단죄하는 인물로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1). 이 메시아가 압제 세력인 로마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2). 원수를 철저히 응징하며 3). 율법을 어기는 죄인을 엄하게 벌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원수의 죽음이 아니라 회개를 원하시며 죄인에게는 처벌보다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17,17)를 줄기차게 선포하였고, 그 진리의 이름으로 그 진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아 칭호는 예수님의 사명을 올바로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고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구세주이시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까지 감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은 이기적인 야망의 논리로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고 더 큰 희생과 사랑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물음은 결국 너희에게 있어서 내가 어떤 존재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를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분 손에 들려 있으니, 연필을 사용하고 안 하고는 그분 뜻에 달려 있습니다. 혹 부러져도 그분께서 필요하다면 깎아 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뜻을 관철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나를 맞추는 삶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고백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길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 중 한 분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고 훌륭한 분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힘들고, 지치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난제에 봉착해 있을 때도 여전히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 ‘구세주’ 이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나를 살리시는 분, 나의 주인으로 확실하게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행하시면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같은 뜻을 되풀이 강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 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숭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집자실지(執者失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움켜잡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움켜잡았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도 그렇고 재물도, 목숨도 그렇습니다. 잡으면 잃습니다. 잃기 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에 소유하지 않은 물건을 도둑맞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주님으로 가득 채워지고 충만해질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잃기 전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아멘
아멘!~~~ "구세주"
묵상 하고갑니다.^^
또한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