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세계의 실금 이혜미 우리가 우주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빗방울이라면 돋아나는 꽃잎과 떨어지는 물방울이 문득 구분되지 않을 때 얕고 긴 잠에서 깨어나 비 가신 자리를 바라보자고 했다 영원히 젖어드는 천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맞잡은 손에 스며드는 손금으로 서로의 깨어진 운명을 혜아리자고 비가 내린다는 말이 높이와 깊이를 포함하듯 어둠에도 안으로 자라나는 가지가 있어 천장에 번진 검은 꽃잎을 헤아리며 고여드는 꿈들을 생각해 솟구치는 어제 속에서 구겨서 던져버린 파지처럼 움찔거리며 조금씩 펼쳐지는 우울을 생각해 사실 비 같은 건 없어요 행성의 깨어진 틈으로 인간이 세계의 비밀을 잠시 엿볼 뿐 침입하는 빗줄기로 꽃점을 치면 발밑으로 빗금이 깊어지고 기억의 낱장이 젖어들겠지 어린 몸을 두고 멀리도 걸어온 것이다 사로잡힌 식물의 내뻗음처럼 침범의 방식으로만 가닿을 수 있는 세계가 있어
비가 내린다 사랑하는 이의 그림자를 움켜쥔 채 파국을 향해 추락하듯이 ―월간 《현대문학》 2024년 9월호 --------------------- 이혜미 /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빛의 자격을 얻어』『흉터 쿠키』, 산문집 『식탁 위의 고백들』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