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혜정광경성목, 현덕정문순선헌, 숙예인의명신희, 강고원충선숙혜, 목정공우창공.
제15대 숙종실록
1,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
(1054년-1105년, 재위기간 ; 1095년 10월-1105년 10월, 10년)
나이 어린 헌종이 밀려나고 숙종(肅宗)이 즉위함으로써 고려 조정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휘말리지만,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여진족의 성장으로 변방이 불안해짐에 따라 외교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그 때문에 군사제도의 재편
이 단행되는 등 고려사회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이지만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순종, 선종의 동복아우다. 105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
은 휘(熙)였으나, 거란의 9대왕 천조제와 이름의 발음에 같다 하여 천조제 즉위년인 1101년 3월에 옹(顒)으로 개명하였
으며 자는 천상(天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질이 강하여 매사에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경자사(五經子史 : 오경과 제자
(諸子)의 글과 역사서)등 많은 서적을 읽어 학문에 밝았고, 이 때문에 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문종은 어린 그에게
“후일에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아마도 네가 될 것 같구나”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아꼈으며, 1065년 그를 계림후에
책봉했다. 1077년에는 계림공으로 승진되었으며, 선종 3년(1086년)에는 수태보 벼슬을 받았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
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상서령에 올랐고, 이듬해 소태보와 왕국모의 도움으로 외척 이자의 세력을 몰아낸 다음에는 중
서령에 올라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측근 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
함으로써 고려 제15대 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넘긴 42세였다.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르던 날에도 이자의의 누이동생 원신궁주 이씨
와 그녀의 아들 한산후 그리고 나머지 두 아들까지 모두 경원군(지금의 인천)으로 귀양을 보냈다. 숙종은 이처럼 처음
부터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기며 축근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숙종은 조정개편을 단행하여 이자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가장 공이 컷던 소태보를 문하시중에 앉히고, 김상기와 임
개를 각각 문하시랑평장사와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상장군 왕국모를 수사도로, 유석을 수사공으로 삼고
손관, 최사추, 김선석 등 측근세력들을 모두 요직에 앉힘으로써 먼저 왕권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하여 숙종대 초반기는 매우 안정된 정치가 이뤄진다. 하지만 후반기에 가면서 여진족이 성장하고 거란의 힘
이 약해짐에 따라 변방이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점차 전쟁을 염려하여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색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숙종은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가장 총애하여 상서령으로 삼았던 둘째아
들 필이 어린 나이로 횡사하고, 이복 동생 부여후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소문이 무성하여 1099년 그를 역모죄로 경
산부 약목군(현재의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 귀양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부여후 왕수의 역모사건에 대하여 <고려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숙종이 마흔이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형제계승 전례에 따라 부여후가 차기 왕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숙종에게는 이미 17
세나 된 장남 왕우가 있었기 때문에 부여후가 왕위를 잇는 다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수
는 왕위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탓에 결국 역모혐의를 쓰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 *,부여공 왕수 – 부여후라고도 한다. 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이다. 1099년(숙종4년) 음력 11월 3일 부여공은 죄를
지어 경산부 약목군(칠곡군 약목면)에 유배를 가야했다. 당시 부여공의 죄목은 고려사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숙
종은 유배 가는 왕수에게 유교와 불교 관련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후 부여공은 1112년(예종 7년)또 죄를 지어 거제현
(거제도)으로 이배(귀양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를 가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부여공의 아들 사공 왕면도 진례현(충남 금
산)으로 유배를 갔다. 거제현으로 이배를 가던 그는 이해 음력 6월 10일 이배도중 현풍현(현재 대구 달성 현풍읍)에서
사망하였다. 예종은 부여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한편 이듬해인 1113년(예종 8년)아들
왕면이 사면되어 개경으로 돌아왔고 사공의 작위를 돌려받았다.>
왕수가 귀양길에 오른 지 2달 만인 1100년 정월, 숙종은 자신의 맏아들 왕우를 태자에 책봉하여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그는 양주땅의 한성을 새롭게 건설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다.
그래서 1101년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최사추, 어사대부 임의, 지주사 윤관 등에게 궁궐 조
성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최사추 등은 그 해 10월 을미일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한다.
‘저희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등지에 가서 산수를 살펴본즉 도읍을 정하기에 합당하지 않고 오직 삼각산 면악 남쪽
의 산수 형세가 옛 문헌의 기록에 부합되오니, 청컨대 삼각산 주룡(산줄기)의 중심 지점인 남향관에 그 지형대로 도읍
을 건설하소서.’
최사추의 보고에 따라 숙종은 남경 건설 사유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이듬해 3월 직접 왕궁지를 순행한 다음, 궁궐 축
성을 명령한다.
이 무렵 전국에 송충이 피해가 극심하여 삼림 훼손이 심해지고 농작물에도 막대한 피해가 초래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또한 동북면에서는 북방의 여진족이 더욱 강성해져 변방이 위태롭다는 보고를 올렸고, 숙종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1102년 4월 동여진의 추장 영가(잉게)가 보낸 사절을 맞아들인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는 동여진에서 사절을 보
내 은그릇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들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하였으며, 1103년 7월에는 여진에 붙잡혀 있다 풀려난 고려
인 의원의 보고에 따라 여진의 국력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인식하고 정식으로 사절을 교환하며 국교를 맺는다. 하지만
여진의 내정이 불안한 탓으로 변방에선 계속 전운이 감돌았고, 결국 1104년 정월 동여진의 추장 오야속 부대가 내전을
치르면서 정주 관문 밖에 군사를 집결시키기에 이른다.
< *.오야속(우야소)-1061=1113 재위 1103-1113 : 여진 완옌부의 추장,핵리부의 맏아들이자 금태조 아골타의 형이다.
작은 아버지 금 목종 완안 잉계의 뒤를 이어 추장이 됨과 동시에 태사(절도사)를 이어 받았다. 이어 이듬해인 1104년
동여진에 있는 부락 중 복종을 하지 않는 부락을 쳐서 함경도 정주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고려에서는 임간을 보내 쳤
으나,성공하지 못하였고 다시 윤관을 보내어 화진을 맺고 돌아왔다.그 후 1107년 윤관이 다시 쳐서 평정하고 9서을 쌓
아 지켰는데,오야속의 간청으로 조공을 받기로 하고 9성을 내주었다. 사후인 1144년 금 희종에 의해 강종(康宗)으로
추존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임간을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물리
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간은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기마병 중심의 여진군을
이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임간을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탄핵하고,다시금 윤관
을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으로 임명하여 다시 여진과 대적하게 하였다. 그러나 윤관 역시 여진군과 싸워 많은 군사를 잃
고 그들과 화의조약을 맺는 것으로 일단 전운을 잠재웠다.
< *.임간(林幹)- 안동출신 임자고(林子高)의 아들이다. 1097년(숙종2년) 지추밀원사 판삼사사에 이어 추밀원사 상서좌
복야가 되었다.1101년 판상서형부사, 이듬해 판서북면병마사가 되고, 1103년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이 때 동여진의 추장 우야속이 별부의 부내로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형과 지조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
는데, 이들의 기병이 정주관(지금의 함북 정평) 밖에 와서 주둔하였다. 이에 1104년 문하시랑평장사로 동북면행영병마
사가 되어 여진에 대비하였다. 정주성에 이르러 여진군과 대치하였는데, 훈련되지 않은 군대로 적과 싸우다가 패하고
정주성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파직되었으나 다시 복진한 뒤 1112년(예종7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벼슬을 그만 둠)
하였다.>
숙종대의 정치.외교는 이렇듯 전반기에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여진족의 국력 강화에 따라 불안
이 가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대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안정궤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덕택으로 주목할 만한 문화적
성과들을 남긴다.
1096년에는 6촌 이내의 혼인을 금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유학자들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 왕실
은 광종 이후 지속적으로 성골 왕족을 중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6촌 이내의 족내혼이 성
행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유학을 숭상하던 유림들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리를 중시하고
족외혼을 가족제도의 기본 요건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따라서 숙종대에 6촌 이내의 결혼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유림들의 힘이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는 족외혼을 권장하던 송나라의 입김도 한껏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6촌 이내의 금혼령은 백성들 사이에서뿐만아니라 왕실에서도 별로 지켜지지 않음으로써 이 법은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다만 이때부터 우리 민족이 조금씩 족내혼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생겼을 뿐이다.
1097년에는 주전관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을 주조하고
이듬해에는 고주법(돈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인 해동통보 1만 5천 관을 주조하여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1101년 3월에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여 인판사업을 확대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는 61명의 선비와 21명의 현
인들을 문선왕(공자)의 묘에 배향함으로써 유학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그리고 1102년에는 은나라의 성인 기자의 분묘
를 찾아 사당을 세우고 능을 조성했다.
이 같은 유학 진흥책과 함께 원효와 의상을 국사로 추증하고 그들이 공덕을 새겨 동방의 성인으로 높임으로써 불교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1103년에는 송나라의 의관 모개 등에게 흥성궁을 사관(숙식하는 집)으로 내주고 의사를 양성하도록 했으며, 1101년
부터 시작된 남경(한성)의 궁궐 조성작업이 1104년 5월에 완결되자, 같은 해 8월에 왕이 직접 남경으로 내려가 누각과
원림을 유람하고(이 때의 남경 궁궐은 경복궁의 북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청와대 부근으로 추측된다.) 연흥전
에서 반야경 도량(불도를 얻으려고 수행함)을 베풀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적 업적 이외에 군사적으로는 기마병 중심의 여진에 대항하기 위해 별무반을 조직하게 된다. 윤관의 주
장으로 설치된 별무반은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과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이 있었으며 고려
는 이들 별무반을 통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한다.
숙종대는 이와 같이 정치,외교적으로 전환기에 놓였기 때문에 한편으론 안정되고, 또 한편으론 불안이 가중되는 시기
였다. 숙종은 이런 정세 속에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1105년 고구려 동명왕의 묘역
(서경 소재)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었다. 그리하여 결국 환궁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돌아오는 노상의
수레 안에서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제위 만 10년 만의 일이었다.
숙종의 능은 개경 송림현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영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