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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14.22-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8,8-15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극심한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사실 앞에서, 믿음의 흔들림과 의혹과 허탈감으로 절망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붙잡혀 죽게 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그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결코 갈망이 식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두려움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움이 되어 이른 새벽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게 했고, 거기서 그들은 천사를 만나 놀랍고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
(마태 28,7)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면서 "평안하냐?"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통해 사명을 주었건만, 굳이 열절하신 사랑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주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향하여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인간을 향하여 계신 분”(본 훼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나 여기 있노라.”(이사 58,9;66,1) 하시며, 이미 찾아와 우리 앞에 계십니다.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셔서,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붙잡혀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당신 앞에 항상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당신 면전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어, 막달레나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당신 부활을 선포하는 첫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달아나버린 제자들을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떠났어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내 형제에게로 가라”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첫 사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뵈올 것입니다.
척박한 땅 갈릴래야,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땅, 바로 여기,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할 때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피어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형제들 안에서 당신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주님!
당신은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십니다.
항상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분,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고 이끌어 가시는 분.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의 회개>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 부활에 기뻐하며 두려워하는 여인들, 그래서 그것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알리는 여인들과 주님 부활에 당황하고 그것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은폐하려는 유대 지도자들이 대조되는데, 제 생각에 마태오 복음은 이것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유대 지도자들이 주님 부활에 당황하고 그것이 알려질까 두려워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이 없어도 이들의 은폐하려는 시도 자체가 그들의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을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주님의 부활 사건은 두 가지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하나는 기쁨을 동반하는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당황스러움을 동반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는 하느님 체험에서 비롯된 경외감의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체험과는 전혀 무관한 두려움이요, 자기들의 행위와 의도가 좌절된 데서 비롯된 두려움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됐을 때라도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요 섭리로 받아들였으면 좋을 텐데, 자기들의 죄와 좌절을 볼 뿐 하느님 보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 지도자들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서도 볼 수 있는, 그러니까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하느님으로부터 숨고 옷으로 자기들의 치부를 감추려고 하였지요.
자기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요 죄임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숨기지 않고 직면하였다면 하느님과 단절되지 않았을 텐데, 숨기고 감추려 했기에 하느님과는 단절되고 두려움만 안게 되었지요.
우리는 하느님과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자기 죄와 실패가 드러나는 것이 더 두렵고, 그것을 직면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다가 하느님과 단절됩니다.
잘못이 드러나고 알게 되었을 때 바로 돌아서는 것, 그것도 하느님께로 바로 돌아서는 것, 그것이 그나마 우리의 현명함이요, 부활의 회개임을 오늘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헌신과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
돈은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많은 사건 사고들 안에서 물질의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물질에 대한 과욕으로 영혼을 파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 옛말에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 고 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마태 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립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 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을 안고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에수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과 헌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순 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행동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랑의 승리이고 그 믿음이 끝까지 지켜지는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앞에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목숨 바쳐 사랑했던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앞에 여자들 마음속에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마태오 복음 28장 8절)
우리네 지난 인생 여정을 돌아보니 두려움과 기쁨이 서로 교차되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아기를 가진 엄마들은 산달이 가까워질수록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이 순간의 고통을 잘 견뎌내면 나를 통해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기쁨에 마음이 설렙니다.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지난 시절, 보다 나은 세상을 한번 만드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노라며, 철옹성 같은 압제자들과 무장한 병력에 저항의 깃발을 들 때, 잡혀가고 구속되고 고문당할 때의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합니다만, 내 청춘을 나라를 위해 바친다는 생각에 마음이 웅장해집니다.
언젠가 우리가 맞이할 죽음의 순간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오직 나 홀로 떠나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하는 데서 오는 걱정이 크겠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고통의 언덕을 넘어서면, 그토록 우리가 기다려왔던 순간, 주님 부활에 결정적으로 참여한다는 생각에 기쁨으로 가득 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인 두 여자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강한 믿음으로 주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주님을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주님 부활에 대한 확신이나 믿음이 부족하십니까?
그렇다면 두 여인처럼 주님을 더 깊이, 더 열렬히 사랑해 보십시오.
안갯속 같았던 주님 부활이 보다 명료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자들과는 달리 주님 부활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들의 꾀임에 넘어갑니다.
두둑한 목돈을 받고서는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주님 부활의 영광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수석 사제들의 악행은 무덤 경비병들의 악행보다 훨씬 더 센 것이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돈을 주어 스승님을 배반하게 만들었던 수석 사제들은 이제 다시 한번 무덤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어 예수님 부활 사건에 대한 입막음을 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칠 계획이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장되고 봉인되기 전에 그 일을 실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무덤 근처를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사악한 수석 사제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돈을 주고 그분의 목숨을 샀습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셨을 때, 그들은 다시 한번 돈을 주고 그분 부활의 증거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앞에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주님 부활에 대한 강한 확신과 믿음을 바탕으로 그분 부활의 충실한 증인입니까?
아니면 끝끝내 주님 부활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수석 사제들 편입니까?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평안하냐?>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 부활의 증거도 아니고, 징표도 아닙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천사를 만났고, 그 천사가 예수님 부활을 알려 준 것으로 기록했는데, 여자들이 천사의 말만 듣고서 예수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라는 말은 ‘반신반의’ 상태였음을, 즉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여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6,8).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일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난 뒤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을까?
네 복음서의 이야기를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처음 만난 곳은 갈릴래아가 아니라 예루살렘입니다.
또 루카복음을 보면,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지시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는 지시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로 가라는 지시는 루카복음 24장 47절,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이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때가 되었다는, 즉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지시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을 할 때 당신이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경비병들’은 사제들이 지휘하는 성전 경비병들이 아니라 빌라도의 부하들, 즉 로마 군인들입니다.
27장 65절의 “당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라는 말은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당신들이 경비병들을 차지하여라.”가 올바른 번역이고, 이 말은 빌라도가 자기 부하들을 내주겠다는 뜻입니다.
경비병들이 총독의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그들이 빌라도의 부하들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무덤을 막았던 돌을 옆으로 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마태 28,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보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가셨는지는 본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경비병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그대로 사제들에게 알렸을 텐데, 사제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 일을 예수님의 부활에 연결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지 않아서, 또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원해서, 경비병들에게 거짓 소문을(가짜 뉴스를) 퍼뜨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경비병들과 사제들에게도 나타나셨다면?”
요한복음을 보면, 이 질문은 이미 최후의 만찬 때 사도들이 했던 질문입니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2-23)
예수님의 답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왜 사도들과 신자들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못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하셨는데, 조금 풀어서 표현하면,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그 희망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믿고 싶어 하는 것’이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활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아예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많은데, 그들은 부활을 ‘남의 일’로만, 또 종교와 신앙에 미친 사람들의 ‘헛소리’로만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것인데, 그들 중에는 경비병들을 매수하는 일에 가담했거나 그 일을 알고 있는 사제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바로 그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이 교회에 알려졌을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 부활 - 사실인가 유언비어인가?>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주님 부활대축일입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그날까지 늘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 같은 우리의 신원입니다.
다시 나누고 싶은 주님의 파스카의 꽃이란 자작 고백시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부활시기를 맞이하여 모든 분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 부활을 자명한 사실로 믿지만 오늘 마태복음의 상황은 두 견해가 팽배한 듯 보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사실인가 또는 유언비어인가 두 가능성입니다.
복음 전반부에 등장하는 주님의 여제자들은 너무 생생한 주님 부활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 소식을 듣고 큰 기쁨중에 제자들에게 전하려 달려가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평안하냐?” 인사와 더불어 당부를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났던 아름다운 체험의 기억들로 가득했던 자리 아닙니까?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어제 부활 성야 교황님의 강론 중 인상적인 대목은 ‘기억’이었습니다.
좋은 기억이, 좋은 추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좋은 기억은, 좋은 추억은 미래의 희망을 향해가는 추진력이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라. 그리고 계속 희망과 기쁨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라."
(Rember and keep moving forward with hope and joy.)
얼마나 멋진 통찰입니까?
참으로 힘들 때 주님과의 첫사랑의 추억인 각자 삶의 자리 갈릴래아를 상기한다면 계속 희망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좋은 추억을 쌓아감이 미래를 향해 가는 힘을 축적해 가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후배들에게 좋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추억을 선물하는 일이 실질적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좋은 추억이 축적이 없으면 한결같이 힘차게 나아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좋은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첫사랑의 자리 갈릴래아로 초대하시며 초발심의 자세로 다시 새롭게 출발하도록 합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믿음의 용사로 돌변하여 복음 선포의 일꾼이 되었고, 그 놀라운 활약상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는 예수님 부활의 유언비어의 소재를 밝히고 있습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으로 매수하며 은밀히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말하라고 지시합니다.
경비병들는 그대로 하였고, 그리하여 이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유다인들 사이에 펴저 나갔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상식적 사람들에게 충분히 먹힐수 있는 유언비어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결정적 답이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앞으로 부활시기 계속될 제1독서 사도행전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증언과 선포로 가득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주님 부활의 증거라기보다는 강력한 주님 부활의 선포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결코 유언비어가 아닌 생생한 체험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열한사도와 함께 오순절에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을 대상으로 예수님 부활이 하느님의 놀라운 위업임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 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문장을 보십시오!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바로 렉시오 디비나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어를 “나”로 놓지 않고 “하느님”을 주어로 하여 성서뿐 아니라 내 삶의 성경책도 렉시오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연히 여기 수도원에 와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여정중에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화답송 시편(16장1-11절)을 그리스도화하여 읽는 렉시오 디비나의 수준이 완전히 대가급입니다.
다윗은 그 예전에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앞서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사도행전 교회의 신도들은 다윗의 시편 고백을 완전히 그리스도화하여 렉시오디비나한 결과를 자기 고백으로 하고 있음을 봅니다.
내용이 깊고 아름다워 각자 내 고백으로 바쳐도 좋겠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다윗의 고백이자 베드로의 고백이요 우리의 고백도 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저에게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깊은 친교를 나누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날마다의 미사가 부활하신 주님을 힘차게 선포하고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 선포자로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 세상에 파견됩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아름답고 좋은 사랑의 추억들로 가득한 하루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학교에서 ‘논리학’을 배웠습니다.
강론을 하기 위해서는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두서없는 강론을 듣는 것은 상당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중언부언하는 강론도 분심이 들게 합니다.
논리학을 배우는 이유는 내가 생각한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도 논리학은 좋은 도구가 됩니다.
논리학에는 삼단논법이 있습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을 귀납법이라고 합니다.
'공자도 죽었다. 부처도 죽었다. 그래서 사람은 죽는다.' 이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반면에 전제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결론을 이끄는 것을 연역법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는다. 공자도 죽었다. 그래서 나도 죽는다.' 이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하느님나라에 대해서는 비유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상의 전환’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비’가 되어 일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깨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율법학자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지평을 넓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튀르크에의 지진 피해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장애인들은 본인이 죄를 지었거나, 조상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장애를 가진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통과 고난은 삶의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을 울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귀납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부활’은 전제되는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해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의심이 많았던 토마 사도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성서에 예언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유대인이었기에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체와 성혈’을 축성합니다.
사제의 축성이 끝나면 제병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가 됩니다.
그리고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라고 고백합니다.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들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어떻게 드러나야 할까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삶의 자리였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신 삶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 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 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렸을 때 좋아하던 간식 중 하나는 초코파이였습니다.
너무 맛있는 초코파이가 금세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아주 조금씩 떼어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군대에서 있었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신병 훈련소를 퇴소하고서 자대에 배치되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제게 한 고참이 다가와서 함께 PX라고 하는 군대 마트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초코파이 두 상자를 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너무 좋아하는 간식이라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한 6개쯤 먹었을까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이제 그만 먹겠습니다. 충분히 먹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인상을 쓰면서 “고참이 특별히 사주는 것인데 안 먹어? 이거 군기가 완전히 빠졌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고참이 무서워서 두 상자를 다 먹었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초코파이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초코파이 한두 개는 분명히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공포였습니다.
너무 많은 것은 오히려 공포를 가져다줄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것도 기쁨이 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한두 권의 책은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책은 공포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상의 책도 기쁨입니다.
많은 이가 기쁨을 찾습니다.
문제는 이 기쁨이 순간의 만족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기쁨은 결코 계속된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공포’가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아가면 알수록 더 커지는 기쁨입니다.
절대로 주님을 많이 알고, 또 주님을 많이 만난다고 해서 ‘공포’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참 기쁨을 주시는 주님이 아닌, 순간의 만족에서 공포까지 주는 세상의 것만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다는 소식에 여자들은 두려워하였지요.
그러나 그 두려움을 넘어선 기쁨이 더 컸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모른 척하는 사람들이지요.
경비병 몇 사람들과 이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은폐하려는 수석 사제들입니다.
이들은 기쁨이 아닌 두려움이 커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는 원하는 대로 되었다며 기뻐했겠지요.
하지만 그 기쁨은 공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굳은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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