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영(金澤榮)-
「의병장 안중근이 나라의 원수를 갚았다는 소식을 듣고聞義兵將安重根報國讎事(문의병장안중근보국수사)](안중근 의사의 거사 소식을 듣고)
平安壯士目雙張(평안장사목쌍장) 평안도 장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快殺邦讎似殺羊(쾌살방수사살양) 양 잡듯이 나라의 원수를 죽였네
未死得聞消息好(미사득문소식호) 내 죽기 전에 좋은 소식 듣게 되니
狂歌亂舞菊花傍(광가난무국화방) 국화 옆에서 미친 듯 노래하고 춤추네
海蔘港裏鶻摩空(해삼항리골마공) 블라디보스토크항에 송골매가 솟구치고
哈爾濱頭霹火紅(합이빈두벽화홍) 하얼빈역에서 벽력이 불을 뿜었네
多少六洲豪健客(다소육주호건객) 수많은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一時匙箸落秋風(일시시저낙추풍) 추풍에 놀라 일시에 수저를 떨어뜨렸네
從古何甞國不亡(종고하상국불망)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으랴
纖兒一例壞金湯(섬아일례괴금탕) 소인배들은 언제나 국방을 무너뜨렸지
但令得此撑天手(단령득차탱천수) 다만 하늘을 떠받칠 이런 인물을 얻어서
却是亡時國有光(각시망시국유광) 외려 망해갈 때에도 빛을 발할 수 있었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소호당시집韶濩堂詩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김성애님은 “김택영의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ㆍ소호당(韶濩堂)이다. 창강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이건창(李建昌), 김윤식(金允植) 등 당대의 문호들에게 인정받았다. 1891년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국의 현실에 절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중국 퉁저우(通州)에서 짱치앤(張騫)의 도움을 받아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일자리를 구해 옌푸(嚴復), 투지(屠寄) 등 중국 명사들과 교류하며 조선의 시문집, 역사서를 간행하면서 생활하였다.
중국에 망명 중이던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사건을 듣고 의분에 북받쳐 위와 같은 시를 지은 것이다. 당시 안중근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도 놀라운 사건으로 회자되었는데 암담한 심정으로 망명 생활 중이던 김택영에게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준 한줄기 빛과 같은 쾌거였다.
이 시를 보면 첫 수에서는 나라의 원수를 통쾌히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운 심정을 유감없이 드러내었고, 둘째 수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에서 있었던 안중근의 의거를 당시의 반응과 함께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에서는 매국노들로 인해 스러져가던 나라에 영웅이 나타나 망해가는 가운데 마지막 빛을 발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거사의 의의를 높이 평하였다.
김택영은 이후 안중근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1916년에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짓기도 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명문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안중근이 일찍이 평안도에서 교육 활동을 한 사실, 우리 교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하는 등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애국 활동을 수행해 온 사실을 기록해 하얼빈의 거사가 일시적인 울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 글은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어 안중근이 거사를 치르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을 마치 옆에서 목격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는 『사기(史記)』에서 형가(荊軻)가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러 떠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안중근이 거사하러 떠나기 전에 불렀다는 비분강개한 「장부가(丈夫歌)」 역시 형가의 「역수가(易水歌)」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점은 김택영이 안중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丈夫處世兮(장부처세혜)
뜻을 드높이 쌓아야 하네 蓄志當奇(축지당기)
시대가 영웅을 만듦이여, 時造英雄兮(시조영웅혜)
영웅이 시대를 만들도다 英雄造時(영웅조시)
북풍의 차가움이여, 北風其冷兮(북풍기냉혜)
내 피는 끓어오르는구나 我血則熱(아열즉열)
분개하여 한번 떠남이여, 慷慨一去兮(강개일거혜)
반드시 도적을 도륙하리라 必屠鼠賊(필도서적)
우리 동포여 凡我同胞兮(범아동포혜)
위대한 공적을 잊지 말라 毋忘功業(무망공업)
만세 만세! 萬歲萬歲兮(만세만세혜
대한독립 만세 大韓獨立(대한독립)
김택영은 「안중근전」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논(論)을 두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예로부터 충신 의사는 항상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는데 지금 안중근은 그 뜻을 장대하게 달성하고 죽었다. 천하의 이 소식을 들은 세상 사람들은 깊은 밤에 혼자 자다가 벽력 소리를 들은 것처럼 놀랐으니, 아아! 천년에 한 번 있을 위대한 공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거사를 성공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이었겠지만, 그가 잡힌 뒤 200여 일 동안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간 것은 그의 의지이다. 이것이 실로 어려운 것이다.
김택영은 1927년 78세의 나이로 중국 퉁저우에서 병사하였다. 그해 4월, 낭산(狼山)에 장사 지내었는데 묘비에는 ‘한국 시인 김창강의 묘(韓國詩人金滄江之墓)’라고 적혀 있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김택영[金澤榮, 1850년(철종 1) ~ 1927년,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경기도 개성 출생.]-조선후기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한사경(韓史綮)』·『창강고(滄江稿)』 등을 저술한 학자.
아버지는 개성부(開城府) 분감역(分監役) 김익복(金益福)이고,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희락(尹禧樂)의 딸이다.
소년시절부터 고문과 한시를 공부해서 1866년(고종 3) 17세의 나이로 성균초시(成均初試)에 합격했다. 20대 전후에 이건창(李建昌)과 교유를 가지면서 문명(文名)을 얻기 시작했다. 34세인 1883년(고종 20) 김윤식(金允植)의 추천으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첸[張騫]과 알게 되었다. 장첸은 그의 시문을 격찬했다.
1891년(고종 28)에 42세로 진사가 되고, 1894년(고종 31)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고종 32) 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을 지내고 이듬해 낙향했다. 1903(광무 7)년 다시 홍문관 찬집소(纂集所)에 보직되어 『문헌비고』속찬위원(續撰委員)으로 있으면서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5년(광무 9)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이 해 겨울에 사직했다.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5년(광무 9)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양쯔강[揚子江] 하류 난퉁[南通]에서 장첸의 협조로 출판소의 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창작활동과 병행해서 한문학에 대한 정리·평가와 역사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승만(李承晩) 등과 관계가 있어 중화민국정부에 우리나라 독립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썼다.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장핑린[章炳麟]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김택영은 한문학사의 종막을 장식하는 대가로서 시에서의 황현(黃玹)과 문(文)에서의 이건창과 병칭된다. 그는 고문가(古文家)로서 문장일도(文章一道)를 주장하였으며,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이것이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화려하여 신운(神韻)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 망명 이후에는 주로 우국적인 시작품을 많이 썼다. 특히, 망국의 한을 작품 속에 담아 내어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출 하였다. 「오호부(嗚呼賦)」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문은 명나라의 귀유광(歸有光)과 박지원(朴趾源)의 문장을 좋아하여 웅혼한 기상이 있다. 저서로는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한사경(韓史綮)』·『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 『창강고(滄江稿)』와 『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다.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匙箸(시저) : 수저. 숟가락과 젓가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
https://blog.naver.com/hbj621029/223001616076 [낙빈왕(駱賓王)-역수송별(易水送別)(역수에서 떠나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