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대필시대.
철원을 굽어보는 금학산 아래에서 32개월 군 생활을 했던 그 시절, 추억도 많았지만 그 중에 하나가 연애편지 대필이었다.
군대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서 다시 책 읽기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취미가 대개 독서나 여행이었다.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펜팔도 많이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군 입대 전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은둔형 외톨이로 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많은 편지를 나누었다. 라디오 전파를 통해 울려오는 ‘한밤의 음악편지’와 ‘별이 빛나던 밤에’ 프로그램에 음악편지를 투고했고, DJ의 그 낭랑한 음성을 통해 나오는 절절한 사연을 통해 누군가 나를 기억했고, 나 또한 누군가를 기억하며 편지를 나누었다. 익명의 사람들이지만 그들과 편지를 나누면서 혼자라는 외로움의 갈증을 해소했던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군대에 와서도 편지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포대 안에서 편지가 제일 많이 오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충청도 증평에서 군 생활을 하는 대길이에게선 이틀이 멀다고 편지가 왔고(주로 책에 관한 내용이었다)여기 저기에서 편지가 잇달아 오자 자연스레 내가 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이 부대 안에 파다하게 났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연애편지를 나에게 부탁했다. 관측장교에서부터 고참들, 심지어는 편지를 잘못 쓰는 부하에 이르기까지, 그 때부터 제대하기 바로 전까지 ‘대필료’도 받지 않는 연애편지를 얼마나 많이 써 주었던가? 말 그대로 연애편지 대필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았는데, 제일 문제가 직속 고참의 연애편지였다. 어찌나 그 고참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던지, 지금까지 그의 주소도 얼굴도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가 고향인 아무개 상병의 상대는 구로공단에 근무하는 아가씨였다.
편지라는 것이 그렇다. 동성이나 이성을 떠나서 나하고 상대방의 생각과 수준이 같으면 어떻게 쓰든 별문제가 없지만, 편지의 핵심을 잡아 쓰기가 어중간한 것이 편지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써서 보낸 뒤 바로 답장이 오면 괜찮았다. 하지만 바로 답장이 안 오게 되면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었다.
“이 새끼 네가 편지를 어떻게 쓴 거야? 왜 답장이 안 와?”
“아닌데요, 열심히 생각해서 썼는데요.”
“그럼 답장이 와야 할 것 아냐?”
관측장교였던 사람도 그랬다. 서울의 모 유명대학을 나온 중위였던 그 장교는 모든 것이 유능한데, 편지를 잘 못 썼던 모양이다. 상대방 여자는 글씨도 문체도 괜찮았다. 그 편지를 받은 후 보여주면 그 편지를 보고서 내 감정의 수위를 조절하고서 그 내용에 맞게 글을 써 주었다. 그리고 분명 내 상대가 아닌데도 그 여자의 답장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것은 무슨 심사였는지 모르겠다.
그 뒤 내가 편지를 대필해 준 그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시절의 그 연애편지 대필, 잘 써도 문제고 못 써도 문제이던 그 시절의 연애편지, 그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나의 글쓰기의 연장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얼굴도 모르고, 아니 내 이름으로도 보내지 못한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 중, 지금도 단 한 통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2025년 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