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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전 경희대 교수/ 촛불행동 상임대표
중앙일보에 실린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라는 김훈의 글은 교사들의 입장을 옹호하겠다고 쓴 칼럼으로 보인다. 그것도 ‘특별기고’라는 대접까지 받았다. 그런데 읽어 가다가 도중에 이게 뭐지? 하게 된다. 교사에 대한 갑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조국을 난데없이 끌어들이고, 논지의 타당성이 전혀 정돈되지 못한 횡설수설이었다.
이런 수준이라면 중앙일보가 고료를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쓰지 말아야 했다. 자신없는 글을 쓴 셈이고. 부끄러운 매명(賣名)이 되었다. 김훈이라는 작가가 지닌 무게에 의문부호를 별로 달지 않는 한국사회인지라 이 칼럼을 사소하게 넘기기는 어렵다.
정작 파탄이 난 것은 김훈이 아닌가?
‘지 새끼만 끼고 돌기’가 교육 붕괴의 주범이라고 몰아세운 그의 눈에는 자본과 권력이 짜놓은 노예교육의 감옥은 보이지 않았고, 걸핏하면 경찰과 검찰을 사병(私兵)으로 동원해 폭력으로 정치를 하는 자들의 비열함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고통스러운 조문 행렬이 보여주는 탈정치, 무정치의 풍경은 정치의 부재, 정치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 그토록 끓어 넘치는 정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그의 주장은 대체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그의 글은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 아니라 김훈이라는 지식인의 ‘파탄’을 드러냈다. 부제로 붙인 ‘공교육이 죽고 그가 죽었다’가 아니라, ‘김훈의 문학이 죽고 그가 죽었다’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은 이렇게 되기 전에 과연 온전하기는 했던가? 혹 그의 문학은 애초부터 이미 죽은 지 오래인데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김훈이 쓴 중앙일보 칼럼은 그 연장선의 논지는 아니었을까?
<칼의 노래>는 무엇을 노래했는가?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 저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둘 곳 없었다.” 왜적의 거침없는 공격을 막아야 하는 임무는 조정(朝廷)의 미망(迷妄)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그는 쓰라리게 고독했다. 공적(功績)을 치하하기는커녕 시기심으로 자신을 베려고 한 임금이 야속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민중을 몰살할 적을 막아낼 기운을 스스로 꺾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 결전의 시각이 닥쳐온다. 하지만 막아내야 할 바다는 너무도 넓었다. 어찌 할 것인가.
<칼의 노래>에서 김훈의 그린 이순신 장군의 고뇌였다. 짧은 문장이나 그 안에 있어야 할 풍경을 담아낸 명문(名文)으로 읽힌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이는 허망한 기교에 불과하고, 장엄한 운명 앞에 홀로 선 이순신의 내면을 도리어 황폐한 것으로 만든 셈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식이라면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만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잃게 된 이순신의 죽음이란 “나는 몸둘 곳 없었다”라며 어차피 승전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이 예감된 자가 준비하고 자초한 자결(自決)을 향한 숨죽인 비명처럼 들리고 만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독백이 김훈에게는 가능해진다.
“나는 각오되지 않은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죽음이 끝장나는 것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전쟁 중에 흉탄을 맞아 숨을 거둔 이의 최후는 현실의 모순 앞에서 어쩔 도리 없다고 비관한 자의 죽음이 되고 만다. 욕되다. 그건 세상을 온통 긴장시키는 칼의 노래가 아니라, 부러진 칼의 신음이다. 대장군은 군주제의 칼과 적의 칼 사이에서 몸둘 곳이 없다고 여긴 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죽을 자리는 분명했다. 사생관(死生觀)이 확고한 명장(名將)의 혼이 김훈의 손에서 염세주의자의 탄식이 되어버렸다. <칼의 노래>가 한성(漢城)의 지가(紙價)를 올렸을 때 불안 불안했던 이유다.
웅장한 역사를 사소하게 만드는 문재(文才)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진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칼의 노래> 첫 대목으로 명성이 높은 문장이다.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풍치를 그려낸 듯하다.
그런데 그 안에 역사가 실종되어 있다. 기이하지 않은가? 역사소설에 역사의식이 먼저 소멸하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그에게 너무 멀리 있는 섬이었나보다. 가령,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 첫줄 하나가 얼마나 놀라운 문장인가.
그 문재(文才)를 가지고 원래의 본문을 살려내면서 이렇게 이어냈다면 어땠을까? “섬이 버려졌다고 꽃마저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어나는 꽃들은 피어나면 누군가가 이내 짓밟고 또 짓밟고. 그래도 피어나기를 멈추지 않고 어느새 숲이 되었다. 숲이 된 꽃들은 결박된 사슬을 풀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 깊은 바다 속에서 매일 밤 울음을 삼킨 칼이 되고 있었다. 한산의 달빛은 점점 예리해져갔다”라든가. 이순신의 칼은 정치가 녹슬게 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모르게 날을 벼리고 있었지 않은가?
김훈의 문학은 웅장한 역사를 사소하게 만드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굴절된 진실을 잡으려고 그랬겠지만, 그러다가 정작 잡아야 할 혼을 놓치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해도 의외로 짧다. 다양한 인간과 폭넓은 관점을 그려내야 하는 작가로서는 심각한 난관(難關)이다. 그가 쓴 칼럼도 다르지 않다. 세밀하게 보겠다고 나섰지만, 문제의 뿌리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
‘정치적 당파성의 오염’이라니?
중앙일보 기고에서 김훈은 현장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행사를 진행하는 중견 교사는 참가자들에게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날 집회가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를 교사들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라니? 정치를 말하는 교사는 오염된 교사라는 말인가? 그가 말하는 정치적 당파성이란 뭔가? 그저 낙인 아닌가?
교사들의 집회에서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는 요구는 상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동의하기는 어렵다. 정치와 분리된 교육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정치 밖에 따로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이상 문제의 본질적인 해법은 없을 것이다. 권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고 오늘날 교육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기보다는 오염 운운으로 끌고 가고 있는 김훈의 논법은 누구를 지탄하고 누구를 방어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 다음의 논리는 더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이날 교사들이 절규하는 고통은 실체가 분명했다. 요약하자면, 교육을 망치는 가장 큰 해악은 ‘악성 민원’이고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의 관리자들은 이 사태의 뒷전으로 물러서 있다는 말이다. 이날 집회에서 교사들은 ‘학부모’라는 익명의 거대 집단을 직접 겨냥해서 발언하지 않았고, 다만 ‘악성 민원’이라고, 에둘러가는 언어를 사용했다. 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어쨌거나 학부모들이 교육의 과정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할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교사와 학부모는 서로 적대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며, 이 모든 사태의 핵심과 배후 또는 주범은 ‘학부모’라는 김훈의 대단히 난폭한 결론이다. 지금 교사들은 학부모와 전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다. 교사의 존엄, 권위를 실질적인 권한으로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그건 비껴가고 학부모를 이 모든 사태의 배후로 설정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내 새끼 지상주의’의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그에게는 학부모는 ‘익명의 집단’으로 취급되고 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정체는 숨기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이른바 ‘내 새끼 지상주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정순신 이동관은 빠지고 조국은 들어간‘내 새끼 지상주의’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상대를 괴롭히는 진상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가 펼치는 논법 속에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지점에 가면 특권을 가진 세력의 갑질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비판받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검찰출신 정순신의 경우도 그렇고 언론장악에 나선 이동관의 경우는 더더욱 김훈이 쓰는 문장의 칼로 도리질 당하지 않을까 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그들은 김훈의 명단에서 빠진다. 학폭과 그걸 무마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은 이 정밀한 문장을 쓰는 작가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말한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된 눈이 다름 아닌 여기에 있다.
“사실, 이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너도나도 그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해 가며 학원 좋고 학군 좋은 동네로 거듭 위장 전입을 해왔는데, 이 정도 범죄는 매우 경미한 사안이다.” 라고 하더니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라고 느닷없이 조국과 그의 가족을 호출하고 ‘권귀의 대표’로 낙인찍는다.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들을 멸문의 고통으로 몰아놓은 정치검찰의 악행은 이로써 내 새끼 지상주의를 단죄한 정의로운 공적이 된다. 더군다나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올랐다니? 그가 이 글을 쓴 정작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로써 드러나게 된다. 조국의 자녀들이 어떤 결단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지 그건 그가 알 바가 아닌 거다. 이건 글이 아니라 명백한 행패다. 그의 글은 그래서 교육의 현실에 대한 해법 모색의 노력이 부재중이다.
우리 함께 불러야 할 노래는 진실의 노래
그의 글은 이렇게 마친다.
“광화문 앞거리의 거대한 울음은 이 시대의 지층 맨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울음이다. 숨진 여교사는 지금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숨진 여교사가 이름 석 자와, 웃는 표정의 사진으로 돌아오기를 교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전국교사일동’은 8월 5일 토요일 광화문 앞거리에서 다시 모인다.”
이 시대의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이 울음을 들어야 할 자들은 정작 따로 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을 생각도, 의지도, 이유도 없다. 그들에게는 교육이란 권력을 대잇기 하는 통로이자, 나머지 국민들을 노예로 기르는 장치일 뿐이다. 이런 현실에 무지하거나 외면한 한 지식인의 헛발질이 참으로 허무한 결론으로 마감됐다. 그래서 그의 붓은 비가(悲歌)가 되었다. 또는 김훈의 지식인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애도(哀悼)가 되었다. 껍데기만 남은, 꽃을 피워내지 못하는 버려진 섬일까?
지식인의 몰락과 붕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장 처참하게 겪고 있는 현실이다. 어차피 그럴 현실이라면 이렇게 속히 정체를 드러내고 퇴장당하는 것이 낫다. 이게 어디 김훈에게만 한정된 문제이겠는가? 현실과 치열한 격투를 벌이지 않는 모든 지식인은 죽은 자들이다. 죽은 자들이 뱉은 말과 쏟아내는 글은 교묘하나 결국 궤변(詭辯)이다.
우리가 부를 노래는 시대와 정면승부를 서슴지 않을 때 나온다. 진실은 그렇게 자라난다. 그 안에는 궤변에는 결코 없는 뜨거운 혈관(血管)이 흐른다.
'칼의 노래' 지은 김훈, 그의 붓이 부르는 슬픈 노래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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