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居正(서거정)-북사모종(北寺暮鍾)(북사의 저녁 종소리)(산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華山撑立碧芙蓉(화산납립벽부용) 화산은 푸른 부용처럼 우뚝하게 솟았는데
寺在煙霞第幾重(사재연하제기중) 산사는 몇 겹의 연하 속에 묻혀 있는지
三丈半銜西嶺日(삼장반함서령일) 세 길에서 반쯤 감춰진 건 서산 위의 해요
一聲初動上方鐘(일성초동상방종) 한 소리 막 울리는 건 산사의 종소리네
驚回醉客人間夢(경회취객인간몽) 술취한 나그네 세상 꿈에서 놀라 깨어나니
羨殺高僧物外蹤(선쇄고승물외종) 세속 밖에 노니는 고승이 부럽기만 하구나
却勝寒山聽夜半(각승한산청야반) 한밤중 한산사 종소리 듣던 일보다 좋아라
搖雲度水送高舂(요운도수송고춘) 구름 흔들고 강물 건너 석양 보내는 모습이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사가집四佳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변구일님은 “우뚝한 봉우리 아래로 자옥한 안개가 화산의 허리를 휘감고 있다. 산 중턱에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던 산사는 자취를 감추었다. 해가 서쪽 산마루로 뉘엿뉘엿 내려오는 때, 어디선가 저녁의 정적을 깨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며 길게 퍼져 나가는 은은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세상에 부대끼며 살아오는 동안 켜켜이 쌓인 근심과 상념들이 사라지고 내 자신이 그 소리를 타고 하늘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저 짙은 안개 속 어딘가에 들어앉은 고승은 왠지 저 종소리를 닮아 있을 듯도 하다. 옛날 한산사에서도 한밤에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어떤 시인이 시를 지었다는데 그는 어떤 시를 지었을까?
이 시를 지은 서거정은 23년간 대제학을 지낸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각 문인館閣 文人인데 6500여 수이 시를 남겨 최고의 다작 시인으로 유명하다. 서거정은 남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 시는 그가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남산 아래 집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병풍처럼 두른 화산이 바라다보였을 것이다. 화산은 지금의 북한산으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세 개의 뿔처럼 솟은 산이라 하여 삼각산이라고도 부른다. 서거정은 삼각산의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는데 푸르게 덮여 있다 하여 ‘푸른 부용’이라 비유했다.
시에 나오는 한산사 종소리는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풍교楓橋라는 곳에 머물 때 들은 것이다.
달 지고 까마귀 울며 서리는 하늘 가득한데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강변 단풍 고깃배 불빛에 시름 겹게 조노라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저 멀리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뱃전에 들려오누나 夜半鍾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한밤중 싸늘한 밤하늘에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장계는 시름에 잠긴 채 떠도는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며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깊어졌을 것이다.
대학 시절 저녁 6시가 되면 뒷산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를 듣곤 했다. 하루는 종소리가 아름다워 눈으로 쫓기라도 하려는 듯 길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본 적도 있었다. 종소리가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울리는 듯했다. 이런저런 고민들로 종잡을 수 없던 내 마음이 이내 평온해지면서 잠시나마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서거정이 들은 종소리도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서거정[徐居正, 1420년(세종 2)~1488년(성종 19),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시호 문충(文忠)]-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좌참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서거정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撑(탱) : 버틸 탱, 1.버티다, 2.취하다(取--), 3.헤치다, 撐(본자), 𢴤
*羨(선) : 부러워할 선, 무덤길 연, 1. (부러워할 선), 2.부러워하다, 3.탐내다. 𠿢(속자), 埏(동자), 羡(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