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영광스러운 이 성사로
세상에 사는 저희가 천상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계시는 그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가도록
저희의 삶을 이끌어 주소서.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누군가가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명료하게 소개하는 성경 구절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루카 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이른바 ‘탕자의 귀향’ ‘돌아온 둘 때 아들의 비유’를 선택하겠습니다.
둘째 아들의 행실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 종종 있는가 봅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앞당겨 받는 그런...
둘째 아들은 재산을 분배 받자 마자 이게 웬떡이냐며, 멀러 멀리 떠나 갔습니다. 갑작스레 생긴 돈은 그 행방이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흥청망청 유흥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중의 돈이 사라지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친구들도 언제 그랬냐는듯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도움을 청해도 언제 봤냐는 얼굴입니다.
완전 상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마침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동물, 불경스러운 동물로 여겨지던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만나면 드릴 사과의 말씀을 되내이면서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저 멀리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죄인인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이 복음 구절의 주인공이요 주체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탕자의 귀향이라기보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 같은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탕자에만 시선을 지나치게 고정 시킵니다. 탕자가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동료 사제 한분이 이 복음 구절을 주제로 미사 강론을 하는 중이었는데, 탕자의 그릇된 행동에 필이 확 꽂혀 탕자 야단치느라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흘렀습니다.
탕자가 돌아와야 강론이 마무리 될텐데, 안 돌아오니 다들 마음을 졸이던 중, 한 형제가 외쳤습니다.
“신부님! 음식 다 식는데, 이제 그만 탕자 돌아오게 하시죠!”
우리도 많은 경우 그릇된 행동을 한 둘 때 아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의 죄목을 나열하는데 신경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비유의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며느리가 요즘 성당에 다니는데, 글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하대.”
이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들이 “아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험하게 죽었대?”라고 묻자, 할머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어. 글쎄 우리 며느리가 매일 십자가 밑에서 가슴을 치면서 ‘제 탓이오’를 외치는 거야. 이 모습을 보니까 며느리가 이 죽음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지? 신고해야 할까?”
잘 몰라서 하는 대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은 며느리의 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역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이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탓이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탓을 외치면서 울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에 쉽게 빠져드는지, 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 것을,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 말씀을 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의 모습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이 비유 말씀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작은아들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을 떠나서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큰아들 역시 방황 중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고 스스로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우리입니다. 외적으로도 방황하지만, 내적으로도 큰 방황의 삶을 삽니다. 아버지 집이 그렇게 좋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삶만 살려고 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황을 멈추고 이제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진정한 사과는 먹구름을 걷어내고, 거친 바다를 잠잠하게 하며, 새벽의 부드러운 빛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한 사람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첼 E.굿리치).
사진설명: 탕자의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