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우리 나무」「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의 저자 박상진 교수가 또 다른 나무 사랑을 보여주는 책, 「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 지난 10여 년 간 전국의 천연기념물 나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념 사진을 박고 또 나무와 대화를 나눈 내용을 담은 이 책을 통해,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며 나이테에 천 년의 역사와 천 가지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흔히,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한다. 사소한 것을 따지거나 지엽적인 것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라는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하지만 수 백에서 수 천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우리 옆에 있어 왔던 나무 한 그루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숲이 보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보일까?
나무박사 박상진 교수가 길라잡이로 나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의 찌꺼기를 탈탈 털어버리고 싶을 때 천연기념물 나무를 찾아가서, 백년대계(百年大計)가 아닌 천년대계(千年大計)로 살아온 지혜를 배우자는 것이다. 조금만 잘 되도 설쳐대는 요즘 사람들이나 반질반질 닳은 관광지에서 벗어나,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패배주의로 살아가지도 않는 천연기념물 나무를 보며 가슴속에 커다란 나무를 심자고 한다.
그래서 10년 전 시작된 '천연기념물 알현'을 함께 하자며, 박상진 교수는 우리의 손을 잡아끈다. 슬슬 못 이기는 채 따라가면, 수백 년 시공을 뛰어넘어 사람과 나무 사이에 쌓인 사연들이 의외로 재밌다. 젊은 청춘남녀의 애틋한 사랑, 모반을 꿈꾸는 남자들의 이야기까지….
"나무는 서둘러 자라지 않았다. 다른 나무의 그늘 밑에서도 인고의 세월을 버틸 수 있는 지혜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서다. 그렇다고 한평생을 남의 그늘 밑에서 살겠다는 패배주의자는 아니었다. 천년대계(千年大計)를 가슴 깊이 숨겨둔 것이다. 백년쯤 버티면 설쳐대던 다른 나무들이 늙어서 힘을 쓰지 못하는 그날이 온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본문 중)
사람에게 희로애락(喜怒哀樂), 나무에게는 희로애락(喜勞哀樂)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이 사람에게 있다면, 박상진 교수가 면회한 나무에는 기쁨과 함께 힘들게 제 역할을 해야하는 괴로움도 있고 또 슬픔과 즐거움이 있었다.
임금님이 열매를 즐겨먹었다(창덕궁 다래나무)거나 가마를 잘 지나가게 해주었다(속리산 정이품송)는 인연으로 처음부터 귀한 대접받은 나무가 있는 반면,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성 외벽에 심어짐으로써 나라를 구한 나무(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도 있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고기 많이 잡고 사고 없이 한 해를 보내게 해달라고, 이별한 연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원하던 옛 사람들의 간절함이 나무마다 배어 있다.
뿐만 아니다.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증언해주는 나무도 있다. 2004년 3월 12일은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곳이 헌법재판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대통령이 해임될지 말지 최고 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임무를 맡은 이곳에, 600년 전부터 권력의 소용돌이를 지켜본 나무가 있다. 바로, 백송이다.
1452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단종의 후견인이었던 김종서를 찾아가 죽임으로써 계유정난을 성공한 쿠데타로 만들었다. 피바다가 된 김종서의 집 부근(오늘날의 재동)에서 이 백송은 그 날의 참극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흘러 1863년 즈음. 안동김씨 세력에 기를 펴지 못하다 힘들게 고종을 등극시킨 대원군은 박규수의 집 사랑채에서 안동김씨를 몰아낼 거사를 도모한다.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이 될 것인지 실패한 반역자가 될 것인지 불안한 마음에, 누군가는 담배를 태웠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담배 냄새가 싫어 방문을 열었을지 모른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사랑채 문을 열면 보이던 백송의 껍질이 예전과 달리 더 하얀 것이 아닌가. 백송이 평소보다 더 희게 보이면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고 했는데…. 결국 반역을 꿈꾸던 이들은 용기백배했을 것이다.
박상진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나무의 생리상 껍질이 더 하얗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무가 자라면서, 오래된 껍질은 떨어져나가고 새로운 껍질로 보충되기 때문. 백송에 얽힌 쿠데타 사연에서, 박상진 교수가 내린 명쾌한 결론은 이렇다. '어떤 일에 있어서는 원인을 찾아나서는 과학적인 눈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렇다면 과연,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가결된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백송이 더 희게 변할까 아닐까? 만약 더 희게 변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좋은 징조가 될까?
최고의 영예 '천연기념물'로 등극하다
흔히 신문과 방송에서 '천연기념물 OO호'라는 소갯말은 많이 듣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박상진 교수는 「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 책에서, 천연기념물에 대한 상식을 넓혀준다. '천연기념물'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자연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남작이었다. 그는 1800년 베네수엘라의 한 마을을 지나다 엄청난 크기의 노거수(老巨樹)를 보고 장엄함에 감동 받아, '기념비적인 자연물'이란 뜻에서 '천연기념물(natural monument)' 이란 단어를 썼다. 때마침 산업혁명 이후 자연 파괴와 공해가 심해지던 상황이라, 자연 보호의 상징으로 천연기념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래서 나무에서 출발한 천연기념물 지정이 차츰 동물, 광물에까지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의 노거수는 1913년 일제에 의해 보호받기 시작했다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런데 오래된 나무라고 해서 무조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것은 아니다. 나무 나라에도 품계가 있는데, 맨 아래 단계가 마을에 있는 '마을나무'이고 행정 단위가 높아짐에 따라 '면나무', '군나무'로 올라간다. 이 세 단계의 나무들은 이름만 붙을 뿐 대우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는 첫 단계가 '보호수'. 산림청에서 주관하며 전국에 8750건이 있다. 이보다 높은 단계가 '시도기념물'과 '문화재자료'로, 이 나무들이 국가가 인정하는 '문화재'다. 여기서 이름이 더 알려지면 비로소 나무 나라 최고의 영광인 '천연기념물'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지정한 천연기념물은 330종이며 이 가운데 식물은 218종이다. 그렇다면 218종 모두가 그 같은 깐깐한 단계를 통과해 천연기념물이 된 것일까? 경우에 따라, 보호수에서 바로 천연기념물로 신분 상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현재 천연기념물의 지정, 해제, 보호 등의 권한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냐 싶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된 순간부터 경호원이 붙고 대접이 달라지듯 나무도 마찬가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 사람의 주민등록번호처럼 평생 변하지 않는 고유 번호를 받으며, 연간 수천 만원의 관리 예산이 생겨 돌보는 사람이 생긴다. 또 주위에 담장이 둘러지고 근사한 소개 간판이 생긴다. 천연기념물 나뭇가지 하나라도 함부로 꺾었다가는 '문화재보호법'의 적용을 받아 경을 치게 되니, 천연기념물의 위력이 대단하다 하겠다.
일상생활 속의 나무는? 나무 나라 상식 더하기
이 책에서 박상진 교수는 나무가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활약을 하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식목일을 4월 5일로 지정한 것에 어떤 유래가 있는지, 왜 훈제구이 할 때는 참나무를 쓰고 거문고는 오동나무로 만드는지, 목조주택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며 요즘 건강식품으로 인기 있는 헛개나무에 어떤 효능이 있는지, 집 안에서 기르기 좋은 나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볼 만한 수목원과 식물원은 어디인지 등등. 나무에 대해 이 정도 지식만이라도 가진다면, 천 년 세월을 함께 한 나무에 대한 예의는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예스24 제공]
지은이 소개
박상진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무의 세포 형태를 공부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저자는 일찍부터 나무문화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경향신문, 영남일보와 「과학동아」「좋은 생각」등 각종 매체에 나무와 문화재관련 글을 연재하여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2002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는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김영사, 2004), 「궁궐의 우리나무」(눌와, 2001), 「다시 보는 팔만대장경판 이야기」(운송신문사, 1999)를 비롯하여 전문서인 「목재조직과 식별」(향문사, 1987)등 여러 권이 있다.
목차
喜 … 사랑 때문에 기쁘고 소중한 인연 때문에 한없이 기쁘다
임금님과의 인연으로 얻은 영광
모두가 열광하는 새콤달콤한 초록 과일-창덕궁 다래나무
설렁탕 한 그릇으로 허기와 슬픔을 달래다-용두동 선농당 향나무
'똘배'들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 맛 좋은 청실배-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
자연이 준 선물 하나, 최고의 지붕 재료-울진 굴참나무
나무 나라 최고의 벼슬을 2세에게 물려주고파-속리산 정이품송
애틋한 사랑 나무
흔들리는 사랑 붙들어주는 '사랑의 묘약'-오류리 등나무
남북분단은 은행나무 부부마저 갈라놓았다-강화 서도면 은행나무
못다 한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굳게 믿으며…-영광 불갑면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아-지리산 천년송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
마의태자가 남긴 恨의 징표-용문사 은행나무
우리나라 최고령 나무, 그 비결은?-정선 두위봉 주목
나무 나라 최고 미인답게 그 자태가 아름답구나-무주 설천면 반송
특별함으로 살아남은 사연
황금비 내리는 축복받은 땅 그곳으로…-안면도 모감주나무군락
800년을 대이어 버텨온 묘지기 나무-부산진 배롱나무
세상의 썩은 정신들이여! 소태맛 좀 보련가-송사동 소태나무
뿌옇게 안개 낀 날에는 소나무와 데이트를…-상주 화서면 반송
勞 … 쉬고싶다. 세상의 근심 모두 짊어진 어깨가 무거워, 이젠 좀 쉬고싶다
나라 지킴이 나무
이 추운 날 갑곶에는 왜 가십니까?-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벚나무는?꽃놀이?를 위한 나무가 아니었다-화엄사 올벚나무
남해안의 왜구를 눈속임하던 고마운 나무-광양 유당공원 이팝나무
치료약에서 바둑판까지, 팔방미인이라네-병영면 비자나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다-남해 창선면 왕후박나무
절집의 지킴이 나무
막걸리를 먹고 사는 운문사의 애주가-운문사 처진소나무
800년 긴긴 세월을 쌍지팡이에 묻어두다 -송광사 곱향나무 쌍향수
선운사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고창 삼인리 동백나무 숲
당당하게 세금 내는 나무
자기 땅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나무-예천 감천면 석송령
哀 … 슬프다. 이슬 맺힌 나무 잎사귀에, 앙상한 나뭇가지에, 슬픔이 배어 있다
비극의 현장을 지켜본 나무
희고 고운 껍질로 좋은 일을 예감하다-서울 재동 백송
하늘이여! 억울하고 원통하다-영월 관음송
저승에서라도 이밥을 배불리 먹거라-진안 평지리 이팝나무
마지막 남은 희망을 이 나무에 걸었으나…-삼척 근덕면 음나무
두 손 모아 자식의 합격을 기원하다-삼척 도계읍 긴잎느티나무
선비들이 나무를 심은 까닭은
물 설고 낯선 땅에서 고향 생각하며…-예산 백송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함양 학사루 느티나무
세상에 널리 쓰이던 만병통치약-독락당 중국주엽나무
모든 근심 훌훌 털고 하늘로 날아오르다-백사 도립리 반룡송
낙도를 지켜온 섬 살이 나무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시 살아나-완도 예송리 감탕나무
내가 너를 그리워할 때, 너는 바다를 그리워하는구나-진도 관매리 후박나무
훼방꾼이 너무 많은 작은 섬마을에서-추도 후박나무
樂 … 욕심과 근심을 버려서 즐겁고 모든 만물을 사랑하니 즐겁다
멋쟁이 선비를 닮은 나무와 숲
동백의 황홀함이 무아지경으로 이끈다-백련사 동백나무 숲
사시사철 바람결에 끊이지 않는 저 향기로움-달성 측백수림
서당 나무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서울 문묘 은행나무
恨 많은 여인 인목대비의 혼이 깃들다-합천 묘사면 소나무
힘든 농사일의 쉼터가 된 나무
나체가 더 아름다운 겨울 멋쟁이-대구면 푸조나무
오늘은 날씨 맑음! 똑똑한 기상 캐스터-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김제평야의 수호천사 왕버들과 만나다-김제 봉남면 왕버들
500년 세월을 무색케 하는 젊은 나무-부산 구포동 팽나무
목민관의 백성 사랑 나무
이곳에 뱀은 얼씬도 하지 말라-함양 상림
한라산 신령님을 불러 내리던 영험한 곳-제주시 곰솔
커다란 꽃 뭉치를 정성껏 심고 가꾸었더니…-마량리 동백나무 숲
첫댓글 유용한 정보 고맙습니다.... 널리 알리겠습니다. ^^
ㅇ유익한 정보 가슴에 담아.... 감사함다
민재향님 반갑구요. 고맙습니다. 자주 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