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어머니의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 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며칠 후에 신체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 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면서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
위 내용은 부분일 뿐 원래의 내용은 매우 긴 내용의 -항소이유서- 였습니다...
양식있는 이나라의 젊은이가 국가에 의하여 파괴되고 신념이 파괴되며,,,이상이 파괴
되는 현장에서,,, 피를 토하며,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었던 그 -항소이유서-는 그 뒤
오랫동안,,,"법"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또는 전, 현직,,, 법관들에게 돌려볼 만한
유일한 -항소이유서-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바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입니다...
그 가 장관이었을 때,,, 작금의 논란이 되는 -기초노령연금법안-을 만들어 -복지국가-
로 가는 첫 걸음을 떼게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차 이 나라가 -서유럽-에 비교하여 부끄럽지 않을 만큼,,, 복지국가가 되기를 원 했던
애국국민이요,,국민을 사랑한 유일한 장관이었습니다...
-복자를 보편적 복지로 확대하려고 했던 사람,,,,국민 누구나가 모두 -행복-의 조건인
건강과 연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시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치" 란,,, 사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서람,,, 깊은 양심 속에만 담아두고 겉으로는
부드러운 사람이 해야만 맞는 것인데,,,
이 사람은,,,너무 너무 신념이 강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좌충우돌이었습니다...
최근의 -진영 장관-이 돌연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어 -사퇴-했듯이....
이 양반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에 반기를 들어 사퇴하였지요...
즉,,, 신념이 너무 강해서 였습니다....
이제 곧 새로 비뀌게 될 -기초노령연금법안- ,,,
현재 정권 아래서는 손해 보는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2025년 쯤에서는 오히려...반액으로 낮아지게됩니다....
즉, 우리는 괜찮겠으나,,,우리의 자녀 세대에서는 "거꾸로" 깍인다 는 겁니다...
참,,기가 막힌 -대가리- 를 쓴 겁니다...
-자기 죽을 때- 까진 욕 안먹겠다는 것이고,,,,
우리 아들세대,,우리의 딸의 세대에서는 복지가 오히려 물구나무서기를 한다는 -안-
입니다..
아주 기가막히지요,,,?
대가리 겁 나게 잘 쓴겁니다...
앞으로 10년 후,, 나라는 거꾸로 나가는 -복지국가-가 되고,,, 그 때는 -나 몰라라- 하면
되는 겁니다...
신념이 너무 강한 사람은,,, 정치판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는 이제 -야인-으로 돌아갔으나,,,국민을 사랑하고,,나라를 사랑하여,,그 가 행세
하던 중에 만들어 놓았던 것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첫댓글 너무 똑똑한 사람이죠 그래서 문제도 됐지만요...
많은 젊은 사람들이 고생했지요 그시절에는...
잘읽습니다.
좋은분들이 많이 나와서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국민이 행복해 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