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대학을 가지 않기로 결심을 한 뒤,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너희와 다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투의 편지였다.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다른 길을 가기 위한 준비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친구들은 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대학 병원은 나의 대학이었다.
그 곳에서 사람과 세상 공부를 했고, 소중한 친구를 만났다. 종합병원이라는 곳은 한국 사회의 최고의 엘리트집단, 그러니까 최상위계급부터 화장실 청소부와 일용직 노동자까지 온갖 계급, 계층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의사사회만 보더라도 서울대출신부터 지방대출신까지 다양했고 인턴들은 출신학교에 따라 명예와 돈이 따르는 과, 그러니까 성형외과에서부터 마취과로 서열이 정해졌다. 간호사는 더 복잡해서 4년제 서울의 간호대학 출신과 지방 4년제, 3년제, 간호조무사의 계층이 세분화 되어 있었다. 그 대학병원은 구로동과 대방동 사이에 있어 환자들도 의사를 따라 병원을 옮기는 VIP환자부터 구로, 가리봉동의 노동자, 신림, 봉천동의 빈민들까지 다양했다.
나의 첫 근무지는 병원과 학교 법인을 총괄하는 기획실의 말단사무직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통원 환자의 처방전을 각 과별로 분류하고 처방된 약의 통계를 내는 일 따위의 단순한 업무였다. 일을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선배들이나 상사들은 나를 엉뚱하고 별난 애로 인정해 주었다. 나름대로 귀여움을 받으며 막내 노릇을 한 지 반년 만에 후배가 들어왔다. 학교는 1년 늦게 졸업했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크고 맑은 눈만큼이나 순박하고 착했다. 그래서 입사한 날부터 사무실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만만한 존재가 되었다. 선배들은 고작 1-2년 차로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려고 했다. 그 아이는 날마다 선배들의 아침거리, 간식거리를 사다주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매점을 들락거렸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바보 같이 당하기만 하는 그 아이한테 화가 나고, 선배들한테도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그 아이 때문에 선배들과 자주 부딪쳤다. 그 아이는 내가 선배들이나 상사에게 너무 날을 세운다고 걱정했지만 나는 무슨 일이 됐든 옳지 않은 일을 그냥 두루뭉수리 넘어갈 수 없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나는 결국 원무과 수납으로 좌천이 되었다.
직장 생활 2년 차가 되자마자 다시 수납의 말단 직원이 된 나는 한 달에 반을 야간 근무를 해야 했다. 저녁 5시 30분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15시간을 수납 창구에서 보내는 일은 막 스무 살이 된 내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앞으로 어떤 일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아 일을 악물었다.
그 수납 창구는 내가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가 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인큐베이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미숙아를 퇴원시키던 가난한 부부를 만났고, 프레스에 오른 쪽 손가락 네 개를 잃은 열다섯 어린 소년을 만났다. 병원 앞에 있던 원풍모방의 노동쟁의를 접하게 되고, 인근의 청소년 직업훈련원을 통해 미감아들을 만났다. 또 병원이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약된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몸으로 부딪치며 세상의 부조리를 배웠고, 그 부조리를 이해하기 위해 일이 끝나면 병원 도서실에 처박혀 책을 읽었다. 도서실의 사서 언니는 나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내가 보고 싶은 책은 무엇이든 구해주었다. 병원 책꽂이 한 쪽은 내가 주문한 공동체 문화, 민중교육, 실천문학, 제3세계문학전집 따위로 채워졌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을 만나가고 있었지만 그 아이는 내가 힘든 수납 일을 하는 것이 자기 탓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내가 야간 근무를 하는 날은 퇴근도 못했다. 하루는 저녁 8시부터 환자들이 몰려왔다.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하필 에어컨이 나오질 않았다. 한참 일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아이가 냉커피를 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냉커피 한잔을 먹을 여유조차 없었다. 다시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그 아이는 어느새 새로 탄 냉커피를 들고 환자들 뒤에 서있었다. 그날 그 아이는 냉커피를 다섯 번이나 새로 타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 아이는 내가 야간근무를 할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만들어 가지고 와 함께 밤을 새주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집을 나간 뒤 아버지와 오빠들 밑에서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주지 않아 1년 동안 마을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중학교를 마쳤고, 중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집안일과 밭일에 시달리다 1년 만에 야반도주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3년 동안 사환 노릇을 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이 2년이나 늦었던 까닭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참 신기했다. 그 많은 상처들을 견디면서 어떻게 가시 하나 품지 않을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 아이는 1년 뒤 자청해서 수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아이는 내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와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퇴근길에 갑자기 맛있는 것을 먹자며 병원 옆 재래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 아이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재래시장 한 구석에 있는 간이 식당이었다. 그 아이가 정말 맛있다며 시킨 음식은 김치부침개와 어묵, 비빔국수였다. 그런데 주인아줌마는 어묵 2인분을 한 그릇에 숟가락 두 개를 넣어 내밀었다. 당혹스러웠다. 그때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과 숟가락을 섞지 못했다. 창피한 일이지만 내가 먹던 밥그릇에 다른 사람의 숟가락이 들어오는 거나, 남이 먹던 음식에 내 숟가락을 넣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지 않았던 이유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과 반찬을 섞어 먹기 싫어서였다. 그렇지만 그 아이 앞에서 그런 내 못된 속내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나눠먹었다. 그 아이와 다닌 덕분에 못된 버릇 한 가지를 고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나는 내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채워놓고 아무에게도 문을 열지 않았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법이 없었다.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은 화장실이나 매점에 갈 때마다 혼자 가지 못하고 누군가와 꼭 같이 가야 하는 여자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오히려 그런 나를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그런 내 속을 모르는 그 아이는 서슴없이 팔짱을 끼고, 내 손을 잡았다. 그 아이는 내가 마음의 빗장을 열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문을 열고 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 아이 덕분에 나는 타인에게 몸을 기대는 법을 배우고, 가시 돋친 아이들을 내 품에 품는 방법을 배웠다.
수납은 환자들이 가져온 처방전을 계산하거나 입원비를 계산하는 곳이다. 그때는 전산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온갖 처치, 수술재료비에 수 백 가지의 약값을 보험 가와 일반 가로 나눠 다 외우고 있어야 했다. 똑 같은 성분의 약이라도 제약회사에 따라 이름이나 약값이 다를 수 있어 약의 성분, 화학기호까지 외워야 실수가 없었다. 특히 응급환자나 사망환자의 경우는 다급한 상황에서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실수가 잦았다. 예를 들면 에피네플린과 에페드린 성분의 주사약은 가격이 몇 만원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되면 자기가 차액을 메우거나 아니면 퇴원한 환자를 찾아가 돈을 받아와야 했다.
그 아이는 실수가 잦은 편이었다. 그래서 야간 근무를 마친 다음 주말은 퇴원한 환자의 주소만 달랑 들고 돈을 받으러 다녀야했다. 그때마다 나는 복덕방 할아버지처럼 집을 찾는 안내자가 되어야 했다. 덕분에 주소 하나만으로 달동네에서 사람 찾는데 도사가 되었다. 동료들은 그렇게 달동네를 헤맬 때마다 자신들은 절대로 이렇게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는데 나는 달동네 골목을 헤매는 것이 좋았다. 그 골목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고, 그 골목을 가득 메운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내가 직장을 그만 두고 빈민운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 아이가 말했다.
"네가 언젠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어."
처음 만석동에 들어가 탁아소를 했다. 탁아소 아이 중에는 여섯 살이지만 지적능력은 한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가 있었다.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 못하던 그 아이는 점심밥을 먹으면서 자고, 낮잠을 자다가 똥오줌을 쌌다. 부지런히 씻기고 청소를 했지만 목욕탕이 없던 탓에 더 깨끗하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 1년은 정말 힘들었다. 탁아소를 하는 것 말고도 아르바이트로 신문배달을 해야 했고, 저녁때는 거의 날마다 시위가 열렸다. 쉼 없이 달리며 살다가 지치면 서울로 올라가 그 아이의 자취방에 몸을 뉘었다. 그 아이는 내가 갈 때마다 새 이불과 요를 내주었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었다. 친구의 자취방은 그 당시 나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탁아소를 한 지 일 년 만에 함께 만석동에 들어갔던 친구들이 떠났고, 탁아소도 정리를 하고 공부방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만난 그 아이가 나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이제 너한테 지린내가 안 나서 좋다."
어리둥절해하는 하는 내게 말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내 몸에서 지린내가 가신 적이 없다고. 그래서 내가 왔다 간 다음 날은 늘 이불빨래를 새로 해야 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이불빨래를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러. 너 중증 결벽증 환자잖여. 얼마나 힘들었겄어."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공동생활을 좋아하고, 성격이 원만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나는 그냥 웃어넘긴다. 지금도 그 아이는 말한다.
"나는 네가 결혼한 것도 신기하지만 공동체로 산다는 게 젤루 신기혀."
언젠가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네가 내 안의 가시를 부드러운 솜털로 만들어주었다고, 너를 만난 덕분에 사랑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고. 친구는 답장 대신 전화를 걸어 말했다.
"중미야, 난 글을 못 쓰니까 말로 할 게. 난 너 덕분에 사는 게 불편혀. 그냥 막 살믄 좋을텐디. 너만 생각하면 내가 잘 살고 있는지, 행복한 건지 생각하게 된단 말여. 아주 징혀."
첫댓글 왜이리 눈물이 날까... 참 마음이 따스해지는 글이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