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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歷史書] 연경[燕京]의 실체[實體]와 그 본[本] 모습
일제[日帝]의 잔재[殘在]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자신의 조국[祖國]인 한국[韓國]의 국민[國民]들에게,........ 또한 후세[後世]들에게, 우리의 역사[歷史]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치욕[恥辱]의 왜곡[歪曲]된 역사[歷史]를, 국사[國史]라고 가르쳐오고 있다.
오늘날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을 보면서, 한국[韓國]의 서울에 있는 경복궁[景福宮]을 비교해 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비록 북경성[北京城]의 옛 성벽은 일부만 남아 있으나, 그 자금성[紫禁城]의 웅장[雄壯]하고 화려함은 절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중국[中國]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을 명[明]과 청[淸]나라의 연경[燕京]으로 알고 있으나,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자들의 위선[僞善]과 거짓에 속고 있을 뿐이다.
중국[中國]의 이십오사[二十五史]와 우리의 역사[歷史] 사료[史料]들에 기록[記錄]된 연경[燕京]은, 지금의 북경[北京]이 아닌 전혀 다른, 대막[大漠] 지역을 기록[記錄]하고 있기 때문이다. 1900년대[千九百年代]를 전후[前後]하여 양이[洋夷]와 일제[日帝]의 아시아 침탈야욕[侵奪野慾]에, 청[淸]과 조선[朝鮮]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 시기[時期]]에 이들과 야합[野合]한 자들이, 조선[朝鮮]이 무너진 빈자리에 밀고 들어와 이 곳이 연경[燕京]이라는 거짓의 역사[歷史]를 만들고, 일제[日帝]와 양이[洋夷]들은 이를 고착[固着]시켜, 거짓과 왜곡[歪曲]의 역사[歷史]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사실[史實]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연경[燕京]을 찾기 위하여 부단[不斷]한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으로 들어나는 그 길을 따라서 발길을 옮기고 있으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이 판을 치는 역사[歷史]의 난세[亂世]속에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증거[證據]하여 고증[考證]하고, 연경[燕京]을 확고히 증명[證明]할 수 있는 사료[史料]와 물증을 찾는 일이 난망[難望] 하기만 하였다.
조선사[朝鮮史]의 서북[西北] 변경[邊境] 지역이며, 고구려[高句麗]의 주 무대였던 천리[千里]의 요동[遼東] 벌판,............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천년[千年]동안 이 요동[遼東]을 건너 왕명[王命]을 받든 사신[使臣]들이 연경[燕京] 을 수 없이 오고 갔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요동[遼東]과 연경[燕京]을 오고가면서, 요동[遼東]과 연경[燕京]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흑막[黑幕]과 안개 속에 가려진 그 본 모습은 좀처럼 들어나지 않았다.
왜곡[歪曲]된 사이비[似而非]의 역사[歷史] 사료[史料]들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현세[現世]에, 연경[燕京]의 북경성[北京城]과, 그 연경[燕京]의 황성[皇城] 모습이 어떠 했는지, 그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는 역사[歷史]의 사료[史料]들은 전무[全無]했다.
다행히 연행록[燕行錄]에 기록[記錄]된 연경[燕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1800년[千八百年] 전후[前後]에 그려진 동판화[銅版畵]가 있어 이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동판화[銅版畵]의 원본[原本]은, 영국[英國] 왕실 박물관[博物館]에 보관되어 있고, 책으로도 출판되어 있으며, 중국[中國]의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도 올라와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1800년[千八百年] 전후[前後]에 연경성[燕京城]의 일부를 그린 이 동판화[銅版畵]는, 연행록[燕行錄]의 중요[重要]한 일부 기록[記錄]들이 사실 이었음을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연경[燕京]과 요동[遼東]을 찾아 이를 확고[確固]히 증명[證明]하는, 하나의 작은, 역사[歷史] 사료[史料]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의 역사[歷史]인 일만년[一萬年] {통칭[統稱]} 조선사[朝鮮史]는, 철저히 왜곡[歪曲]되고 파괴[破壞]되었으며, 변조[變造]되고 조작[造作]되어 있다. 우리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의 수명[壽命]은, 1000년[千年]에서 오백년[五百年]을 오르 내리는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하여 소위 중국[中國]이라는 역사[歷史]의 왕조[王朝]들은, 길어야 수[數] 백년[百年]에서 수[數] 십년[十年]의 왕조[王朝]들이 태반이다.
수[數] 십년[十年]만에 망[亡]한 왕조[王朝]들을 어찌 우리 역사[歷史]의 황조[皇朝]들과 비교 할 수 있으랴!
오늘날의 중국[中國] 북경[北京]이 원[元]의 대도[大都]이며, 명[明]나라의 북경[北京]이며, 청[淸]나라의 북경[北京]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거짓의 역사[歷史]를 변조[變造]하며 조작[造作]하고 있는 자[者]들의 새빨간 거짓말이며, 자라나는 후세[後世]들을 속이는 역사[歷史]의 사기극[詐欺]이다.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우리의 일만년[一萬年] 역사[歷史]가 반도[半島]에서 전개되었으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 황성[皇城]이 지금의 한국[韓國] 서울에 있는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주장[主張]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中國]도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에 혈안[血眼]이 되어 있으나, 실제의 모습은 한국[韓國]의 실정[實情]과는 전혀 다르다.
중국[中國]의 지방정부[地方政府]들은, 그 뿌리를 잊지 않고, 수[數] 천년[千年] 역사[歷史]의 흐름과 줄기를 다시 새롭게 하고 있으며, 그 맥[脈]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半島]에 조선[朝鮮]의 황성[皇城]이 있었다면, 지금 중국[中國]의 북경[北京]이 연경[燕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북경[北京]이 연경[燕京]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歷史]의 사료[史料]로 분명[分明]히 들어나고 있다.
지금의 북경[北京]이 연경[燕京]이라고 하는 것은, 1900년대[千九百年代]를 전후[前後]하여, 양이[洋夷]와 일제[日帝]와 그에 부역[附逆]하는 자[者]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일시적인 거짓의 북경[北京]일 뿐이다.
지금의 북경[北京]은, 오랜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을 지닌 역사서[歷史書]의 연경[燕京]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는 곳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사[世界史]라는 것이 얼마나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담고 있을까 ?
태반[太半]은 거짓의 세계사[世界史]일 뿐이다. 동양[東洋]이나 서양[西洋]이나, 일부 명성[名聲]이 높다는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의 거짓과 위선[僞善]은, 그 도[道]를 넘어 그 끝을 모를 지경이다.
이러한 자[者]들이 권력[權力]과 결탁[結託]하여, 소위 명문대학[名門大學]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거짓의 역사[歷史]를 사실[史實]인양 가르치며, 학문[學文]의 정도[正道]를 흐리고, 후세[後世]들을 속이며, 세상[世上]을 우롱[愚弄]하고, 세상[世上]을 기만[欺瞞]하고 있다.
연행록[燕行錄]을 보면,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이수[里數]가 철저히 반도[半島]의 서울과, 지금 중국[中國]의 북경[北京]에 맞추어져 있다. 지금 세상[世上]에 나와 역사[歷史]의 고지도[古地圖]라고 행세 하는 것들도 모두 이것과 같은 지도[地圖] 뿐이다.
특히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지금의 한반도[韓半島]를 자세하게 그리고 있으며, 이것이 조선[朝鮮]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의 웅대[雄大]한 일만년[一萬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축소[縮小]시키고 없애버리려는 국제[國際]적인 음모[陰謀]일 뿐이며, 그 음모[陰謀]와 모략[謀略]이 광범위[廣範圍]하고 다방면적[多方面的]으로 치밀[緻密]하게 진행 되었음을 나타내는 일면[一面] 이기도하다.
우리의 일만년[一萬年] 대륙[大陸] 역사[歷史]의 사실[史實]과 본 모습을 찾으면서, 한국[韓國] 국사학계[國史學界]의 현실[現實]을 돌아보고 있으면, 분노[憤怒]와 통탄[痛嘆]이 부글부글 끊어 오를 뿐이다.
청[淸]나라 건륭조[乾隆朝]당시[當時]에, 영국[英國] 사절단[使節團]이 연경[燕京]인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1800년대[千八百年代]를 전후[前後]하여, 북경성[北京城]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1843년[千八百四十三年] 영국[英國]에서, 대청제국성시인상동판화[大清帝國城市印象銅板畫]로 출판되었고, 그 원본[原本]은 박물관[博物館]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이 동판화[銅板畫]에 나오는 청[淸]의 북경[北京]인 연경[燕京]의 모습은, 1900년대[千九百年代]를 전후[前後]하여 찍은, 지금 북경성[北京城]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의 북경성[北京城]은 1900년대[千九百年代] 초반, 민국[民国]시기에, 4차[四次]에 걸쳐 대개조[大改造]공정을 진행 했다. 이때에 지금 북경성[北京城]의 본 모습은 처참히 허물어져 없어져 버렸다.
이 대개조[大改造]공정 중에, 많은 성곽[城郭]이 헐리고, 많은 성문[城門]과 성루[城樓]와 전각[殿閣]들이 없어져 버렸다.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연경[燕京] 지역의 연혁[沿革]은,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의 유릉[幽陵], 도당[陶唐]의 유도[幽都], 우[虞]에서는 유주[幽州], 순[舜] 임금 때에는 유주[幽州]와 병주[幷州], 주[周]는 소공[召公]을 봉[封]하고 연[燕]이라고 하였다.
한[漢]은 연왕[燕王]을 봉[封]했고, 진[秦]나라에서는 상곡[上谷], 진[晉], 당[唐]의 범양[范陽], 요[遼] 태종[遼太宗]의 남경[南京] 석진부[析津府], 송[宋]은 연산부[燕山府], 금[金]의 연경[燕京], 성도[聖都], 중도[中都], 원[元]의 대도[大都]와 중도[中都], 명[明]의 북평부[北平府], 순천부[順天府], 연저[燕邸], 청[淸]나라도 북경[北京], 연경[燕京]이라고 하였다.
연경[燕京]인 북경[北京]은, 이렇게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지역에 있는 명[明]과 청[淸]의 북경성[北京城]은, 그들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대로, 중국[中國] 역사[歷史]의 얼굴과 같은 지역이다.
지금 중국[中國]의 북경[北京]이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연경[燕京]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 웅장[雄壯]하고 찬란한 황궁[皇宮]의 성곽[城郭]과 성루[城樓], 전각[殿閣]들을 허물어 없애 버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세계적[世界的]인 성곽[城郭]과 황궁[皇宮]인, 그 자랑스러운 연경[燕京]의 북경성[北京城]을 허물고 개조[改造]작업을 진행 하였을까 ? 그것은 그들 스스로 지금의 북경[北京]은, 연경[燕京]이 아니었음을 실토[實吐]하고 있는 것이다.
1900년대[千九百年代]를 전후[前後]하여 지금 북경성[北京城]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이곳이 명[明]과 청[淸]나라의 북경[北京]이 아니었음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청[淸]나라의 변발을 한 사람들도 섞여 있으나, 성[城] 주민의 대다수가, 흰 옷을 입은 조선[朝鮮]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 북경[北京]의 1900년대[千九百年代] 사진들 속에는 낙타의 무리들이 오고가는 사진들이 있는데, 이러한 사진을 찍어 유포 시키고 책을 만들어 배포한 자들은, 왜[倭]놈들과 양이[洋夷]들이라는 사실[事實]이다. 일제[日帝]는 그 후[後]에, 지금의 동북[東北] 삼성[三省]에 어용[御用]의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생생한 사실[史實]의 기록[記錄]과 역사[歷史] 사료[史料]들을 통하여, 일만년[一萬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자랑하며, 대륙[大陸]의 위대[偉大]하고 웅대[雄大]한 조선사[朝鮮史]가 반도[半島]로 이식되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 축소[縮小], 변조[變造]되는 과정의 일면[一面]이 확연[確然]히 들어나고 있다.
지금 중국[中國]도,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에 함몰[陷沒]되어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은, 대청제국성시인상동판화[大清帝國城市印象銅板畫]에 대하여 상상[想像]으로 그린 것이라는 궤변[詭辯]을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 오문[[午门]을 그린 그림들이, 마치 청[淸]나라 당시[當時]의 그림인양 행세를 하며 전시되어 있으며, 나돌고 있는데,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은, 한국[韓國]이나 중국[中國]이나 다를 바 없다.
이 대청제국성시인상동판화[大清帝國城市印象銅板畫]는, 당시[當時] 영국[英國] 사절단[使節團]의 기록[記錄]대로, 1800년대[千八百年代] 전후[前後]에 영국[英國] 사절단[使節團]이 청[淸]나라의 북경성[北京城]을 방문하여, 북경성[北京城]을 직접보고 그려서, 영국[英國]으로 돌아가 1843년[千八百四十三年]에 동판화[銅版畵]로 출판된 것이다.
이 동판화[銅版畵]에 나오는 그림들을 보면, 연행록[燕行錄]에 나오는 요동[遼東]의 천리대야[千里大野], 대막[大漠]과 사막[沙漠]지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연경[燕京]까지는 모두 모래로 된 반사막[半沙漠]지대라는 기록[記錄]들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었음이 들어나고 있다.
그리고, 명[明]나라가 망[亡]할 때, 청[淸]나라 군사들이 명[明]나라의 연경[燕京]에 입성[入城]하기에 앞서 그 잔당들을 공격하는 북경성[北京城] 지역을 그린 그림들이 있다. 그 그림들을 보면, 반사막지대[半沙漠地帶]를 선명[鮮明]히 그리고 있다.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대로 연경[燕京]은, 반사막지대[半沙漠地帶]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연행록[燕行錄]들은, 연행록[燕行錄]의 중요[重要]한 기록[記錄]들의 원문[原文]이,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었으며, 변조[變造]되고, 개찬[改竄], 가필[加筆], 개작[改作]되었음이 분명[分明]히 들어나고 있다.
우리 앞에 지금 놓여져 있는 역사서[歷史書]의 대부분이, 조선사[朝鮮史]를 폄하[貶下]하고 말살[抹殺] 시키려는 자[者]들의 수난[受難]을 격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矛盾]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1900년대[千九百年代]의 모습을 찍은 지금 북경성[北京城]의 일부 사진들은, 인터넷 사이트에 많이 게재[揭載]되어 있으며, 박물관[博物館]에도 소장[所藏]되어 있다.
1800년대[千八百年代]를 전후[前後]하여, 영국[英國]의 사절단[使節團] 일행이 그린 청[淸]나라 연경[燕京]의 북경성[北京城]의 모습과, 지금 북경성[北京城]의 모습은 확연[確然]히 다르다.
그 것은, 연경[燕京]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지금의 북경[北京] 지역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는 다른 곳이라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대청제국성시인상동판화[大清帝國城市印象銅板畫] 북경성[北京城]
청조[淸朝] 황궁[皇宮]의 오문[午門] 대열병[大閱兵]
청조[淸朝] 황궁[皇宮]의 오문[午門] 대열병[大閱兵]
청[淸]나라 연경[燕京]인 북경성[北京城] 서직문외[西直門外]
청[淸]나라 연경[燕京]인 북경성[北京城] 서직문외[西直門外]
연경[燕京]인 북경[北京]에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수 많은 조정[朝廷]의 대신[大臣]들과 사신[使臣]들이 수[數] 백년[百年]을 오고갔으며, 당시[當時]의 연경[燕京]에 대한 산천[山川]과 지리[地理], 자연환경[自然環境], 강[江]과 하[河]의 근원[根源]과 흐름, 나라의 형세[形勢], 역사[歷史]의 연혁[沿革]과 역사[歷史]의 인물[人物], 인종[人種]과 종족[種族], 생활 풍속[風俗], 혼례[婚禮]와 장례[葬禮]의 풍속[風俗], 묘지[墓地]의 형태[形態]와 실태[實態], 그 지역의 기후[氣候] 등 다방면[多方面]에 걸친 수 많은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인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은, 조선사[朝鮮史]를 깍아 내리고 비하[卑下]하며,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거짓 역사[歷史]를 심는 행위[行爲]를 멈추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천인공로[天人共怒]의 행태가 그 도[道]를 넘어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歷史]를, 깊은 진흙 수렁의 나락[那落]으로 한없이 떨어트리고 있다.
이러한 자[者]들의 궤변[詭辯]을 정리해 보면, 우리의 역사[歷史]는 반도[半島]에서 전개 되었으며, 지금의 중국[中國] 대륙[大陸]에, 역대[歷代]의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이 있었고, 우리는 항상 침략[侵略]만을 당하고, 굴욕[屈辱]적인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소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제후[諸侯] 노릇을 하며, 핍박[逼迫]을 받아 왔다.
우리는 항상 비참[悲慘]하고 가난하였으며 못 살았고, 조선[朝鮮]이 망[亡]한 후, 근대화[近代化]가 되면서 이만큼 살게 되었다. 이러한 것이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국민[國民]들의 정신[精神]속에 심어온 역사교육[歷史敎育]의 단면[斷面]이다.
왜[倭]놈들이 양이[洋夷]들에게 선전하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는 중국[中國]의 속국[屬國]으로 지내 왔으며, 중국[中國]의 신하[臣下]노릇이나 하고, 나라를 지킬 능력과 힘이 없는 나라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합[倂合]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한국[韓國]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이러한 왜[倭]놈들의 악의[惡意]적인 거짓의 모략[謀略]과 그 다름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 국사[國史]라는 문자[文字]를 사용하는 것이 참으로 기이[奇異]하다.
무릇 역사[歷史]라는 것은, 인간[人間]의 행위[行爲]를 객관적[客觀的]인 입장에서 사실[史實]대로 기록[記錄]하는 것이다. 역사[歷史]를 권력[權力]과 사욕[私慾]을 위해서 이용하고 기휘[忌諱] 한다면, 그것은 이미 역사[歷史]가 아니다.
수[數] 천년[千年]의 역사[歷史]속에서,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속인 자들이, 후세[後世]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자들은 하나도 없고, 오욕[汚辱]만이 역사[歷史]에 가득히 기록[記錄]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역사[歷史]의 진리[眞理]다.
그럼 여기서,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주장[主張]하는 자[者]들의 궤변[詭辯]이 맞는 것인지, 조선[朝鮮]이 과연 그 들의 주장[主張]대로 그러한 나라였는지, 조선[朝鮮]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홍제전서[弘齋全書], 책문[策問], 지세초계문신친시[墬勢 抄啓文臣親試] 기유[己酉]의 일부 기록[記錄]을 살펴보도록 한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책문[策問]
지세초계문신친시[墬勢 抄啓文臣親試] 기유[己酉]
史志所載。足見歷代因革之迹。而春秋以降。秦置四十郡縣。漢置十三州部。唐有十五道。宋有十八路。元立十一省。明立十三司 [중략]
사지[史志]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역대[歷代]의 연혁을 볼 수 있다. 춘추시대[春秋時代]로부터 내려오면서 진[秦] 나라는 40군현[郡縣]을 두었고, 한[漢] 나라는 13주부[州部]를 두었으며, 당[唐] 나라는 15도[道]를 두었고, 송[宋] 나라는 18로[路]를 두었으며, 원[元] 나라는 11성[省]을 세웠고, 명[明] 나라는 13사[司]를 세웠다. [중략]
其裂土之制。何者爲便。而拓地之廣。何代爲盛歟。洛陽。受敵於四面。金陵。僻在於一隅。汴京濱河。常有衝決之患。燕都近胡。每多馮陵之慮。地利如此。猶得以控制天下者。何歟 [중략]
구역을 가른 제도는 어느 것이 편리하며, 지역을 개척하여 넓힌 일은 어느 시대에 가장 성하였느냐? 낙양[洛陽]은 사면으로 적을 받고, 금릉[金陵]은 편벽되어 한쪽에 위치하여 있으며, 변경[汴京]은 하수에 가까워서 항상 둑이 무너지는 걱정이 있었고 연도[燕都]는 호[胡] 가까워 매번 침입을 당하는 염려가 많았다. 지형이 이러하여도 천하[天下]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이냐? [중략]
以東方言之。一隅連陸。三面阻海。朝鮮之號。遠自檀君。肅愼之命。載在周乘 [중략]
동방[東方]으로 말한다면 한쪽은 대륙과 연접되어 있고 삼면은 바다로 막혀 있다. 조선[朝鮮]이라는 호칭은 멀리 단군[檀君] 시대로부터 있었고 숙신[肅愼]이라는 이름은 주[周] 나라 역사에 실려 있다. [중략]
麗置四京十道。眞興之巡北境。功著闢土。景德之改邑名。意出變夷。亦可指其處而論其事歟。渤海舊疆。半入契丹。則麗祖統一。能無餘恨。耽羅孤島。初有星主。則九韓居四。得不已僭歟 [중략]
고려[高麗]는 사경[四京]과 십도[十道]를 두었다. 진흥왕[眞興王]이 북방 국경 지대를 순행함은 국토를 개척한 공이 현저하고, 경덕왕[敬德王]이 고을 이름을 고친 것은 만이[蠻夷]의 풍속을 변경하려는 의도였다. 그곳을 지적하고 그 일을 논하라. 발해[渤海]의 옛 강토는 반이나 거란[契丹]으로 들어갔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통일[統一]은 여한이 없었겠으며, 외딴 섬인 탐라[眈羅]는 당초에는 성주[星主]가 있었는데, 아홉 개의 한[韓] 나라 중 네 번째로 친다는 것은 참람[僭濫]한 것이 아니냐? [중략]
惟我國家受天休命。全有大東。分八道而州郡星羅。環四圉而鎭堡棊錯。經緯過數千里。休養且累百年。沃野膏壤。桑麻自足。深林大澤。貨財日興 [중략]
우리나라는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받고 동방[東方] 전체를 소유하여, 팔도[八道]로 나누니 주[州]와 군[郡]이 별처럼 늘어서고, 사면[四面]을 에워싸 진[鎭]과 보[堡]가 바둑알처럼 깔렸다. 경도와 위도가 수천 리를 넘고 승평을 누린 지 수백 년이 되었다. 비옥한 들녘과 기름진 토양은 상마[桑麻]가 절로 넉넉하고, 깊은 숲과 큰 강에는 재물과 보화가 연일 생산된다. [중략]
南有箘簵漆絲之饒。北有蔘茸皮革之產。山居千章之材。水居千石之魚。而民物之殷庶。風氣之文明。庶乎其甲于外服矣 [중략]
남[南]으로는 균로[箘簵]와 칠사[漆絲]가 풍부하고 북[北]으로는 산삼ㆍ녹용ㆍ피혁이 산출된다. 산에는 아름드리의 재목이 있고 물에는 수많은 고기가 있다. 백성[百姓]과 물산[物産]의 풍요로움과 풍속[風俗]과 기질의 문명[文明]함은 거의 중국[中國] 외부의 국가 중 제일이다. [중략]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이러한 것이 바로 조선[朝鮮] 모습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라는 것은,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가 아니다. 치욕[恥辱]의 일제[日帝] 잔재[殘在]의 산물일 뿐이다.
조선사[朝鮮史]와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면면[面面]을 살펴보면, 주[周]와 한[漢]을 제외하고, 모두 이적[夷狄]과 혼합[混合]된 나라 일 뿐이다. 고대[古代]에 성인[聖人]과 현군[賢君], 현인[賢人]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중국[中國]이라고 한다. 라고 한 말은 정말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나라들 중에, 단명[短命]의 나라가 많은 것도, 그럴만한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 없이 모두 황제[皇帝]를 잠칭[僭稱] 했다.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 중에, 단명[短命]의 나라가 많은 것은, 나라가 이적[夷狄]들과 연접[連接]해 있으면서 전란[戰亂]이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적[夷狄]이 하[夏]에 들어와 중화[中華]를 어지럽게 하고, 황제[皇帝]로 군림한 것이 태반인데, 이것이 바로 중국사[中國史]라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의 후예[後裔]들이 그 중심[中心]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것은 역사서[歷史書]가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를 포함하여 지금의 중국대륙[中國大陸]은, 조선사[朝鮮史]의 일만년[一萬年] 만고[萬古]의 터전이다.
무엇이 중국[中國]이고, 무엇이 우리의 역사[歷史]인가 ?
왜, 무엇 때문에, 조선[朝鮮]의 사신[使臣]이,......... 한[漢]나라 사신 추풍이 부는 변방에 와 노래하네 漢節秋風出塞歌 라고 말하고 있을까 ?
송자대전[宋子大全]
차후운옹환장암칠십일운[次後雲翁煥章菴七十一韻]
청[淸] 나라 서울에 가보니 頃嘗入燕都
개와 염소 속에 원숭이도 섞였는지 犬羊雜猴狖
거리마다 비린내 나고 腥膻九衢上
황제의 글씨로 창문을 부쳤는데 寶章糊戶牖
다행히도 뜻 있는 사람 만나서 幸遇悲歌人
얼굴을 대하자 마음도 맞았네 眉宇得心趣
하는 말이, 이는 선황제의 글씨인데 謂此先皇筆
이렇게 되들에게 짓밟히고 있다오 曾被戎馬蹂
그대가 이것을 가지고 가오 爾須懷此去
그대 나라는 참으로 좋은 곳이오 爾邦孔不陋 [중략]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부록[附錄]
묘갈명[墓碣銘]
원임 직각[原任直閣] 윤행임[尹行恁] 지음.
내가 어렸을 때 용문[龍門]에 사는 원자재[元子才]를 뵈니, 야복[野服] 차림에 기걸하고 수염과 눈썹이 뚜렷하며 성품이 날카로운 분으로서 남을 좋다고 허여하는 일이 적었다. 그러나 이무관[李懋官]에 대해서는 청수하고 문장을 좋아하여 이름이 당세[當世]에 높다고 말하였다. [중략]
무관은 공족[公族]의 후예[後裔]로서 무림군[茂林君]을 시조[始祖]로 삼았으며, 그 후 현인이 많았다. 조[祖]는 필익[必益]인데 강계부 도호[江界府都護]이고, 부[父] 성호[聖浩]는 통덕랑[通德郞]이며, 비[妣]는 반남 박씨[潘南朴氏]로서 신유년[辛酉年][1741, 영조 17]에 무관을 낳았다. [중략]
일찍이 연도[燕都]에 들어가 오랑캐가 되어버린 중주[中州]를 보자 술을 마시고 비감한 노래를 부르며 일사[逸史]와 비승[祕乘]을 수집해 가지고 돌아와 명말[明末]의 유민전[遺民傳]을 지었으니, 이것이 바로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이다. [중략]
나이 53에 졸[卒]하여 한수[漢水] 남쪽 판교촌[板橋村]에 장사하였다. 충장공[忠莊公] 백시구[白時耈]의 손녀가 무관의 숙인[淑人]이 되어 3남매를 낳았으니, 아들은 광규[光葵]요 두 딸은 유선[柳烍]과 김사황[金思黃]에게 시집갔다. [중략]
무관이 처음 규장사성운[奎章四聲韻]을 교열하였는데, 죽은 지 3년 만에 비로소 그 책을 간행하면서 상[上]이 하교하기를, 운서[韻書]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은 이덕무[李德懋]의 노력이라, 그 재식[才識]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으니 그 아들을 검서[檢書]로 삼으라. 하고, 곧 돈 5백 냥을 하사하여 그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였으니, 덕무[德懋]는 곧 무관의 이름이요, 광규가 드디어 아버지의 관직을 계승한 것이다. [중략]
지금 중국[中國]의 북경[北京]에 있는 북경성[北京城]은, 대부분 없어져 버리고, 자금성[紫禁城]만이 남아 거짓 연경[燕京]의 행세를 하고 있다.
이 북경성[北京城]은, 1900년대[千九百年代] 전후[前後]까지 그 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면, 그 방대[尨大]하고 웅장[雄壯]함에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압도[壓倒]되지 않을 수 없다.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자금쇄술[紫禁瑣述]
燕京不過北方一隅之地。山川則醫閭,渤海亦是支流餘脈而已。人物則雖有堯,舜,禹,湯之聖。皐,夔,稷,契之佐。一着黑毳帽馬蹄袖。則餘無足觀矣 [중략]
연경[燕京]은 북방[北方]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고, 산천[山川]은 의무려산[醫巫閭山]과 발해[渤海]로서 역시 지류[支流]와 여맥[餘脈]일 뿐이며, 인물로 말하면 요[堯], 순[舜], 우[禹], 탕[湯]같은 성군[聖君]과 고[皐], 기[蘷], 직[稷], 설[契] 같은 현신[賢臣]이 있었지만 한번 흑취모[黑毳帽]와 마제수[馬蹄袖]를 착용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더 볼 것이 없다. [중략]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仞築甓垣而周圍之。曰城堞也。高起亭閣殿宇而雕彩之。曰宮闕。尊者卑者。難辨等威。幼者長者。莫分冠童。飮食必以豬油爲味。臭惡不堪嚥。衣服必以氈裘反着。貌惡不堪視 [중략]
황막[荒邈]한 사막[沙漠], 흰 자갈뿐인 천리[千里] 광야[曠野]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 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 전우[殿宇]를 세워 조각[彫刻]과 단청[丹靑]을 하여 궁궐[宮闕]이라하며, 관리[官吏]는 높은 자인지 낮은 자인지 등위[等位]를 분변하기 어렵고, 민간의 아이와 어른은 관동[冠童]을 분별할 수 없으며, 음식은 반드시 돼지 기름으로 조미를 하므로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 없고 의복[衣服]은 반드시 털 갖옷으로 입은 모양이 흉해서 볼 수가 없네. [중략]
婚喪之用樂。先王之禮。掃地無餘。語音之侏。蠻夷之俗。根於天性。至若金鈴,葫蘆之屬。俱是隨手破碎無用之物。不過欺騙小兒。奪取小泉之計。古之唐虞商周之大國亦如是。而猶以未見爲恨耶。
혼례[婚禮]와 상례[喪禮]에 풍악[風樂]을 사용하니 선왕[先王]의 예[禮]는 쓸어 버린 듯 남은 것이 없고, 알아들기 어려운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오랑캐 풍속[風俗]이 천성[天性]에 박혔기 때문이네.
그리고 금령[金鈴], 호로[葫蘆] 등은 모두 손이 스치기만 하여도 깨어지고 부서지는 쓸모없는 물건으로서, 어린아이들을 속여 돈을 빼앗으려는 계책[計策]에 지나지 않으니, 저 옛날의 당[唐], 우[虞], 상[商], 주[周]의 큰 나라에서도 역시 이러했다면 그래도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겠는가 ? 하였다. [중략]
영국[英國]에서 출판된 대청제국성시인상동판화[大清帝國城市印象銅板畫] 그림들을 보면,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의 자금쇄술[紫禁瑣述]에서, 연경[燕京]을 보고 난 뒤에, 그 소회[所懷]를 말하는 내용[內容]에 대하여, 같은 공감[共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황성[皇城]들은 지리지[地理志]에 실려 있는 데로, 그 규모의 크기와, 견고[堅固]하고 웅장[雄壯]함에 있어서 가히 세계[世界] 최대[最大]의 궁궐[宮闕]이었다.
지금 중국[中國]의 북경[北京]에 있는 북경성[北京城]의 성곽[城郭]은 거의 없어지고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성곽[城郭]이 있던 성[城]터는 뚜렷이 남아 있다. 그 성곽[城郭]이 서 있던 길이를 측정[測定]해 보면,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고려[高麗] 황성[皇城]의 크기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치[一致]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一致]라고 할 수 있을까 ?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는 이러한 황성[皇城]들이 자리를 잡고, 1000년[千年]의 역사[歷史]를 이어 왔다. 이런 곳에 살고 있는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의 저자[著者]가, 명[明]과 청[淸]의 연경[燕京]에 가서, 동판화[銅板畫]에 그려진 그러한 황성[皇城]을 보았으니,............ 황막[荒邈]한 사막[沙漠], 흰 자갈뿐인 천리[千里] 광야[曠野]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 놓고 성첩[城堞]이라 하고,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仞築甓垣而周圍之。曰城堞也
높다랗게 정각[亭閣], 전우[殿宇]를 세워 조각[彫刻]과 단청[丹靑]을 하여 궁궐[宮闕]이라 하며,高起亭閣殿宇而雕彩之。曰宮闕,.............. 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수 밖에 더 있겠는가 ?
연행기[燕行紀]의 기열하지원명원[起熱河至圓明園]에서는,............... 수레는 더디고 대막엔 가을인데 車馬逶遲大漠秋,.......... 백단산 남으로 보이는 게 신주라네 白檀南望是神州,........... 연경 운수는 하늘 끝에 닿았고 燕雲樹色連天盡,........... 선대하 물소리는 관새[關塞]로 사라져 가네 宣大河聲入塞流, 라고, 연경[燕京]에 대하여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연경[燕京]은 대막지대[大漠地帶]에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의 중국[中國] 북경[北京]이 대막지대[大漠地帶]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인가 ?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자기 자신의 조상[祖上]인 선대[先代]의 위업[偉業]을 짓밟고,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며, 거짓의 역사[歷史]로 국민[國民]의 기상[氣像]과 정신[精神]을 내면[內面]으로부터 무너트리고, 조상[祖上]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역사[歷史]의 맥[脈]과 혼[魂]을 끊어버리며, 국민[國民]들을 바보로 만드는 자[者]들이, 역사학자[歷史學者]이며, 그러한 자[者]들이 나라의 국사[國史]를 논[論]한단 말인가 ?
목은집[牧隱集]에서는, 요동[遼東]의 벌판에 대하여,......... 들이 넓으니 백성[百姓]들은 나무에서 살고, 하늘이 나직하니 말은 구름 속에 들어가네.[野闊民居樹 天低馬入雲]라고 하였으니, 그 요동[遼東] 벌판을 형용한 것이 더 이상 여한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는 바로 요동[遼東] 벌판을 형용한 열 자[字]의 전신[傳神]이다. 其形容遼野。無復遺恨。穡曰。此是遼野十字傳神 라고,
그리고 또,....... 갑자기 끝이 없이 넓어져서 忽然闊無涯,........ 해와 달이 들에서 나오누나 日月出于野,........ 누가 알리요 백모 쓴 나그네가 誰知白帽客,....... 이미 요동[遼東] 백성이 되어 있는 줄을 已作遼東民,........ 북으로는 혼동강을 바라보고 北瞻混同江,........ 남[南]으로는 의무려산을 마주했네 南對醫無閭,........ 이렇게 삭막한 오랑캐 소굴에 索莫犬羊窟,......... 군자가 살 줄을 어찌 알았으랴 那知君子居 라고 말하고 있다.
요동[遼東]의 천리대야[千里大野]는, 의려[無閭]산의 북[北]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담헌서[湛軒書]의 연기[燕記], 연로기략[沿路記略]에서는,...... 신요동[新遼東]을 동경[東京]이라 하고, 청 세조[淸世祖]가 쌓은 것인데, 이곳으로부터 심양[瀋陽]으로 도읍[都邑]을 옮겨 갔다고 했다.新遼東稱東京。淸世祖所築。自此移都瀋陽云
요동[遼東]에서 서[西]쪽으로 3백 리를 가면 대륙[大陸]이 바다처럼 가없이 넓어 해와 달이 들에서 떴다가 들에서 진다. 自遼東西行三百里。大陸漫漫無涯涘。日月出於野而沒於野,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월사집[月沙集]의 경신조천록 하[庚申朝天錄下], 산해관 기사[山海關記事]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조는 연경에 도읍을 열었으니 成祖闢燕都,....... 그 규모는 주나라 한나라보다 크고 規模邁周漢,....... 여기는 옛날 황폐한 변방이라 玆地昔荒屯,........ 아득히 중국과 오랑캐 경계 이뤘다. 逖矣華夷判,......... 지금은 황제의 도성과 가까운 곳 卽今近皇圻,......... 인후가 되고 또 울타리가 되었어라. 咽喉且屛翰,......... 요동 땅이 마침 다사다난한 터에 遼路屬多事,........ 게다가 저 오랑캐 반란 일으켰으니 況値小酋叛,......... 공이 오시매 설산이 무거워졌나니 公來雪山重
연경[燕京]과 산해관[山海關]을 말하는데, 설산[雪山]을 거론하고 있다. 요동[遼東]과 산해관[山海關], 그리고 연경[燕京]은 설산[雪山]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 있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의 경사문[經史門], 산융[山戎]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설원[說苑]에는, “길이 고죽[孤竹]을 경유하다.”라는 말이 있으니 아마도 필시 유, 병[幽幷]의 지경에 있어, 선비[鮮卑], 글안[契丹]의 유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리라.
선비[鮮卑]와 거란[契丹]의 주요 거주 지역은,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서북[西北] 지역과 카자흐스탄 일대이다. 지금도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선조[先祖]들을 잊지 않고 조상[祖上]들을 기리는 기념물[記念物]을 주요 지역에 속속 세우고 있으며, 자손[子孫]들에게 이러한 역사[歷史]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산융[山戎]편에서, 후세[後世]에 요ㆍ금[遼金]의 화에 이르러는 다 유, 병[幽幷]의 경계로부터 일어나서 마침내 화하[華夏]를 어지럽혔으니, “머리를 더풀 거리고 옷섶을 왼편으로 단다.”는 말이 이에 이르러 과연 징험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말하는,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는, 오늘날의 천산[天山]과 알타이산맥사이에 펼쳐진 광활[廣闊]한 지역[地域]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지역이 선비[鮮卑]의 고토[故土]이며, 자신들이 그 후손[後孫]들이라고 자랑스럽게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하고 있다.
선비[鮮卑]는 일찍이 고구려[高句麗]에 복속되어, 고구려[高句麗]의 일원이 된 종족[種族]이다.
유리[類利]가 즉위하여 부분노[扶芬奴]를 등용하여 선비[鮮卑]의 항복을 받아내서 속국[屬國]으로 삼았다. 類利立。用扶芬奴。降鮮卑爲屬國, 라고, 역사[歷史]는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지역이다.
오늘날 알타이산맥의 서남[西南]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조[先祖]가 선비[鮮卑]라고 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역사[歷史]와,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의 역사[歷史]는, 그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의 일만년[一萬年] 역사[歷史]의 서북[西北] 변경[邊境] 지역은, 천산[天山] 북로[北路]와 알타이산맥의 서남[西南] 지역이었으며, 고금[古今]의 수 많은 역사[歷史] 사료[史料]들을 증거[證據]로 하여, 이를 분명[分明]하게 증명[證明] 할 수 있다. 오늘날, 이식쿨호수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 곳에 있는 산을 오손산[烏孫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환[烏丸]은 오손[烏孫]의 동북[東北] 지역에 있다고 수 많은 사서[史書]의 기록[記錄]들은 전[傳]하고 있다. 왜곡[歪曲]된 역사[歷史]는, 이러한 오환[烏丸]을 지금의 중국[中國] 북경[北京] 지역으로 옮겨 놓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오환[烏丸]의 후손[後孫]들은, 발하슈호와 자이산호 일대에 살고 있으며, 이곳이 자신들의 고향이며, 오환[烏丸]은 자신들의 선조[先祖]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歷史]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의 신검[神劒]을 칠때, 거느린 군사 중에,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勒] 등의 기병[騎兵]이 있었다.
溟州大匡王順式,大相兢俊,王廉,王乂,元甫仁一等,領馬軍二萬,大相庾黔弼,元尹官茂,官憲等,領黑水達姑,鐵勒,諸蕃勁騎九千五百,
명주[溟州] 대광[大匡] 왕순식[王順式]과 대상 긍준[兢俊], 왕렴[王廉], 왕예[王乂]와 원보 인일[仁一] 등이 마군[馬軍] 2만 명을 거느리고, 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 관헌[官憲] 등이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 9천 5백 명을 거느리며, 중략]
이 철륵[鐵勒]은 어느 지역에 있었을까 ? 그 들이 천년[千年]동안 부른 북방[北方] 민가[民歌]의 내용을 보자.
칙륵천 敕勒川,
음산 아래 陰山下,
하늘은 파오처럼 天似穹廬,
사방 들판 덮었어라 籠蓋四野.
하늘은 푸르르고 天蒼蒼,
들판은 광활한데 野茫茫,
바람에 쓰러지는 풀사이로 소와 양떼 보이누나 風吹草低見牛羊.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천산[天山] 북로[北路], 알타이산맥의 서남[西南] 지역에 있는 철륵[鐵勒]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후백제[後百濟]와 전쟁을 하였다.
이러한 것이 모두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며, 현실[現實]이다. 역사[歷史]라는 것이 무엇 인가 ?
시아비아[是我非我]가 역사[歷史]인가 ?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으로 고증[考證]되고 증명[證明]되는 것이 역사[歷史]인가 ?
첫댓글 청나라복식으로된 명성황후의 그림을볼때 이곳에 있던 황제는 고종이었을까요? 아니면 따로 청황제가 존재해있었을까요? 왜 러시아인이 그렸다는 명성황후는 청나라 의복이었을까요? 생각컨대 1840~50년대 아편전쟁때 이미 북경성이 불탔다는 기록이 있는걸로봐서 선생님이 말한 그곳연경에서 오늘날 서안으로 옮겨오지않았나 추즉해봅니다. 그래서 1860년대이후로 청나라복식을한 백성들이 대륙에 널리 퍼져살고있엇을거라생각합니다. 또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란것도 바로 아편전쟁때 불탄 자금성을 떠나 서안으로오면서 황궁을 재건하지 않았나싶습니다. 그래서 서안고성의 벽돌이 비교적쌔련되어보이는까닭이바로 이거아닐까요?
그게 참 의아스러운 일 입니다. 지금 북경이 청나라 연경이라고 하면서, 청나라 궁중 여인들을 찍은 사진을 보면, 청나라의 황후를 비롯하여 궁중 여인들의 머리 모양과 복장이, 조선의 궁중과 같습니다. 앞으로 차차 분명히 밝혀 지리라 봅니다.
대원군이 반도의 경복궁을 재건했다고 하는데, 그 시기적으로 보면 의문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이에 대한것도 곳 밝혀 질 것입니다.
글 잘 보았읍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진이고 지금의 자금성(현 뻬이징)보다 훨씬 화려하네요...서직문 바깥이라하니 원명원 근처겠죠....그림이든 판화이든 아님 사진이든간에 왠지 본래 청의 북경성으로 보입니다.
오문의 지붕꼭대기(용마루)에 용(龍)의 조각이 분명히 보이네요...또 서직문 바깥 풍경의 그림에 전루(箭樓)라 하나요....그 전루 외벽을 전부 옥돌로 장식했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연경의 인근에 모용씨부터 써 왔다는 석산이 있어야 합니다. 또 성곽 바로곁에 그림에서 보듯 하천이 하나 흐른다는 것이 특징이죠.... 배들도 많이 다니네요.. 그 하천의 다리 앞에 패루가 보이구요....연행록에 조가패루와 영원성전투 이야기가 나오는데 연경이 있는 청나라(?)에 패루 문화는 있었고 현 중국 대부분지역(주로 중원에...)에 오래된것부터 신작까지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같은 문화권이 아닌지요...?
패루 바로 앞에는 화표주(?)도 보이네요.
연행기
수레는 더디고 사막엔 가을인데 / 車馬逶遲大漠秋
백단산 남으로 보이는 게 신주라네 / 白檀南望是神州
여기서 백단산과 신주(연경)은 아주 가까운 곳임을 알수 있습니다. 백단산은 조조가 오환을 칠 때 거처간 곳이죠....
<유주와 병주는 오늘날 천산과 알타이산맥 사이에 펼처진 광활한 지역이다.> 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백두산(현 벨루하산)도 유주에 있는 셈이네요....
백두산(白頭山)은 사류하(沙流河)의 정북쪽에 있다한 조경일록의 기록과 부합하고 가까이에 북경도 있어야 합니다.
위의 사진(즉 연경)속의 자금성은 어디인지 궁금하군요.....? 카자흐스탄 동쪽인가요...아니면 천산과 알타이산맥 사이쯤인지요...? 그림속의 문화(특히 건축문화)가 현 중원의 것과 유사한점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어쩌면 소련시절 열심히 핵폭탄 실험한다고 터뜨렸던 카자흐스탄에 있는 지역일수도?
@주몽의나라 주몽의 나라님께서 말씀 하시는 소련의 핵 폭탄 실험장은, 자이산호의 서북 지역에 있는데, 지금도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소련이 왜, 무엇 때문에, 다른 불모 지역도 많은데, 대체적으로 살기좋은 이곳에서 핵실험을 하였을까요. 역사의 흑막이 있다고 보여 집니다.
동판화 그림속의 자금성에 대해서는 , 현지에서 말하는 그 들 역사의 자료와, 조선사의 사료들을 포함하여, 명과 청나라의 연경에 대하여, 논증 할 예정 입니다.
중원과 건축 문화가 유사한 것은, 같은 역사권이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차자흐스탄의 동부 지역과 신강성 서부 지역의 국경이 교차하는 지역은, 현재의 중원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고전에서 말하는 역사와, 현재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와는, 그 차이가 너무 큽니다. 앞으로 현지의 연구와 역사에 대한 사진 자료를 포함하여 글로서 대신 할 예정 입니다.
윗그림과 비슷한터치의 그림 여러장이 이미 예전에 올린적이 있습니다. 찾아보면 있습니다.
이제 연경의 본 모습이 나타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글로 보면, "연경"은 카자흐스탄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 현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끌벅적한 요즘에, 잃어버린 조선사 진실찾기는 기댈 곳이 전혀 없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100년도 안 된 현대사 이야기를 가지고도 이 모양이니, 수천년 전의 조선사문제는 어찌 이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캄캄할 뿐입니다. 여러 회원님들께서 열성적으로, 관심을 갖고 성원을 해 주시는데, 보답할 길이 막막합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되는데.......생각만 있을 뿐 마땅한 대안이 없군요.
좋은 정보와 관심을 갖고, 성원해 주시는 회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늘 함께하시고, 건강을 위해 기원합니다.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오랜 만에 뵙습니다. 일이 바쁘다 보니 많이 소원 했습니다.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을 나타내고, 우리 역사의 흐름과 줄기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그 기틀은, 길지 않은 시기에 굳건히 만들어 지리라 보여 집니다.
감사 합니다.
예. 염려덕분에 건강하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먹고 나면 시간이 좀 나지 않을까 했지만, 시간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열심히 고서와 씨름하고, 이를 고증, 증거하기 위해 시간 있을 때마다 적고, 찾고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가져봅니다. 이 나라가 정상적인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리라 굳게 믿습니다. 비오는 날! 광화문에서 고생하시는 많은 분들도 계신데........왜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바낄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참 답답합니다. 이게 모두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댓가를 받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기성세대로써, 젊으니들, 얼굴보기가 부끄럽습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빌며,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