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보고 - 2
경험 많고 노련하고 전문 지식을 쌓은 이후락 정보부장으로서는 당연한 의문 제기였지만,
노범호는 사위 허열의 편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탈취당한 무기까지 발견되었다면 아무래도 녀석은 자살했거나 사고로 죽은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노범호가 애써 변명했지만, 이 부장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잠시 검토해 보았습니다만, 백수웅의 지금까지의 활동을 검토해 볼 때 자살을 할 이유는 전혀 없고요,
또 그 정도 실력이나 일본에서의 장기간 생활 수준으로 볼 때 오토바이로 열차와 충돌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노 회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노범호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 검사의 사기를 저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테러 전문가 추적에는 국내 1인자가 되었으니까요.
비록 백수웅의 체포에는 실패했어도, 어디에 숨든 녀석은 번번이 허 검사에 의해 적발 되었으니까요.
노 회장님, 한 가지만 부탁합시다. 일본을 한번 다녀오십시오."
"일본?"
"네. 일본 정보 관계 부서에 부탁은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일본까지 갈 여유가 없어서요.
가셔서 백수웅을 잘 아는 일본인을 만나 그 아이의 히스토리(경력)를 알아 와 주십시오.
배후 인물이나 성품까지도. 일본측에서 잘 협조해 줄 겁니다."
노범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부터 일본을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도대체 그들은 백수웅이 한국으로 잠입해 오도록 무얼 했단말인가.
자신을 돕고 있는 요네조오 의원이나 몇몇 재벌과 각료, 요직에 있는 친지들을 찾아보고,
또 그 동안 살아 온 백수웅의 과거도 알아보고 싶었다.
"일본에 가면 한 여성의 인사를 받게 될 겁니다. 이 쪽에선 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이죠.
함께 귀국하십시오. 허 검사를 도와 녀석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정보 계통의 요원을 일본에서 차줄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백수웅 체포에는 은밀한 진행이 필수적이며,
새로운 실력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어떻습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
"좋습니다. 내일 떠나겠습니다. 각하께는 제가 직접 보고 올리 겠습니다."
"아직 백수웅의 죽음 문제는 보고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죽음이 확인될 때까지는."
결국은 일본측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백수웅을 체포하는 데 허열 검사가 적절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두 번씩이나 손아귀에 넣었다가도 놓쳤다면 경험 부족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일본에는 이런 종류의 국제 테러 저지에 경험 많은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다.
지원 요원으로 여성을 선택하려는 이유도 남성과 여성 요원의 하모니를 위해서였다.
백수웅의 죽음을 확인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노범호는 다음 날인 월요일(4월 3일) 일본을 향해 떠나기로 했고,
이후락 정보부장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간 즉시 일본측에 여성 요원 지원을 요청했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 시간 허열은 부하들과 술과 계집에 취해 들뜬 기분으로 놀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돌아온 노범호는 삼선동 자택을 스쳐 지나 딸 옥진이가 입원해 있는 서울 대학 부속 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후락 정보부장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귀찮던 녀석이 한시바삐 죽어 주기를 바라는 초조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다. 보고서에 의하면,
백수웅은 영등포에서 오토바이를 탈취해 이용하고 있었고, 수사 요원의 권총까지 빼앗았다고 했다.
그 두 가지 흉기가 시체와 함께 발견되었다면, 백수웅은 틀림없이 자살했거나 실수로 열차에 치인 것이 분명하다.
실수라기보다는 자살 쪽의 가능성이 더 높다. 허열에게 쫓기다 지쳤을 것이고,
어디에 숨든 결코 완벽한 은신은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스스로 열차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제 백수웅 문제는 끝났다. 뒤통수를 무겁게 짓누르던 압박감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래도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면, 딸 옥진이를 설득하고 이해시켜 충격을 완화시키는 일이다.
병실로 들어섰다. 전속으로 붙여 준 간호원이 노범호를 맞아 주었다.
"환자 좀 어때요?"
"지금 화장실 잠깐 가셨어요. 괜찮아요. 어깨가 탈골되었었는데 완전히 접합되었구요.
몇 군데 찰과상도 치료했어요."
노범호는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내일 오후에는 대한 항공을 이용하여 도쿄로 날아간다. 이미 백수웅이 죽었으니,
그에 관한 업무는 사실 소멸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요네조오 의원과 몇몇 사람을 만나 보고
돌아오기만 하면된다. 여성 정보원 하나를 파견시켜 주면, 데려다가 이 부장에게 넘겨 주기만 하면 된다.
잠시 후 창백한 채 힘 없어 보이는 딸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의외라거나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침대에 눕자,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간호원 아가씨, 잠시 자리 좀 피해 주겠어?"
"네, 회장님. 나가실 때 가운터에 말씀만 해 놓으세요."
간호원이 나가자, 노범호는 의자를 당겨 옥진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옥진아, 옥진아."
" "
"대답하기 싫으면 듣기만 해라. 사람이란 때로는 운명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네 고통을 애비가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넌 이미 열이의 아내고 미라의 에미야,
8년 전 일 때문에 현실을 흐트릴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상처입을 일이 있다면 지금 부터 다 씻어 버려라.
중요한 건 어제가 아니라 내일. 인간은 내일을 위해 사는 거야. 이런 말 차마 하기는 싫다만 숨길 수 도 없구나.
옥진아, 마음 단단히 먹고 내 말 잘 들어라. 얼른 일어나 미라한테 가야지.
사실은 오늘 새벽 청평에서 백수웅이 자살을 했다."
"뭐라구요!"
누워 있던 노옥진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타오르는 두 눈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잠시 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누웠다.
"백수웅 씨는 죽지 않아요."
"그래, 믿기 싫겠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야. 청평에서 열차에 치여 "
"그만! 그만 해요. 저는 이제 아버지를 믿지 않아요. 그 사람은 절대 죽지 않아요. 죽어서도 안 되구요. 으흐흐"
마침내 고통스러운 움음이 터져 나왔다.
흐느껴 울던 노옥진이 울음을 멈추었다. 병실 침대의 하얀 시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녀는 아버지 노범호를 향해 지금까지 감추어 두었던 감정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백수웅 씨를 일본에 버린 건 아버지죠? 전 알아요. 저를 속였어요.
제가 결혼하는 조건으로 백수웅 씨를 무조건 석방시켜 주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버지는 사람을 마치 짐짝처럼 일본에 버렸고, 그는 8년 만에 복수하겠다며 서울에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가 자살을 했다구요? 천만에요. 저는 그 사람을 잘 알아요. 목적이 있는 사람이에요,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전 피하지않을 거예요. 만나겠어요.
떳떳이 만나 용서를 빌고, 이제 우리곁을 떠나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그 사람이 죽었다고 제게 말씀하시는 건,
이제 그 사람을 죽일 테니 놀라지 말라는 경고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건 안 돼요.
죽이지 않고 설득시켜 돌려보 내야 해요."
"네가 아무리 그래도 그 아이는 살아나지 못해. 난 그 아이의 시체를 확인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열차에 뛰어들었어."
노범호는 그 말 한 마디를 차갑게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거에 매달려 미래를 망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더 먼 홋날에는 또 지금 이 시간을 후회하겠죠. 지금은 미래의 과거니까요.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는 원리는 왜 생각 않으세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아버지, 백수웅을 만나세요. 이번에는 아버지가 빌어요. 과거를 용서해 달라구요."
"못된 것 같으니라구. 그 녀석은 이미 죽었어. 다 끝난 거야."
노범호가 고함을 치며 병실에서 뛰쳐나갔고, 노옥진은 몸을 일으켜 세운 채 넋 나간 사람처럼
병실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독백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죽지 않아. 백수웅은 죽지 않아. 나를 직접 만나 보지 않고는 절대 눈 감지 못할 거야."
침대에서 일어서려던 그녀가 다시 주저앉았다. 어깨의 통증은 완전히 가셔졌지만,
부은 발목이 다시 시큰거리며 통증이 왔기 때문이었다.
발목만 나으면 전국을 뒤져서라도 백수웅을 찾고야 말겠다며 그녀는 자신에게 거듭 다짐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1972년 4월 첫째 월요일인 3일,
대한 항공 242편 여객기가 김포 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힘차게 이륙하기 시작했다.
퍼스트 클래스의 특별석에 앉은 노범호는 갑자기 성냥갑처럼 작아지는 집들과 공항 청사,
그리고 개미같이 작아지는 차량 행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은 그렇게 창 밖의 풍경에 머물러 있었지만, 머리는 병원에 남겨 놓고 온 딸 옥진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8년 세월이 흘렀고, 남편 열이가 무서울 만큼 성장하고 있고, 게다가 귀엽기 짝이 없는 미라까지 얻어,
아무리 백수웅이 나타난다고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다는 엄연한 현실조차 믿으려 들지 않았다.
'참, 어리석기는 어쩌다 그런 빨갱이 같은 녀석과 어울려서 일생을 망치려는지 몰라. 자식! 잘 뒈졌어.'
세계적인 도시 도쿄의 관문 하네다 공항은 이 날도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비서 한 명 대동하지 않은 채 비공식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노범호는 외형상 초라해 보였으나,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한국 정부의 최고 요인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외부에 알리지 않아 매스컴 관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이미 통보받은 경제계의 정치 거물 요네조오 의원과
이후락 정보부장의 부탁을 받은 정보계 인물들이 귀빈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요네조오 의원, 오랜만이오."
노범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한 . 일 국교 정상화와 경제 협력에 앞장 섰던 요네조오 의원이
'하이'를 연발하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들과 환담을 하면서도 노범호는 계속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5분이 지난 후 귀빈실 문이 열리며,
훤칠하게 키가 크고 코가 뾰족한 서양인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오우, 브라운. 나, 여기 있습니다."
브라운. CIA 극동 책임자인 브라운 대령. 백수웅 증발과 한국으로의 잠입 정보를 노범호에제
최초로 알려 준 바로 그 인물이었다.
한때 요정 송죽의 히데코와 사랑에 빠졌다가, 중대 정보를 잃은 뒤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의 목을 비틀었던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브라운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요네조오 의원이 다소 놀라는 듯했다.
"저 친구, 미 대사관에 있는 ClA 요원 아니오?"
"그렇습니다. 여기 나온 이유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자, 서로 인사나 하시죠."
그런데 얼굴 보며 악수하는 것만 처음일 뿐, 이미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일본 첩보계 요원들과는 다음 날 오전 자신의 투숙 호텔인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뒤
돌려보냈고, 요네조오 의원과 브라운 대령, 그리고 노범호 회장은 브라운 대령의 차에 올라
도쿄 시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 날 저넉은 브라운이 대접하겠다고 하여, 그는 전에 히데코가 일한 적이 있는
긴자(銀座)의 송죽 요정으로 자를 몰았다.
"오늘 중요한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겠습니다. 브라운 대령이나 요네조오 의원 모두 제게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들입니다. 또 두분 모두 테러리스트와 관계가 있는 분들이구요."
술집 여인들을 물린 뒤, 잔에 술을 따르며 노범호가 입을 열었다.
"먼저 백수웅의 한국 잠입 정보를 제공하신 브라운 대령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백수웅 은 한국에서 죽었습니다."
"뭐라구요? 백수웅이? 어떻게요?"
그들은 뜻밖의 정보라는 듯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 놓았다.
노범호는 백수웅이 당국의 추적에 쫓기다 못해 열차에 뛰어들어 자폭했다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브라운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요네조오 의원은 갑자기 너털 웃음을 웃으며 노범호의 손을 잡았다.
"그래, 시체만 발견했지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거죠?"
"네. 하지만 오토바이와 권총이 현장에 "
"노 회장님, 잘못 알고 계십니다. 백수웅은 절대 그렇게 죽을놈이 아닙니다."
"뭐라구요?"
노범호가 놀란 얼굴로 요네조오 의원을 바라보았다.
요네조오 의원. 68세. 자민당(自民黨) 핵심 맴버로 한 . 일 국교 정상화 추진 위원을 지냈으며,
그 당시 김종필 . 오히라 메모 작업을 지휘한 친한파 인물이다.
정계와 재계에서 알아 주는 인물로, 노범호의 사업체를 일본에 소개시켜 준 장본인이며,
노범호가 백수웅을 일본에 버릴 때 도와 주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미.일 3개국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백수웅을 중심으로 기묘하게 얽혀 있는 형편이며,
이렇게 숙명적으로 모일 수 밖에 없었다.
노범호는 이들에게 백수웅의 정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백수웅 존재에 대해 기묘한 감정을 품고 있는 브라운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듣고 있었다.
"백수웅은 좌익 학생 운동의 앞잡이였습니다.
그를 체포해서 무기 징역이나 사형에 처해 제거시키겠다는 게 제 의도였습니다만,
일이 꼬이느라고 그랬는지 하필 제 여식(옥진)이 그놈을 사랑하게 되어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죠.
그래서 요네조오 의원에게 뒤처리를 부탁하고 일본으로 보냈던 겁니다.
언젠가 제가 백수웅 문제로 골치가 아프면 제거해도 좋다고 했는데, 끝내 이런 일이 벌어졌군요.
과연 백수웅은 살아 있을까요?"
백수웅이라면 누구보다도 요네조오 의원이 잘 안다. 무려 8년 간이나 관리하고 뒷바라지를 해 왔다.
살인 강도 사건에 백수웅이 개입되어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뒤로 빼돌려 주었다.
노범호가 제거해 달라고 했을 때도 이를 외면했다.
언젠가는 큰 티켓으로 써먹을 가치가 있을 거라는 계산을 해둔 것이다.
그런데 그 녀석이 어이없게도 서울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알고 있겠지만, 요네조오 의원은 모르고 있을 거요."
"뭘요?"
"백수웅이 서울에 출현한 진짜 이유 말이오 오늘은 사실을 말하겠습니다.
백수웅에 대해서는 모두 책임이 있는 사람들만 모였으니까요.
박성철 북한 제2 부수상과 이후락 정보부장 간에 곧 비밀 회동이 있습니다."
"뭐라구요?"
요네조오 의원으로서는 기가 찰 국제 첩보였다. 이 엄청난 정보를 노범호는 서슴없이 내뱉었다.
"두 달 정도 남았소. 백수옹의 목표는 바로 이 두 사람이오. 백수웅이 그런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브라운의 실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백수웅이 한국에 잠입한 것도 모르고 있었던
요네조오 의원에게도 책임이 있구요. 우리는 모두 그 녀석에게 공동 책임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끝났소. 죽었으니까."
"아니오."
요네조오가 정색을 하며 나섰다.
"노 회장님이 알고 있는 상반신 없는 시체는 엉뚱한 녀석일 겁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에는 귀신 같은 녀석입니다.
또 그가 8년동안 일본에서 어떻게 보냈는가를 아시면 절대 죽을 놈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겁니다.
녀석은 반드시 자신의 목표를 달성 할 겁니다."
백수웅에 대한 의견을 말한 뒤, 요네조오는 잠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가고 있었다.
"아이의 목적은 제2의 6.25 전쟁입니다. 이후락, 박성철이 테러당하면 틀림없이 전쟁이 납니다.
일본 당국에서는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사건이 될지도 모르지만, 난 한국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백수웅에 대한 공동 책임의 세 사람, 노범호와 요네조오 의원, 그리고 브라운 CIA 요원은
네 시간에 걸친 대책 회의로 고심하고 있었다. 이후락과 마찬가지로 백수웅의 죽음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 요네조오 의원이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백수웅은 죽지 않았습니다. 귀국하시거든 이 점 특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테러가 성공한다면 노 회장님은 물론, 나, 여기 브라운 대령까지도 책임을 면치 못하게 될 겁니다.
또 나는 한국 전쟁의 재발을 원치도 않습니다. 만일 그 녀석을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데 전문가가 필요하다면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아니오."
노범호는 이 제의를 한 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백수웅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바로 이후락 정보부장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 와 보니, 그 녀석을 8년간이나 지켜보고 보살폈던 요네조오 의원까지도
그의 죽음에 회의를 품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교활한 녀석이 엉뚱한 녀석을 자신의 대리로 희생시켰는지도 모른다. 완전히 잠적한 채
물밑 활동을 하기 위해, 그렇다면 녀석은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지?
어디서 숨 죽이며 찬스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노범호는 비로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요네조오 의원을 만나 백수웅의 지난 8년간의 일본 생활 이야기를 들으며,
왜 허열이 번번이 놓치는가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내는 포악한 성격을 길러 왔고,
한번 목표를 설정하면 절대 바꾸는 법이 없는 녀석이라고 말해 주었다.
"섣불리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녀석, 마음만 먹으면 천황(天皇)이라도 암살할 녀석이니까요.
8년 동안 10여 회나 녀석의 꼬리를 놓쳤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사건을 일으켰죠.
수사 당국에서 백수웅의 과거를 케내기 위해 뛰어다닐 때마다 압력을 넣어 빼돌리기는 했지만,
정말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아이였습니다."
결론은 났다.
백수웅은 죽지 않았으며, 그는 서울 어딘가에 잠복한 채 노범호 자신과 이후락,
박성철의 등 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두렵기는 브라운도 마찬가지였다. 남북 회담의 기밀이 흘러나간 곳이 바로 자신의 주머니였고,
불행하게도 그 기밀은 자신의 애인 히데코를 통해 백수웅에게 옮겨 갔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있는 저희 조직을 동원할까요?"
브라운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원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런 제의는 노범호에 의해 단호히 거절되었다.
"백수웅이 테러리스트로서 뛰어난 강점이 있다는 건 시인합니다. 하지만 한국에도 정보부가 있고,
그 녀석 하나 제거할 만한 인물은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의 손끝에 잡혀 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한 가지 부탁합니다만, 이번 남북 회담 기밀은 우리 셋 이외로 더 확산되어서는 안 되며,
백수웅이 죽었을 거라는 나의 추측은 이 시간 이후 버리겠습니다. 귀국하면 반드시 녀석을 제거시켜
여러분들의 걱정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자 기밀 회담은 이렇게 끝을 냈다.
노범호는 자신의 숙소인 도쿄 타워 뒤쪽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특실로 돌아왔다.
몇 잔의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와이셔츠만 걸친 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었다.
'백수웅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위장 자살. 이후락과 요네조오 의원이 백수웅의 위장 자살을 간파했고, 브라운 대령이 동조했다.
그 방면에는 모두 전문가들인 셈이다.
누워 있던 노범호는 감전된 사람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서울은?'
백수웅이 우이동 사위의 집을 습격하여 폭파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열(허열)이나 딸 옥진의 가슴에
총알을 박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거리를 활보하며 회담 장소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회담장이야 대통령과 정보부장, 자신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고,
그나마 워커힐과 영빈관이 복수 추천만 되어 있을 뿐 확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뒤를 가리지 않는 포악한 살인자 백수웅이 만일 사위와 딸을 향해 공격을 해 온다면,
사위와 딸은 앉아서 당하는 도리밖에 없다.
노범호는 국제 전화로 우이동 집을 향해 부지런히 다이얼을 돌렸다. 딸 옥진이가 병원에 입원 중이니
사위가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열이마저 아직 돌아오지 않아 집을 보살피는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아직은 별일 없어 보여, 노범호는 가슴을 졸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열이가 방심하면 안 되는데, 내일 일찍 귀국해야겠어.'
잠이 올 리 없다. 호텔 방의 불을 끄고 옷을 벗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밤 깊은 도쿄 하늘에서 북극성이 반짝이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첫댓글 다음글이 기다려지네요
믿고 싶은것 아닐까요? 앞으로 어떻게 될건지.........................
잘난체 하는것들은 모두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한다니까...ㅉㅉ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