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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書經]에 나타나는 동방민족의 역사
반경盤庚 중中 -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하수河水를 건너 사람들을 옮기려고 도모하였다. 惟涉河以民遷 <반경盤庚 중中>이 부분에서 눈여길 대목은 [惟涉河以民遷]이다. <하河는 일반적으로 하수河水>이니 그는 분명히 하수河水를 건넜다. 반경盤庚은 하수河水 남쪽에 있는 엄奄에서 옮겼으므로 북방으로 움직여 하수河水를 건넌 것이다. (自奄遷于北蒙曰殷 -죽서기년竹書紀年). 동방계열들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이며 옮긴 은殷은 지금의 안양安陽으로 이리두二里頭 èr-lĭ-tóu와 이리강二里岡 èr-lĭ-gāng이 양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안양安陽 ān-yáng(씨 언니 골)에 [~이의 얼이 있는 터 와 ~이의 얼이 있는 곳]이란 마을이 나란히 있는 것이다. 반경盤庚의 기록에 특별하게 <얼爾>이라는 표현이 많은 까닭이 이해된다. 갑골문甲骨文이 하수河水를 넘어 동방족의 활동무대인 북몽北蒙으로 옮긴 다음인 반경盤庚 때부터 나타난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아울러 특별한 사실은 하수河水 수계水系의 북쪽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무렵부터 나타나는 갑골문甲骨文에서 분명하게 이 지대地帶를 거점據點으로 유목목축遊牧牧畜을 생활방식으로 삼던 선조先祖인 왕해王亥를 크게 받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반경盤庚이 씨 어른들과 씨들을 설득하면서 줄곧 선왕先王들에 대한 발자취를 입에 담은 사정과 잘 들어맞는다. 즉 <오는 신해일辛亥日에 왕해王亥에게 제사祭祀를 지내는데 소 30마리를 사용할까요?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후편殷墟書契後編 권상卷上 23엽葉 16편片>라고 묻는데 이만큼 많은 소를 희생犧牲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아무튼 반경盤庚은 [언사偃師를 남방 한계로 한 북몽北蒙 즉 안양安陽 지역]으로 옮기면서 이 일대에서 오래 동안 터줏대감으로 근거하고 있던 조이鳥夷 계열과 밀접해졌음을 알려주는데 이들은 장수수계漳水水系에 접근한 <우禹>와 이미 접촉한 바 있었다(鳥夷皮服).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에<왕해王亥의 출자出自를 곤민국困民國 [1] 으로 기록하였는데
[1] 곤困 kùn은 큰으로 큰 나라라는 말인데 오늘날엔 우리말 김군*이군처럼 일반화되었지만 옛날에는 어른이란 뜻이 더 짙었으니 어른이 다스리는 씨들이 있는 나라로도 이해된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有困民國 句姓而食 有人曰王亥 兩手操鳥 方食其頭...>라 하여 왕해가 벌써부터 조이鳥夷 세력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양 손에 새를 잡고 그 머리를 먹고 있다고 했으나 산해경山海經에서 나오는 「식食」은 어떤 집단의 근거지나 영역을 이야기하거나 같은 씨라는 표현이라고 말한바 있다). 왕해王亥와 연결된 곤민국困民國이 동방계열의 텃밭인 대황동경大荒東經에 수록收錄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재확인해준다. 실제로 갑골문甲骨文(상승조商承祚 은계일존殷契佚存 888편片)에도 해亥가 새 추隹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안양安陽으로 옮긴 뒤부터 그 지역의 조이계鳥夷系와 재결합하는 가운데 지난날 같은 경험을 지니고 있던 왕해王亥가 두 세력의 연결고리로서 고조신高祖神으로 높이 받들어졌음을 밝혀준다. (其告于高祖王亥三牛 -곽약우郭若愚 은계십철殷契拾綴 455편片). 이와 같은 까닭으로 이 시기에 나타나는 복사卜辭에는 왕해王亥가 새를 손으로 잡고 있는 글자가 등장하여 [산해경山海經] 기록과의 정합성整合性을 보여주며 두 집단의 연합도 재확인해준다(곽약우郭若愚 은계십철殷契拾綴 455편片).
그렇다면 반경盤庚은 어떤 세력과 손을 잡았을까? 앞선 글자의 <해亥>에서 손으로 잡은 새의 생김새는 갑골문甲骨文에서 [봉鳳]으로 이해되는 글자와 매우 닮았다. [봉鳳*봉황鳳凰*봉조鳳鳥]라는 이야기인데 이들의 근거지는 [산해경山海經]의 동쪽 지방(동산경東山經*해경海經의 동경東經)에 나타나는 봉鳳이 존재하는 지역일 것이다(상족商族이 지속적으로 새와 친밀해질 수 있는 까닭도 알고 보면 시조始祖인 계契의 현조설화玄鳥說話에서도 그 실마리가 보인다). 반경盤庚이 도읍都邑을 옮길 때 [자읍玆邑]의 운명을 점치는 기록은 매우 특별하다. <왕이 자읍이 종말에 이르지 않았는지? 점을 쳤다. 貞 帝弗終玆邑*왕이 이 자읍에 종말이 있을 것인가 점을 쳤다. 丙辰 卜 (南+殳)貞 帝唯其終玆邑 -장병권張秉權 殷虛文字丙編 상집上輯(1) 73편片>라 하는데 [자읍玆邑]은 상商의 주도읍지主都邑地를 말한다는 게 정설定說이다(도방남都邦男 은허복사연구殷虛卜辭硏究 196p). 즉 [도읍都邑=자읍玆邑=어른의 마을]로서 소리 값으로 쓴 <어르신 마을>을 [어른인 ~지인 자玆 zī+마을 읍邑]으로 썼음을 알려주는데 필자筆者의 견해와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 점복占卜의 결과를 빌어 천도遷都를 결정하였음을 앞선 [서경書經]의 기록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이는 <내가 이에 새로운 어른의 마을(玆新邑)에 불러들여 품에 안으려는 것은...予若籲懷玆新邑 –서경書經 반경盤庚 중中>이라 표현한 글귀에서도 명백하다. 하여튼 상商은 반경盤庚에 이르러 도읍을 신하臣下와 중인衆人들의 반대를 집요하게 설득하고 달램으로서 하수河水 북쪽으로 옮기는데 성공함으로서 재도약의 기회를 맞았으며 반경盤庚은 무정武丁과 함께 이름을 크게 남긴 인물로 기록되었다.
이에 내가 새로운 어른의 마을(玆新邑)에 불러들여 품에 안으려는 것은 모두 그대들을 헤아렸기 때문이며 또한 나 비씨(丕)가 마음에 두고 있는 뜻을(志) 따르려 함이다. 이제 나는 장차 그대들과 도읍을 옮겨 그걸 시험해보면서 그 터전에서 안정되어 보려 하는데...이러한 생각을 공경하여 정성을 다함으로서 어른인 나를 감동시키지 않고 우리 얼들은(爾) 스스로 곤궁困窮하고 고통스러움만 꾀하려 하는가? 그대들은 장구한 방책도 없이...어찌 그대들의 삶을 하늘같이 높으신 그 어르신이(上帝) 살피시겠는가(在)?
予若籲懷玆新邑 亦惟汝故 以丕從厥志 今予將試以汝遷 安定厥邦...欽念以忱 動予一人 以惟自鞠自苦 汝不謨長...汝何生 在上...<반경盤庚 중中>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위 문구文句를 살펴볼 까닭이 있다. 반경이 도읍을 옮기려는 움직임은 아주 면밀하고 정교한 어떤 목적과 계획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매우 짙기 때문이다. [응후應侯의 갑작스런 방문 – 반경盤庚의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한 언급 – 갑골복사甲骨卜辭에서 자읍종玆邑終이라는 해답을 얻음 – 이 결과를 어른들과 중인衆人들에게 알리면서 도읍 옮김의 당위성當爲性을 설명]하는 아주 치밀한 전개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위와 같은 다짐 비슷한 말이 이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 키워드는 바로 <불러오다*품에 안다*이르게 하다. 회懷>인데 궁금한 점은 어떤 세력을 불러오겠다는 것일까? 하는 사실이며 <비씨> 계열인 반경盤庚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글귀는 앞에서 말한 배경과 연결시켜야 의문이 풀린다. 반경盤庚은 이 모든 걸 진행하기에 앞서 그를 별안간 찾아 온 <응후應侯>와 서로 깊은 계획을 나누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응후應侯는 동방 지역의 명물名物인 <송골매*해동청 응후鷹侯>이다. 소리도 같다. 즉 조이계鳥夷系 인물로서 왕해王亥의 표기表記에도 나타나는 [봉鳳]과도 인연이 깊은 세력이었다. 이들과의 결합은 반경盤庚이 안양安陽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동안 상商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상속제도相續制度의 혼란을 극복하여(대강大康에서 양갑陽甲에 이르기까지 형제兄弟-부자父子-연장자年長者 상속相續의 혼합형태였다) 부자상속제父子相續制를 완성하는 기틀을 세웠고 무정武丁에 이르러 강력한 실체實體로 다시 떠오르게 된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내가(予) 아비나라(天)의 말씀을 이어 받으려고(續乃命) 나가서 맞이하려는 것이지(迓) 어찌 내가 그대들을 협박하려 하겠느냐. 그대들이 축적蓄積해 온 것들을 받들어 활용活用하려는 것이다. 나도 우리들의 선왕선공先王先公들이 우리 얼(爾)들을 먼저 헤아리신(先) 수고로움을(勞) 생각하고 있다(念). 나 비씨 어른은 능히 우리 얼들과 더불어 나아갈 터이며 당연히(然) 우리 얼들을(爾) 품에 안아 다스릴 것이다(用悔). 나라 다스리는 걸 잘못하여 어른 마을(玆邑)에 진陳을 치고만 있으면 우리 비씨 높은 어른께서(高后丕 즉 성탕成湯을 말한다) 허물을 물어 괴로움을 되풀이하여 내리실 것이다(崇降).
予迓續乃命于天 予豈汝威 用奉畜汝衆 予念我先神后之勞爾先 予丕克羞爾 用懷爾然 失于政陳于玆 高后丕乃崇降罪疾...<반경盤庚 중中>
① [이아爾雅 석고釋詁 하下]에서 <수는 함께 나아가다. 羞...進也>라 했다. ① [이아爾雅 석고釋詁 상上]은 <숭은 높고 크다*가득 차다*거듭하다*겹치다 이다. 崇...高*充*重也>라 했다.
이 부분도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 무렵의 청사진을 바탕으로 접근하면 왜 반경盤庚이 답답해하면서 꾸짖음과 다독거림이 뒤섞인 긴 설명을 하는지? 이해가 빠를 듯하다. 매우 분명하게 <응후應侯>가 미리 귀띔을 해준 말에 따라 그쪽으로 도읍을 옮겨 옛날 탕湯과 같은 역할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동방계 큰 어르신의 말씀을 맞으려 한다는 의지가 숨어있다.
반경盤庚 하下
이제 내가 가슴과 배 그리고 쓸개와 창자를 다 꺼내어(가슴과 뱃속에 있는 마음을 다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얼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爾百姓) 나의 속깊은 뜻을(朕志) 전하여 알리며(歷告) 우리 얼들의 허물을 없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얼들은(爾) 서로 서로 노여워하거나(共怒) 나 한 어른만을(予一人) 헐뜯는데(讒言) 같이 따르지(協比) 말라(無).
今予其敷心腹腎腸 歷告爾百姓于朕志 罔罪爾衆 爾無共怒協比讒言予一人 <반경盤庚 하下>
반경盤庚의 기록에서 한인漢人들이 끈질기게 <너>로 해석하였으며 또 가장 많이 쓰인 어휘語彙가 바로 [이爾]이다. 이 글자는 특히 도읍을 옮기는 중차대重且大한 일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기 식솔食率이나 씨 어른들을 다독거려야 하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 있을 때 되풀이하여 나타난다. 과연 이 글자를 <너>라고만 가볍게 풀어야 할까? 앞서의 기록에서도 흔히 보이는 [여汝]를 두고 말이다. 높으신 아비나라가 장차 우리 고조高祖(成湯)의 덕德을 되돌리려고 애를 쓰시는데 우리 집안이(我家) 떨칠 수 있도록 다스리려 한다(亂越). 나는 이윽고 이 말씀을(命) 사람들이(民) 공손하게 받드는 가운데(恭承) 도탑게 공경할 수 있도록 하여(篤敬) 새 도읍이 영원한 터전이 되도록 다스릴 것이다.
肆上天將復我高祖之德 亂越我家 朕及篤敬恭承民命 用永地于新邑 <반경盤庚 하下>
① [이아爾雅 석언釋言]은 <사는 힘쓰다*애를 쓰다. 肆...力也>라 하였다.
② [이아爾雅 석언釋言]에서 <월은 떨치다*드러나게 하다. 越...揚也>라 하였다.
아주 중요한 기록이다. 앞선 <우리 얼들이 나를 비판하여 어째서 온 사람들을 뒤흔들며 도읍을 옮기려 하는가? 라고 말한다. 爾謂朕 曷震動萬民以遷>란 물음에 대한 대답인데 여기에서 반경盤庚이 상제上帝의 의지를 받들어 도읍을 옮긴다는 사실과 그러한 언질言質이 분명히 그에게 전달되었음을 알려준다.
열명說命 - 금문今文에는 없고 고문古文에 있다.
무정武丁이 명재상名宰相이었던 부예傅說에게 명命한 걸 기록하였다(3年 夢求傅說得之 -죽서기년竹書紀年). 상商은 이 무렵 다시 강성해졌으며 이를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 <東不過江黃 西不過氐羌 南不過荊蠻 北不過朔方>이라 기록했다. 그는 반경盤庚의 조카로서 반경盤庚의 두 동생이 자리에 오른 다음 대代에 뒤를 이었다. 본문本文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반경盤庚-무정武丁]에 이르기까지 형편을 알아보자.
1. 반경盤庚 무렵부터 상商과 구체적으로 결합한 동방 세력들은 누구인가?
무정武丁 때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그의 삼촌인 반경盤庚을 도운 동방계 세력의 계보系譜이다.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비妃의 이름이 [배우자配偶者라는 부婦 + 출신出身을 표시하는 ○]의 형태가 일반적이다. (호후선胡厚宣 은대혼인가족종법생육제도고殷代婚姻家族宗法生育制度考*정산丁山 갑골문소견씨족급기제도 甲骨文所見氏族及其制度).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부호婦好]의 경우 그 출신이 <호好 계열 -동방계>임을 알려주며 이 같은 이름을 지닌 여러 부인들이 <후신后辛*후계后癸*후무后戊>라고도 나타나는데 잘 알려진 婦好의 무덤에서 <사모신司母辛*후신后辛>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왔으며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비신妣辛으로 표기表記되었다(왕우신王宇信*장영산張永山*양승남楊升南 시론은허오호묘적試論殷墟五號墓的 부호婦好 1p).
즉 반경盤庚 무렵부터 비妃로서 결합한 중요한 세력군들이 [신辛으로 표현된 순舜의 딸인 사모신司母辛와 계癸로 나타난 소호少皥의 딸 칭稱의 존칭尊稱인 모계母癸 족단族團]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들 세력이 조이계鳥夷系로 일컬어지면서 그 일대一帶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왕실王室의 가장 가까운 친척親戚이며 보호자로 나타나는 [참새라는 작족雀族]의 존재가 이를 실제로 증명해준다(호후선胡厚宣*정산丁山*백천정白川靜 갑골문중소견인지동명고甲骨文中所見人地同名考).
甲子卜...雀(弗)其呼王族來 <곽약우郭若愚 은허문자철합殷虛文字綴合 302편片> 이 갑골문甲骨文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확인해준다. <작雀이 왕족을 부르자 그들이 왔다>는 말인데 왕족王族들이 작雀의 호출呼出을 받았다는 이야기로서 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위치였음을 알려주는데 그 배경이 바로 반경盤庚 때부터 도움을 준 동방계 조이鳥夷 세력이기 때문일 것이다(산서山西 방면의 작雀과는 다른 집단이다). 특별한 사실은 [부호婦好]의 경우 무정武丁이 군사력의 지원을 말할 정도로 강력한 힘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호후선胡厚宣 은대봉건제도고殷代封建制度考 4p). 즉 어떤 세력의 아녀자로서 그 세력을 대표하여 비妃로 결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녀가 높은 지위를 가졌으며 군사적 지도자와 제사의식을 거행하는 주체主體로서의 역할과 스스로의 성읍城邑을 지녔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왕우신王宇信*장영산張永山*양승남楊升南 시론은허오호묘적試論殷墟五號墓的 부호婦好 1p).
① 生13月 婦來好 不其來 <임태보林泰輔 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 권1 20엽葉 11편片>
② 辛巳卜 貞 徵婦好三千 徵旅萬 呼伐...<방법감方法歛 고방이씨장갑골복사庫方二氏藏甲骨卜辭 310편片>
③ 癸卯卜 賓貞 井方于唐宗彘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후편殷虛書契後編 권상卷上 8엽葉 5편片>
④ 翌庚子 婦井侑母庚 <방법감方法歛 고방이씨장갑골복사庫方二氏藏甲骨卜辭 310편片>
① 에서 분명하게 [부婦]가 <호好>에 올 것인지? 아닌지? 를 묻고 있는데 이를 보아 호好는 지명地名이며 그 지역에 근거한 세력임을 밝혀준다. ② 또한 부婦가 어떤 씨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도 알려준다. 더욱 명백한 기록으로서 ③ 은 정방井方이 어떤 지역 세력임을 보여주는데 ④에서 이들을 배경으로 비妃가 된 아낙네를 부정婦井으로 부르고 있다.
2. 이 무렵 상商의 군사력을 짐작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대규모 전투를 많이 치룬 이 무렵 상商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갑골점복甲骨占卜 기록이 말해주는데 대략 적게는 3000명 많으면 1만 3000명이었다(양상규楊尙奎 중국고대사회여고대사상연구中國古代社會與古代思想硏究 20p-21p*진몽가陳夢家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述 276p-277p).
상商이 군사적인 동원력과 위압을 지속적으로 가졌던 근본적인 까닭은 오랜 동방적인 사회단위로 바탕을 이룬 족단族團 중심의 구조였기 때문이다(씨 어른의 이름이 씨의 이름이며 마을 이름이라는 일상적인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보다 넓고 큰 형태의 신농계神農系의 족足 ⇨ 족族에서 씨를 뿌린 족단사회族團社會). 실제로 강방羌方과의 전역에서 1만3000명이 동원되었는데 <여旅>라는 중앙족단들의 군사에 부호婦好 족단3000명이 보태어졌다(진몽가陳夢家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述 277p).
3. 상商의 문양文樣에 나타나는 동물들과는 어떤 관계를 보여주는가?
특히 상商의 깃발이나 청동기물靑銅器物에 <호랑이>가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깊이 아로새겨진 뿌리의식 속에 순舜의 위 대代이며 전욱顓頊의 아들들인 거호巨互나 속호束虎의 혈통血統을 잇고 있다는 관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주목 할 만 한 점은 이와 곁들여 <새> 문양文樣이 발견되는데 조이鳥夷 계열과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의 재확인이다(동작빈童作賓 은대적조서殷代的鳥書*호후선胡厚宣 갑골문상족조도등적유적 甲骨文商族鳥圖騰的遺迹과 갑골문소견상족조도등적신증거 甲骨文所見商族鳥圖騰的新證據).
4. 반경盤庚 다음부터 상商의 움직임은 관찰될 수 있는가?
이는 <DAVID KEIGHTLEY>의 공식公式을 통해 나타난 자료들을 활용하여 간접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도방남島邦男>이 찾아낸 <은허복사총류殷墟卜辭綜類>의 지명地名들을 바탕으로 Keightley가 만들어낸 <통치권 행사*영토 장악력*종교행사 주재主宰와 왕권王權의 존재를 보여주는 내용*연맹과의 전쟁 기록*무역과 공납貢納>이라는 사실과 관련성이 있는지? 있으면 이를 만족시키는 횟수를 곱하여 나온 수치數値를 가지고 200점이 넘는 지명地名만을 골랐다. 그 결과를 분석했을 때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보이는 군사행동의 방향과 맞아 떨어진다는 걸 알려준다.
총 16개의 지명地名 가운데 지역적 분포分布는 [하북河北 2 – 산동山東 3 – 하남河南 5 – 산서山西 5 와 섬서陝西 1]로 나타났다. 하북河北의 경우는 상商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지역임이 이번 분석에서도 확실하므로 예외例外로 친다면 산동山東은 제신帝辛 무렵에 이루어진 군사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상商의 진출 방향은 도읍에서 서편인 산서山西 ⇨ 섬서陝西 그리고 서북에서 중부에 걸치는 하남河南 지역이 거의 확실하다. 이 같은 사실은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이 정확함을 알려주는 지표指標이다.
빈도頻度로 보면 [하남河南과 산서山西의 지명地名들이 1144-6480]으로 압도적이다(산서山西와 섬서陝西 4*하남河南 3 –1098점을 얻은 하북河北의 우盂는 옮긴 도읍 부근 지역이다). 나머지 지역은 모두 [200-800] 사이에 있다(하북河北 1*산서山西1을 빼면 모두 산동山東과 하남河南 동부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의 무정武丁 기록]
12年 報祀上甲微(죽서기년竹書紀年)
32年 伐鬼方次于荊(죽서기년竹書紀年)
34年 王師克鬼方氐羌來賓(죽서기년竹書紀年)
43年 王師滅大彭(죽서기년竹書紀年)
50年 征豕韋克之(죽서기년竹書紀年)
※ 상갑미上甲微에게 제사祭祀한 기록이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의 원조遠祖이었던 그가 살림터로 삼았던 하수河水 북방으로 옮겼기 때문이며 시위씨豕韋氏는 전욱계顓頊系(돼지 시豕)와 순계열舜系列(위韋는 순舜의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의 결합 세력이다. 그리고 귀방鬼方은 신농계神農系이다.
5. 상商이 서부 경략經略에 힘을 쏟을 때 부딪친 동방족들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현존現存하는 갑골문甲骨文에 나타나는 상商 주변의 방方은 33개이다(도방남島邦男 은허복사연구殷墟卜辭硏究 384p-385p). 가장 많은 빈도頻度를 보인 공방(工 아래 口)方은 서북면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간간히 상商의 변경邊境을 습격하여 대미지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무정武丁은 이를 빌미로 무력행동을 하였다(때로는 6000명 규모였다 –이학근李學勤 은대지리간론殷代地理簡論 64p)
토방土方(터줏대감의 나라)은 산서山西 북쪽에 있었는데 무정武丁에 의해 통합되었다(도방남島邦男 은허복사연구殷墟卜辭硏究 388p-389p). 강방羌方(신농계神農系)은 무정武丁이 같은 동방계를 치자 반발하여 가장 치열하게 격전激戰을 벌인 세력으로 상商은 대규모의 군사행동이 잦았는데(때로는 13000명 정도) 그 때문에 잡힌 포로들은 주로 상商의 제의祭儀에서 대량大量의 제물祭物로 바쳐진 유일한 집단이다(진몽가陳夢家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述). 하남河南 서부를 남방 한계로 삼아 북쪽으로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지역에 널리 확산된 강력한 세력이다(진몽가陳夢家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述 282p*도방남島邦男 은허복사연구殷墟卜辭硏究 404p-495p). 이런 배경으로 주周가 상商을 극克할 때 중요한 연합 세력이 되었다. 지방旨方 zhĭ(어른 씨의 나라)은 섬서陝西 중부에서 강방羌方과 가까이에 있던 연합 세력이다. 무을武乙이 몸소 사령관이 되어 싸울 만큼 큰 규모의 전쟁이 잦았다(진몽가陳夢家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述 287p).
여방(雨 아래 西)方은 문무정文武丁 때 격돌激突하였는데(동작빈童作賓 은허문자갑편殷虛文字甲編 2907P) 한수漢水 지역에 있었다는 이학근李學勤의 견해가 정설定說이다(강홍江鴻 반룡성여상조적남토盤龍城與商朝的南土 45P).
여기에서 인방人方(어른 씨의 나라)에 대한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감히 엄두도 못내다가 상商의 끝 왕王인 제신帝辛에 이르러 두 번(8년과 10년)의 직접 원정遠征이 나타나는데 이 결과로 말미 암이 치명적인 국력國力의 약화弱化를 초래招來하여 결국 주周에 의해 멸망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도방남島邦男 은허복사연구殷墟卜辭硏究 391p). 강소江蘇와 산동山東에 걸쳤으며 회하淮河의 중류中流와 상류上流를 젖줄로 삼았다. 우방盂方은 도읍 북동쪽에 있던 매우 중요한 세력이었는데 필자筆者는 반경盤庚을 별안간 찾은 조이계鳥夷系 응후應侯로 짐작한다. 제신帝辛이 인방人方에 대해 적대적인 행동을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과 이 때문에 제신帝辛이 아주 중대한 군사적 행동을 하게 만든 세력이기 때문이다(동작빈童作賓 은력보殷曆譜 하下 vol 2 45p-46p*진몽가陳夢家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述 309p-310p).
이로서 상商을 둘러 싼 동방계열의 실체實體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장 북서부에 토방土方*그 아래쪽으로 산서山西 北部에 공방(工 아래 口)方*섬서陝西 중부와 그 아래로 하남河南 서북면에 강방羌方과 주周의 뿌리인 주방周方 그리고 지방旨方*남부인 한수수계漢水水系에 여방(雨 아래 西)方*동편의 산동山東과 회하淮河 일대一帶에 인방人方*하북河北 중부의 우방盂方 등이다.
정유丁酉...서쪽의 토방土方이 동쪽 국경에 이르러 두 마을에 피해를 주었다(癸巳卜...土方征于我東鄙 ○二邑)...기사己巳...공방이 75명의 인명피해를 내며 시래示○의 농경지에서 방목放牧했다(공방 亦侵我西鄙田)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청화殷虛書契菁華 2> 令三族(군사 목적으로 조직된 중앙군으로 본다)比沚聝(토방土方에 가까운 상商의 백伯이다)伐土方 受有祐 <굴만리屈萬里 은허문자갑편고석殷虛文字甲編考釋 상上 145p>
王勿...婦好伐土方 <방법감方法歛 고방이씨장갑골복사庫方二氏藏甲骨卜辭 237편片>
이 해 가을...양羊(강羌을 아예 신농계神農系 상징인 양羊으로 표현하고 있다)에 대한 군사작전을 이야기하려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장광직張光直 상문명商文明 인용> 次令五族(군사 목적으로 조직된 중앙군으로 본다)伐(羌+幺)方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후편殷虛書契後編 권하卷下 42엽葉 6편片>
己亥...三族王其令追旨方及于(干+日)*令王族追旨方及于...<윤내현尹乃鉉 상왕조사商王朝史의 연구硏究 인용
*호후선胡厚宣 전후남북소견갑골록前後南北所見甲骨錄>
癸巳...王其令五族伐(禾 아래 由 -서북방의 고을나라)...伐○ <곽말약郭沫若 은계수편殷契粹編 1149편片>
勿呼婦妌伐龍方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속편殷虛書契續編 권4 26엽葉 3편片>
比倉侯虎伐土方授有祐...侯告伐夷方...雀○(쳐들어갔다는 말이다)蔡方 <은허서계전편殷虛畵契前編 44엽葉 6편片>
그러나 이런 트러블은 하나의 빌미는 될 수 있어도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다. 보다 더 큰 문제는 갑골문甲骨文의 기록에서 무정武丁 때 산서山西 남부에 근거했던 세력군인 [여씨계인 악岳 yuè*환씨계인 견犬*전욱계인 관串 chuàn*큰 어른 나라라는 곽郭 quō*신농계인 악○*큰어른 골인 지沚 zhĭ*소호계인 작雀 quë]들에 대하여 상商이 같은 동방계보임을 앞세워 영향력을 확산시켜나가자 오랫동안 이들과 친밀했던 지방旨方*공방*강방羌方 등과의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진몽가陳夢家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述 291p-298p).
상商이 이 지역에 집요하게 눈을 맞춘 까닭은 그 무렵 무기武器나 제기祭器 등 제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동銅과 주석朱錫이 산서山西 남부지역에서 산출産出된다는 사실에 있었다(석장여石璋如 은대적주동공예殷代的鑄銅工藝*Noel Barnard &Satō Tomatsu Metallurgical remains in ancient China). [1]
특히 산서山西의 소금(해현解縣 로촌蘆村의 소금 늪)은 기마騎馬의 핵심인 말에게 없어서는 않되는 중요한 것이었는데 안양安陽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루트였다(호상운胡翔雲 전국최근염장록全國最近鹽場錄*장홍쇠章鴻釗 석아石雅 185p). 따라서 이 지역의 충성과 공헌도가 상商의 흥기興起와 주周의 주도권主導權 장악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는 게 정설定說이다(진몽가陳夢家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述 312p).
[1] 안양安陽에서 400km 반경半徑의 28 군데의 동급鑛 가운데 거의 절반이 17 곳의 주석광朱錫鑛 가운데 6개가 이 지역에 있다.
※ 갑골문甲骨文은 동작빈童作賓이 내용 가운데 보이는 <세계世系*칭위稱謂*정인貞人*갱위坑位*방국方國*인물人物*사류事類*문법文法*자형字形*서체書體> 등 10개의 분석 표준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5기期로 나눈 것이 정석定石이다. 즉 [1기期는 반경盤庚-소신小辛-소을小乙-무정武丁] [2기期는 조경祖庚-조갑祖甲] [3기期는 품신稟辛-강정康丁] [4기期는 무을武乙-문무정文武丁] [5기期는 제을帝乙-제신帝辛]이다(동작빈童作賓 갑골문단대연구례甲骨文斷代硏究例 324p).
지금까지 이야기한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이제부터 원문原文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앞으로 기록 분석을 통하여 반경盤庚이 안양安陽으로 옮겨 동방계 큰 어르신의 배려로 세력을 다시 일으키는 가운데 무정武丁에 이르기까지인 갑골문甲骨文 제1기에서 줄기차게 받들었던 <상제上帝>란 이름이 무정武丁의 서방 공략攻略으로 말미암아 미운 털이 박혀 그 뒤 제2기부터 차츰 사라져가는 걸 볼 것이다. 특히 눈여길 점은 [상제上帝]가 상商에서 인식하고 있던 다른 신神들처럼 제사祭祀가 받들어진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에 천天과 같은 의미라면 말이다. 따라서 상제上帝는 신격神格이 아닌 실체實體를 말하는 것이다. 뒷날 인방人方을 공격하면서 이 존재를 무시한 제을帝乙과 제신帝辛이 비로소 스스로에게 [제帝]를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1]
[1] 제신帝辛의 인방人方 공격은 8년에 10개월*10년에 8개월에 걸쳐 진행된 대규모였다(도방남島邦男 은허복사연구殷虛卜辭硏究 403p).
두 번째로 제신帝辛이 인방人方을 공격할 무렵 소신小臣 [여艅]의 존재가 보이는데 분명히 전욱계顓頊系 중여衆艅 곤鯀의 묘예苗裔 세력이다. 핵심 집단인 소신小臣의 지위를 가진 걸로 짐작컨대 상商에 포용包容된 시기가 오래되었을 듯하다. 동방계열과의 굳은 결합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事例이다.
丁巳 王省夔祖 王易(賜)小臣艅夔具 唯王來征人方 唯王十祀五彤日 -소신여준小臣艅尊의 명문銘文 <나진옥羅振玉 삼대길금문존三代吉金文存 하下 1169p>
이처럼 갑골문甲骨文을 바탕으로 살펴볼 때 결국 반경盤庚이 하수河水를 넘어 북쪽에 도읍을 만들면서 상商의 협력 세력으로 나타나는 <씨>들은 모두 동방계열임을 밝혀준다. 이를 적어본다면 [큰 세력이라는 기夔 kuí*여씨계인 악嶽 yué*~루씨 마을인 여방呂方 lŭ*왕해王亥의 묘예苗裔인 해亥 그리고 씨 마을인 혜兮 xī*큰 마을인 고高 gāo와 고槀 găo*신농계인 용龍 lóng*어른 마을인 계雞 jī*전욱계 마을인 아我*虫+虫]으로 모아진다. 이들 세력은 모두 [어른의 이름=씨의 이름=고을나라 이름]이라는 동방계의 모범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步于嶽(지명이다) <호후선胡厚宣 갑골육연甲骨六緣 48편片>
使人于嶽(자명이다)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전편殷虛書契前編 권1 50엽葉 6편片>
丙子卜 呂貞 呼○呂 <호후선胡厚宣 l권1 570편片>
王其呼亥秦 <경도대학인문과학연구소장갑골문자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藏甲骨文字 2158편片>
侑于 ll (지명이다)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전편殷虛書契前編 권1 53엽葉 2편片>
王...乙丑其祐升歲于袒乙白牡 王在 ll(지명이다)卜 <곽말약郭沫若 은계수편殷契粹編 235편片>
貞 令 ll(씨족 이름이다)...○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후편殷虛書契後編 권하卷下 26엽葉 12편片>
賓貞...ll方(고을 나라 이름이다)...山 <나진옥羅振玉 은허서계전편殷虛書契前編 권5 14엽葉 7편片>
특히 [十 아래 묘]는 무정武丁 때는 중요한 제사祭祀를 주재主宰하고 강정康丁에 이르는 기간까지 매우 비중 있는 정인貞人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런데 [제2기] 갑골甲骨에서는 지명地名으로 나오는데 상商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던 세력이 모범적인 동방계 언어구조를 보여주고 있음을 밝혀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세력은 제신帝辛이 인방人方을 공격하던 [제5기]에 들어서면 완전히 등을 돌려 적대敵對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불을 보듯 환하다(은허복사연구殷虛卜辭硏究 422P).
[제1기] 己亥卜 爭貞 [十 아래 묘]侑于袒 <전수당소장은허문자戩壽堂所藏殷虛文字 25엽葉 12편片>
[제2기] 己亥卜 行貞 王賓父丁歲○ 亡尤在[十 아래 묘] <은허문자갑편殷虛文字甲編 3510편片>
참고로 상商에 봉사한 후侯는 35*백伯은 39이며(이들은 중심지와 그 부근 일대에 퍼져있었다) 방方 가운데 결합된 것은 24*적대敵對한 세력은 36이다(은허복사연구殷虛卜辭硏究 422P-423p*433p*441p). 언제든지 상商의 행동에 따라 느슨해지거나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아울러 인방人方을 공격한 시기를 기점起點으로 이탈하거나 강력하게 압박한 세력이 무려 9개라는 사실은 동방계열의 배반감과 노여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준다.
나라의 터줏대감으로서(台) 온 누리를 바로잡기엔 덕德이 견주지 못할까(弗類) 이 사람은(台) 두렵습니다. 그래서 어른으로서(玆故) 말을 삼간 것입니다. 공손하고 묵묵히 [이를 풀어 낼] 길을 생각하다가 꿈에 상제上帝께서 이 몸에게 뛰어나고 어진 대들보(보필輔弼)를 내려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제 말을 대신代身하여 전傳할 것입니다.
以台 正于四方 台恐德弗類 玆故 弗言 恭黙思道 帝賚予良弼 其代予言...<열명說命 상上>
① [이台 tãi]는 소리로 <터*터전>이다.
이 부분은 필자筆者의 상상력이 섞인 짐작으로 보아주었으면 한다. 앞선 기록에도 아주 드물게 나타났지만 무정武丁에 이르면 <나>라고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이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어휘語彙는 그가 삼촌인 소을小乙의 상喪을 치루면서 3년간 입을 열지 않아 답답한 신하臣下들이 간언諫言을 하자 글로서 답答할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온 <소리글자>이다.
❶ 상商의 중흥기中興期를 이루었고 가장 많은 군사 활동을 했으며 통치관습과 제의祭儀 형식을 크게 정돈하여 모델링하였으며 갑골문甲骨文을 가장 많이 남긴 기록주의자였다.
❷ 그는 반경盤庚의 조카이다. 그러므로 반경盤庚의 응어리 진 속마음과 굳은 의지意志 그리고 부흥復興의 염원念願이 담겨졌던 천도遷都의 의미를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❸ 그는 자리에 오르기에 앞서 오랫동안 밖에서 소인小人(갑골문甲骨文엔 이 부류部類가 없다. 사기집해史記集解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孔安國曰 勞是稼穡 與小人出入同事也*馬(鬲+刂)曰 有所勞役於外 與小人從事 知所人艱難勞苦也』라 기록되었다) 들과 어울렸다. 정사政事와 민심民心에 대한 관찰 과정인데 반경盤庚도 여중汝衆(씨 어른이나 친위親衛 세력)이 소인小人들과 함께 휩쓸리자 이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고 있을 만큼 비교적 왕실王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며 왕권王權의 향방向方에 일정한 역할을 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있으면서 친근한 뜻으로 불렸거나 스스로 일컬었던 자신의 칭호稱號를 가지고 있었음 직 하다.
❹ 개혁과 부흥復興의 뜻이 강한 그가 [王宅憂亮陰三祀 旣免喪 其惟弗言 -사기史記도 이와 같은 내용을 특기 特記하고 있다]하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기존旣存의 신하臣下들에 대한 재평가와 쇄신刷新을 위한 관찰과정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그가 아래 사람들의 궁금증을 극대화시킨 다음 가장 먼저 내린 글이 자신을 부르는 칭호稱號에 관한 <이台>와 정치적 구심점求心點을 만들 인물로 생각한 <부열傅說>였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❺ 그러므로 그가 처음으로 제시提示한 [태台]는 소인小人들과의 생활 속에서 끈끈한 존칭尊稱으로서 나타나고 익숙해진 [터줏대감 혹은 이 사람은]이라는 대화체對話體로서의 인칭대명사人稱代名詞였을 것이다. 무정武丁 무렵에 그동안에도 간간히 보이던 [이台]가 별안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무정武丁의 기록을 보면 지극히 자신의 의지를 보이거나 일신一身의 문제에 관하여 말할 때는 어김없이 [이台]라고 말하고 있다(命之曰 朝夕納誨 以輔台德 -서경書經 열명說命 상上).
[부열傅說]의 문제는 무정武丁이 담고 있는 모든 뜻과 의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대들보 감을 찾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자리에 오르면서 갑자기 헤아렸을까? 아마도 소인小人들과 어울리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찾았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소인小人들과의 귀동냥을 통하여 부열傅說의 소문이 잡혔음이 틀림없다. 즉 꿈은 그가 자연스럽게 등장할 극적인 무대장치일 뿐이다. 부열傅說은 우虞와 괵虢 사이에 있던(傅巖在虞虢之間 -집전集傳) 부암傅巖의 들에서 노역勞役을 하고 있었다가 불려졌다(說 築傅巖之野 -서경書經).
만일 약藥이 엉성하여 듣지 않으면(弗瞑眩) 병이 낫지 않으며 만약 발이 땅을 살피지 않으면 그 발을 다치게 할 것이오...이에(乃) 어르신(辟)을 바로잡아(匡) 선왕先王인 비씨肥氏 어른의 [가르침을] 좆으며 우리 고후高后(成湯)의 길을 따라 나아가(迪) 온 누리를 편안하게 하시오.
若藥弗瞑眩 厥疾弗瘳 若跣弗視地 厥足用傷...以匡乃辟 俾率先王 迪我高后 以康兆民...<열명說命 상上>
① 여기에서 다시 [어르신 벽辟]이 나타나는데 앞서 탕湯이 비씨계열과 친연성親緣性을 보인다고 설명한 바와 같이 그를 언급할 때는 늘 <벽辟과 비俾>가 세트로 나타난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전한前漢의 양웅揚雄이 지은 [양자방언揚子方言 -일반적으로 방언方言이라 한다]에서 <약을 마셔 독이 있는 걸 해대海岱에서는 명현瞑眩이라 한다. 飮藥而毒 海岱之間謂之瞑眩>라고 기록하였는데 분명히 그들 사이에서 통하는 말소리를 듣고 소리가 비슷하게 나는 한자漢字로 표현한 것이다. 이 문단文段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❶ 해대海岱 지역은 전통적으로 동방계의 텃밭이다. 여기에서 서로 통용通用되는 말이라 함은 우리말소리 값이란 뜻이다. 이를 그대로 들어 표기表記한 [瞑眩 míng-xuàn]은 순 우리말로<멍청한*멍한 또는 엉성한>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우리말에 <민숭민숭하다-맹숭맹숭하다>란 사투리가 남아있다. 약藥이 잘 듣지 않으니 그런 푸념이 자연스럽게 나왔을 것이다.
❷ 이런 말 습관이 지금 무정武丁과 부열傅說 사이에서 서로 전혀 어색함 없이 오가고 있다(스스럼없이 자기네들끼리만 통하는 명현이라는 방언方言을 썼고 이를 부열傅說도 금방 알아들으리라 믿고 있다는 분위기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무얼 말하는가? 상의 뿌리나 부열傅說이 모두 동방계열이었다는 이야기이다. [傅說 fù-yue]은 우리식 이름으로 보면 <여씨의 아비 어른인 부여父餘>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어지는 [선跣과 족足]도 댓 구對句를 이루면서 동방족의 소리글자로 풀어지게 된다. 즉 신농계神農系에서 만들어 낸 [족足 ⇨ 족族]의 관념을 빌어 발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족族의 바탕이 흔들린다는 표현으로 본다. 갑옷과 투구를(甲冑) 늘여 세우면(惟) 융적戎狄을 일어나게 할 것이니 벌여 놓은(惟) [이런] 겉옷가지들은 상자에 넣어두시고 늘여 세운(惟) 창과 방패들은 몸소(躬) 살피시어(省) 어르신(王)께서 [한 나라의] 어른(玆)으로서 경계함을 꾀하십시오. 진실로(允) 어른으로서 능히 현명賢明하실 때(克明) 이에 따라(乃) 편안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惟甲冑起戎 惟衣裳在笥 惟干戈省厥躬 王惟戒玆 允玆克明 乃罔不休 <열명說命 중中>
이 대목은 앞서 전제前提로 이야기한 무정武丁 때의 군사적 움직임을 머리에 담고 헤아려야 할 듯하다. 무정武丁이 서부지역에 대한 무력행동을 생각하자 간곡하게 타이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같은 계보系譜끼리 부딪쳐보아야 아무런 이로움이 없으며 오히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세력에게 좋은 빌미를 주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생각을 정당(善)하게 한 뒤에 움직이시고 움직임은 그 때를 맞추셔야 합니다. 慮善人 動惟厥時]나 [도리에 맞다고 여길 때 그 정당함을 잃어버리고(喪失) 재능이 있다고 뽐낼 때(矜持) 그 공功을 잃게 됩니다. 有其善喪厥善 矜其能喪厥功]는 모두 그 연장선에서 부열傅說이 충언忠言으로서 권고하는 것으로 본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랑하는 마음을 열어 놓되 업신여기는 것까지 받아들이지는 마시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지나쳐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無啓寵納侮 無恥過作非]와 [살아가는 데를(居) 여유롭도록(攸) 꾀하여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순조롭게 도모할 수 있습니다. 惟厥攸居 政事惟醇]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분수에 넘치게 일을 벌여 자신의 씨들까지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차라리 일을 꾸미지 않음만도 못하다는 경고警告이다.
이 사람 작은 어른은...나의 의지를 우리 얼(爾)들에게 가르치도록 꾀하여 만일 술과 단술을 빚으려 하면 그 얼들에게 누룩과 엿기름이 되어주고 만약에 조화로운 국을 만들려 할 때는 우리 얼들의 소금과 매실이 되어주시오. [그래서] 우리 얼들도 내가 수신修身하는 것처럼 서로 주고받도록 하여(交) 나를 버리지 말게 해주시오. 나도 이 가르침을 능히 행하도록 꾀하겠오...그 얼이 선왕으로부터 이 어르신에게 능히 이어지도록 하여 사람들이 길이 편안하도록 해주시오.
台小子...爾惟訓于朕志 若作酒醴 爾惟麴糱 若作和羹 爾惟鹽梅 爾交修予 罔予棄 予惟克邁乃訓...其爾克紹乃辟于先王 永綏民 <열명說命 하下>
① [이아爾雅 석언釋言]에서 <매는 가다*행하다. 邁...行也>라 했다.
분명히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없었던 까닭을 스스로 말하면서 비록 감반甘盤에게는 배웠으나 소인小人들과 더불어 [황야荒野-하수河水-박亳]으로 떠돌아다니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반성하는 가운데 [이台]라는 호칭呼稱으로 말하고 있다. [이爾]에 관하여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고종융일高宗肜日 -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고종高宗(武丁)의 제사 다음날 구씨 어른 세력이 넘어왔다. <조기>가 말하길 먼저 어르신을 바로잡고 그 일을 바르게 하겠다. 라고 하였다. 高宗肜日 越有雊雉 祖己曰 惟先格王正厥事...<고종융일高宗肜日>
신농계神農系로부터 비롯되어진 [시동尸童 -씨아기]은 [삼대일계三代一系]라는 동방적인 관념에 따라 손자孫子를 제사상에 앉히고 아들이 제주祭主가 되므로 시동尸童을 시주尸主라고도 한다. 그리고 본제本祭를 마친 다음날 시주尸主를 위한 제의祭儀를 하는데 이를 상商에서는 <융肜 róng>이라 하고 주周는 <역繹 yì>이라 하였다. 상商은 동방계열이기 때문에 원래 소리 값대로 [신농씨神農氏의 제례祭禮]라는 존경의 뜻으로 농農 nóng의 소리대로 읽었으며 주는 이것을 동방족의 관습이라 하여 <~이 혹은 여>로 쓴 것이다. 무정武丁은 동방의 풍습대로 바로 이 융제肜祭를 받고 있다. 그런데 제삿날에 <꿩 –장끼>이 우는게 무엇이 이상할까? 더욱이 융일肜日은 본本 제사 다음 날에 올리는 것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를 이변異變이라고 구태여 기록하였다는 점(高宗肜祭有雊雉之異 -서序)은 분명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금 더 이상스러운 건 한족漢族들은 한결같이 [雊雉]를 <장끼가 울다>라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분명히 <장끼가 울 구雊+꿩 치雉>란 이중설명구조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또 원문原文의 소리글자를 훼손毁損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글자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열쇄를 찾아낼 수 있다.
[치雉 zhì]는 우리말로 <어르신 ~지>이다. 그러므로 [雊雉]는 <장끼란 상징이름을 가진 조이계鳥夷系 어른>이다. 실제로 갑골문甲骨文의 방方 이름을 보면 이런 형태의 이름을 지닌 동방계 세력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은 고종高宗 즉 무정武丁의 근사적 움직임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던 방方이었을 것이다. 무정武丁 시대인 [제1기]에 상商에 무릎을 꿇었거나 친밀했거나 협력관계를 이룬 방方들은 16개로 나타나는데 [제2기]인 조경祖庚 이후부터 11개의 방方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좀더 정교하게 분석해볼 때 2기 다음에 새로 추가된 7개(2기 1*3기 3*4기 3)를 빼면 겨우 4개의 방方으로서 급격하게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한 방方들이 상商의 영향력에서 이탈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데 무정武丁 무렵에 적대적인 관계로 나타나 [제5기]에 이르기까지 1회回 이상 기록으로 남겨진 방方은 8개이다. 그 가운데 [제4기]까지 시종일관 적대적이었던 방方은 단 하나이다. 특히 이 방方은 본문本文의 사건史件이 발생한 시기인 [제2기]에는 홀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한 혐의嫌疑를 받을만 하다(은허복사연구殷虛卜辭硏究 422P-423P*433P*441P 참고).
조을祖乙이 하는 말은 왜 이런 일이 터졌는지? 근본을 캐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를 하나하나 밝힌 다음 어른의 허물이 있으면 바로잡고 무엇이 불만인지? 따져 일을 올바르게 매듭짓겠다는 이야기이다. 즉 [격格]은 동방계의 침입사건을 계기로 은근히 무정武丁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무력적인 도발행위를 나무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집전集傳]에서도 속사정이야 어떻건 간에 <나쁜 마음을 바로잡는다. 格正也 猶格其非心之格>라 해석한 점은 옳다고 본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文章에서 조을祖乙은 <생각건대 높으신 아비나라에서 아래 사람을 살펴볼 때 올바른지를 본보기로 삼는다. 惟天監下民 典厥義...>로서 왕王의 몸가짐을 은근히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아래 사람 민民]으로 비추어 꾸짖고 <사람들이 덕을 따르지 않으며 허물을 귀담아 듣지 않으니 아비나라에서 참되고 믿을만한 말씀을 내려 덕을 바로잡아 주시는데 이를(乃) 그것이(其) 이 사람을 어찌하겠는가(如台)?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民有不若德 不聽罪 天旣孚命 正厥德 乃曰其如台>라 하여 이번 사건史件이 올바르지 못한 덕德을 행한 결과로 빚어진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백감여西伯戡黎 –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서백西伯은 주周 문왕文王 희창姬昌이다. 그가 <여黎>를 쳐서 이겼는데 이를 [집전集傳]에서 노골적으로 <여가 도를 넘은 짓을 하므로 군사를 내어 이기자...黎爲不道 於是 擧兵伐而勝之...>로 해석한다. 철저한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思考이다. 아무튼 이 기록은 [서경書經]의 말대로 <서백이 여를 정벌하자 조이가 두려운 마음으로 달려가 왕에게 말을 올리다. 西伯旣戡黎 祖伊恐 奔告于王>한 글귀이다. 지금 우리 백성들은 喪心하지 않는 이가 없어 말하기를 아비나라는 <가라>에게 위엄을 내려주시지 않으며 큰 말씀을 받은 어른이 없는가? 지금의 어른은 그게 이 사람을 어쩌겠는가? 라고 한다 합니다.
今我民 罔不欲喪曰 天曷不降威 大命不摯 今王其如台...<서백감여西伯戡黎>
① [지摯 zhì]는 소리로서 <어른 ~지>이다.
필자筆者는 [天曷不降威 大命不摯]를 사람들이 바라는 속마음을 나타내주는 키 포인트라고 본다. 그래서 <갈曷>은 우리말 [가라]로 <지摯>는 [어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래야 문맥이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중대한 순간에 스스로를 크게 드러내는 뜻이 강한 [이台]가 어김없이 그리고 다시금 등장한다. 왕이 말했다. 오호라! 나의 삶은 아비나라에서 나오는 말씀에 있는 게 아니다. <조이>가 되받으며 말했다. 아하! 이런(乃) 많은 허물들이(罪多) 그곳에(上天) 나열羅列되어 있는데(參在) 이렇게(乃) 아비나라의 말씀을(命于天) 따져서 능히 밝힐 수 있으십니까(能責)? 은殷이 곧 없어질 터인데 이 공功은(乃功) 어른에게 있으니(指) 우리 얼이 서린 나라에(爾邦) 벌罰은 없다고 하지는(無戮) 못하실 것입니다.
王曰 嗚呼 我生不有命在天 祖伊反曰 嗚呼 乃罪多參在上 乃能責命于天 殷之卽喪 指乃功 不無戮于爾邦 <서백감여西伯戡黎>
① [지指 zhĭ]는 소리로서 <어른 ~지>이다.
갑골문甲骨文의 기록을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제신帝辛 무렵의 서풍書風이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하고 정돈되었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는데(갑골문단대연구예甲骨文斷代硏究例 423p) 아울러 모든 기록에서도 이 시대의 제도制度*사회구조社會構造*통치형태統治形態*군제軍制와 정벌征伐*전렵행사田獵行事*제사의식祭祀儀式 등이 가장 잘 정비되었으며 엄숙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왕권王權의 강화되었음을 지적한다(동작빈童作賓 논상인이십일위명論商人以十日爲名 대륙잡지大陸雜誌 제2권 제3기 10p).
그러므로 제신帝辛이 포학暴虐하고 음탕淫蕩하며 무능력하다는 설명(서경書經 진서秦書와 목서牧書*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은 한족漢族의 정신적인 뿌리인 주周를 의식한 상商의 정벌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잘 꾸며진 무대장치로 여겨진다. 마치 하걸夏桀의 말기末期 상황을 그대로 베낀 듯한 상주商紂의 행동이나 폭정暴政 그리고 탕湯과 문왕文王이 갇혔다가 풀려난 사건史件들이 주周의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잘 짜여 진 시나리오를 보는 듯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제신帝辛은 결코 <亡國之君>이 아니며 오히려 야망이 크고 독선獨善이 넘치는 면은 있는 똑똑하고 명석明晳한 어른이었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다(동작빈童作賓 논상인이십일위명論商人以十日爲名 대륙잡지大陸雜誌 제2권 제3기 10p).
<소식蘇軾>도 이 부분에서 <조이祖伊의 간언間言이 모두 다 말하고 숨기는 게 없어 한漢과 당唐의 보통 군주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왕紂王이 비록 고치지는 않았으나 끝내 노여워하지 않아 조이祖伊가 온전하였으니 후세後世의 군주는 주왕紂王만도 못한 자들이 많다. 蘇氏曰 祖伊之諫 盡言不諱 漢唐中主 所不能容者 紂雖不改 而終不怒 祖伊得全 則後世人主 有不如紂者多矣 -집전集傳>라 하며 제신帝辛이란 인물이 무능無能한 폭군暴君이 아니었음을 말했다.
8년의 10개월*10년의 8개월이라는 연이은 인방人方 정벌전이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병력 규모 또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였음을 볼 때 제신帝辛 몰락沒落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 사건으로 빚어진 급격한 국력탕진國力蕩盡과 국세약화國勢弱化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여 진다. 더구나 긴 기간 동안 동방에 눈길을 돌리는 바람에 서부지역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진 탓도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다. 주周가 그곳에서 세력을 결집結集하는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원문原文으로 돌아가자. 제신帝辛은 분명하게 상제上帝와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이러한 태도를 <조이祖伊>가 매우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독선獨善을 부린 허물은 모두 제신帝辛 그대에게 있으며 바야흐로 그런 행동에 대한 징벌懲罰로서 상商이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이는 마당에 그걸 끝까지 아니라고 우길 것이냐? 는 질책叱責이다.
미자微子 -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미자微子 계啓는 미微 나라의 자子인 <계啓>라는 말이다. 제을帝乙의 맏아들이며 주紂의 배다른 형님이다. 상商이 장치 무너질 것이 불을 보듯 환하자 이를 슬프게 여겨 기자箕子와 비간比干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걸 기록하였다. 조선朝鮮이 토벌하라는 말씀을 내리어 우리 은방을 황폐화시킬 것인데 우리 방은 흥청망청하여... 天毒降災 荒殷邦 方興...<미자微子> 여기에서 상왕조商王朝를 이룩한 씨氏 가운데 하나이며 그 뒤에도 왕실王室의 한 축軸으로 일정한 역할을 한 [비씨 계열]을 다시 한 번 짚어보자. 성탕成湯이 이들과 연결되었음을 이야기 하였지만 상商 말기末期 까지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던 <비씨>들은 비간比干*비중比仲*비렴飛廉 등이 나타나는데 아마도 우리 도가사서道家史書에 기록 된 <풍백風伯 비렴蜚廉 -운사雲師 회록回祿*우사雨師 거야鉅野와 함께 치우蚩尤의 삼사三師로 나온다> 계통으로 보인다. 비렴蜚廉 세력이 대륙으로 진입하여 안정된 씨로서 세력을 이룬 본보기로서 <사비시奢比尸 -해외동경海外東經과 대황동경大荒東經*거비시據比尸 -해내북경海內北經*장비국長臂國 -해외남경海外南經*일비민一臂民과 일비국一臂國 -해외서경海外西經과 대황서경大荒西經>이 [산해경山海經]에 보인다.
이들을 상징한 신수神獸로서 [비유肥遺 –북산경北山經*비유사肥(虫+遺)蛇와 비유肥遺 –서산경西山經*비익조比翼鳥 -해외남경海外南經과 대황서경大荒西經]가 기록되었음은 이미 이야기했다. 이 가운데 불함산不咸山이 있는 숙신씨국肅愼氏國에 있다는 비질蜚蛭 zhì은 <풍백風伯 비렴蜚廉 세력의 어른>이니 [비렴-숙신씨-비질-비씨]라는 등식等式이 정교하게 이루어진다(대황북경大荒北經). 바로 상商의 뿌리가 생겼으며 확장된 지역과 연결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이어지는 비인肥人*비여씨肥如氏*비리卑離*부여扶黎*비류씨沸流氏들이다.
본문本文으로 돌아가자. 아주...아주 특별한 문구文句가 보이기 때문이다. [天毒降災]인데 한족漢族은 <하늘이 독하게 재앙을 내려>라고 해석하면서 [집전集傳]도 이를 거들어 <주紂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가 무도無道하여 하늘이 재앙災殃을 내린 것이며 천하天下의 입장으로 보면 주紂가 무도無道함은 하늘의 운수運數이다. 기자箕子가 이렇게 하늘에 돌려 말한 것은 충후忠厚하고 군주君主를 공경恭敬하는 뜻을 말한 것이다. 曰紂言之則紂無道 故天降災 自天下言之則紂之無道 亦天之數 箕子歸之天者 以見其忠厚敬君之意>라고 맞장구친다.
왜 다른 모든 내용에서 개인적으로 성품性品이 극악무도極惡無道하다고 표현한 주紂를 여기에서는 그 탓을 하늘에 돌리는가? 어째서 하늘의 운수運數인데 하늘이 스스로 운명運命을 만들고 또 그걸 빌미로 삼아 <독한> 마음으로 재앙災殃을 내리는가? 나라의 어른이나 한 나라를 걸고 게임을 즐기시는가? 하늘이 정한 운수運數가 그렇다면 관여關與안해도 될 터인데 어찌하여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독한 마음>을 강조하며 이중적인 재앙災殃을 또 내리는가? 이 모든 원인은 [천독天毒]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일부러 감추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 첫머리에 <동해 안쪽 북해 모퉁이에 조선천독이란 나라가 있다. 東海之內北海之隅 朝鮮天毒>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天毒]을 <곽박郭璞>은 천축국天竺國으로 <원가袁珂>는 오기誤記라고 얼버무렸지만 [산해경山海經]의 기록이야말로 정확한 설명임을 바로 [서경書經]의 이 대목이 말해주고 있다. 필자筆者는 앞서 이를 [하늘같은 독기纛旗를 상징으로 삼은 조선朝鮮]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 말을 한 당사자當事者야말로 <기자箕子>였으니 더욱 신빙성을 더해준다. 그래서 기자箕子는 똑 부러지게 그리고 노골적인 표현으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이 토벌討伐이라는 징벌(誅罰)을 내릴 것이다. 天毒降災 -그러므로 재災를 재앙災殃이라는 추상적인 상황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자箕子가 역시 공자孔子보다 낫다. 이어지는 내용이 [은방殷方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荒殷邦]이라고 한 까닭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물론 기자箕子는 분명히 [방邦이 아닌 방方]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조선朝鮮을 중심으로 볼 때 <방方>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商이 독선獨善으로 나갈 때 인방人方으로 높여 부른 동방계의 대륙 중심을 인식하여 스스로를 높일 적에도 [대방大方]이라고 했다. 이제는 [천天*황천皇天*상천上天*상上 - 제帝*상제上 그래서 필자筆者는 [선鮮 xiăn]도 이쯤에서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학자學者들이 한족漢族의 농간에 넘어가 수없는 설說을 만들어 스스로 진구렁에 빠져 더욱 더 해석을 어렵고 어지럽게 한 <선鮮>은 [천天 tiān]이라는 소리글자의 딘순한 변이變異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데도(乃) 두려운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 늙은 장로長老로서 예부터 지녀온 어른(人)으로서의 위치位置를 어긴 것입니다. 지금 은나라 사람들이 <신지>에게 바치는 희생물들을 훔치고 빼앗아도 용인容忍해주고 있으나 가져다 먹어도 뒤탈이 없습니다.
乃罔畏畏 咈其耈長舊遺位人 今殷民 乃攘竊神祗之犧牷牲 用以容 將食無災...<미자微子>
[기자箕子]가 말하려는 내용은 무슨 <공자孔子가 말하는 군자君子의 세 가지 두려움(천명天命*대인大人*성인聖人의 말씀)>란 말장난이 아니다. 그저 눈앞에 닥칠 조선朝鮮의 말씀을 받든 무력행동일 뿐이다.
어느 누가 미자微子가 마음이 급박急迫해서 찾아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자는데 한가롭게 공자왈 맹자왈 하고 있겠는가?
기자箕子는 미자微子의 직선적인 물음에 직접적인 답答을 준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고 있는 <신지神祗>도 동방계열의 어휘語彙로 보아야 한다. 즉 제신帝辛의 묵인黙認 아래 동방계의 일상적인 관행慣行에서 일탈逸脫하고 있는 현실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분은 이러한] 은나라 사람들을 살펴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원수怨讐처럼 거두어(讐斂) 다스려질 것입니다(用乂). 적이나 원수처럼 되는(敵讐) 결과를 가져오는 데에만(召) 게을리 하지 않아 허물이 모여 하나가 되었으니 [이렇게] 어른들은 많은데도(多瘠)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降監殷民 用乂讐斂 召敵讐不怠 罪合于一 多瘠罔詔...<미자微子>
① [척瘠 jí]은 소리로 <어른 ~지>이다.
[降監殷民]은 앞의 <今殷民>에 대응對應한다. 그런 은민殷民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제신의 인방 공격과 나라 안에서 조선의 영향력을 없애려는 움직임에 대한 보답은 마치 원수怨讐를 대하듯이 맞는 철저한 취급取扱이라는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