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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괘방산 산행기
겨울 산행
괘방산 산행 출빌 집결지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짓눈께비가 날리고 있었다. 이번에 가는 산이 동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 보이는 것을 기대하고 참가 신청을 했는데 난감한 기분을 느끼며 조금 일찍 교대역에 도착했다. 해가 늦게 뜨는 계절이긴 하지만 찌뿌등한 날씨라 아직 밤중처럼 주변이 깜깜했다.
차에 오르며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앞쪽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길옆 가게이세 도시락과 물을 사는 것으로 산행 준비를 마쳤다. 어제 새벽 3시에 잠을 자고 서둘러 나오느라 아이젠 등을 재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평소 가급적이면 등산 기구들을 쓰지 않고 내 몸으로 균형을 잡으며 걷고 싶었기 때문에 별 염려는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차가 출발했다. 작년 말 등산동호회 임원진이 바뀌었지만 이번에도 이득우 전 재무가 깁밥 배급과 일정 소개 등 여전히 수고를 해 주었다.
영동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가는 동안 창밖을 보니 구름이 잔득 끼어 있었다. 그래서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볼 생각을 아예 접어야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대관령을 넘어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다행히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 지점에서는 맑은 햇살에 파란 하늘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동해가 마당처럼 보이는 산을 오르는 풍경이 상상되었다.
11시 산행 출발 지점인 강릉시 강동면 안인리 바닷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차한 안인은 강릉 지역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실기 시작한 곳이다. 현재의 강릉 지역 내 영곡면 영전리, 서천면 가둔리, 판교리 강동면 안인리, 하시동, 강릉시 토성지와 지변동, 교동, 안현동, 옥계면 금전리 등의 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중기 단계의 토기 파편들이 출토되었는데 선사시대 유물들은 대부분 이 곳처럼 바닷가나 호수, 하천 유역에서 별굴되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 강릉 지역에 예국(濊國)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 이 지역에 족장사회 집단의 연합체인 군장 사회 집단이 출현하는 시기는 초기철기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1991년에는 이 곳 강동면 안인리 유적지에서 모두 32기의 초기철기시대 주거지 유적이 발굴 조사된 적도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번갈아 이 지역을 차지하였는데 장수왕 이후에는 신라의 영향권이 되었다. 신라 내물마립간 시대의 기록에는 하슬리의 가뭄으로 기근이 심하여 세금을 면제해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이 곳이 신라의 행정구역 내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태종무열왕때 하서주로 되었다가 통인신라시기인 경덕왕16년(757)에 명주라 개명되었다.
강릉지역이 신라시대 중요하게 부상되는 것은 왕위계승 경쟁에서 밀려 이곳으로 와서 명주군왕으로 봉해지면서부터이다. 그리고 명주를 비롯하여 양양, 삼척, 울진 등을 식읍으로 받아 강릉지역에서 독자적인 지방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명주가 동원경으로 개칭되었다가 940년 다시 명칭이 명주로 환원되었다. 고려 원종 때는 강릉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강릉대도호부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413년 태종13에 전국이 팔도로 나뉘면서 강원도 에 소속되었다.
바람 부는 바우길
차에서 내리니 매우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산행 지도를 보니 ‘고루포기산’이란 지명이 보였다. 그 지명을 보면서 가슴이 에어오는 듯 한 느낌이 느껴졌다. 몇 년 전 그곳에서 나의 산행 경험중 가장 위태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날은 일행과 이틀 동안 두 구간을 걷기 위해 갔다가 혼자 따로 하루에 50km 정도를 걸어 대관령 구 휴게소로 내려온 날이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와 1m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비로 흔적이 지워진 산길을 더듬거리며 막바지 고루포기산을 오르니 2km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 곳을 가까스로 걸어 나와 택시를 타고 강릉으로 가서 밤 11시 30분차로 서울로 돌아왔었다.
오늘 같은 추운 한겨울, 강풍을 맞으며 산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난스런 일정이 될지 의식 되면서 바짝 긴장이 되었다. 화장실에서 내의부터 겹쳐 입은 옷들을 차례로 갈무리해서 세찬 바람에 한기가 들지 않도록 옷매무새를 고치고 가파른 계단 길로 산행을 시작했다. 오르다 보니 점차 시야가 시원스레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을 위식하다 보니 바다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 움츠러든 조심스레 오름길을 올랐다. 조금 걷다보니 능선이 나나났다. 거기서 직진과 좌측의 두 갈래 길이 나왔는데 이정표가 없어 망설이다 지도를 보니 정동진까지 진진 코스로 되어 있어 곧바로 나아갔다.
잠시 오르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동해 육지 언저리 너머로 바다가 겹쳐 보였다. 좌측에서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이 교차되고 바다 언저리에 낮은 산봉우리위에는 건물이 놓여 있는 평온한 풍경이었다. 잠시 멈춰 스케치를 하는 사이 뒤에 오던 일행이 지나쳐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 스케치북이 펄럭거려 스케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뒤에 오던 다른 일행이 바람이 심하게 부는 추운 날씨에 그림을 그리느냐며 한마디씩 말을 건네고 지나갔다 연륜이 많지 않은 떡갈나무의 빈가지가 세찬 바람에 흔들려 삭막 감을 자아냈다. 그런데 그렇게 텅 비어진 듯 하고 달싹 얼에붙게하는 바람이 사물의 느낌을 더 투명하게 느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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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를 마치고 서둘러 일행을 뒤쫓아 갔다. 오늘 산행 코스는 출발지인 안인진에서부터 삼우봉-괘방산-괘일재-당집-정동진에 이르는 9km 정도이다. 그 코스 중 가장 높은 괘방산은 339.2m로 고도가 낮은 편이다.
조금 가다보니 오늘 걷는 길을 바우 길로 표시한 표지가 걸려 있었다. 바우는 ‘감자바우’ 처럼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키는데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산천답게 자연적이며 인간 친화적인 트레킹 코스” 라고 소개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데크 공사 중인 봉우리에 올랐다. 일행이 잠시 멈춰 탁 트인 조망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도 기대했던 동해바다가 훤히 바라보이는 풍경이 반가워 스케치 했다. 거기서도 바람이 세차게 불어 종이가 펄럭거렸다. 펼쳐 보이는 풍광을 안정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몸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나도 모르게 기마자세를 취했는데 뒤에서 “자세 죽인다”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다시 내림길을 걸어 조금 해안에서 멀어진 능선 길을 지나갔다. 길을 걷는 동안 동해 바다가 멋지게 펼쳐 보이는 곳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좌측을 주시하며 가다보니 넓고 깊게 형성된 계곡지점에서 바다 쪽으로 작은 산봉우리들 너머로 바다가 펼쳐진 풍경이 나타났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해안이 앞쪽에 중첩되어 보이는 산자락 끝에 길게 면해 보이기도 하고 단순하고 완만한 능선 너머로 드넓은 바다가 훤칠하게 펼쳐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는 바다 물빛은 전에 다른 계절에 보았던 그 물빛과 퍽 달라 보였다. 봄철에 해안을 지나며 가까운 바다를 보았을 때는 투명한 에메랄드 빛깔로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진한 군청색 빛깔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이 마치 추운 날씨에 바닷물이 움츠러들어 밀도가 높아지고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서 그 고달픔을 견디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바람이 해수면에 심한 굴곡을 일으키며 마치 밭고랑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다.
오늘은 추운 날씨인데도 이곳을 찾은 둥산객들이 제법 많아서 내가 잠시 멈춰 스케치를 하거나 빠른 걸음으로 다시 그들을 지나쳐 가는 동안 여러 사람들과 계속 조우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는 얼굴이 생겨서 내가 스케치 하는 것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분도 있었다. 산행을 하면서 특별한 느낌이 들 때마다 스케치를 하고 다시 일행을 뒤따라가느라 바삐 움직이게 되었다.
산행에서의 꿀맛 같은 식사
다시 주변이 훤히 바라보이는 산봉우리에 올랐다. 그 곳이 지도에 나타난 삼우봉 같았다. 산과 바다가 잘 어우러진 광경을 찾아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오던 방행으로 구불구불한 해안선이 길게 이어지고 산자락 끝에서부터 태초의 체취를 간직한 바다가 가득 차오른 듯 한 느낌이 다가왔다. 그 순간의 느낌을 화폭에 담으려고 서둘러 스케치를 하다 보니 일행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계속 스케치를 하자 남상길 김준식 건축사가 어서 와서 식사하라고 했다.
잠시 후 가까이 다가가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음식을 눈밭에 펼쳐 놓고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이 매우 즐겁게 느껴졌다. 각자 준비해온 밥, 김치, 무무말랑이, 담금술, 소주, 막걸리 김, 과일 등이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식사를 하다 뒤를 돌아보니 앞쪽 급한 경사지 끝자락에 두어 개 낮은 봉우리가 솟아 있고 그 너머로 영롱한 물빛의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 보였다. 거기서 보는 풍광이 지난 봉우리보에서 본 풍경보다 더 크게 와 닿았다. 오늘 산행은 동해 바다를 생생히 느끼는 기대를 미리 하고 온 터여서 더 유심히 바다를 바라보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이 앞서 출발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바라보인 풍경을 스케치하고 뒤따라갔다. 정오를 지나며 바람이 잦아들고 낮 기온이 점차 올라 있었다, 그래서 출발 때의 세찬 겨울바람을 맞을 때와 계절 감각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따스한 햇살에 봄기운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가다보니 앞쪽에 통신탑 등이 설치된 봉우리가 보였다. 곳 이 괘방산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막고 있었다. 그처럼 접근이 되지 않는 분위기여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나게 되었다
민속 신앙의 자취가 서린 당집
다시 더 가다 보니 큰 소나무 숲 안에 작은 건물이 보였다. 지도에 나타난 당집이었다. 우리나라 바닷가 마을들에서는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민속 신앙 풍습이 오랫동안 전래되어 왔는데 현대 들어 점차 유명무실한 분위기여서 이런 시설이 전보다 더 귀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큰 소나무 숲속에 작게 지어진 모습이 퍽 소담스런 분위기여서 그것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는데 다른 일행 한 분이 전에 서울 갤러리에서 나를 본 적이 있다며 인사를 했다. 나도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놀라며 인사를 했다.
스케치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내림 길을 지나 능선을 넘어 임도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거기서 이어진 길을 가다 보니 마치 산을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산 길이 아닌지 염려가 되어 뒤에서 오는 분들에게 불으니 그 길이 맞는다고 했다. 조금 가다 보니 다시 산 능선으로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혹한의 계절에 섞여드는 희미한 봄기운
다시 서둘러 걸었다. 햇살이 더욱 따사롭게 느껴졌다. 바람이 잦아든 상태로 햇살을 받으며 걷다보니 두텁게 입은 옷이 조금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풍광이 조금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겨울 강추위로 나무줄기 속까지 바짝 얼어붙게 할 것 같던 아까와 달리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딴판으로 변한 느낌이 들었다. 동지를 지난 후부터 차츰 늘어난 낮 시간만큼 따사로워진 햇살이 기온을 오르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햇살이 감촉에 와 닿고 언 땅이 녹아 질척이는 곳도 있었다. 팽팽하던 솔 잎과 줄기가 조금 나른하게 쳐진 느낌도 들었다.
길가 우측의 작은 둔덕에 다른 일행 몇 명이 멀리 앞쪽을 바라보며 “저기가 정동진”이라고 했다. 한 분이 다시 “가로 막힌 산을 또 넘어가야겠다”고 하자 다른 분이 저 산 하나만 넘으면 끝이라고 했다. 다른 분이 “저 정도쯤이야” 하면서 길을 나섰다. 나도 그 자리에 서서 정동진을 가늠해 바라보다 보니 안온한 산세에 햇살은 산란하고 공기가 더 따뜻해져 있었다.
다시 산봉우리 하나를 넘으며 정동진에 다가서는 동안 그 장소에 대한 갖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유명한 장소의 풍광과 느낌을 포착go 스케치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걷게 되었다. 하지만 막바지 길이 야트막한 산길을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그냥 밋밋하게 지나게 될 것 같았다
‘모래시계’와 정동진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가니 숲 너머로 정동진이 보였다. 그리고 길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정동진이 한 눈에 바라보여 스케치를 했다. 바다와 좌우로 나지막한 산자락이 어우러져 평온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관광지처럼 번잡해진 모습도 보였다. 반대쪽 산봉우리 위에는 커다란 배가 걸터앉아 있어, 그 곳의 원래 자연 풍광이 깨지고 거대한 광고탑을 설치해 놓은 것처럼 변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스케치를 하는 동안 아래 기차역에서 안내방송이 들렸다. 근래 지방의 작은 역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이곳은 더 활발하게 운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도 유명세가 아니면 승객이 적어 역으로서의 기능이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때를 생각하니 저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곳이 이처럼 유명한 장소가 된 것은 1995년 SBS 수목 드라마였던 ‘모래시계“ 덕분이다. 그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을 경신할 만큼 인가였는데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해 일찍 귀가한다해서 ’귀가시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드라마의 내용은 폭력과 순정적인 요소가 섞여 있는데 요즘 시대 정서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 때는 애환의 정서가 있었다. 삶이 애환속에서 더 빛나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의 시절이었다.
산자락을 내려와 정동진 읍내에 도착하니 작은 도시의 시내 가로 같은 풍광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한적하게 바다를 느끼던 이전과는 다르게 카페촌 거리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한가롭고 가난하지만 진실한 삶의 체취가 생생한 일상적인 환경에서 문득 정겹게 눈길이 닿던 시절의 체취는 사라지고 없있다.
‘모래시계’ 이후 정동진은 일약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단지 유명세만으로 명소가 되어 있다. 그리고 땅 값이 오르고 많은 건물들이 새로 들어섰다. 정동진은 이제 전설 같은 장소가 되어 있다. 하지만 결국 나타나 보이는 것은 여느 시골 읍내의 일부 같은 도시 모습을 띠게 된 것 뿐이라는 것이 씁쓰레하게 여겨진다.
잠시 일행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바로 앞쪽에 정동진역을 들렀다. 사람들이 붐벼 활기를 띠고 있었다. 정동진 역사를 들어서 바닷가로 나가니 고현정 소나무, 모래시계 소나무, 시비도 세워져 있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가장 바깥으로 가니 번잡한 분위기가 다 보이지 않고 태초 자연의 바다 느낌만 다가와 반가웠다. 역 주변은 번잡하게 변했지만 바다의 느낌은 그대로여서 안도가 되었다
주문진 횟집
주차장으로 가서 타고 온 버스에 올랐다. 주문진에 가서 회를 먹고 가기로 했다. 4시 10분 주문진에 도착했다. 이곳은 어항이 있어 신선한 생선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미리 기사분의 연락으로 마중 나온 여자 분이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함께 이동해야 한다고 해서 잠시 항구 풍경을 바라보고 뒤따라갔다. 그런데 지난번 봄에 왔던 때와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커다란 실내 어물 시장 안으로 들어가 안쪽 모서리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등산화 끈을 풀고 각자 나눠준 비닐봉지에 신발을 담느라고 시간이 걸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안내를 하지 않으면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마련된 상차림에 찌개가 끓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자리에 앉자 오징어 회에 이어 주문한 회를 내 왔다.
일행이 식사를 하는 동안 신구 회장이 번갈아 인사를 하며 건배를 했다. 이번 산행 공고 때무터 동해 풍경이 바라보이는 산행과 동해의 신선한 회를 맛보는 것이 당연한 코스일 것처럼 분위기가 띠워진 점도 있고 이심점심 만 원쯤 더 걷어 기왕지사 회를 맛보고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당초 예정시간을 조금 넘어 밖으로 나왔다. 도로로 나오니 바깥이 금새 어두워져 있었다.
6시 15분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에는 점차 산행 시간을 내기 어려워질 것 같은 기분에 그동안 다녔던 산행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리고 동해의 맑고 투명한 자연의 체취를 대하며 내 안에 생기를 불어 넣는 시간도 가져보려 했다. 옆 좌석의 윤원석 고문이 도로사정이 괜찮으면 10시 정도 도착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다행히 9시 40분에 양재역에 도착해 귀가했다.
(20130112)
첫댓글 김석환건축사님 멋진 후기네요^^ 잘읽고 다녀갑니다...
졸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항시 고맙습니다..
평소 주변에 후덕한 마음 베푸시면서 사시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새해 가정에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