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백건우ㆍ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
← 파리의 이응로 화백집에서 올린 결혼식 당시의 윤정희, 백건우, 박인경씨(왼쪽부터). 1977년 7월초, 재불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박인경을 통해 스위스 취리히의 한 부호가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한다는 제의를 받는다. 박인경은 고 이응로 화백의 두번째 아내로, 이응로와 함께 프랑스에서 생활하다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백건우는 한 해 전, 이응로의 주례로 영화배우 윤정희와 결혼식을 올린 바 있어 평소 이ㆍ박 부부와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백건우는 윤정희와 5개월된 딸, 그리고 박씨와 함께 1977년 7월29일 취리히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는 부호의 여비서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여자는 부호의 양친이 유고 자그레브에 있다며 연주지 변경을 요청했다. 공산국가라 내심 찜찜했으나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탔다. 백건우 가족과 박씨가 찾아간 곳은 한적한 시골에 있는 3층 집. 있어야 할 부호는 없고 동양인 남자 만이 보이자 백건우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웨이트, 웨이트” 소리를 뒤로한 채 타고온 택시를 타고 유고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달렸다.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투숙했으나 이튿날 아침 객실 문앞에는 북한사람으로 보이는 3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사관 직원의 도움으로 자그레브 공항을 벗어나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린 것은 30일 정오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이 사건은 박씨가 3차례에 걸친 파리 주재 한국 대사관의 조사요구에 응하지 않아 아직도 미완이다.
[1863년] 자동차왕 헨리 포드 Henry Ford 출생
1863년 7월 30일 태어남 / 1947년 4월 7일 죽음 "돈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업이란 한심한 사업이다." - 헨리 포드 미국 역사상 20 세기 전반에서 가장 미국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과 자동차왕 헨리포드이다. 헨리포드는 1863년 디트로이트 부근 디어본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동차왕 헨리는 어릴 때부터 기계를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고장난 시계는 모두 거두어 말끔히 고치는게 취미였다. 포드가 13세 되던 1876년에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디트로이트에 갔다가 이야기로만 듣던 증기자동차를 보고 홀딱반해 버렸다. 헨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증기자동차로 달려갔다. "우와! 신기하다. 말로만 듣던 증기자동차를 직접 보게 되다니! 그런데 아저씨, 이 자동차는 어떻게 말이 끌지 않는데도 저절로 가지요?", "아저씨, 이건 뭐예요?" 헨리는 운전사가 귀찮을 정도로 증기자동차의 원리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의 꿈은 '시계박사'가 아닌 '자동차박사'로 바뀌었다. 증기자동차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번은 학교 담벼락 옆에서 증기를 이용한 실험을 하다가 보일러가 터지는 바람에 불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헨리는 농부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일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16세 되던 1876년 청운의 뜻을 품고 디트로이트로 가서 '미시간 차량회사'라는 기계제작소에 들어갔으나 겨우 일주일 후에 해고되고 말았다. 아무도 고치지 못한 기계를 헨리가 30분만에 고친 것이 이유였다. 이 젊은 청년 때문에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봐 겁이난 공장장이 쫓아낸 것이다. 이후 그는 여러 회사를 다니면서 기술을 익혔고, 드디어 뛰어난 기술자가 되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발명왕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전기회사'가 있었는데 그는 일터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전기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9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드디어 2기통짜리 엔진을 부엌 싱크대 위에서 완성한 후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1896년 5월 드디어 최초의 4륜마차 차체에 2기통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쿼드리사이클(Quadricycle)"을 완성하였다. 그는 몹시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아뿔사! 작업실 문이 자동차보다 작아 나갈 수가 없었다. 헨리는 도끼를 들고와 문과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도끼소리에 놀라 잠이 깬 식구들 앞에서 자신이 만든 1호차를 당당히 올라탔다. 시운전은 성공이었다. 2인승,4마력,시속45km의 이차는 친구에게 200달러에 팔렸다. (지금 이차는 포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디슨은 10년이나 아래인 포드를 격려 하였다. 이때부터 발명왕과 자동차왕은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한편 그는 자기차를 선전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서른 여덟살이었을 때, 자동차 경주에 참가하여 최고 시속 72km로 미친 듯이 달렸는데 그 당시 시속 72km는 요즘으로 치면 비행기를 탄 것과도 같은 어마어마한 속력이었다. 덕분에 헨리는 우승을 차치했지만 죽을 뻔한 모험이었다. 1903년 6월 자본주들의 자본을 모은 15만 달러로 포드자동차 회사를 정식으로 발족 시켰다. 그러나 당시 자동차는 신기하지만 고장이 잦고 시끄러우며 비실용적인 사치품에 불과 했다. 때문에 포드가 은행에서 대출을 요청하자 은행장은 "멀쩡한 말들이 이렇게 많은데 자동차 사업이 되겠는가?"라며 대출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한편, 포드는 이 회사를 세우면서 혼성주주제 라는 새로운 창업법과 경영법을 도입한다. 회사의 일정 지분을 투자자에게 배분하는 방법으로 남의 기술과 돈, 그리고 공장과 기계시설을 이용해 차를 만들었던 것이다. 경쟁사를 이기는 길은 자동차를 서민들이 생활에 이용할 수 있도록 값이 싸고 실용적인 차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 포드는 1903년 7월 2기통엔진의 자동차를 시작으로 1908년 혁명적인 자동차 포드 T형을 개발하였다. 이 포드 T형은 1927년 단종 될 때까지 1.500만대를 만들어 20세기 전반 전세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한 자동차왕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신제품 차를 소개한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관리방식과 경영시스템을 도입한데 있다. '부자들의 장난감인 자동차를 서민들의 생필품으로 바꾸겠다'는 신념이 포드의 자동차 왕국 건설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창업 정신은 1913년 컨베이어 벨트 생산방식의 탄생으로 이어져 자동차 대량생산의 기틀이 마련됐다. 그는 컨베이어시스템을 통해 1공정에 18분이 걸리던 제조시간을 5분으로 단축했다. 이를 통해 다은 자동차가 2천달러를 호가할 때 포드사의 모델-T 값을 2백60달러로 낮출 수 있었다. 자동차는 중산층의 대두와 자동차의 대량생산으로 보통사람들의 필수품이 되기 시작했으며 거대한 미국 경제력의 밑받침이 되었다. 그는 1947년 84세의 나이로 뇌졸증으로 사망하였다. 새로운 발상으로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된 그는 중산층의 우상이자 국민적 영웅이었지만 동시에 무자비한 자본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도살장의 해체라인을 자동차 조립라인으로 바꾼 것이나 평균일당의 두 배가 넘는 5달러 발상을 한 점에서 그는 천재였다. 5달러 일당은 비용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는 '가장 경제적인 발상이었다'고 흡족해했다. 포드는 노동통제를 위한 장치들을 고안하는데도 천재였다. 그의 공장에는 작업시간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 등 비적격자를 골라내기 위해 '감시조'가 편성됐고 감시조에 걸린 사람들은 해고 전단계인 '대기조'로 분류됐다. 권투선수였던 해리 베네트나 전과자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해 악명을 떨쳤고 노동조합은 자동차회사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1941년에 도입했다. 한때 포드사에는 '사업주의 첩자가 자동차만큼이나 많다'는 말이 돌았다. 그는 반유태주의자이면서 히틀러의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디어본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농부의 아들이자 노동자로 생각했고 사치를 혐오했다. 33세에 처음 자신의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었을 때부터 그는 누구나 탈 수 있는 값싸고 튼튼한 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그 꿈은 '필연'이었다. 또한 기계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컨베이어벨트를 실험하고 도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내가 '현대'를 발명했다"던 그는 신화와 그 신화를 벗기려는 비평가들의 혹평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오늘과 내일(Today and Tomorrow) 1926", "나의 산업철학(My Philosophy of Industry) 1929" 등이 있다. 한편, 포드는 1999년말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있었던 세기의 차 선정위원회에서 20세기 최고의 기업가로 선정되었다
[1917년] 대림그룹 창업자 이재준(李載濬) 출생
1917. 7. 30 경기 시흥~1995. 12. 29 서울. 1939년 목재상으로 출발해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로 성장한 대림산업을 모체로 하는 대림그룹의 창업주이다. 1929년 군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공부보다는 장사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22세 때 부평역 앞에서 문을 연 부림상회가 중일전쟁으로 물자가 달리면서 큰 목재상으로 성장하자 토건업에 뛰어들었고, 그 뒤 6.25전쟁으로 인한 복구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해외건설 붐을 타고 대림산업을 국내 정상의 건설회사로 키웠다. 서울증권 설립과 호남에틸렌 인수를 통해 증권과 석유화학 사업으로 업종을 확장하며 꾸준히 성장한 대림 그룹은 특히 대림산업을 통해 해외건설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1970~80년대에 플랜트 사업을 특화, 사우디아라비아 알주베일 복합화력발전소 등을 건설하며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그 결과 대림은 대림산업과 대림엔지니어링·대림자동차·고려개발 등 12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13위(1994) 그룹이 되었다. 1954년 인천시교육위원회 위원, 1964년 대한건설협회 이사, 1965년 대한전기협회 및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와 대한건설공제조합 및 대한건설군납조합 운영위원, 1970년 대한상공회의소 특별위원에 임명되었다. 1974년 (주)대림엔지니어링 사장, 1980~88년 대한건설협회 회장, 1982년 서울 올림픽 범민족추진위원회 이사, 1983~88년 건설기술연구원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3년까지 대림그룹 회장, 1971∼95년 대림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철탑·은탑·금탑 산업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베트남 공로훈장, 대통령표창 등을 받았다.
[1965년]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망
← 일본 문학에 있어 탐미주의의 선구자였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1965년 7월30일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가 79세로 사망했다. 도쿄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학비 부족으로 중퇴하고 24세 때인 1910년에 와쓰지 데쓰로 등과 함께 제2차 ‘신사조’를 창간한 후 단편 ‘문신(文身)’과 ‘기린’을 발표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에는 ‘스바루’에 희곡 ‘신서(信西)’, 단편 ‘소년’을 발표해 문단의 격찬을 받았다. 문신을 한 뒤 갑자기 몸이 변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문신’은 다니자키 문학을 특징짓는 탐미주의의 신호탄이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자연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여체를 찬미하고 성의 신비를 응시하여 변태성욕의 세계까지를 파헤쳐 탐미주의·예술지상주의·악마주의의 천재적 신인으로까지 지목됐다. 장편소설 ‘치인(痴人)의 사랑’에서는 ‘인습적 정조 관념이 없는 여성의 변태성욕적 연애’를 뜻하는 ‘나오미즘’이라는 말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후반기에는 고전적인 경향이 강해져서 ‘장님 이야기’ ‘춘금초(春琴抄)’ 등의 원숙한 작품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11세기 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현대어로 번역했다, 전쟁 후에는 ‘세설(細雪)’로 아사히문화상을 수상했다.
[1953년] 이승엽 일파 간첩혐의로 기소 1953년 7월 30일 남조선노동당 계열을 비롯한 이승엽·임화·이강국 등 12명을 기소했다. 기소장에는 이들이 미제국주의를 위해 간첩행위를 했으며 남반부 민주역량을 파괴하고 약화시키는 음모를 꾸미는 것과 동시에 테러·학살 행위를 자행하고 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해 무장폭동 행위를 했다고 적혀 있었다. 남로당 출신에 대한 숙청은 1952년 12월 15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당의 조직적·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라는 보고를 통해 당의 강화와 종파주의의 청산을 강조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승엽일파간첩사건으로 체포된 자들 중 이원조가 징역 12년형, 윤순달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승엽을 비롯한 나머지 10명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7·30교육개혁조치 발표 1980년 7월 30일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학교 내 보충수업 이외의 모든 과외교습을 금지하는 내용의 7·30교육개혁조치가 발표되었다. 과외교습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학생들의 심리적 압박감과 과중한 학습시간으로 인해 심신의 발달이 저해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폐단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1969년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하고 1974년 고교평준화정책을 도입하는 등 입시제도를 고쳐왔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대학입학에 대비한 고등학생들의 과외로 모양을 바꾸면서, 1970년대말에는 '과외망국론'이 거론될 정도로 과열과외가 계속되었다. 이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대학입시에 고교 내신제 도입, 대학본고사 폐지, 대학 졸업정원제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 과외교육 금지의 정당성과 실효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되면서 1989년 6월 이후 과외교육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으며, 2000년 4월 27일 헌법재판소에서 과외금지조항 위헌결정을 내림으로써 다시 과외교육이 전면 허용되었다.
[1900년] 독립운동가 조경한(趙擎韓) 출생 1900. 7. 30 전남 승주~1993. 1. 11 서울. 호는 백강(白岡).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 근거를 둔 독립단의 국내연락원으로 활약했다. 1924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덕신의숙(德新義塾), 계명학원(啓明學園) 법정과에 다니면서 신채호(申采浩)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26년 만주에서 배달청년회의 배신학교(倍新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정의부 교민교과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창립에 참여,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직 및 훈련의 책임을 맡았다. 1931년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지청천(池靑天)·김창환(金昌煥)·황학수(黃學秀)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을 일으켜 만주 각지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933년 뤄양 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특별반이 개설되자 오광선(吳光鮮)과 함께 교관에 임명되어 청년군사간부의 양성에 힘썼다.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에 힘을 기울였고, 1935년 7월에는 그 발전체인 민족혁명당에 참여했으나,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당권을 장악하게 되자 1937년 지청천 등과 조선혁명당을 창설하고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7년 8월 한국광복전선이 조직되자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임시정부에서 군사학 편찬위원으로 일했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40년 5월 충칭[重慶]에서 민족진영의 3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통합운동을 벌여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여 총사령부의 주계장(主計長), 총무처장 대리 등을 역임했다. 1941년 12월 중국 국민당이 운영하는 전시간부훈련단에 광복군장교훈련소가 설치되자, 송호성(宋虎聲)·나월환(羅月煥)과 같이 훈련책임을 맡았으며, 1942년 10월에는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장(政訓組長)으로 선전업무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임시의정원 징계심사분과위원장,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 국무위원회 부비서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4년에는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중앙상무 집행위원이 되었다. 8·15해방 후 귀국하여 김구가 영도한 한국독립당을 발판으로 정치활동을 벌였으나 김구의 남북협상론에는 뜻을 달리했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임정기념사업회장·독립유공자협회장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09년] 영국의 역사가·저술가 파킨슨(Parkinson, Cyril Northcote) 출생 1909. 7. 30 영국 더럼 바너드 성~1993. 3. 9 켄트 캔터베리. '일은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 확보해놓은 시간을 다 채울 만큼 늘어난다'는 풍자적인 금언인 '파킨슨의 법칙'을 만들어냈다. 1955년 런던의 〈이코노미스트 Economist〉에 기고한 평론을 통해 이 '법칙'을 처음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유명하지 않은 학자였던 그는 뒤에 가서 '지출은 수입에 비례해 증가한다'라는 2번째 법칙을 만들어냈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인 〈법칙과 이윤 The Law and the Profits〉(1960)에 자세히 나와 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1935년 런던대학교의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학박사학위를 받은 파킨슨은 영국의 여러 학교에서, 그리고 1950~58년에는 말레이 반도에 있는 학교에서 강의했다. 관료제의 본질에 관한 그의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참모장교로 일하던 때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그의 말을 빌리면 관리자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며 그렇게 해서 부하의 숫자를 늘려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킨슨의 2번째 법칙은 정부 공무원들을 비꼬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그들은 세금이 걷힐 수 있는 한 계속해서 공무원의 숫자를 무한정 늘리려 한다는 것이다. 무심코 사람을 웃기는 파킨슨의 평론은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뒤 〈파킨슨의 법칙:진보를 추구하며 Parkinson's Law, or The Pursuit of Progress〉(1957)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같이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책 이외에도 파킨슨은 비평가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정치사상의 발전 The Evolution of Political Thought〉(1958)과 같은 여러 권의 역사학 책도 썼으며, 어렸을 적부터 해군의 역사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바다를 주제로 한 소설도 썼다.
[1818년] 영국 작가 브론테(Bronte, Emily)] 출생
← 브론테, Branwell Bronte가 그린 유화(1833) 필명은 Ellis Bell. 1818. 7. 30 잉글랜드 요크셔 손턴~1848. 12. 19 요크셔 호어스. 소설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1847) 단 1편만 남겼는데 요크셔의 황야를 무대로 펼쳐지는 격정과 증오를 다룬 작품으로서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브론테 집안의 3자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가였다고 여겨지지만 그녀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말이 없고 내성적인 데다가 관심을 끌 만한 편지왕래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1편뿐인 소설 〈폭풍의 언덕〉은 그녀의 정신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만들 뿐이다.
생애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는 아일랜드인이었으며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공부해 1806년 학위를 받았고, 6년 뒤 콘월 주 펜전스 출신의 마리아 브랜월과 결혼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보좌신부로 일했던 까닭에 첫째딸 마리아와 둘째딸 엘리자베스는 요크셔 주의 하트셰드컴클리프턴에서 태어났고 샬럿, 패트릭 브랜월, 에밀리, 앤은 손턴 근처에서 태어났다. 1820년 아버지는 호어스의 교구사제가 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1821년 어머니가 죽은 뒤 브론테 자매들은 황량한 황야의 사제관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냈다. 대개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리아, 엘리자베스, 샬럿, 에밀리가 랭커셔의 카우언브리지에 있는 '성직자 딸들을 위한 학교'에서 보낸 한 해를 빼면 브론테 집안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 집에서만 교육을 받았다. 1835년 샬럿이 로헤드에 있는 미스 울러 학교에 교사 자리를 구하자 에밀리는 학생으로서 언니를 따라갔으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3개월 만에 돌아왔다. 1838년 에밀리 자신이 핼리팩스 근처 로힐에 있는 미스 패칫 학교에서 6개월 동안 교사일을 했으나 너무 힘들어 그만두었다. 가족들이 집에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샬럿은 호어스에 여학교를 열 계획을 세웠다. 1842년 2월 샬럿과 에밀리는 에제 기숙학교에서 외국어와 학교운영을 배우기 위해 브뤼셀에 갔다. 에밀리는 집과 거친 황야를 매우 그리워했고, 내성적이기는 했지만 브뤼셀에서 샬럿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하다. 그녀의 열정적인 기질이 샬럿의 차분한 성격보다 더 쉽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0월에 이모가 죽자 에밀리는 호어스로 아주 돌아왔다. 1845년 샬럿은 우연히 에밀리가 쓴 시를 몇 편 보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3자매가 모두 시를 써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년 뒤 그들은 각자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로 시작되는 필명을 써서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 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을 함께 펴냈다. 이 시집에는 에밀리의 시 21편이 실렸는데, 후대의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에밀리의 시만 진정한 시인으로서 재능을 엿보게 해준다고 평가했다. 이 책을 내는 데 3자매가 들인 비용은 50파운드나 되었는데 정작 팔린 것은 2권뿐이었다. 1847년 여름에는 런던의 출판업자 J. 코틀리 뉴바이가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과 앤의 〈애그니스 그레이 Agnes Grey〉를 함께 출판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출판은 샬럿의 〈제인 에어 Jane Eyre〉가 발표될 때까지 미루어졌다. 〈제인 에어〉는 나오자마자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폭풍의 언덕〉은 1847년 12월 출판되었을 당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너무 야만적이고 동물적이며 구성이 허술하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나중에야 영어로 씌어진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 〈폭풍의 언덕〉을 출판한 뒤 곧 에밀리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점점 더 숨쉬기조차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다가 1848년 12월 결핵으로 숨졌다.
[2001년] 가수 황금심(黃琴心) 별세
1922년 ~ 2001년 7월 30일 일제 강점기에 데뷔해 1960년대까지도 활발히 활동했다. 본명은 황금동(黃金童)이다. 부산 동래구 출신이나 어릴 때 경성부로 이주해 자랐다. 1936년 15세의 나이에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모집에서 1등으로 입상하면서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해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왜 못 오시나요〉와 〈지는 석양 어이 하리오〉가 데뷔곡이다. 이후 작사가 이부풍의 소개로 빅타레코드로 옮겨 1938년 〈알뜰한 당신〉과 〈한양은 천리원정〉을 발표했는데, 이 음반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인기 가수가 되었다. 〈알뜰한 당신〉은 이후로도 널리 불리면서 황금심의 대표곡으로 남아 있다. 이때 오케레코드사와 분쟁이 일어나 법정으로 가는 소동도 있었다. 황금심은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로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민요조의 구성진 창법은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남긴 히트곡으로는 이면상 작곡의 신민요인 〈울산 큰애기〉와 블루스곡 〈외로운 가로등〉을 비롯하여 〈마음의 항구〉, 〈알려주세요〉, 〈청치마 홍치마〉, 〈꿈꾸는 시절〉, 〈여창에 기대어〉, 〈만포선 천리 길〉, 〈날 다려가소〉, 〈한 많은 추풍령〉, 〈추억의 탱고〉 등이 있다. 김용환이 조직한 빅타레코드 소속의 반도악극좌에서 활동하다가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와 만나 결혼했다. 한국 전쟁으로 고복수가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시련 속에 1952년 취입한 제주도를 소재로 한 노래 〈삼다도 소식〉이 히트하여 다시 인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고복수의 사업이 계속 실패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황금심도 생계를 위해 영화와 드라마 주제가를 부르면서 많은 분량의 노래를 취입하게 되었다. 선우일선의 노래를 재취입한 〈대한팔경〉, 신민요 〈뽕따러 가세〉,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장희빈〉, 영화 주제곡 〈피리 불던 모녀고개〉 등이 유명하다. 이렇게 1970년대까지 발표한 곡 수는 4천여 곡에 이른다. 1997년 사업에 실패하면서는 파킨슨병으로 쓰러져 투병에 들어갔다. 그의 투병기는 1999년 KBS 2TV '영상기록 24시'에서 방송돼 팬들의 안타까움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2001년 7월30일 사망했다. 당대의 스타 커플이었던 황금심과 고복수의 자녀들은 음악인이 되어 음악 가정을 이루었다. 맏아들이 트로트 가수 고영준, 둘째 며느리는 대학가요제 출신의 가수 손현희, 셋째 아들이 작곡가 고병준이다. 국내 대중음악계에 기여한 공로로 1992년 문화훈장 옥관장을 수상했다.
[1934년] 부민관 기공 백악(白堊) 구층의 호화건물,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 낙성 근래의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태평통(太平通)의 일대 위관 <매일신보> 1935년 12월 10일자
금 10일에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하게 될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은 기지(基地)가 1천 7백 80평으로 건평수(建坪數)는 584평, 연평수(延坪數)는 1천 7백 17평이며, 건물은 대강당이 3층에 63척, 시계탑(時計塔)이 9층에 144척, 지하실이 4층이나 되는 근대식의 대건물이다. 그리고 총공비는 48만 원으로 작년 7월 30일부터 기공을 하여 금년 12월10일에 준공되었으니 만 1년 4개월간이나 긴 시일을 요하게 된 것이다. 구조장치를 보면 난방, 환기, 급수위생, 방화 등의 모든 설비가 갖추어 있다. 3천 3백 '뽈트'의 전력을 사용하여 대강당 무대에는 120'킬로'의 동력으로 40'뽈트'의 전등을 사용하게 된 대규모의 장치이다. 대강당의 정원수는 1천 8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그 안에는 이발소, 식당, 사교실, 소강당, 담화실 등이 있어 어떤 사람이고 활동할 수 있는 것으로 태평통 일대에 일대 위관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대규모의 설비를 40만 부민에게 구경을 시키기 위하여 오는 11, 12 양일간은 매일 오전 오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반에게 무료 공개한다고 한다. (사진은 준공된 부민관).
당시 경성(京城)에는 문화·예술을 공연할 만한 대규모 극장이 없었는데,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100만 원을 기부하자 조선총독부가 지금의 태평로1가 1,486평 부지에 부민관을 세웠다.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대강당·중강당·소강당·담화실 등을 갖춘 다목적 회관이었으며, 당시로는 드물게 냉·난방 시설과 조명·음향 시설을 갖추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극장이 일본인 개인소유였던 데 반해, 이 극장은 부립극장(府立劇場)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곳에서 극단 중앙무대·현대극장 등이 창단공연을 가졌고, 신파극단과 악극단의 공연은 물론 중요한 강연회도 열렸다. 8·15해방 직후 미군이 사용하다가 1949년 서울특별시가 소유하게 되었으며, 1950년 1월 국회의사당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75년 9월 1일 국회의사당이 여의도로 옮긴 뒤 시민회관이 되었고, 같은 해 도로확장공사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1976년 세종문화회관이 세워지면서 그 별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1년부터 서울특별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1932년] 조만식 등 평양에서 건중회 설립 평양의 조만식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여명으로 조직된 건중회(建中會)의 발회식이 거행되다. 본회는 한국 민족의 생활 권익 옹호 신장을 목적으로 성립된 것인데 동회의 간사에는 오윤선(吳胤善)·이기찬(李基燦)·손수경(孫壽卿)·황달영(黃達永)·한근조(韓根祖)·노진설(盧鎭卨) 등이다.
[1511년] 이탈리아의 마니에리스모 화가·건축가·작가 바사리 (Vasari, Giorgio) 출생
← 바사리가 그린 〈자화상〉,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Uffizi 소장 1511. 7. 30 이탈리아 피렌체 아레초~1574. 6. 27 피렌체.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역사를 연구해 책을 썼지만, 이 연구서의 중요성은 그가 화가로서 얻은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바사리는 어린시절에 굴리엘모 데 마르칠라트에게서 그림을 배웠지만, 본격적인 수업은 피렌체에서 받았다. 그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우정과 후원을 얻었고, 안드레아 델 사르토 밑에서 배웠으며, 평생 동안 미켈란젤로를 숭배하게 되었다. 바사리는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도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아레초에서 그린 작품 이외에 그의 대표작은 피렌체의 베키오 궁에 있는 커다란 프레스코 연작과 로마의 칸첼레리아에 있는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일생을 그린 그림(이른바 100일 프레스코)이다. 바사리의 그림은 토스카나 지방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의 표현양식을 따랐는데, 경박하고 피상적이며 색채감각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바사리는 화가보다 건축가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1560년에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를 위해 짓기 시작한 피렌체의 우피치 행정청과, 피사에 카발리에리 디 성 스테파노를 위해 지은 교회와 수도원 및 궁정이다. 이 건물들의 설계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보여주며, 토스카나 마니에리스모 유파의 건축양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뛰어난 대표작이다. 바사리는 또한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1562)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쓴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화가·조각가의 생애…… Le Vite de'più eccellenti architetti, pittori, et scultori italiani……〉(1550)는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헌정되었다. 이 저서에서 바사리는 중세 예술을 그리스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사이에 자리잡은 암흑시대의 무능한 산물로 간주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견해를 따르고 있으며, 조토에서 시작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절정에 이른 토스카나 미술의 부활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이 저서에서 언급한 예술가들 가운데 그당시 살아 있던 사람은 미켈란젤로뿐이었다. 초판을 훨씬 증보한 재판(1568)에서는 제목에 화가들이 맨 먼저 언급되어 있다. 바사리 자신의 자서전을 비롯해 당시 살아 있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전기를 포함하고 있는 이 증보판은 오늘날 초판보다 훨씬 잘 알려져 있으며, 여러 나라 언어로 널리 번역되었다. 바사리의 문체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그의 방법론은 근대 예술사가들의 방법론과 비슷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확인된 사실이 부족할 경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빈틈을 가설로 채워놓았다. 본문은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권 첫머리에 실린 서론은 다양한 예술에 대한 귀중한 논문으로서 바사리의 이론과 편견을 뚜렷이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 T. S. R. 보아스의 〈조르조 바사리와 그의 책 Giorgio Vasari:the Man and the Book〉은 1979년에 출판되었다.
그 밖에 2004년 배우 출신 오기 지카게, 일본 여성 최초 참의원 의장에 선출 2003년 빌 뮬러 미국 야구 사상 최초로 한 경기서 좌우 연타석 만루홈런 기록 2000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재선 1998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제84대 총리에 선출 1994년 영국의 추리 소설가 로빈 쿡 암으로 사망 1991년 IBMㆍ모토로라ㆍ애플 3사 ‘파워PC동맹’ 체결 1983년 미국-중국, 무역분쟁 종식 1981년 감비아 좌익 군사쿠데타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1978년 알바니아 단원(斷援)에 반발 중국 비난 1978년 비동맹회의, 베오그라드선언 채택 1975년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 헬싱키서 개막 1971년 서울외곽에 그린벨트 첫 지정 1963년 필리핀-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3개국 수뇌회담 1961년 신문윤리 실천요강 채택 1959년 대법원, 조봉암 재심청구 기각 결정 1958년 아이슬란드 영해 12마일 확대 선언 1953년 역도산, 일본프로레슬링협회 결성 1953년 미국 상원, 한국부흥비 2억불 사용 승인 1952년 국제적십자총회 세균전 금지협약 가결 1946년 전국학생연맹 결성. 위원장 이철승 1940년 범미상회담, 공동방위결의를 채택(아바나선언) 1938년 랑군서 불교도와 회교도 충돌. 사상 3000여명 1935년 문고본 대명사 ‘펭귄북스’ 출간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개막 1928년 미국 조지 이스트먼 최초의 칼라영화 공개 1921년 소련-터어키 평화조약 성립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평양) 발기대회 1913년 독일, 대군비(大軍備) 확장안 제정 1912년 메이지(明治) 일왕 사망 1909년 한국 최초의 한자전(漢字典) 발간 1907년 제1차 러일협약 조인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서 맨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분열 1900년 영국, 광산법 제정 소년의 지하노동 금지 1898년 독일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사망 1893년 프랑스 샴조약 체결(프랑스 메콩강 동안 획득) 1771년 영국 시인 그레이 사망 1718년 식민지 개척자이자 종교운동가, 윌리엄 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