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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고난은 위대한 작품을 만든다 (고후 4:17-18)
이 시간에 “고난은 위대한 작품을 만든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생은 고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인생 자체를 하나의 큰 부담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고난도 은혜다. 은혜일 뿐 아니라 아주 큰 은혜라’고 말합니다.
1969년 이스라엘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골다 메이어. 그녀는 자기에게 백혈병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5년 동안 총리직을 수행했을 만큼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공개된 자서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얼굴이 못생긴 것이 행운이었다. 못생겨서 더 기도했고, 못생겨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결국 나의 약점은 조국 이스라엘에 도움이 됐다. 나는 하나님의 소명이 가장 낮은 자리로 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난 속에서 위대하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고난 없었으면 좋겠지요? 우리가 성경에서 고난도 복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면 옳은 말씀이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싫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좋으신 아버지께서 나쁜 것이라면 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겠습니까? 고난을 알고 보면 어떤 은혜보다도 더 귀하고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도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고후4:17)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고난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줄까요?
1.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복음전도자요, 찬송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등의 찬송시를 쓴 분 존 뉴톤이 고난을 당하는 어떤 부인에게 쓴 편지가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자극하여 기도하게 만듭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고난을 받아야 기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무런 고통스러운 변화도 없이 다만 오랫동안 편안하고 풍요한 시간이 계속되면, 우리는 냉랭하고 형식적인 태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 주며 우리를 긴장시켜 열심히 주를 찾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주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말이 맞습니다.
한나를 보세요. 삼상1:10에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식을 낳지 못해서입니다. 당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여인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시대에는 본 부인에게 자식이 없으면 모든 권한은 첩의 자식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자식 낳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남편이 얻은 첩 브닌나가 한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울며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 못할 고통 앞에 한나가 받은 은혜는 기도의 은혜였습니다. 한나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몸과 마음을 드리며 마음 속 깊이깊이 그리고 오래오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했든지 엘리 제사장 보기에 술 취한 여자 같았습니다. 그래서 응답 받고 낳은 아들이 그 유명한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이런 말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까? 우리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려는 은혜입니다. 사람에게는 말 못하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더 있나요? 사람들이 기도에 너무 형식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좀 더 깊이 기도하면 사무엘 같은 엄청난 은혜를 주시려고 예비하고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이 사사요 제사장이요 제사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깊이 그리고 오래 기도하는 자에게 큰 영적 권세를 주십니다.
2.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히12:10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에게 고난이 없다면 함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형제를 폐지하느냐 아니면 집행하느냐 하는 토론이 분분하지만 그러나 사회에 강력한 억지력이 사라짐은 이익보다 손해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계를 보세요. 심판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심판이 있고 징계가 있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되고 신앙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런 면도 필요해요. 그래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이루어 경건함으로 기쁘시게 섬기게 됩니다.
고전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멸하셨다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6-11)
그러므로 고난 중에 회개해야 합니다. 육신의 고난만이 고난은 아닙니다. 시32:3-5에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심령의 고통을 당한 후에 회개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애굽의 이스라엘은 언제까지든지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고난이 그들을 복되게 만들었습니다.
3.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가 말했습니다. “나는 근대인물 39명의 전기를 쓰면서 이들의 공통점을 조사해 보았다. 그 중 한 가지는 대부분이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이다. 후에 다시 현대인물, 43명의 전기를 썼는데 이 중 32명이 가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 했다고 합니다.
요셉이 가나안 촌사람에서 애굽이 총리가 된 것도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도 있지만 고난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고난이 있기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더 기도했습니다. 다윗 역시 고난 속에서 크게 성장해 나갔습니다. 양치기 목동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왕으로 왕에서 여러 나라를 다리는 만왕의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난 속에서 영적으로 그렇게 높아지고 강해집니다. 그래서 롬 5:3-5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너무도 힘듭니다! 너무도 힘듭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이게 내 모습이로구나.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하소연을 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주셨습니다. 그래도 무겁다고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뒤에 오는 사람들은 긴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워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울며 예수님을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 놀란 자매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고난이 힘들다고 잘라달라고 하지 말고 감사하면서 주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일군으로 만들어 줍니다.
요나 보세요.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 만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 고난 속에서 회개하여 니느웨를 구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핍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온 민족으로 흩어져 선교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자기 사명을 발견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개그맨 서세원 씨 간증이 있습니다. 정부의 과도한 규제로 갖고 잇던 부동산은 팔리지도 않고 세금은 어찌 그리 많이 나오는지 이것 때문에 물질적 어려움을 당해 경찰, 검찰, 중앙지법에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그 때 몸과 맘은 심히 피폐해 40일 특별새벽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 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가한 것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만 하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재판 중에 나는 비록 쓰레기나 먼지보다 못하지만 하나님 일을 위해 충성하겠다고 기도했더니 검사 측 증인이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해주어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7년간 백수로 지내면서 30억이나 빚진 문서를 내놓고 하나님의 일에는 사례비 한 푼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더니 파산을 하루 앞두고 부동산이 좋은 가격에 팔리더랍니다.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만들어 줍니다.
5.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바울의 경우를 봅니다. 고후12:7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떠나기 위하여 세 번 주께 간구하였지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온전케 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참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훈련소의 교관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의 훈련소에 와 있습니다. 힘들지만 미래의 영광에 비하면 심히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도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고 고난으로 순종하는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기도의 사람으로, 능력의 사람으로, 거룩의 사람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군으로 그리고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고난의 의미를 깊이 깨달고 주님이 원하시는 귀한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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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 (사53:4-6)
이 시간에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충만한 은혜와 복을 누리려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일단은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주어진 복음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1. 영혼의 구원입니다.
사53: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허물과 죄를 담당하심이란 우리 영혼 구원을 의미합니다. 영혼 구원이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과 관계 회복, 다음은 영혼의 소생과 기능의 회복,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잃어도 영혼 구원만큼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임종환자들을 돕는 호스피스 봉사를 하던 한 자매님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게 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돌보다보니 타 종교인들은 대부분 죽음의 공포감으로 맞이하는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죽음을 평안한 중에 맞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자매님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가 참 종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예수의 공로로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이 다릅니다.
2.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마음의 치유입니다.
4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치유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처 때문에 현재의 고통은 물론 미래에도 계속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을 히12:15을 보면 쓴 뿌리라고 하는데 이것이 나면 한없이 고통을 생산하고 또 남까지 괴롭게 합니다. 조선 왕조의 연산군이 왜 폭군이 되었습니까? 히틀러가 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습니까? 모두 쓴 뿌리 때문입니다. 이처럼 쓴 뿌리는 무섭습니다. 그래서 쓴 뿌리 나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쓴 뿌리도 그렇지만, 중국의 오만불손한 쓴 뿌리들도 염려 됩니다. 저들이 경제대국이 되기 전에 예수 복음으로 바꿔놓지 않으면 아무도 저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답니다. 개인이나 국가의 상처의 근본적 치료는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즉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이 있을 때 치료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잘 아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의 고통도 상처도 슬픔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35:10에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했습니다. 사51:11에도 동일한 말씀이 반복됩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마음의 슬픔과 고통 이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다 치료받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육체의 건강입니다.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합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으셔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고난당하신 이유는 성도의 영육간의 질고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본래 죄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누리려면 이 예수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주셔서 치료해 주십니다. 혹은 치료의 길을 내어 주십니다.
프랑스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에는 배낭에 책 두 권은 꼭 넣고 나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파스칼이 팡세를 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여동생이 불치병 안질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스칼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동생 눈을 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파스칼이 기도를 마치고 동생을 찾아가 눈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오빠!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눈이 방금 나았어요.” 이 때 파스칼은 “나는 철학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 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주님은 채찍 맞으신 그 공로로 병인들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4.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환경적인 회복입니다.
신28:15에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받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도 범죄하면 기근 전쟁 역병 내란 짐승 등 환경적인 저주가 왔고 회개하면 악이 물러가고 환경이 회복되었습니다. 개인도 가문도 국가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저주도 속량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후8:9에 보면 본래 부요하신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줄 아세요. 약속의 말씀의 선물입니다. 보이는 물질은 한 트럭 주어도 먹고 나면 사라지지만 부요의 말씀을 주면 그 말씀 붙잡을 때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요케 해 주신 복음에 서서 부요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더 알아야 할 것은 부요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시듯 우리들도 주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함으로 가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는 진리까지 알아야 하늘의 상을 쌓습니다.
5.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대인관계의 회복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심입니다. 엡2:18에 십자가의 공로로 “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골3:13에서도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 대신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미국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인생살이에서 실패한 사람들 만 명을 표본 조사해 보았더니 흥미 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들이 전문적 기술과 지식이 없어서 실패한 사람은 15%밖에 되지 않았고, 85%가 인간관계의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놀라 도대체 인간관계란 또 무엇이냐? 심층 분석해 보니까 이 사람들은 한결같은 부정적 의식이 가득했습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신 버림당하심으로 인간의 관계를 바꾸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형을 만날 때 얼마나 대하기 역겨운 상대였습니까? 그러나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 뵌 것 같다고 했듯 모든 사람을 나의 천사로 알고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몹쓸 사람이다가 아니라 귀한 재목이다, 원수다가 아니라 은인이다, 방해자다가 아니라 협조자다, 보기 싫다가 아니라 보고 싶다, 나와 관계없다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분이다로 타인의 인간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본 인간론입니다. 바울처럼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 가지면 대인관계에서 실패할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면 대인관계가 좋아집니다. 반대로 신앙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대인관계가 나빠집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관계란 예수의 공로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공로로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국제사회도 더욱 아름다워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영적전쟁에서 승리입니다.
골2:15을 보면 우리의 원수인 정사와 권세 즉 마귀의 역사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주님을 아프게 고난을 주었지만 결국 자기를 못 박고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가 있는 이상 사단은 성도들 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안에서 승리했다고 믿으세요.
고대 블레셋 전쟁에서 보여주듯 대장이 이기면 다 이긴 것으로 보았듯 성도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승리의 공로로 승리자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기셨으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들도 이긴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십시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위해서, 하나님과 대인간의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부요와 온전한 승리와 사명을 위해서 우리 대신 고난 받으셨습니다. 이 은혜의 복음에 서서 그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이 고난의 주님을 깊이 감사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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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고난에 참예하자 / 벧전 4:12-14
여러분! 주님을 진정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주님을 진정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만이 아니라 그의 고난에도 진실로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 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럼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일까요?
1, 참 신앙을 갖는 것이 곧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딤후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참 진리대로 행하시다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대로 적당히 하셨다면 핍박이 없었을 텐데 성경의 원 진리대로 사시려다가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사람들처럼 세리나 창기 등 죄인을 미워해야 하는 데 사랑하셨습니다. 혹은 고통 하는 병자를 보고도 안식이라는 핑계로 못 본체 하면 괜찮을 텐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쳐 주셨습니다. 혹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든 말든 자기를 숨기셨다면 핍박이 없을 텐데 진리대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예수 모른 체 적당히 처세하면 핍박이 없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니까 핍박이 오게 됩니다. 술을 안 마신다고 옷에다 술을 붓고, 바쁜데 주일성수한다고 구박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금을 바로 내다가 탈세자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네가 정직하게 내니까 우리들이 탈세한 것이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요셉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 애매하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뜻대로 했더라면 고난이 없을 텐데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지 않고 바로 살려다가 고난이 왔습니다. 이런 외부적인 고난만이 아니라 진리대로 바로 살려고 하면 우리 속에서 옛사람이 총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고난임을 아시고 이기시기 바랍니다.
2. 고난에 동참하려면 주님의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빌2:5-7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이런 고난 주간에 경건한 사람들은 금식하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이 기간에는 사치스런 일이나 자기를 위한 일을 자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고 묵상하기 위해서입니다. 프란시스는 주님의 고난을 얼마나 묵상했든지 몸에 못자국과 창자국이 생겼다고 합니다.
3. 주의 고난에 동참함은 철저히 내가 죽어지는 것입니다.
갈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엡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거기 참여하여 함께 죽었고 다시 사실 때 우리도 거기 참여하여 다시 산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굳게 서서 날마다 나를 죽이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빌3:10에“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했습니다. 은혜 받아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어지는 것 이것도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4. 우리를 연단시키는 시련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벧전4:12-13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꿩 먹고 알 먹고 훈련도 받고 상급도 받고, 그러므로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5. 예수님 고난에 참예하려면 고난당하는 자를 도와야 합니다.
마25:40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마 25장의 심판대의 좌우편에 양과 염소 아시지요? 양은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고 칭찬 받은 사람들이고 염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착각이 있었습니다. 소자들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님의 모습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권사님께서 철야기도를 하면서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 보기를 원했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든지 예수님께서 “내일 12시에 너희 집을 찾아 가마” 하셨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집안을 쓸고 닦고 방석을 내놓고 음식을 마련하고 분주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12시에 웬 거지가 밥 좀 달라고 찾아옵니다. 지금 예수님 맞이할 준비도 바쁜데 웬 거지가 찾아오니까 권사님은 그 거지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오신다고 하시고서 안 오십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어제 12시에 네 집을 찾아갔었느니라. 그런데 너에게 쫓겨나서 들어가지 못했다” 하시더랍니다. 그제서야 권사님은 어제 그 거지가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했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변장하시기도 하시지만 변장하지 않더라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병들었을 때 찾아가보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고 배고플 때 먹여주고 입혀주어야 합니다. 약 5:13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이렇게 해 주는 것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은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골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했습니다.
왜 교회를 위한 수고가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함입니까? 주님께서 하시다가 남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나의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왜정 말기 신사참배 문제로 5년 동안 감옥에서 고초 당하시다가 결국 순교를 하셨는데 순교하시기 직전에 쓰신 고난의 명상록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옵니다. 거기 보면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내가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영광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대답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으리이까?" 했습니다.
6.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은 복음 전도하는 것입니다.
딤후2:3에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그리고 딤후2:9에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계1:9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이렇게 교훈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은혜는 물론 고난에도 참예함을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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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은총 / 시119:65-72
이 시간에 “고난의 은총”이라는 제목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생긴 이래 인간은 왜 사느냐 하는 질문보다 더 심각하고 처절한 질문은 인간에게 왜 고통이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현실로 도전해 오는 문제이며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왜 인간에게 고난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편 기자를 통하여 고난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한 마디로 고난은 하나님이 내신 학교라는 것입니다.
1. 고난은 신앙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66-67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습니다.
여기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는 신앙의 학교라는 점입니다. 히5:8을 보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배운 지식만이 내 심령 깊이 깨닫는 말씀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도 모르고 인생도 모릅니다. 교회사를 보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이 있습니다. 그 논쟁은 소개하지 않더라도 펠라기우스가 왜 잘못되고 어거스틴이 옳은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펠라기우스는 인생의 고난을 몰랐습니다. 그는 그저 순탄하게 편하게만 자라온 사람이었기에 인생이 무엇인지 고난이 무엇인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고난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기독교사에 빛나는 학자요 신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 그것은 고난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도 모릅니다. 성도들도 보면 대부분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또 고난 속에서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스왈더 샌더스 목사는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신음할 때 잠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당신이 내 곁을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장애가 됩니다. 당신의 간호에 대해서 감사하지만 나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이 고통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기 원합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내 아내는 참으로 위대하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난 곳에서 신앙을 배우는 사람은 훌륭합니다.
2. 고난은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학교입니다.
69절에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교만한 자가 자기를 대적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이 현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교만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은 교만한 자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돈 벌면 교만, 조금만 더 배우면 교만, 인물이 좋아도 교만해져서 남을 멸시하고 천대하는데 고난 받고서야 겸손해집니다.
신앙의 최대의 경지는 겸손입니다. 사람이 끝까지 겸손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을 것입니다. 물은 아래로 흐르지 위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사코 우리를 겸손의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합니다. 그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고난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인격을 연단하는 풀무라고 합니다. 풀무 속에서 쇠붙이가 녹을 때 불순물이 다 제거되고 순수한 것만 남는 것과 같습니다.
경기도에 가면 풀무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풀무원에는 쇠를 녹여 제련하는 풀무의 그 정신에 따라 설립된 학교도 있고 농장도 있고 회사도 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그 정신에 따라 참 신앙을 가진 학생들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고 또 좋은 식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풀무의 연단을 통해서 이 세상의 헛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다 빼내고 주의 말씀과 은혜로 채우십니다. 그래서 고난의 학교에서 배운 야곱이 참 신앙자가 되고, 고난의 학교에서 배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고, 탕자가 고난의 학교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내가 성공할 때는 세상을 보았으나 내가 병상에 누워 잇을 때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했습니다. 이처럼 고난은 겸손의 학교입니다.
3. 고난은 부지런을 가르치는 훈련의 학교입니다.
70절에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 안에도 이런 지방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안일과 게으름의 마음입니다. 이 안일과 게으름이 신앙의 가장 큰 적입니다. 그래도 이 게으름과 안일이 나를 대적하고 죽이려 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뜨거움을 버리고 적성에 맞게 적당히 모양만 멋있게 신앙생활하려고 하면 은혜 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목장에서는 양들 사이에 염소를 한 마리씩 넣어 놓는 답니다. 그러면 양들은 정이 많아서 서로 뭉치면 속에 들어간 양은 죽는데 염소가 그 꼴을 못보고 머리로 받아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부지런한 신자로 만들어냅니다. 왜 나에게 어려움이 있는가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기에 그렇다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히12:6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열심 내야 합니다. 더 예배해야 합니다. 더 기도해야 합니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더 전도해야 합니다.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열심 내야 합니다.
사람의 몸도 머리는 시원해야 하지만 배는 뜨거울수록 좋답니다. 배가 차신 분들은 배를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낮에나 식후에는 물을 적게 마시고 찬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는 차듯이 말씀은 누구보다 냉철하면 좋고 그러나 신앙은 뜨거워야 합니다. 자꾸 신앙에 찬물 부으면 안 됩니다. 열심 없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달려가는 말에게 채찍이 왜 있습니까? 더 잘 달리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욥도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케 하는 고난의 학교입니다.
4. 고난은 위대한 일을 이루는 학교입니다.
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인격이나 위대한 작품은 다 고난의 산물입니다. 위대한 인물 치고 고난을 겪지 않았던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위대한 소설도 고난 가운데 쓰여 졌고, 베토벤의 “운명”이라든지 헨델의 “메시야” 등도 다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졌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배부르고 따뜻하면 위대한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야곱도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지요. 진주도 조개 속에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그 이물질로 인해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도 수천도의 고열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솥단지의 구수한 슝늉도 타지지 않으면 나오지 않지요? 값비싼 향품도 모두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가리켜 흔히 변장된 축복이라고 합니다. 변장하고 찾아오니 축복인지 모르지만 귀한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난의 은총을 감사하고 이 학교에서 열심히 배우십시다. 하나님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부지런을 배우고 회개를 배우고 온전함을 배우십시다. 사명을 배우십시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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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로운 고난 (고후 4:17)
‘보배로운 고난’이라는 제목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고난이 보배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 17절의 말씀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식이 찬란한 구절을 보셨습니까?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고난에 대한 설명이 이처럼 대단해요. 주님이 허락하신 고난이 그만큼 보배롭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1. 고난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줍니다.
히12:10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고난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고난 속에서 회개하고 거룩함을 입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2. 고난은 우리를 깊은 영적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롬 5:3-5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 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고난은 우리에게 깊은 기도 속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을 주실 텐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이 뜻을 못 맞춥니다. 한나 보세요. 한나가 고통 속에 한이 맺혀 얼마나 깊이 기도합니까? 그래서 얻은 아들이 사사 선지자 제사장 삼권을 다 가진 사무엘입니다. 이처럼 깊은 기도자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은혜입니다.
3. 고난은 놀라운 부흥을 가져다 줍니다.
출1:12에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합니다. 초대교회 보세요. 핍박 속에서 교회는 더욱 부흥했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일군들을 보면 고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48:10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하셨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을 갖게 된 동기를 조사하면서 놀란 것은 거의 대부분 고난 속에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못 고칠 병에 걸렸다든지, 자녀를 잃었다든지, 이런 한 맺힌 과거가 있더라고요. 기독교는 고난 속에서 만들어졌고 고난 속에서 자랍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든지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 깊은 은혜를 주십니다.
이 시간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고통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평안하다고요? 돌아보세요. 내 일생 다가도록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했을까?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통을 느꼈으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했겠습니까? 이 고통이 있을 때 구원이 있습니다. 부흥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고난은 피하지 말고 감사합시다. 그리고 고난의 의미를 알고 순종합시다.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보배로운 믿음 보배로운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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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설교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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