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복무시절 안성기 배우님
2022.09.17 11:52:35
나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2년 학훈단(현재는 학군단)에 지원해 장교로 軍에 가게 된다.
내가 장교로 軍에 가기로 한것은 내 전공이 베트남어였기 때문에 베트남에 ‘越語(월어) 교육대 교관’으로
전공을 살리면서 장교로 軍 생활을 하는 이른 바 一石三鳥(일석삼조)를 기대하고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나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임관하던 1974년은 베트남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이미 1973년부터 철군이 시작되었던 시기라 나의 베트남에서의 군 생활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장교 후보생 시절 군사학 성적이 좋았던 나는 임관시 군번이 ‘74-00052’이었다.
이 군번은 임관한 2000여 명의 동기 중 52등이었던 것을 뜻한다.
덕분에 임관식에서 나는 육군참모총장 상까지 받았다. 어학을 전공하면 보병장교로 보임을 받던 관행과는 달리
포병 병과를 받았다. 나는 강원도 철원 김화지역에서 포병 관측장교를 했다.
그것도 말단 포병 대대에 배치돼 근무했다.
부임 첫날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부임 첫날 밤, 주번 사관이 공교롭게도 대학 선배였고,
선배는 내게 “애인이 찾아왔으니 대신 주번 사관을 맡아달라”면서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무조건 한 명만 혼내면 첫날밤은 조용히 지나간다”며 첫날밤 치르는 비법(?)까지 일러 주었다.
완장을 차고 점호를 받는데 무엇으로 ‘건수’를 잡을까 궁리를 하다 포병 병사들은 보병들과는 달리
총을 자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총기 수입’ 상태가 불량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져 내무반 전 병사들에게 “총기를 든다 실시” 하고 검사를 해보니
총구가 시뻘겋게 녹슬어 있었다. 선배의 지침에 따라 병사 한 명을 시범으로 한 대 치니 나가 떨어졌다.
내무반은 조용해졌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그 당시 그 병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지휘자로서의 권위(?)는 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나의 나긋나긋한 성격을 잽싸게 알아차린
병사들이 내가 주번을 설 때면 생일 파티며 회식을 만들어 즐겼던 것이다.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에게는 설설 기던 병사들이 나를 만만히 보았던 모양이다. 나머지 병사들은 나를 ‘천사’로 부르며 거의 경례를 안 하는 수준이었다. 어떤 병사는 “안녕하세요”라고까지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관측장교였던 나는 부하 병사 두 명을 데리고 산에 있는 OP(포병 관측소)에 올라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관측소는 529고지였는데, GP에 비해 OP는 상부의 검열이 거의 없었다.
한 번은 시내에 나가 헤밍웨이며, 사르트르며, 카뮈며 문고판 책을 잔뜩 사와 하루에 한 권씩 읽어댔다.
딱딱한 사회과학 서적보다 단편소설류를 좋아한 나는 책이랑 정말 친해졌다.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근무지 교체를 하는데 이 시간은 정적과 함께 유익한 시간이 됐다.
기타도 사가지고 와서 작곡도 하던 시절이었다.
군 생활은 보직이 말해 주는 것 같다. 전역을 앞두고 대대장이 새로 부임해 왔다.
나는 그 시기에 군단 장교 음어 경연대회에 출전했다. 300여 명의 출전자들이 모여 음어를 해독하는 대회였는데 숫자표의 숫자가 서로 만나는 부분을 한글자모로 판독해 단어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639는 ‘간첩’, 745는 ‘이동’ 식이었다. 앞 사람들이 워낙 잘 하기에 입상에 실패한 줄 알았는데,
대대로 돌아온 후 며칠 뒤 작전과장이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내게 “안 중위, 1등 했다”며
“다른 사람은 오탈자가 많이 나왔는데 너는 완벽했다”고 칭찬하는 게 아닌가.
돌이켜보면 어디에 있건 자기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나의 경우는 다섯 살에 연기를 시작해 중학교 3학년까지 연기를 하고 이후에는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으니
지금의 연예계 스타들이 군에 가기 싫어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는 없겠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한창 인기가 높은데 그 인기를 접고 군에 갔다 오면 상황은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같은 안보상황에서 태어난 우리 젊은이들은 누구나 이 사실을 감수하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보편적인 인간들의 세계, 즉 군을 알아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불알친구’들에게도 배우는 게 많은데. 더욱이 사회의 온갖 특기와 개성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대통령도 청와대에만 있으면 민심을 못 듣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어떤 경험이든 해 보는 것이 안해보는 것보다 좋다. 이 경험은 직업에도 녹아든다.
평생을 바라보며 2년 반이라는 시간을 받아들이자. 나는 1975년 베트남이 패망한 뒤 베트남에 가지 못한 미련을 ‘하얀 전쟁’으로 풀었다. 영화 ‘남부군’을 찍으면서 정지용 감독에게 안정효씨로부터 산 원작을 소개하면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면 내가 꼭 출연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었다. 결국 난 1991년 ‘하얀 전쟁’을 통해 영화 속으로 그것도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베트남전엘 다녀오고야 말았다
첫댓글 어디에 실렸던 기사인지 의미있는 자료입니다.
안소위 군번이 52번, 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