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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묵시문학의 정체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혼돈기였던 신,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장르가 묵시문학(Apocalyptic Li
terature)이다. 계시(Revelation), 또는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 것
(unveiling)을 의미한다. 환상,예언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묵시문학이라 불리는 문서군(文
書群)은 일정한 문학형식을 갖고있는 문학장르이며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험하고
신비한 문서가 절대 아니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저자의 불순한 의도가 숨겨진 거짓 예언서이다. 과거의 유명한 선지자들
의 이름을 빌려 지나간 사실을 예언인것처럼 기록하거나, 또는 기존의 문서에 누군가가 내용
을 덧붙여서 지나간 사건을 예언인것처럼 꾸며 새로 등장할 왕조를 찬양하는 등의 행위를 보
여준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불순하기 그지없는 문서들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요한계시록 만큼은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으로 혹세무민하는 거짓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아무것도 예언하지 못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이후의 역사는 계시록과는 어긋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구약의 묵시문학에서 상징과 숫자들을 차용했다. 구약의 상징과 숫자들은
구체적인 역사를 예언한 것인데,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수비학적인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없이
마구 사용했다. 이제 말많고 탈많은 그 묵시문학의 정체를 파헤쳐 보자.
▶ 묵시문학의 태동
조로아스터교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 이후 3000년에 구원자가 도래해서 불의 심판이 내려지
고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심판의 날에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 의로운 자들은 고통없이 불바다
를 통과하지만, 불신자들은 정화 되거나 불에 타 없어진다. 의로운 자들과 정화된 자들은 세계
화재 이후에 정화된 새 땅에서 살 것이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이사야 45장 1절]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빌론 유수를 당한 유대인을 해방 시켰다.
유대인들은 그를 여호와가 보낸 메시야로 칭송했으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사상세계가
유대인들에게 급속하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고레스와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적대세력으로써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육체와 물질의 번영을 약속하는
다산 의식등을 배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묵시문학(Apocalypse)으로 알려진 문학형식이 유대
인들에게 급속도로 보급 되었으며, 이것은 제 2,3 이사야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
사야 43장 18~19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 할 것
이라." [이사야 65장 17절]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롯된 묵시문학은 유대교에도 전파되어 신구약의 중간기에 해당하는 BC
2세기~1세기에 유대인들도 묵시문학을 기록하게 된다. 그 문서들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롯
된 영지주의 사상처럼 하나의 강력한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곧, 선과 악, 신과 악마,
빛과 어두움은 서로 충돌하고 있어 도무지 화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교정이 불가능한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미련이 거의
없으며, 이러한 면에서 비관주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 속에 신의 부재가 극
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신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을 방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정상적인 방법보다는 신의 나라의 수직적인 도래를 통한
역사의 파국을 희망한다.
이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던 모세오경에서는 찾기 힘든 점이다. 오경속의
여호와는 유대민족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이방인들을 멸한다. 특히,
유대인의 묵시문학속에는 강력한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느껴야 했던 민
족적인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최초의 독립문서(獨立文書)로써의 묵시문학은 BC 2세기 중엽의 다니엘서이지만, 그보다 이전
에 이사야서, 스가랴서등과 같이 비교적 짧은 같은 종류의 문서가 구약의 다른 부분에 포함 되
었다. 이 소 문서들은 대부분 상징적인 서술로 일관되어 있고, 현실에 순응하는 제사장들과
예루살렘 귀족들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기록되었다.
특히, BC 6세기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BC 2세기경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의
유대교 탄압과정에서 등장한 다니엘서에서 이러한 흐름이 잘 나타나고 있다. 당시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가와 알렉산더 치하의 제국주의적인 통치는 정복한 백성들을 완전히 헬라화하려
는 의지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유대땅에서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페르시아에도 동일한 묵시문
학적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디아스포라화 된 수많은 유대인들이 율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도
이러한 헬라화의 과정에서 일어났다.
계속되는 외세의 침공으로 혼돈을 겪었던 유대의 정치상황하에서 히브리어로 '성스러운 사람
들' 혹은 '경건한 사람들'을 뜻하는 하시딤(Hasidim or Chasidim)운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은 유대사회에서 만연해 있던 헬레니즘 사상을 배격하고 유대인의 옛 전통을 지키려고 전전긍
긍했지만, 아이러니칼 하게도 그들의 사상마져도 부활사상과 종말론에 오염되어 있었다. 특히
하시딤으로 부터 죽은 자의 부활과 같은 묵시문학적 사상체계를 발전시킨 바리새파가 파생되
어 나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유대교내에 영지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쿰란의 에
세네파는 예루살렘의 성전제의를 거부하며 이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종교
관은 이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신구약의 중간기에 등장한 묵시문학들은 악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종
말이 온다는 철저하게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나중에 기독교가 등
장한뒤 이 세상을 창조한 여호와가 제작자인 데미우르고스에 불과하고, 예수 만이 참하나님이
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현재의 기독교가 아무리 영지주의를 배격한다고 해도 기독교안에 잠재된 종말론 그 자체가 강
력한 이원론이다. 이 세계는 구제불능의 세계이니 필연코 멸망해 버릴것이라는 극단적이고 비
관적인 세계관이다.
러셀의 설명에 의하면 묵시문학은 삶이 평안하고 정상적일 때에는 결코 번성하지 않는다고 한
다. 핸슨(Paul D. Hanson)의 설명에 의하면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유래되는 묵시록의 기록자
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당시 외세의 침공으로 고난을 겪었던 유대민족들 사이에서 종말론적인 묵시문학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희망은 이 세계와 역사가 일단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기대한다.
마찬가지로 과거 이스라엘 역사상의 위대한 일들은 미래에 있을 종말의 시기(세상끝날)에 재현되리라는
묵시문학적 희망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여호와의 통치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이 세계가
탈역사화하여 초월적 세상이 다시 새로 펼쳐질것이라는 기대로 바뀌어졌다.
기독교 정경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유대교 묵시문학으로서 에티오피아 에녹서(1~107장, 혹
은 에녹 1서), 슬라브 에녹서(1~73장, 혹은 에녹 2서), 히브리 에녹서(1~48장, 혹은 제 3에녹
서,세가지 종류의 에녹서는 쓰여진 언어를 따라 분류해 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저작 연대 역시
크게 차이가 난다), 에스라 제4서, 시리아어 바룩 계시록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 후대에 조작된 구약의 예언
구약의 묵시문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
(에녹, 에스라, 다니엘과 같은)의 이름을 빌린 위명(爲名: Pseudonym)으로 과거와 현재의 사
건을 미래시제로 조작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이것을 인터폴레이션(Inter
polation :수정 어귀를 가미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오래된 예언서들이 이러한 형태를 띄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노스트라 다무스의
모든세기라는 예언서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상당히 상징적으로 암시 되어 있어서 해
석하기가 난해한데, 그중에서 현대인이 읽어보아도 금방 알아낼수 있는 예언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대혁명의 예언이다. 1999년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고 해서 세상을 떠
들썩하게 만들었던 구절도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스럽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예언
은 아주 자세하게(왕이 사로잡히는 내용까지) 서술되어 있다. 오늘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중, 히틀러의 등장, 프랑스 대혁명등의 예언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고 주장하면서 혹세
무민하는 사람이 있는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많은 부분이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 진것이라는데 합의를 보고 있다.
구약의 예언들 역시 이러한 인터폴레이션 현상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구약의 예언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라고 기록해 놓았지만,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과거의 일이된다.
예를들어, 안티오코스4세라는 시리아의 왕이 유대땅을 약탈하며 유대교를 탄압 했다가, 반란
이 일어나 그를 축출하고 다시 유대인이 왕권을 잡게 되었다고 하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새로 들어선 마카비 왕조의 왕권확립을 위해 왕을 지지하는 세력의 누군가가 그 모든 것이 이
미 오래전에 예언 되었다고 거짓문서를 작성한다.
그는 시중에 존경 받는 다니엘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 시킨다. 책의 저자도 다니엘로
발표 한다. 그런데 다니엘은 BC 600년경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전설적 인물이다. 따라서 책은 BC 600년경에
기록된것으로 간주 된다.
다니엘로 위장한 익명의 저자는 책 속에서 앞으로 닥칠 일들을 경고 한다. 하지만, 익명의 저자에게는
바빌론제국의 몰락과 유대인의 귀환, 헬라제국의 분열, 안티오코스의 유대교 박해와 몰락에 대한 사건들은
이미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다니엘의 이름을 빌린 저자는 그것이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인것처럼
기록한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할지 못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사실이다. 다니엘서에는 후기의 헬라어 단어
가 3개(3장에 악기들의 명칭으로 등장)나 들어 있으며, 2장 4절~ 7장 28절은 후기 아람어로
기록 되었다. 나머지 부분도 후기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후기 히브리어가 사용된 구약으로
아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등이 있다) 다니엘이 바빌론에 끌려간
BC 6세기에 씌여졌다면 이런 현상은 일어날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쓰여진 문체, 언어, 문법
역시 그 시대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the new thompson annotated-chain reference bible]
또한 BC 190~180년에 쓰인 집회서의 이스라엘 예언자 명단(집회 48,22; 49,7-8.10)에 다니엘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후의 BC 134 ~ 104년 사이에 저술된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다니엘서를 언급한다
(1마카 1,54 = 다니 9,27과 11,37).
그리고 70역의 다니엘서는 BC 145~140년경의 로마 신탁집에서도 이용된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
/임승필번역 / 구약성서새번역17-다니엘,토비트,유딧,지혜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주석中 다니엘서
입문]
그리고 다니엘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의 수집 과정을 통해 성립 되어 갔다고 여겨진다.
1장은 3인칭 문체로 기록 되었고 3장에는 다니엘이 나오지 않으며, 2장과 4장 및 3장과 6장은
동기를 변화시키며, 그 묘사가 언제나 정확하지 않는데서 원래 개별적인 독립 자료들 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니엘서 1~6장은 이방 왕을 거부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여호와를 찬양하
게 하고 있는 반면, 7~12장은 이방 왕을 유대인의 조종밖에 있는 괴물로 표현한다. 여호와의
호칭을 사용하는 9장 4~20절과 12장 11절 이하도 후기의 첨가로 여겨진다. 또한 여호와의 존재보다
꿈이나 환상속에 등장하는 천사들이 중요하게 거론 된다.
다니엘서의 최종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전통적 방식에 따라 느부갓네살(1~ 4장), 그의 아들
벨사살(5장과 7~8장), 그리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와(6장과 9장) 페르시아 사람 고레스(10~1
2장) 등 여러 임금의 통치 시대에 배치 시켰다. 다니엘서는 BC 606년에 유배를 간 한 젊은 유
대인이 세 동료와 함께 선택을 받아 왕궁의 시종이 되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1장). 이 젊은이
는 해몽을 잘 함으로써 벼슬에 오르게 된다(2장). 그 뒤에 그와 세 동료는 일시적으로 생명까
지 위협받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3,6.14) 페르시아 제국이 시작될 때까지 출세 길을 달린다.
유배 간 유대인들이 벼슬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정승(6장)
또는 지방 장관, 그리고 현인들의 총감독관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2,48-49; 4,6; 5,11), 저자
는 그 가능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 이는 그의 의도가 역사적 설화와는 다른 차원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것이다.[새번역성서 주석中 다니엘서 입문.1992 / 분도출판사]
히브리 경전에서 다니엘서가 예언서에 속하지 않고 성문서에 포함 된다는 사실도 이 문헌이
나중에 정경으로 받아들여 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니엘서는 그 책이 왜 씌여 졌는지에 대한 저자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다니엘이 바빌론왕들의 꿈을 해몽해주는 앞부분 이야기를 제외하고, 후반부의 예언들은 거의
다 안티오코스4세의 몰락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안티오코스에 대한 예언은 날짜와 시기
까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또한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끝날은 종말이 아니라 안티오코스가
몰락하는 그날이다. 이런점들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벨론 시대에 쓰여진 것이 BC 2세기경의
안티오코스와 마카비 왕조의 시기에 기록된것이라는 것은 이미 학자들은 잘알고 있는 공공연
한 사실이다.
바빌론에 끌려 간 다니엘이 바벨론의 몰락과 새로 등장할 왕조를 예언했다고 하지만, 안티오
코스 시대에서는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이름을 알수없는 다니엘서의
위명의 저자는 이미 지나간 사실을 미래에 일어날 일처럼 서술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역시 다니엘서에 아래와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성립연대는 BC 6세기에 다니엘이 바빌론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했으나 오늘날에는 BC 2세기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박해 당시 다니엘의 이름을 빌려 기록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시 된다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다니엘서 Book of Daniel항목]
카톨릭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시록적인 집필의 구성을 마카비왕조 기간동안의 미지의 저자의 일로 여기고, 정확하게 안
티오코스4세(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년)라고 지목한다."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ume IV / Book of Daniel 항목]
'숨겨진 성서'의 저자 윌리스 반스토운은 외경인 이사야의 승천을 설명하면서 성경의 묵시문
학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그 환상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묵시록의 저술자는 사도나 구약의 선조등 성서상의 저명
한 인물들을 그 저술자로 내세운다. 또한 예언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 내용을 일반적으로
과거에서 끌어낸다. 미래의 역사에 대한 예언이 적중한다. 묵시록의 내용은 이미 과거에 발생
한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3권 / 이동진역 / 문학수첩 / P.22]
다니엘서의 저자와 기록연대에 대하여 최초로 비평을 가한것은 AD 3세기 시리아 사람으로 헬
라 철학자인 포르피리(Porphyry)였다. 그는 AD 233년 시리아의 두로에서 태어나 잠시 가이사
라에서 오리겐(Origen)교부(敎父)문하에서 공부한후, 로마에 가서 신플라톤주의 대표 철학자
인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철학자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항하여'(Against the Christians)라는 제목으로 15권의 책을 썼는데
그의 책 제 12권에서 다니엘서는 다니엘에 의해 기록된것이 아니라 BC 2세기 시리아의 왕이
었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시대에 유대땅에 살던 어떤 유대인에 의
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다니엘서는 장차 올 사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을 미래 시제(時制)를 써서
예언인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며 저자가 알 수 없는 장래일을 추측으로 그럴듯하게 기록한것 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8, 19세기를 직후해서 유럽에서 중세기적 신학을 배격하
고 합리주의적인 새로운 신학의 조류에 의한 고등비평이 일어나면서 다시 이사야서와 다니엘
서와 같은 문헌들이 비평의 도마위에 올려졌고 그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구약의 예언서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한 권의 문서 뒤에 자신의 책을 붙여서,
전체가 연결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사야서의 저자는 한명이 아니다. 이미 학계에서는
오늘날에는 이사야서를 제3의 이사야까지 분리해 놓고 있는 상태이다.
두산세계대백과 역시 아래와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예언자 자신이 직접 쓴 것은 아니고 제각기 복잡한 절차를 거쳐 형성되었는데,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등은 후대에 많은 가필이 이루어졌음이 인정되고 있다." [두산세계대
백과 EnCyber / 예언서 豫言書 prophets항목]
특히 모세 오경과 달리 예언서의 가필이 심했던 것은 그 책의 공인과정에서도 알수가 있다.
토라(Torah), 즉 모세 오경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 여러 가지 전승들이 하나로 묶어졌고 가장
빨리 경전으로 인정 받았다. 반면에, 예언서인 네비임(Nebiim)과 성문서(聖文書)인 케투빔(Ke
thubim)은 BC 2세기의 마카비 혁명시대에 하나둘씩 나타나서 AD 70년경의 예루살렘 멸망 시
기에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예언서의 내용들이 바빌론 유수 이후에 등장해서,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받기 전까지 계속해
서 수많은 내용이 덧붙여 졌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예언서의 내용이 기가 막히게 맞았던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특히, 구약의 예언들은 마카비 혁명이전의 사건에 대해서 기가막히게 들어맞는 예언을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적사건, 즉 헤롯대왕과 로마의 등장, 예수의 등장, 유대인들이
유대땅에서 추방되는 사실에 대해서 구약의 예언서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
다. 마카비 혁명 이전에는 위명의 저자가 예언서를 마음대로 조작 할 수가 있었지만, 유대교의
경전으로 자리잡아 가면서 함부로 손을 대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일것이다.
혹시, 예수에 대한 예언이 구약에 있다고 주장하실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7장의 억지로 '끼워
맞춘 예수신화'에서 신약의 저자들이 아무런 상관없는 구약의 구절을, 고의적으로 예수의 생
애에 끼워 맞추기 했다는 것을 밝혀둔바 있다.
▶ 이사야서의 저자는 3명 이상이다
이사야는 유다의 요담, 아하즈, 히즈키야 왕이 재임하던 BC 742년경부터 40여 년간 활동했다
는 전설적인 예언가이다.
이사야서는 그 문학양식이나 기술된 내용의 역사적 상황, 문체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위명의 저자가 내용을 덧붙여 가기 시작해 BC 4~3세기 쯤
에 하나로 묶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의 200년간의 이사야 연구들로 인해 이제는 이사야서의 저자가 한사람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진 않지만, 외국에서는 일반평신도들도 잘 알고있는 이 사실을 한국의 목
회자들은 침묵하고 있다.
12세기에 에즈라(Ibn Ezra)가 이사야서의 통일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은 있었으며,[M. Fr
iedlaender, The commentary of [Abraham ben Meir] Ibn Ezra on Isaiah, London 1873; A.
Geiger, Wissenschaftliche Zeitschrift fur judische Theologie 2 (1836), 553~557], 아이히
호른이 처음으로 이사야서의 39장과 40장을 나누어서 40장 이하를 '제2이사야'(Deuterojesaj
a)라 불렀다.[J.G. Eichhorn,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Leipzig 1780~1783, Gottin
gen 41823/25, 83~97].
그후, 1892년에 베른하르트 둠은 그의 이사야서 주석(B. Duhm, Das Buch Jesaja, HAT III, 1
892; 41922, nachdruck 1968)을 내면서, 40~55장의 제2이사야서 연대는 540년경이며, 13,
2-22; 14,4b-21.22f.; 21,1-15는 제2이사야와 동시대인 다른 이의 저작이며, '야훼의 종 노
래' (42,1-4; 49,1-6; 50,4-9; 52,13-53,12)는 포로기 이후 유대 공동체내 한 사람의 작품,
그리고 56~66장은 이와는 또 다른 사람으로써 그를 예루살렘에서 살았던 느헤미야 등장 바로
이전의 '제3이사야'(Tritojesaja)라고 명명했다.
즉, 1~39장까지를 제1이사야서, 40~66장까지를 제2이사야서로 구분 지은 이래, 다시 제2의
이사야서 역시 저자가 두명 이상이라는 논의가 제시되어 1~39장을 제1이사야서, 40~55장
을 제2 이사야서, 56~66장까지를 제3 이사야서로 구분짓게 된것이다.
둠의 제3 이사야서 설이 나온후, 수많은 연구와 논문이 쏟아졌다. 제3의 이사야서 부분은 아직
도 이견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에 하나로 합쳐져 있을 뿐, 제3이사야서의 문학양식
이나 기술된 내용의 역사적 상황, 문체가 너무도 틀리기에, 폴쯔는 다수제작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며,[P. Volz, Jesaja II, KAT Bd. IX, Leipzig 1932] 체인(Cheyne)은 이사야서 주석 에서
제2이사야에게서 영향을 받은 제2이사야 학파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T.K. Cheyne, Introd
uction to the Book of Isaiah, London 1895]
새번역성서 주석中 이사야서 입문에서는 제3이사야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사야서 40~55장에서 56~66장으로 넘어가 보면, 이 둘 사이에는 사고와 어휘의 유사점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조와 새로운 표현들의 차이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한편 이사야
서의 이 마지막 부분 안에서도 이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본문들 사이의 다양성을 발견하게 된
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주석가들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주교회의성서
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 / 구약성서새번역5-이사야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어떤 이들은 이사야서 56~66장을 일종의 편집물, 곧 저자나 생성 연대와 관련해서 각기 다양
한 단편들의 인위적인 집합으로 여긴다. 이러한 설명은 이 작은 책에 들어있는 시들 사이에 일
정한 부조화가 있음을 전제한다. 사실 모든 것을 동일한 한 저자의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고 보
여진다. 다른 이들은 56~66장 역시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 땅에 재입주하는 문제에 봉착한 제
2이사야에게서 유래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예언자 스스로 자기만의 고유한 표현들을 변형시키면서까지 자신을 표절할 가능성이 별로
없고(40,3과 57,14; 52,12와 58,8; 49,23과 60,16 등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작품들 사이의 차이점들이
유사점들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남을 부정할 수도 없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11개 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제2이사야에게서 영감을
받아 유배가 끝난 뒤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사명을 수행한 동일한 한 예언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새번역성서 주석中/ 위의 책]
제3의 이사야서에 대한 논란은 논의는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물론, 그 논의는
제3의 이사야서를 찬성하는 학자와 부정하는 학자간의 논란은 아니다. 이사야서가 세부분으
로 나눠진다는데에는 동의하지만, 제3의 이사야서를 어떻게 규정짓느냐하는 논의가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제3의 이사야서설은 약간의 이견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사야서의 저자가 여러명이라는것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정설이다. 이사야서의 예언 역시 후대에 덧붙여지고 가필이 심하게 이루어진 조작의 예언이다.
특히, 앞서서 언급했던 배타적인 유대인의 민족신 여호와는, 제 2의 이사야서 부터 보편성이 나타나기
시작 한다.
▶ 요한계시록에 영향을 준 다니엘서의 숫자
다니엘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날짜는 '일곱 때'(7년; 다니엘 4;16), '한 때 두 때 반 때'(3년반;
다니엘 7:25,12:7), '70 이레'(70주간; 단 9:24), '1290일'(다니엘 12:1), '1335일'(다니엘 12:12), '2300일'(다니엘
8:14)등이다. 이러한 숫자는 또한 요한 계시록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계 12:6, 12:14, 13:5 참고)
그 동안 학자들은 다니엘서의 날짜들을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에 해
당하는 과거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특히 학자들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연대 계산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다니엘서의 예언이 안
디오쿠스 4세 때의 사건을 예고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
데, 뒤에서 밝히겠지만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이집트 등지에서 유행한 궤변론인 수비학에 빠져
서 다니엘서의 숫자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마구 남발했다. 이것은 유대인의 게마트리아(Gema
tria), 즉 그들이 표현하는 글자와 동등 값을 가진 숫자를 기초로 하여 경전 해석을 유도하는
신비적 궤변론이다. 이것을 또 이솦쉐피즘(isopsephism)이라고도 한다.
우선 다니엘서에 자리잡고있는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자.
다니엘서 10장에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 3년에 다니엘은 3주간의 고행중에 환상과 접하게 된
다. 모시옷을 입고 순금 띠를 두루고, 몸은 감람석 같았고, 얼굴은 번갯불처럼 빛났으며, 눈은
등불 같았고, 팔다리는 놋쇠처럼 윤이 났으며, 목소리가 우렁찬 사람이 다니엘에게 나타나 그
에게 계시를 내린다. 그 이후 12장에는 또 다른 두사람이 나타나는데, 다니엘은 두 사람이 끝
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다니엘 12장 7절에서 그들은 종말이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들이 말한 '한 때 두 때 반 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다시 묻는다. 그러자 그들이 다시 대답한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지낼 것
이요. 기다려서 일천 삼백 삼십 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너는 가서 마지막
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다니엘 12장 11~13장]
이 구절을 끝으로 다니엘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다시 쉽게 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오늘날 우리에게는 난해한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것이 있다. 환상속에 등장한 자들이
말한 종말의 시기에 숫자가 아주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니엘서가 씌여진 시기는 안티오코스 4세(Antiochos IV. BC 215?~BC 163)
때이다.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의 왕이었던 안티오코스 4세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現神
王)라고도 불리며, 그리스 로마 문화에 심취하여 헬레니즘 문화에 입각한 제국주의 국가의 통
일을 꿈꾸어 유대교를 박해했다. 그러나 결국 유대땅에서 마카베오가(家)를 중심으로 하는 독
립전쟁이 일어나고, 안티오코스 4세는 박트리아와 파르티아를 회복하기 위해서 동방원정을
계획했으나 BC 163년 사망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유대교 박해는 아주 유명하다. 그는 이집트를 점령하기 위해 원정을 나섰다가 실패
한 후 유대땅을 침략해서 약탈을 일삼았다. 그는 유대인 8만명을 학살 또는 노예로 잡아 갔으
며, 종신직인 대 제사장 직을 돈을 받고 넘겨 버렸다. 또한 율법책을 가졌거나 아이에게 할례
를 베푸는 자는 사형에 처했으며 유대인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유대인들이
성전의 제단에 희생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준수하는 것을 금지 시켰으며, 이를 어기는 자가 있
으면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특히 무엇보다 유대인의 성전에 그리스의 제우스 신전을 세웠
으며, 제단에 유대인이 부정하게 생각했던 돼지를 잡아 그 피로 제사를 지냈다. 그의 점령 아
래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개국이래 최대의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이다.
다니엘서 후반의 예언은 대부분 안티오코스의 유대교 탄압과 그의 몰락에 대한 예언이다. 다
니엘서에 등장하는 숫자들은 모두 그의 통치기간과 일치한다. 다니엘서 8장에는 2300일이라
는 숫자가 등장한다. 다니엘은 환상속의 장소에서 뿔달린 숫양을 통하여 환상을 접하고, 환란
의 시기가 얼마동안 지속되느냐고 묻는다.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
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 8장 13~14절]
여기서 천사는 2300일이 지나야 성소가 깨끗하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2300일은 약 6년이 넘
는 기간인데, 이 기간은 안데오쿠스 4세가 유대 땅을 점령하고 그 땅을 더럽혔던 기간과 일치
하고 있다.(BC 169~163년: 혹자는 이 기간이 BC 143년~148년이라고 주장 하기도함)
그의 6년간의 유대통치 기간중, 그의 성전 모독사건은 BC 167년 기슬르월 15일에 시작되어
서[마케베오 상 1장 54절], 성전이 수복 된 하누카(Hanukkah)절인 BC 164년 기슬르월 25일
에 끝났다.[마카베오 상 4장 52절] 그것은 3년이 약간 넘는 기간이며, 이로부터 45일후 안티
오코스4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유대땅에 전해진다.
위에서 언급한 다니엘서 12장 11~12절을 다시 보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멸망케 할
물건을 세운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안디오쿠스 4세가 성전에 드리는 희생 제물
을 금지하고,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를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린 모욕적인 일을 가리키
는 것일 것이다. 맨위에서 언급한 다니엘서 12장을 다시 해석하자면 이렇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지낼 것
이요." [다니엘서 12장 11절] : 안티오코스 4세의 성전모독은 이 일이 일어난 후부터 1290일
후, 즉 3년 95일 후(BC 164년 12월 24일)에 성전은 마카비 일가에 의해 다시 수복이 된다.
"기다려서 일천 삼백 삼십 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다니엘서 12장 12절]
: 1290일간의 성전모독에서 45일을 더 기다린후 1335일까지 견디는 자는 복된 사람이라는 언
급은, 마카비일가에 의해 성전이 회복된지 약 45일 후에(163년) 안티오코스 4세가 사망했다
는 소식이 유대 땅에 전해진 것을 가르키는 것임.
이것이 다니엘서의 1290일, 1335일, 2300일의 숨겨진 의미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니엘서 12장에서 환상속의 두사람이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말은, 1
290일,1335일을 다니엘이 이해하지 못하자 다시 한번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한 때 두 때 반
때'는 그 숫자들과 동일한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도 '한때와 두때와 반때'라는 표현이 나온다.
한때를 1년으로 보고, 모두 합하면 대략 3년 반 정도 되는 기간이다. 역시 안티오코스 4세의
성전모독과 일치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우수운 일은 안티오코스 4세가 사망한지 약 300년 후에 등장한 요한계시록이다.
다니엘서의 상징적인 숫자들은 안티오코스 4세의 성전모독을 예언한 것인데,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다니엘서의 상징적인 숫자들을 수비학적인 측면에서 받아 들였다.
요한계시록에도 환란의 시기인 3년반이라는 상징적 기간이, 1년을 360일로 계산해서 1260일로
나타낸다.(당시 유대인은 정확하지 않은 태음력을 사용했다. 유대력으로 한 달은 29일
다음 달은 30일인 달력을 사용하면 1년은 354일이 되어서 태양력인 1년 365.2422일과는 11일의 차이가
생긴다.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19년 동안 7번의 윤달을 넣어 주며 3, 6, 8, 11, 14, 17, 19년째의 해에
윤달을 추가했다. 유대력에서는 윤달은 아달월 다음에 추가하며 이달은 두 번째 아달월이라는 뜻의
아달 쉐니라고 부른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2장 6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
리라." [요한계시록 11장 3절]
아예 다니엘서의 '한때, 두때, 반때'가 그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요한계시록 12장 14절]
심지어 3년반을 달(月)로 쳐서 42달로 표기 하기도 한다.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요한계시
록 13장 5절]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
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1장 2절]
'한때 두때 반때'의 의미가 3일반이라고 사용되기도 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
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11장 9절]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
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요한계시록 11장 11절]
다니엘서의 숫자는 분명히 안티오코스의 성전모독의 기간을 예언한 것인데, 요한계시록의 저
자는 '한때 두때 반때'의 의미를 '환란의 시기', '참고 인내 해야하는 시기'로 규정해 버렸다. 날
짜로만 기록하는것으로는 성에 안찼는지 표현을 바꿔가면서 기록하기도 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다니엘서의 3년반이라는 상징적 숫자를 환란의 시기라는 수비학적인 측면으로 받아들
인 것이다.
묵시문학을 연구하는 광신자들은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숫자를 가지고 종말의 때를 계산해내
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에스라 시대부터 예수의 죽음 까지를 이 수치에 맞추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1992년부터 1999년까지의 7년이 대환란 기간이고 2000년에 예수가 재림
한다고 주장 했다가 허구임이 드러나 사기꾼으로 몰린 사람도 있었다.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숫자를 가지고 오늘날의 현실에 적응시킨다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제대
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구약의 다니엘서는 미래예언이 아니고 과거를 미래 예언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신약의 유일한 묵시문학인 요한 계시록은 수비학에 빠
져서 다니엘서의 숫자를 별다른 의미도 없이 사용했다. 따라서 이러한 숫자들을 가지고 종말
의 때를 예측 한다는 것은 무익한 노력임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다니엘서에는 예수가 예언되지 않았다
왕의 꿈을 해몽(解夢) 함으로써 신임을 얻었다는 다니엘의 예언은 꿈에 의한 환상에 기인한다.
따라서 다니엘서는 몽환적 분위기를 풍긴다.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다니엘 7장 1절]
일부 기독교인들은 다니엘서에도 예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것
이 다니엘서의 '기름부은자'와 '인자 같은 이'가 예수를 가르키는 것이라 한다. 먼저 다니엘서
9장의 기름부은자가 예수를 가르키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
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 되었느니라. 그가 장
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
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서 9장 24~27절]
기독교측의 주장은 이렇다. 기름부은자는 예수이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진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말한 것이고, 기름부은자가 사라진후에 한명의 왕(王)과
그의 백성들이 와서 성소에 이방신의 우상을 세운다는 이야기는 AD 70년경에 로마황제 베스
파시아누스(Vespasianus, Titus Flavius. AD 9?~79, 재위 69~79)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39~81, 재위 AD 79∼81)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킨뒤 유대인을 이
스라엘에서 추방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덧붙여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Publius
Aelius. AD 76~138, 재위 AD 117∼138)는 모든 유대인들을 유대에서 축출하라는 법을 제정했다.
이 주장은 과연 타당할까?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다니엘서의 마지막12장에서 말하는 끝날은
안티오코스 4세의 몰락에 대한 예언이다. 다니엘서의 대부분의 예언은 안티오코스 4세시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다니엘서의 끝날은 인류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윗구절의 예언 역시 안티오코스 지배하의 언급일뿐이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
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라는 구절에 특히 주목
하라. '개역한글판'의 뜻이 모호하여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그 장군은 한 주간 동안 무리를 모아 날뛸 것이다. 반 주간이 지나면 희생 제사와 곡식 예물
봉헌을 중지시키고 성소 한 쪽에 파괴자의 우상을 세울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파괴자도 예정
된 벌을 받고 말리라." [다니엘서 9장 27절 / 공동번역판]
위 구절에서 침략자들은 성전의 가장 높은곳에 우상을 세우고, 희생제사와 예물 드리는 일을
금할것이라고 했다.
1세기경의 유대인들의 반란에 대한 댓가로 로마황제들은 성전을 파괴해 버렸고 유대인들을
유대땅에서 추방시켰다. 즉,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침략자란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유대
땅에서 추방한 로마황제가 아니라,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교를 금지했던 안티오코
스 4세인 것이다. 특히, 한이레반(3년반)동안 성전에 우상을 세운다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주
고 있다.
기름부은자가 올 때 예루살렘이 중건되리라는 예언은, 바빌론에서 포로로 잡혀있던 유대인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유대인들에게 대한 종교와 정치적인 자치를 허용하며 성전을 건축
하는 것까지 허용한 것에 대한 내용이다.(에스라 1:2~4, 6:3~5)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Cyprus)는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BC 539경에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인을 귀향 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고 지원 했으며, 유대인들에게 상당
한 자치권을 부여 했다. 페르시아 정부는 초기에는 다윗의 가문에서 유대 통치자들을 선정 했
지만 후에는 대제사장의 가문에서 비롯되었다. 유대의 새로운 통치자는 세스바살(에스라 5:14)
로서 그는 유다 목백(Prince of Judah, 에스라 1:8)이란 칭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만에 자치권을 얻게 된지 얼마 않되어 BC 333년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메디
아와 페르시아는 멸망했고,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게 되자 그가 다스리던 대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의 네 장군에게 분배 되었다. 이 네 명의 장군 중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했던 사람
은 프톨레미란 사람 이었다. 그러나 곧 이 땅은 다시 셀류코스라고 하는 시리아 왕가에게 넘어
가게 되었다.
다니엘서 9장은 결코 예수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바빌론 유수 이후에 유대인이 잠시 자치권
을 얻고 도시를 재건 하지만, 다시 침략자들이 들이닥쳐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들여놓고 유
대교를 박해 한다는 예언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서에 인자가 나온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주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다니엘 7장 13절]
윗 구절에서 '인자 같은 이'가 등장 하는데,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신약에 예수가 자신을 지칭
하던 '인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공동번역판에는 '사람 모습을 한 이', KJV에는 'like the Son of man', 표준새번역에는 '인자
같은 이'로 언급되어 있다. '인자'는 아람어로 '바르나샤'(bar nasha) 또는 '바르에나샤'(bar en
asha)이며, 히브리어로는 '벤 아담'(ben adam)이다. 아람어의 바르(bar)는 히브리어 벤(ben)
과 동의어이며 그 뜻은 아들이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
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에스겔 2장 3절]
에스겔과 시편에서 '인자'라는 이 단어는 무수히 사용 되었다. 구약속에서 '인자'라는 단어는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인간', '그 사람'등으로 자주 사용 되었으며 여호와가 선지자를 부르는
호칭의 형태로 93번 등장한다.
그 당시의 아람어 용례는 단순히 거짓말 쟁이를 가리켜 '거짓의 아들', 죄인들을 가리켜 '죄의
아들들', 부자를 가리켜 '부의 아들'로 표현했다. 따라서 '바르나샤'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리츠만(H. Lietzmann)은 '인자'가 유대주의에서 메시야적 명칭으로 사
용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H. Lietzmann / Der Menschensohn: Ein Beitrag zur neutestame
ntlichen Theologie (Freiburg im B. /Leipzig: Mohr, 1896) / P.85]
인자는 시리아어나 아람어로 단순히 한 사람만을 의미하며, 다니엘서에서 언급한 '인자 같은
이'는 단순히 '사람 모습을 자'라는 뜻으로 앞에 나오는 짐승들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다. [the new thompson annotated-chain reference bible.]
즉, 7장 전체에는 4마리의 짐승이 등장한다. 4마리의 짐승이란 독수리의 날개가 달린 사자, 갈
비뼈 3개를 입에 물고 있는 곰, 머리가 4개이고 날개가 4개 달린 표범, 열개의 뿔이 달린 무서
운 짐승이다. 7장 17절에 다니엘은 4마리의 짐승이 4명의 왕이라고 말한다. 이 짐승들은 요한
계시록에도 등장하므로 숙지해 두길 바란다.
뉴톰슨 관주 주석성경은 4마리의 짐승에 대해서 이렇게 풀이해 놓았다.
독수리의 날개가 달린 사자: 독수리와 사자는 모두 바빌론의 왕(신)으로 날개가 뽑혔다는 것은
바빌론의 몰락을 암시.
갈비뼈 3개를 입에 물고 있는 곰: 메데, 바사, 바빌론을 통합한 페르시아.
머리가 4개이고 날개가 4개 달린 표범: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은 4명의 장군에 의해 4
부분으로 분열 됨.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으로 등장한 열개의 뿔이 달린 무서운 짐승은 다른 짐승과 다르다. 나머
지 짐승은 잠깐 등장하는데, 뭐라고 정의 내릴수 없는 4번째 짐승은 다니엘서7장 전반에 가장
주요한 등장물 이다. 여호와의 등장으로 나머지 3짐승은 권세를 빼앗기고 그 생명이 얼마 동
안 연장 되지만, 4번째의 10개의 뿔달린 포악한 짐승은 살해 당하여 시체가 뭉그러지고 불에
던져졌다고 한다. 4번째 짐승은 가장 무서운 벌을 받았던 것이다. 문제의 4번째 짐승은 어떤왕
을 말하는가? 바로 안티오코스4세이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
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다니엘 7장 25절]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동안 유대교를 탄압한다는 언급이 안티오코스4세임을 잘 말해주고 있
다. 다니엘서의 후반부의 예언은 계속해서 안티오코스4세의 유대교 박해와 그의 몰락을 다루
고 있다. 짐승과 대비되는 '인자 같은 이'가 와서 여호와에게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은 안티오
코스4세를 몰아내고, 다시 유대인으로써 왕권을 되찾게 된 마카비왕조를 찬양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 이것이 예수에 대한 예언 이었다면, 어째서 신약의 저자들은 이 구절들을 인용하
지 않았겠는가?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구약의 구
절들을 마구 남발 했었다는 점을 상기하라.
▶ 계명성과 뱀
이사야서 14장 12절에서 성경저자는 바빌론왕의 몰락을 은유적으로 표현해서 계명성의 몰락
으로 빗대어 말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계명성(啓明星)은 샛별과 금성(Venus)과 같은 단어이며
영어로는 루시퍼(Lucifer)이다.
누가복음 10장 18절에서도 예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라
고 부정적으로 언급 했는데 여기서 중대한 논란거리가 생긴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예
수는 스스로를 계명성 이라고 말한 것이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
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장 16절]
계명성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은 다른곳에서도 발견된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요한계시록 2장 28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베드로 후서 1장 19절]
뜻 전달이 잘 안되어 공동번역판의 베드로 후서 동구절을 올린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 [베드로 후서 1장 19절/ 공동번역판]
베드로 후서에서도 신자들에게 계명성이 뜰때까지 기다리라고 충고하고 있으며, 욥기에서도
새벽별을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욥기 3
8장 7절]
예수가 스스로를 계명성이라고 언급한 요한계시록의 기록과, 반대로 계명성을 부정적으로 언
급한 이사야서의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사야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계명성은 분명히 부정적이다. 이사야서14장에서의 계명성은 민
족들을 짓밟고 자기의 땅을 폐허로 만들고 자기 백성들을 모두 죽인뒤에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사람들로 부터 비난받는 악마의 모습이다. 그리고 바빌론 왕의 몰락을 비유적으로 표
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계명성'에 대해 킹제임스 성경은 엇갈리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
에서는 문제의 이사야 14장 12절의 계명성을 '루시퍼'라는 단어로 바꿔 놓은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의 옹호자들은 이사야서의 문제의 구절을 예로들며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예수)
은 스스로를 계명성이라고 말했는데, 이사야서에서 악마를 계명성이라고 번역한 것은 주님께
대한 극악무도한 모독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시퍼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루시퍼라는 이름으로 처음 번역된것은 AD
4세기말에 제롬이 번역한 라틴역 성경인 벌게이트(Vulgate)역에서다. 킹제임스 성경은 벌게이
트역의 영향을 받아서 루시퍼라고 번역했지만, 20세기에 등장한 대부분의 성경은 이사야서의
문제 구절을 계명성이라고 번역했다.
이사야서의 문제의 단어를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헬렐'(helel)로 기록하고 있으며, 헬라어 70
인역에서는 '발광체'라는 뜻을 지닌 '헤오스포로스'로 번역했다. 반면에 '별'이라는 뜻의 히브
리어는 '코캅'(kokab)으로 구약성경에 36회 기록되고 있다. 예컨데 위에서 언급한 욥기의 새
벽별은 '보게르 코캅'(boger kokab)이다. '헬렐'(계명성)이라는 단어의 원형은 '할랄'로서, 그
의미는 '빛나다', '찬양하다', '교만하다'의 분사형 명사이다. 루시퍼라는 이름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의 아들 루시퍼"라고 번역한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문제의 이
사야서의 구절의 히브리 원문은 '헬렐 벤 샤하르'(halel, ben, shachar)로서 직역하면 '아침의
아들 발광체' 또는 '아침의 아들 빛나는자'라고 번역할수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그의 저서 '야훼와 가나안의
신'에서 이사야서의 문제구절이 BC 7세기에 기록된 가나안의 종교시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
적했다!
"헬렐의 아들 샤헤르여, 어찌하여 하늘에서 떨어지게 되었느냐! 네가 너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하늘에 올라 주극성(circumpolar stars)보다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올리리라. 그리고 북
쪽 너머에 있는 회의의 산(Mount of the Council)에 살리라. 또한 구름 뒤에 올라 엘룐(Elyon:
엘의 존칭)처럼 되리라'라고 하지 않았느뇨" [W.F. Albright / Yahweh and the Gods of Cana
an. (New York: Doubleday & Co., 1968) / P. 232]
장송곡(葬送曲) 모음집에 포함되어 있다는 위의 가나안의 종교시가 이사야서의 문제 구절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의 히브리 원문인 '헬렐
벤 샤하르'(halel, ben, shachar)와 어원적으로 상당히 유사하고, 나머지 내용도 판에 박은듯
너무도 비슷하다. 아래 이사야서의 문제구절과 위의 가나안 종교시를 한번 비교해 보라.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
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 [이사야 14장 12~15절]
가나안(Canaan)에서는 아세라(Asherah) 여신을 자궁이란 뜻으로 헬렐(Helel:구덩이)이라고
도 불렀다. 헬렐(아세라)은 샤헤르(Shaher)와 샬렘(Shalem)쌍둥이를 낳았으며, 샤헤르는 북
쪽 너머의 신들의 세상을 넘보려다가 태양신에게 패배 했다고 한다. 패배한 샤헤르는 태양신
에 의해 '번개 치는 큰뱀'(lightning serpent)으로 전락하여 헬렐의 음부 또는 지옥 깊은 곳(aby
ss)에서 그가 하늘에서 가져온 억센 불(火)을 지피는 뱀이 되었다고 한다.
가나안 사람들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광명전달의 신 으로 여겼으며, 지금도 유대인들은
새벽기도를 샤하리트(Shaharit)라고 부르는데 샤헤르와 어원학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다른 쌍둥이 형제 샬렘(Shalem)은 저녁별(Evening Star)을 뜻한다고 한다. [이리유카바 최/
교회에서 쉬쉬하는 그리스도교 이야기 / 대원출판사]
계명성과 관련된 이사야서의 이어지는 다음구절을 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
겠고, 그 열매는 나는 불뱀이 되리라" [이사야 14장 29절]
개역한글판에서는 '나는 불뱀'이라고 애매모호하게 번역했는데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은 '날으
는 불뱀'이라고 확실히 번역했다.
이것과 유사하게 이집트에도 태양신과 대적하는 뱀이 등장한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아포피스(Apophis), 레네누테트(Renenutet), 네헵카우(Nehebkau), 와드
젯(Wadjet)등의 여러명의 뱀신들이 등장한다. 그중, 아포피스 (Apophis : Apep 또는 Apepi라
고도 불림)라는 뱀의 신은 태양신(Ra)과 우주적인 질서의 영원한 적이다.
어둠, 악, 혼돈의 힘을 신격화 시킨 아포피스는 매일밤 태양의 배를 타고 명계를 지나가는 태
양신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태양신이 매번 이겨서 동쪽에서 여명으로 다시 나타난다. 어쩌
다가 아포피스가 일시적으로 이길 때는 일식(日蝕)이 일어난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세트(S
eth)만이 태양신의 지하통로에 거주하는 강대한 뱀 아포피스(Apophis)와 대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BC 3000년기 동안에 세트는 파라오의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세트가 오시리스를 죽이고 그의
아들 호루스와 전쟁을 치루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면서, 호루스가 세트의 지위를 대신 차
지하게 되었고 세트는 악신이 되었다. 상이집트의 옴보스(Ombos)에 세트의 출생지로 알려진
중요한 성소(聖所)가 있으며, 나일강 삼각주의 북동지방에서도 세트의 숭배가 널리 행해졌다.
세트가 악신으로 전락한 것은 힉소스인들과 관련된 이집트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것으로 여겨진다.
이집트 신왕국시대에서 관속의 미라와 함께 부장(副葬)된 종교문서인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 따르면 세트는 "북쪽 하늘의 군주"이며, 폭풍과 구름 낀 날씨를 관장하는 것으로 언
급된다. (死者의書라고 불리는 문서로 이집트의 것과 티벳의 것이 있다.) 세트는 명계에서 부
주의한 영혼들을 잡아내는 역활을 맡고 있다. 그런데 강대한 뱀 아포피스로부터 태양신을 보
호해주는 세트가 아이러니하게도 아포피스와 동일시 되기도 했다.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에서는 반인반수의 거대한 괴물 티폰(Typhon)으로, 또 오시리스신화
에서는 악신 세트(Seth)의 변신(變身)으로 나타나며,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의 창세전설(創
世傳說)에서는 라가 큰 고양이가 되어 이 뱀을 정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페피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로,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여도 다음날 밤이면 다시 살아나 라를 공격한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아페피 Apepi 항목]
티폰(Typhon)는 아포피스뿐만 아니라 세트와 동일시 되었던 괴물이다. 두산세계대백과의 티
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티포에우스라고도 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땅 밑의 암흑세계의 신 타르타로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 모습은 보통 100개의 용의 머리를 가지고 무서운 목소리로 울부짖는
괴수(怪獸)로 알려졌으며, 사나운 격풍(激風)이라고도 하고 불을 뿜는 거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굉장한 힘의 소유자로, 제우스의 주권을 침범하려고 천상을 공격하자 제우스는 번갯불을
던져 이를 퇴치하였다. 번갯불에 타 죽은 티폰의 시체로 인해 에트나산에 불이 붙어, 불을 뿜
는 화산이 되었다고 한다. 티폰은 사녀(蛇女) 에키드나와의 사이에서 키마이라, 히드라, 오르
트로스 등의 괴물을 낳았다. 온갖 바람의 아버지라고도 전해지는데, 태풍을 의미하는 영어의
typhoon은 이 괴물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티폰 Typhon 항목]
그리스 신화에서도 뱀은 제우스의 자리를 찬탈 하려다가 징벌을 받은 부정한 존재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신화들의 유사성을 발견할수 있다. 즉, 신의 자리를 노리고 반역을
획책했던 뱀의 몰락이다. 가나안 지방에서는 북쪽너머의 신들의 세계를 넘보려던 사헤르가 뱀
으로 몰락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천상의 세계를 넘보려던 티폰이라는 뱀이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을 괴롭히던 아포피스라는 뱀이 있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뱀의 대적자인 세트가
아포피스와 동화 되었다. 북쪽 하늘의 군주로 알려진 세트는 힉소스 정복 시대의 상이집트에서는
숭배되었으나 이집트 신왕조의 등장이후 악마로 전락해 버렸고, 급기야 아포피스와 동일시 되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좀 빗나가겠지만, 세트와 호루스가 신들의 법정에서 8년간의 지리한 공방을 벌이는
중에 다윗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 지리한 법정 공방이 섬으로 옮겨져 계속되는 가운데, 이
시스는 몰래 섬에 잠입한뒤 젊은 여자로 변신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세트가 다가오자
이시스는 목동의 미망인인 척하며 어떤 자가 남편의 소를 약탈하고 아들을 집에서 쫓아 내겠
다고 위협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세트는 젊은 미망인과 그 아들이 고통받고 있는 부당한 사건
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자 이시스는 솔개로 변신해서 아카시아 위로 날아올라가서는 세트에게
그가 스스로 죄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세트는 울음을 터뜨리며 태양신 라(Ra)에게 가서 이시
스의 속임수에 대해 하소연했지만, 재판내내 세트의 편을 들어주었던 태양신도 그 자신이 스
스로를 비난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일을 비꼬아 질타하는 사무엘하의 일화와 유사하
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관계를 통해 임신시키고 그 남
편마져도 죽음으로 내몰았다. 사무엘하 12장에서 예언자 나단이 찾아와서 다윗에게 가난한 자
의 양을 빼앗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분통을 터트리면서 당장
그 부자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말하지만, 나단은 그 부자가 바로 다윗 자신이이라고 질타한다.
어쨋든간에, 이번에는 뱀과 계명성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사
이의 관련은 엄밀히 말해서 혼돈되어 있다.
계명성은 로마에서 금성의 여신 비너스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그리스의 여신 아프로디테
가 로마식으로 바뀐것인데 그것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가나안의 여신과 연관이 있다.
두산세계대백과는 이쉬타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신(天神) 아누, 또는 월신(月神) 신의 자식으로 알려졌다. 미(美)와 연애를 주관하는 신으로
, 전투의 여신이기도 하다. 원래는 새벽의 명성(明星:金星)을 가리킨 듯하나, 그 정확한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서(西)셈족(族)에서는 아슈타르테(아스타르테)라고 하여 여성 어미(語尾) t가
붙어 여신을 나타내고 있으나, 남(南)아랍에서는 아스타르라고 하여 남신(男神)으로 되어 있
다....(중략)....또한 '이슈타르의 명계하강'(冥界下降)이라는 설형문자(楔形文字)로 된 문서가
남아 있는데, 이 문서에 의하면 7개의 문을 통과할 때마다 여신은 의복과 장식품을 빼앗겼다
가 지상으로 돌아올 때 그것들을 다시 되찾아 몸에 걸친다고 한다. 이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는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되었는데, 바로 풍요의 신 두무지의 연인이다." [두산세계대백과 EnC
yber / 이슈타르 Ištar 항목]
'아침의 여신이면서 저녁의 여신'인 이쉬타르는 고대 바벨론의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다. 금성
(金星)은 가나안 지방과 더불어 그리스와 로마의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도 여신으로 여겨졌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비너스와 아프로디테는 주로 남녀간의 애정과 불륜에 관련된 면만 부각된
듯하다. 이것은 고대인의 대모신(大母神)숭배 풍습을 이어 받은듯 하지만, 가나안 지방에서는
금성(계명성)의 여신이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었던것 같다.
인안나(Inann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쉬타르는 사랑의 여신임과 더불어 전쟁의 여신이고
, 일부지역에서는 남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녀는 7단계를 거쳐 명계로 하강하여 자신의
연인 탐무즈(두무지)를 되찾는다. 이쉬타르는 명계의 여왕 에레쉬키갈에게 사로잡혔으나, 이
쉬타르의 아버지 신(Sin)이 에아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구조되었다고 한다. 명계로 하강했다는
내용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죽음과 부활의 신화에
필적한다.
마찬가지로, '지옥에 내려간 그리스도'라는 외경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뒤 하데
스가 지배하는 명계로 하강했다. 그곳에서 예수는 아담과 예언자들, 순교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지옥밖으로 구출해서 데려간다. [윌리스 반스토운/숨겨진 성서2권 / 문학수첩 / P.137
~146]
결론을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신화는 지역이나 시대,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나타낸다. 예컨대 춘향전의 경우 오늘날에는 해피엔딩이 잘 알려져 있으나, 일부 전승
에 따르면 죽음을 당한 춘향이의 귀신이 이도령앞에 나타난다는 비극적인 버전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쉬타르 여신은 아세라,인안나 등의 여신과 혼동되며, 지역에 따라 남신(男神)으
로 성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고, 어떤 신화에서는 그녀(이쉬타르)가 금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신화에서는 그녀(아세라)의 아들이 금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금성(이쉬타르)은 명계로 하강한 구원자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그녀(아세라)의 아들 금성은 태양신에게 반역을 일으킨 반역자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집트의 세트신처럼 시대에 따라서 바뀌는 신화도 있다. 세트는 거대한 뱀 아포피스
로부터 태양신 라를 보호하는 수호신이었지만, 이집트 신왕조의 등장할 무렵 세트는 악마로
전락했고 아이러니 하게도 아포피스와 동일시 되어 갔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한사람이 기록한 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여러시대를
거쳐 기록된 책이다. 이사야서의 문제구절은 가나안 종교시의 변형임이 분명 하지만 가나안
신화에서도 사헤르는 계명성과 관련이 있다. 이사야서나 누가복음처럼 계명성을 부정적으로
기록한 성경저자도 있는 반면에, 계명성을 '명계에서 구원해줄 구원자'의 관점에서 기록한 성
경의 저자도 있는것이다.
킹제임스 성경의 옹호자들이 이사야서와 요한계시록의 문제구절로 기존교단을 공격해도 제대
로된 반박을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다. 루시퍼라는 단어는 성경에는 없고, 이사야서의
문제구절이 계명성과 관련된 가나안 신화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유명한 신학자인 '올브라이
트'(W.F. Albright)가 '야훼와 가나안의 신'(Yahweh and the Gods of Canaan)이라는 책에서
이미 오래전에 지적했다. 그런데 계명성에 대해 부정적인 기록을 남긴 이사야서의 기록은 요
한계시록의 기록과 상반되는 입장에 놓인다!
킹제임스 성경의 옹호자들을 함부로 반박했다가는 성경의 오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어서
기존교단은 속앓이로 끙끙 앓고만 있는 셈이다.
계명성을 뱀과 관련지어서 불길한 징조로 바라본 성경저자도 있고, 반대로 계명성을 '구원자'
또는 '빛의 전달자'라는 긍정적 측면에서 바라본 성경저자도 있다. 솔직해지면 모든 문제가 해
결된다. 성경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만이 킹제임스 성경 옹호자들 같은 저속한 문자주의자들에
게 대항할수 있다는것을 필자는 말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