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나면
요4:13-14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만났고, 아내를 만났고, 친구를 만났고, 성도를 만났으며, 예수님은 만났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만나기고하고 사기꾼을 만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복된 만남을 사모해야합니다.
한 소년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시골 소년이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10년 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났습니다.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소년의 아버지는 시골 소년이 의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물에 빠졌던 소년은 훗날 영국의 수상이 되었고, 가난했던 시골 소년은 페니실린을 발명해 노벨 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바로 영국의 유명한 윈스턴 처칠과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입니다. 그후 1940년 5월 처칠은 폐렴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당시 폐렴은 한번 걸리면 낫지 못하는 죽음의 병이었습니다. 처칠의 꺼져가는 목숨을 건진 건 바로 페니실린이었습니다. 서로에게 복을 끼치는 복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다윗과 요나단 같은 축복된 만남이 있습니다.
그러가하면 북왕궁의 아합왕과 우상인 바알 신앙을 가진 이세벨의 불행한 만남이 있습니다. 이세벨은 북 왕국에 바알 신앙을 퍼뜨리고, 그의 딸인 아달랴는 남유다의 아하시야 왕과 결혼 후, 남유다까지 바알 신앙을 전파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인 아하시야 왕이 죽자 남유다의 7대 왕이 되어 남유다의 왕족들을 몰살하기까지 합니다. 잘못된 만남이 만들어낸 끔찍한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여기 함께 하신 성도님들은 삶 속에 어떤 만남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서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친구 사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 정말 많은 새로운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벤츄라교회 성도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과의 만남을 제 인생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성도님들이십니다.
여러분도 저와의 만남이 최고의 만남이 되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복된 만남의 출발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벤츄라교회와 성도님을 최고의 만남이요 축복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고백의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제가 목사라는 것을 제외하고 보면 뭐가 남을까요? 잘 나가는 사업가도 아닙니다. 유명한 연애인도 아닙니다.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50대의 한국 남자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여러분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과 제가 가진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만난 인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리가 되어주셔서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의 근본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는 존재하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영적 축복과 이 세상의 축복까지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줄 믿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와같은 여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세상의 비난에 노출된 인생을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은 그녀로 하여금 세상과의 단절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사람 만나기를 꺼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 더워서 남들이 꺼리는 시간, 너무 더위서 문밖 출입을 삼가는 시간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유는 사람 만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사람들의 눈길이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삶을 원했겠습니까? 원치 않았지만,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고, 어느날부터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해도 있었을 것이고, 잘못된 소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설명할 길도, 들어줄 사람도 없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인생,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새로워졌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마친 후 마을로 뛰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외침니다.
길가다 만나기조차 두려웠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자신 있게 외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을 향한 세상의 조롱과 비난의 무서움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에 당당히 외치는 이 순간,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뛰어가 외치는 여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감격스럽습니다. 울컥하기도 합니다.
제 자신도 그러한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피했던 순간, 사람 만나기가 두려웠던 순간이 저도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저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이십니까?
셋째, 말 걸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성분들이 남자보다 오래 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남자보다 말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하루에 5,000 단어면 충분하지만, 여성은 20,000단어를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성분들은 몇 시간을 수다를 떨고도, 할 이야기 못했으니 다음에 만나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며 헤어진다고 합니다.
본문의 여인이 가진 과거는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겠습니까? 세상은 그녀의 상처에 소금물을 뿌렸을 것입니다. 차가운 눈빛으로 외면했을 것입니다. 말 한마디 걸어 주는 이가 없는 인생, 더욱 어둠으로, 고독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을 길러 나온 것을 봐서는 종을 부리며 살아가는 풍족한 인생도 아닙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예수님은 말을 걸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물을 달라하셨지만, 이 여인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만나기도해도 재수 없다고 욕먹던 삶 속에 누군가, 말을 걸어주십니다.
말 거는 것이 뭐가 대수가 할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말을 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녀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외국 살다보니 느껴지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말을 하고 싶으면, 질문하고 싶으면, 돈을 써야 합니다. 물건을 사야, 음식을 시켜야 말을 걸 자격이 주어집니다. 아니면 비싼 돈을 주고 상담사를 만나야, 내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구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초라한 그녀의 삶에, 그녀의 과거를 알면서도 대화를 나누며, 영생을 선포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녀의 인생은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제가 2021년 9월에 개척했고 섬기던 교회를 부목사님에게 섬기도록 하고 제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개척해서 7년을 섬겼고, 제법 부흥도 했고, 당시 밴쿠버 지역에서는 개척한 교회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를 떠나는 마음은 인간적으로 힘들었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다.”,“내가 잘되는 것보다 교회가 잘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마음으로 교회 중직들이 함께 의논하고 기도하고, 저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2년을 준비했고,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목회하는 친구들, 저를 아끼는 친구들 중에서도 “바보같냐”라는 말도 있었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설명하고 말하기보다, 숨어 지내게 되더군요.
“나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했는데, 세상은 이렇게도 보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힘들어군요. 힘든 티를 내면 아내가 더 힘들 것 같아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앓이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친구들과의 연락도 자제하게 되었고, 주변 지인들과의 만남도 최소화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내 마음 아시겠지.. 그렇게 지냈던 지내왔었습니다. 제가 벤츄라교회에 오게 되었을 때에 제 주변에 목회자가 제게 물었습니다.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제가 뭐라 했을까요? 사명을 느꼈다고 했을까요? 뜨거운 열정이 솟았다고 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위로 받았습니다”
제 마음에 세상과 거리를 두려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기억해주셨구나”라는 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 자신에게 치유와 위로의 역사가 일어났던 순간입니다.
제가 제 마음의 치유와 위로를 받지 못한채로 벤츄라교회에 왔다가 생각해 보세요. 서로가 불행했을 것입니다. 제가 위로받고, 치유 받은 후에 달려와 여러분을 만나니 제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 걸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대화를 걸어 주십니다. 친구나 가족에게도 못할 이야기를 그분에 털어놓으시며, 마음의 치유와 위로를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 해방의 자유를 누립니다.
이 여인은 불행한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피하고, 세상을 외면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마음 속에는 어떤 무거운 짐들이 있었을까요?
후회와 자책감일 것입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인데...
부모를 잘못 만났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한 고통은 여인으로 하여금 세상과 분리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회피하는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오지 않는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 주신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 중에 그녀는 자신을 억압하고 짓누르던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자유를 누립니다. 세상 앞에 당당해 집니다.
“여자가 물둥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4:29)
마치,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며, 세상을 회피하며 살았던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받은 것처럼, 여인은 당당하게 마을로 뛰어갑니다. 자신을 질타하고, 배척하던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외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 여인과 같은 자유를 누립니다.
위로, 자유, 이같은 축복을 저는 일차적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궁긍적 축복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는 동안 너무나도 중요한 축복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위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해방의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같은 일차적 축복을 누린자는 궁극적 축복의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 영생의 축복입니다
다섯째,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다 했습니다. 이 물은 영생의 물이요, 예수을 만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일차적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면,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와 해방의 일차적 축복을 누리자, 여인은 예수님을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을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여인은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살았습니다.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러 물을 길러 왔지만 여인의 진짜 갈증은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진리의 말씀을 듣자, 물동이를 버려둡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외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시면, 성경의 말씀이 마음을 파고 들 것입니다. 이해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믿을려고 해서가 아니라, 이해가 되어지고, 믿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16)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