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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증판서 월성군 김공 묘표(持平贈判書月城君金公墓表)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원년) 반정(反正)은 그 의리가 매우 크다. 처음에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가 그의 큰아들 연양공(延陽公) 이시백(李時白)에게 거사를 말하였을 때 연양공이 신하로서 임금을 폐위한다는 것이 의심스러워 청하기를, “제가 김 명숙[金明叔, 명숙은 김원량의 자(字)]에게 물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명숙은 바로 미촌(麋村) 김원량 공이다.
거사의 의논이 합치되자 공도 그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가부(可否)를 도왔다. 이윽고 윤리가 바로잡히고 종사(宗社)가 안정되어 백성이 편안해지자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金自點) 등이 부귀(富貴)에 마음이 빠졌다. 공이 그들과 일을 같이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더러 책망한 바람에 뭇사람의 노여움을 샀었고, 또 염인 구가(廉藺寇賈)의 사이1)에서 처음에는 양쪽을 화해시키려고 하다가 결국 양쪽의 의심을 받고 말았다.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에 역적 이괄(李适)이 고변(告變)되었을 때 공이 그전에 이괄의 부자를 매우 신임하였으므로 자신의 식구 백 명의 목숨을 걸고 그가 반역을 꾀하지 않았다고 보장하였는데, 그 뒤 이괄이 반기를 들었다는 장계(狀啓)가 올라오자 승지로 있던 김자점이 아뢰어 공을 구금하였다.
공이 옷을 찢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상소를 썼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식이 없어 역적을 충신으로 오인하여 감히 그가 역모가 없으리라고 보장함으로써 주상을 기망(欺罔)한 바가 되었으나 신의 본심은 하늘에 해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괄은 바로 신의 이성(異姓) 근친입니다.
그가 평소 입론(立論)한 바와 처신(處身)한 바가 한결같이 사대부(士大夫)와 같았고 그의 아들 이전(李栴)은 어려서부터 신의 집에 드나들면서 ≪소학(小學)≫, ≪가례(家禮)≫ 등의 글을 배웠는가 하면 또 한때의 선생(先生)이나 장자(長者)들을 받들어 섬기었고, 또 자신은 연소한데다가 배운 바가 없어 벼슬살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그들을 허여한 채 허위와 기망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줄 헤아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정찬(鄭燦)이 고변할 때에 신의 생각에는, 정찬은 광해군(光海君) 때 공신(功臣)의 가신(家臣)이므로 이괄이 그와 같이 역모를 했다는 것이 타당성이 없었기 때문에 끝내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명철하신 주상께서 즉위하여 인륜이 다시 밝혀졌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느냐고 생각되어 공신들을 감시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지나치게 우려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매우 간특하고 교활한 자가 공신 중에서 나오리라고 신이 어떻게 예측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의 집에 노모(老母)가 계신데다가 죽도 잇대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털끝만큼도 비리를 저질러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역적과 인척간이라는 이유로 주상의 의혹을 샀으니, 신이 땅속에 들어가더라도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결국 올리지 못하였다. 관군(官軍)이 적병의 방어에 나섰으나 차례대로 패배하자, 주상이 남하(南下)하기 앞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김유(金瑬)에게 묻기를, “고발된 죄수들을 모두 다 죽여야 하겠는가?
김원량은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가?” 하니, 김유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김자점이 대뜸 말하기를, “그들을 남겨 두었다가 적에게 사용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친한 사람을 보내어 옥중(獄中)에서 목을 베어 죽였는데, 때는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 2월 8일이었다.
공이 죽기 전에 목사(牧使) 이갱생(李更生)이 부드러운 안색으로 김자점에게 말하기를, “김원량은 어진 선비이다. 사람들이 장차 공을 뭐라고 하겠는가?”라고 하니, 김자점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선비를 죽인 죄는 내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하였으므로, 김유, 이갱생 두 원훈(元勳)도 공을 도와주지 못하였다.
공의 관향은 경주(慶州)로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고려(高麗) 말엽에 판도 판서(版圖判書) 김장유(金將有)가 조정에서 물러나 보은현(報恩縣)으로 가 살았는데, 자손들이 그곳에 눌러 살았다.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충암 선생(冲庵先生) 김정(金淨)은 중종(中宗) 때 기묘 명현(己卯名賢)이었고 그의 종제(從弟) 김벽(金碧)은 벼슬하지 않았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김천우(金天宇)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고 할아버지 김가빈(金可賓)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아버지 김변(金汴)은 공으로 인해 월천군(月川君)에 추봉되었는데, 문학과 덕행이 가문 대대로 이어졌으므로, 간이(簡易) 최입(崔岦)과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실로 그 묘갈명(墓碣銘)을 저술하였다.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대사헌(大司憲) 구수담(具壽聃)의 손녀이자 현감(縣監) 구영준(具英俊)의 딸인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기축년(己丑年, 1589, 선조 22)에 공을 낳았다. 공이 어려서부터 뛰어나 비범하였는데, 겨우 이름을 지었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냐?’고 묻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해 주면 대뜸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이때부터 이웃집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면 차마 듣지 못하였다. 조금 장성하여 소사(蕭寺)에서 거처하면서 분발하여 글을 읽다가 책을 짊어지고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니, 사계 선생이 ≪가례(家禮)≫, ≪소학(小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가르쳤는데, 공이 방 손재[方遜齋, 손지재(遜志齋) 방효유(方孝孺)]의 글을 가장 좋아하여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하자는 의논이 일어나자 공이 친한 사람에게 정도(正道)를 지키고 굽히지 말라고 권면하였는데, 간당(奸黨)이 그 말을 듣고 미워하였다. 공이 옥중(獄中)에 갇히어 ‘가의(可矣)’ 두 글자를 좌석에다 붙여 놓았는데, 이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윽고 방면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안협(安峽)의 우미촌(友麋村)으로 들어가 살면서 스스로 (미촌(麋村)을) 호(號)로 삼고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이윽고 연양공(延陽公, 이시백)과 같이 반정(反正)의 대의(大義)를 협찬하여 결정하였는데, 그의 책략을 운용(運用)한 바가 상당히 있었다.
의정(議政) 우재(迂齋) 이후원(李厚源) 공이 말하기를, “유생(儒生)으로서 이 일에 참여한 것이 의리로 볼 때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송 광종(宋光宗) 때) 조여우(趙汝愚)가 헌성 태후(憲聖太后)의 명을 받아 영종(寧宗)을 옹립할 때 주자(朱子)도 그들과 같이 일을 하였다.”고 하였다.
우재가 말하기를, “계단을 가로질러 글을 써놓고 쟁반을 받들고 피를 마시는 데 옛날에도 이러한 유생이 있었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면하여도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거사하는 날 공이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오늘날 그 계책만 협찬하였을 뿐이지, 매나 호랑이처럼 무용을 부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다.” 하고 군사의 앞에 나가지 않았고 또 위교(渭橋)에서 인조(仁祖)를 맞이할 때 참여하지 않았다.
그 뒤 논공 행상(論功行賞)할 때 공과 우재가 극력 사양하자, 인조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가상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용릉(舂陵) 자제들의 안정감2)을 가졌던 것처럼 되었음은 실로 공에게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이 결국 면하지 못하고 낮추어 3등 공신(三等功臣)이 되었는데, 이는 공의 겸손하고 확고함으로 인해서였다.
그래도 공은 여전히 마지않고 사양하다가 심지어 언로(言路)에 있는 절친한 친구에게 ‘공훈의 기록이 범람하다’는 이유로 삭제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되지 않자 또다시 하사한 물품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인조가 하교(下敎)하기를, “예(禮)에 어른이 주는 것도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임금이 주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공조 좌랑(工曹佐郞),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치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공과 같이 학행(學行)의 추천을 받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서 사은(謝恩)하고 곧바로 사직하였다. 이는 공의 처음 마음은 의리를 바로잡고 도리를 밝히려고 하였을 뿐이지, 애당초 공로에 대한 보상은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38년째 되는 해는 현종(顯宗) 2년(1661년)이었다. 공의 부인 이씨(李氏)가 상언(上言)하여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자, 대신(大臣) 심지원(沈之源) 공이 그의 상언대로 원한을 씻어 줄 것을 요청하니, 현종이 공훈과 벼슬을 환원해 주라고 명하였다.
4년 뒤에 적신(賊臣) 허적(許積)이 허위로 윤인발(尹仁發)의 사건을 끌어대어 공신 녹권(功臣錄卷)을 회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윤인발이 일찍이 밤에 광주(廣州) 노상에서 행인을 죽여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빼낸 뒤에 자기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윤인발(尹仁發)이 도적을 만나 죽은 것’으로 소문을 내고 상(喪)을 알린 뒤에 장사를 치르도록 하고서 서쪽에 있는 이괄에게 달려가 역모의 주동이 되었다.
이괄이 안령(鞍嶺)에서 패배할 때 그의 머리를 얻었다. 허적이 임금에게 고하기를, “이게 바로 김원량의 모사입니다.”라고 하니, 풍양군(豊陽君) 장선징(張善澂)이 그의 선친 계곡(谿谷, 장유(張維)) 공의 말을 외우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자, 임금이 다시 의논해 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대신(大臣) 이경석(李景奭) 공과 홍명하(洪命夏) 공이 모두 심공(沈公 , 심지원)의 의논과 같았으나 결국 허적이 가로막고 말았다. 지금 주상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에 참판(參判) 이선(李選)이 그의 선친 우재(迂齋, 이후원(李厚源))가 남긴 뜻에 따라 상소를 올려 다시 공의 억울함을 아뢰자 주상이 다시 대신에게 명하여 의논해 처리하라고 하였다. 이내 공신 녹권을 회복함과 아울러 호조 판서(戶曹判書)의 벼슬을 내리고 월성군(月城君)으로 봉하였다.
공이 서윤(庶尹) 신평(新平) 이경항(李景恒)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요사(夭死)하고 딸은 판관(判官) 이인실(李仁實), 학생(學生) 이겸(李兼)에게 시집갔다. 공에게 근친(近親)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충암[冲菴, 김정(金淨)]의 5대손 김헌(金瀗)을 공의 후사(後嗣)로 삼아 주었다.
아! 공이 비범한 자질로 혼란한 세상을 만나 천리(天理)와 인륜이 끊어진 것을 탄식한 끝에 계책을 협찬하여 대훈(大勳)을 겨우 이루었는데 자신이 살육을 당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후로 공을 견제한 김자점과 허적은 모두 흉악한 역모를 하다가 처형되었고, 전후로 공을 위해 억울함을 씻어 준 사람은 모두 유명하고 어진 공경(公卿)들이었으니, 공이 어진지의 여부는 많은 말을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문원공(文元公)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이 일찍이 말하기를, “김원량은 정말로 죽음을 자취(自取)하는 바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의심할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김자점에게 말하기를, “네가 김원량이 일찍이 서쪽 고을의 수령을 요구한 것을 첫째의 의심스러운 단서로 삼았다.
그렇다면 김원량은 일찍이 무주(茂朱)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이 또한 의심스러운가?”라고 하였다. 이는 공이 사람들이 서쪽 고을로 가는 것이 싫어서 회피하는 것을 보고 개연(慨然)히 영변 판관(寧邊判官)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나는 미처 공을 보지 못하였다.
의정(議政) 우재(迂齋) 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김 명숙(金明叔, 김원량)은 뜻은 크지만 재주가 거칠고 학문이 정밀하지 않은데다가 너무나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김원량이 초야에 매몰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니, 우재 공이 또 탄식하기를, “김 명숙은 자신을 그르치고 남도 그르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공의 순수한 면 속에 하자를 여기에서 상상할 수 있다.
각주
1) 염인(廉藺)은 춘추 전국시대 조(趙)나라 장수 염파(廉頗)와 상경(上卿) 인상여(藺相如)이고, 구가(寇賈)는 후한(後漢) 광무제(光武
帝) 때 무신(武臣) 구순(寇恂)과 가복(賈復)임. 이들은 서로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립하는 위치에서, 한편의 관대한 처사로 인해 마침
내 절친한 사이가 되었음.
2) 용릉(舂陵)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기병(起兵)한 곳으로, 용릉의 젊은이들이 광무제의 근후(謹厚)함을 보
고서 안심하여 적극 호응하였다는 일을 말함. 여기서는 인조 반정의 거사(擧事) 때 유생(儒生)들까지 대의(大義)에 협찬했다는 뜻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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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金元亮 墓表[宋時烈]
癸亥反正, 其義大矣哉! 始延平李忠定公貴以語其長胤延陽公時白, 延陽有韶武疑, 請曰: “子將問於金明叔。” 明叔卽麋村公元亮也。 議旣協, 公亦周旋其間, 以相可否。 旣彝倫正, 宗社安百姓寧, 而器遠、自點等溺心富貴, 則公恥與同事, 或有嗔責語, 而衆怒叢集, 又於廉・藺、寇・賈之間, 初欲兩解, 而終致兩疑矣。 甲子, 逆适見告, 公從前深信适父子, 遂以百口保之, 及适叛書至, 自點以承旨啓囚之。 公裂衣咋指, 以血草疏, 略曰: “臣無有知識, 認賊爲忠, 敢保其無他, 遂成誣罔, 而臣之本心, 則證在天日矣。 蓋适卽臣異姓近屬也。 其平日立論處身, 一如士夫, 而其子栴自少出入臣家, 受《小學》、《家禮》等書, 又尊事一時先生長者。 又自以年少未學不願祿仕。 臣以此許可, 不料其詐僞欺罔至於此極也。 當鄭燦之發告也, 臣以爲燦乃廢朝勳戚之家臣, 則适乃與之同謀, 似不近似, 故終不致疑。 且念今日聖明在上, 彝倫復明, 孰敢有異心哉? 每聞勳臣譏察之事, 輒以爲過慮。 大慝巨猾出於勳臣之列, 豈臣心之所料哉? 臣家有老母, 饘粥不繼, 而未嘗爲一毫非義。 今以逆臣之族, 以致聖朝之疑惑, 臣雖入地, 亦不瞑目。” 然竟不得上。 王師禦賊, 次第敗衄, 上將南幸, 問於判義禁金瑬曰: “見告諸囚將盡誅乎? 金元亮何以處之?” 瑬未及對, 自點遽曰: “不可留以遺賊, 以爲其用也。” 遂遣所親, 斬殺於獄中, 甲子二月八日也。 當其未死也, 李牧使更生緩頰謂自點曰: “金某, 賢士也。 人將謂公何?” 自點大言曰: “殺士之罪, 吾自當之。” 金、李二元勳, 亦不能爲公地。
公慶州人, 新羅敬順王後也。 麗末版圖判書將有退居報恩縣, 子孫因家焉。 國朝冲庵先生諱凈爲中廟己卯名賢, 其從弟碧不仕, 是公高祖。 曾祖天宇, 弘文館典翰: 祖可賓, 司憲府監察。 考汴, 以公贈月川君, 有文行世其家, 崔簡易岦、張谿谷維實銘其墓。 妣綾城具氏, 大司憲壽聃之孫, 縣監英俊之女。 以萬曆己丑生公。
幼踔厲不群, 才命名而孤, 問於母氏“父安在”, 母氏泣而告, 輒釀淚。 自是聞隣兒呼父, 不忍聞。 稍長, 棲身蕭寺, 發憤讀書, 負笈從沙溪先生, 先生敎以《家禮》、《小學》、《心經》、《近思》等書。 公最好方遜齋書, 手不釋卷。 及廢母議起, 公語所親以勉其守正不屈, 奸黨聞而惡之。 公就理, 以“可矣”自標其座, 蓋取“朝聞夕死”之義。 旣免, 盡室入安峽友麋村, 因以自號, 以爲終焉計。 旣與延陽贊決大義, 其所運用者頗有焉。 迂齋李相公厚源曰: “儒生與知此事, 於義何如也?” 公曰: “趙汝愚以太后命擁立寧宗, 而朱子與之同事矣。” 迂齋曰: “載書橫階, 奉盤飮血, 古亦有如此儒生乎?” 公曰: “此則可免也。” 擧事日, 公謂崔完城鳴吉曰: “吾儕於今日, 只贊其謨而已, 至於鷹揚虎闞, 非所堪也。” 遂不赴軍前, 又不與渭橋之迎。 至論功行賞, 公與迂齋請辭甚力, 仁廟聞之曰: “可尙也。” 然上知舂陵子弟之安實由於公, 故公竟不得免, 而下從三等者, 由公遜碩也。 公猶辭避不已, 至囑知己之在言路者, 冀以濫錄削去而不得。 又不受錫賚, 則敎曰: “禮, 長者之賜, 猶不敢辭, 況君賜乎?” 由掌隷院司評、工・戶曹佐郞, 以學行與愼獨齋金公集竝登薦剡, 爲司憲府持平, 出謝旋遞。 蓋公初心只欲正義明道而已, 利功非謀計所及也。
公沒後三十八年, 乃顯宗之二年。 公夫人李氏上言訟冤, 大臣沈公之源議請如章, 顯廟命復勳爵。 後四年, 賊臣許積誣引尹仁發事, 請還丹書之籍。 蓋仁發嘗夜殺行人于廣州路上, 皮面抉目, 而使其家人指謂仁發遇盜死, 發喪藁葬之, 而西走适, 爲其謀主。 及适敗於鞍嶺而獲其馘。 積白上以爲: “此金某謀也。” 豐陽君張公善澂誦其考谿谷公語, 以明其不然。 上命更議, 則大臣李公景奭、洪公命夏皆如沈公議, 而終爲積所格焉。 今上庚申, 李參判選以其考迂齋遺意上疏伸公, 上復命大臣議處。 遂復勳籍, 贈戶曹判書, 封月城君。 公娶庶尹新平李景恒之女, 有一子而夭, 二女適判官李仁實、學生李兼。 公無近屬, 朝廷以冲庵五代孫瀗爲後。
嗚呼! 公以不群之資, 際昏亂之世, 傷歎於天理人彝之斁滅, 旣贊謨決策, 大勳纔集, 而身陷大戮, 豈不悲哉? 雖然, 前後持公者, 自點與積, 而皆以兇逆誅死, 前後伸公者, 皆名公賢卿, 公之賢否, 不待多言而可知矣。 文元公金先生嘗曰: “金某固有取死之道, 其心則何疑焉?” 嘗謂自點曰: “汝以某嘗求西倅, 爲第一疑端。 然某嘗求茂朱, 是亦可疑耶?” 蓋公見人厭避西任, 慨然而請爲寧邊倅也。 余未及見公矣, 迂齋相公嘗謂余曰: “金明叔志大才疎, 學未精密, 自信太過, 難乎免矣。” 及其時事大變, 恨不得埋沒草莽, 則又歎曰: “金明叔自誤而誤人。” 公之醇疵, 此可想見矣。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