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사람, 행하는 사람
2023년 7월 16일 약 1:22-25
1. 선교의 사명
(1) 고등종교
사람은 누구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름대로 자기 신앙이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무종교다.’, ‘믿는 종교가 없다.’고 하는 분들의 경우에도 어떤 종교단체에 적(籍)을 두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믿는 바가 내 육체적 능력, 즉 건강이든지, 혹은 내가 열심히 모아놓은 재산이든지, 혹은 자연의 원리, 순리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은 뭔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믿는 양상들이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절에 나가서 불공을 드리고, 또 어떤 이들은 부지런히 점집을 쫓아다닙니다. 이 다양한 신앙의 모습들 가운데서 그래도 비교적 많은 수가 소속되어 있으며, 나름의 교리와 조직의 체계를 갖춘 종교들을 구별하여 고등종교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른바 이 고등종교들과 그렇지 않은 신앙들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 차이 가운데 하나는 ‘나를 넘어서는가?’입니다. ‘나를 넘어서는가, 아닌가?’ 입니다. 즉 그 관심이 ‘나, 내 문제에 한정되는가? 아니면 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 입니다. 점집에서는 나의 길흉화복을 예측하고 좋게 만들어주려고 애씁니다. 복채를 내고 부적을 받아 간직한다든가 푸닥거리를 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죠. 그런데 언제나 관심하는 것은 나입니다. 내 문제죠. 나와 기껏해야 내 가족의 안위입니다. 점집에서는 무슨 이웃이라든가, 민족이라든가, 세계 평화라든가 뭐 이런 것들에 대하여 고민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등종교는 이웃에 대하여, 민족과 나라에 대하여,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선교로 나타납니다. 교회에는 선교란 개념이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교의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란 본래 선교하는 곳입니다.
몇 년 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가톨릭세계청년대회가 열렸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청년가톨릭신자들에게 가난과 맞서 싸울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거리로 나가서 파장을 일으켜라. 소란스러운 청년대회를 기대하고 있다. 교회도 거리로 나가길 바란다.” “불평등에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빈부격차를 키울 뿐”이라며 “가난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를 회피하고 무시하는 사회에는 평화와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대에 걸 맞는 교회의 선교 사명을 잘 드러내주는 말씀이었습니다.
(2) 선교 당부의 성구들
성경에는 교회의 선교 사명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눅 4:18-19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하여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 땅에 어려운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란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눅 9:1,2,6
예수께서 그 열둘을 한 자리에 불러놓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시려고 그들을 내보내시며, … 제자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의 사역에 제자들을 불러 파송하셨습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최후의 당부입니다.
행 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최후의 당부입니다.
갈 6:9-10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의 경주를 힘쓸 것을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곳곳에서 믿음의 자손들에게 세상에 나가 복음과 진리의 빛을 밝히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2. 야고보서 1:22-25
사도 야고보는 본문에서 두 종류의 신앙인을 예로 듭니다. 한 부류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듣고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사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요. 예배드릴 때는 말씀을 듣는데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그 말씀을 잊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잊으니 당연히 자기 맘대로 살지요. 그런데 본문은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오늘 본문 약 1:23-24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거울을 볼 때는 자기 얼굴을 보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거지요.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는 ‘그렇지. 맞아. 그래야지.’ 하다가도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잊어버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22절입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을 사도 야고보는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의 말씀 25절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이나 지금이나 주님의 계명을 듣기만 하는 자와 듣고 행하는 자가 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실행하는데 의의가 있지 듣기만 하는 것은 부족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많이 읽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행하는 사람
(1) 인생에 남는 것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 봅니다. 언뜻 생각하면 퍽 많이 남길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사실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아니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기억이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퍽 많이 기억해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쉽게도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빈소를 지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보면, 맨 산 사람 얘기입니다. 망자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남지 않습니다. 오래 되지 않아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화장을 하는 문화여서 두 시간도 되지 않아 한줌 가루로 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하늘장(葬)이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화장한 가루를 특수 제작한 풍선에 담아 하늘로 보내는 것입니다. 40~50km 상공의 성층권에 도달한 풍선은 터지고 그 안의 가루는 하늘에 흩뿌려지는 방식입니다. 비용은 24만 엔, 우리 돈으로 220만 원 정도입니다. 애도할 사람도 묻을 땅도 없는 상황에서 고령인구의 사망자 속출하기 시작한 일본에서 나온 새로운 풍속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 몸이야 그렇지만 우리에 대한 기록은 영원하지 않냐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영원합니다. 아니 영원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육신보다는 오래갑니다.’라고 말해야겠죠. 그런데 그것도 별롭니다. 목회자는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교적부를 펼칩니다. 교적부의 이름에 붉은 볼펜으로 줄을 긋지요. 아무개집사 1965.3.13생. 1980년 11월 20일 세례. 2000년 집사 임명. 이렇게 쓰인 그 위에다 줄을 딱 긋고 빨간 글씨로 [2023년 7월 16일 소천] 이렇게 적습니다. 그래 결국 남는 것은 교적부의 그 한 줄밖에 없습니다.
(2) 행하는 사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인생이요? 한 줄입니다. 우리 인생이 한 줄인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훌륭한 일을 했으니 두 줄이라고요? 그게 그겁니다. 여러분, 영원한 것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것,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이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생활 속에서 부단히 애쓰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망할 바입니다. 우리 모두 귀한 사명을 맡고 있지요. 내가 하늘샘교회 친교부원으로서 질병으로, 가난으로, 여러 사정으로 어려움에 처한 교우를 찾아가 돌아보고 기도해주는 일, 내가 예배부원으로서 교회의 예배를 정성스레 준비하는 일, 예배 처소를 더 아름답게 꾸미는 일, 예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내가 교육부원으로 주일학교 아이들과 매 주일 그 자라나는 과정을 함께 하는 일, 그 아이들의 내일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일, 봉사부원으로서 교회를 위해 남들보다 한발 더 먼저 움직이는 일, 우리가 하지 못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다양한 선교단체를 위해 기도하며 후원하는 일, 평화가 사라진, 정말 평화롭지 못한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애쓰고 수고하는 일, 이런 일들이 영원한 일들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 앞에서 나눌 이야기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야깃거리를 많이 만드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에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잘 실천함으로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수고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