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환란이 바꾼 일상
최진근
코로나 역습이 평화롭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일이라 충격적이다.
과거에도 바이러스를 경험했다.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 플루, 2015년 메르스를 겪었지만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그래서 코로나도 무사히 지나가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런 안이한 생각이 기우임을 알았다. 날이 갈수록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더니, 2월 29일에는 전국에서 1일 확진자가 909명이 발생했고, 3월 4일에는 대구의 1일 확진자가 405명이나 되었다. 그러자 혹시 가족에게 불행이 닥칠까봐 겁이 덜컹 났다. 자유로운 일상을 순식간에 파괴당해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데, 지인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고향에 계시는 90노모를 뵙고 조심하시라고 당부하자, 코로나가 6.25전쟁보다 더 무섭다. 전쟁 때는 적군과 아군이 보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으니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옮길지 몰라 무섭다”고 하드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코로나는 비말로 전염된다는 보도와 지인들이 보내온 여러 정보를 접하면서 일상의 대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외출을 삼가 했다. 사회적 거리를 지키려고 정기적으로 만나던 모임을 코로나가 끝날 때 까지 연기하기로 했다. 하루에도 몇 곳을 다니다가 막상 집에만 있으니 갑갑해서 온 몸이 수 신다. 거의 매일 하던 산책을 중단하자 건강이 걱정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지인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물었다. 외출은 삼가고 가끔 한적한 곳을 찾아 산책을 한다는 말을 듣고, 산책을 하기로 작정했다. 산책을 나갈 때는 안전을 위해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세정제를 장갑에 발라 대문과 엘리베이터를 열고 닫았다. 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치면 등을 돌려 서거나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것을 볼 땐 처음에는 섭섭했지만, 한두 번 겪다보니, 나도 상대를 배려해서 피하게 되었다.
한 달 이상 집에서 삼시세끼를 먹으니 식상했다.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를 지켜보니 매일 세끼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힘겨워 보였다. 한 마디 불평 없이 묵묵히 수고하는 아내를 위해 외식을 하는 것이 어떠냐며 상의를 했다, 아내는 한마디로 반대를 한다. 며칠 전 모방송사 뉴스에서 바이러스가 비말과 손으로 어떻게 옮기는지 실험한 결과에서 수저와 물 컵을 통해 급속도로 번진다는 보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가족건강을 염려해 반대하는 것은 고맙지만, 예방조치를 철저히 준비해서 나가기를 몇 차례 권유하자 아내는 마지못해 외식을 하기로 했다. 아내는 식초를 거저에 듬뿍 묻혀서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손님 세 명과 주인만 있었다. 손님이 없어 걱정을 하며 호주머니에서 거저를 꺼내 이것저것 닦아서 식사를 했다. 식당주인과 손님은 우리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며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식당주인을 불신하는 행동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
지인을 만나면 주먹으로 악수를 한다. 4월 초였다. 앞산 고산골 사찰에서 불이 나 소방차 십여 대가 출동했다. 집에서 불난 곳을 바라보니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어서 산으로 번지면 어쩌나하며 급히 불난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지인을 만났다. 순간 반가워 마스크와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자 지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마지못해 주먹을 살짝 되며 악수를 했다. 지인과 헤어지자, 아내는 나무랐다.
“ 요즘 텔레비전 안보세요, 당신같이 악수하는 사람이 어디서요,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주먹으로 악수하잖아요, 그 사람에게 실례를 했어요.”
너무 반가워 코로나가 번졌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한 행동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미안해서 전화로 사과를 한일이 있다. .
매일 오전 10시에 발표하는 코로나 확진현황브리핑을 보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면 가슴이 철렁하고, 줄어들면 기분이 좋았다. 대구의 확진자가 늘어나면 지인들로 부터 건강관리 잘하라는 안부전화나 문자를 받기도 했다. 매일매일 보도하는 확진자 발생현황이 하루일과의 희비를 가르는 잣대가 되었다.
평상시에는 사흘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목욕을 해왔다. 코로나가 발생한 후 거의 90여 일 동안 목욕을 하지 못했다. 내 경우는 목욕으로 피로를 풀었는데, 집에서만 샤워를 하니 목욕만큼 피로 회복이 잘 되지 않은 것 같다.
이발은 4주에 한 번씩 목욕탕 이발관에서 했는데, 목욕탕이 다중집합장소라 휴업을 하자 머리카락이 장발이 되었다. 긴 머리카락을 빗으며 투 덜 되자, 아내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머리카락이 길지만 멋이 있네요, 좀 더 길러 머리카락을 뒤로 묶으면 예술가 같겠어요.”
외출을 나갈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모자를 쓰면 머리카락이 양쪽 귀 옆으로 카이젤 수염같이 솟아나 보기가 부자연스러웠다. 이런 모습이 생소해 궁리를 했다. 동네이발관에 가서 이발을 하려니 오랜 기간 얼굴형에 어울리게 다듬어 온 머리형을 버릴까 걱정이 되어 목욕탕 이발관에 세 번이나 가 봤다. 갈 때마다 휴업을 연장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어서 아내에게 사실을 말 했더니, 미장원에 가서 하잖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 마장원에 문의를 했다. 미용사가 단골이발관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기에 목욕탕 이발관이라고 하니, 기다렸다가 단골이발사에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목욕탕이 영업을 할 때 까지 기다리고 있는 처지다.
코로나 영향은 4.15총선에도 변화가 왔다. 과거선거는 후보자의 유세소리, 시끄러운 정당 로고송과 율동으로 대변되던 선거운동이 조용한 방식으로 바뀌었다. 후보들은 유권자와의 직접접촉이 어려워지자 온라인을 통한 표심잡기를 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당일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투표장으로 가라는 안내 문자가 여러 번 왔다. 선거당일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투표장으로 갔더니, 먼저 온 유권자가 1미터이상 거리를 유지하며 긴 줄을 서 있었다. 투표장입구에서 손 소독을 하고, 비닐장갑을 받아 끼고, 열 감지를 거처 투표장에 들어 갈 수 있었다. 50여년 이상 투표를 하면서 처음 겪는 진풍경이었다.
코로나 환란으로 어려움이 많지만 값진 교훈을 주고 있다. 자유로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가치를 느끼게 하고, 가족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협력해야할 필요성을 재발견하고, 코로나19 이후에 전개될 변화의 시대를 준비하고, 5-6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바이러스를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코로나는 아직 진행형이다. 하루속히 종결되어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기를 기원해 본다.
첫댓글 구름이 지나고 나면 빛은 항상 존재합니다. 삶속의 어려움 극복 뒤에 행복이 있지요. 코로나19 잘 극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세상은 나누는 사람들의 것이기에
누구나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만나지는
행복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말씀 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을 일생같이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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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