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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셨죠? 2024년 갑진년,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나무 줄기처럼 굳센 푸른 청룡의 해는 잘 보내고 계신가요.
1월 지나고 눈 깜짝할 사이 2월이 되었네요. 29일밖에 없어서 업무 일정상 문자 그대로 미친 듯 날뛰어야 하는 달입니다만
그래도 놓칠 수 없어서 말이죠. 6년 만에 돌아왔다는 한국어 버전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 2월 11일, 일요일이라 마침 설 연휴이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이번에도 원작 읽기를 실행했답니다.
도서명: 파리의 노트르담(축약본)
저자: 빅토르 위고
옮김: 김진형
* 이 도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재활통신망 아이프리 도서관에 데이지 형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노트르담 드 파리)》는 우리나라에서 <노틀담의 꼽추>로 알려진 작품이다. 나도 초반에는 ‘노틀담의 꼽추’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접했다. 아마 번역하는 과정에서 뭔가 편의상의 직역이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과 <장 발장>이 서로 다른 이야기인 줄 알았던 때와 같은 오해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트르담’과 ‘노틀담’이 너무 비슷했고, 딱 봐도 같은 곳을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한편 이 작품을 독서하기 전에 완역 원본을 읽을지, 아니면 스토리 중심의 축약본을 읽을지 좀 고심했다. 빅토르 위고의 오리지널 《파리의 노트르담》은 전체 2권이고, 소설 중간중간 노트르담 성당의 역사나 유래, 도시 파리의 생활사 등이 담긴 에세이가 들어 있어 엄청 분량이 많기 때문이다. 📚
👩🦯🦮 사실 내가 중고생 때 읽었던 게 바로 이 완역본이었다. 그나마 <레 미제라블>은 시간이 좀 있어서 완역본에 도전했지만, 이 경우 공연 일자까지 여유가 없고, 《파리의 노트르담》은 솔직히 좀 여러 번 접하기도 했으며, 분량이 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불문학자이자 번역가 진형준 교수의 축약본 《파리의 노트르담》였다. 축약본이라 해도 에세이 부분만 없을 뿐, 캐릭터의 관계성이나 각 인물이 펼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별로 지장은 없다.
그러나 구관이 명관이라고, 다른 독자들은 나중에 꼭 원작을 들길 바란다. 빅토르 위고의 사상이나 그 시대상, 그가 문장으로 표현한 의미를 원작이 더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 덧붙이자면,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이 대박 히트를 치면서 철거될 뻔한 노트르담 성당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이 성당 하나 살렸다.
참고로 <레 미제라블>처럼 이 소설 역시 영화나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으로 제작되어 사랑을 받고 있다. 빅토르 위고는 어떤 면에서는 축복받은 작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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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비극이 되고 욕망이 되고 집착이 되는 순간 - 《파리의 노트르담》
👱♂️🎤 피에르 그랭구아르: 거리의 시인, 이야기의 사회자이자 방관자
“극을 다시 시작하시오. 자, 연극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야기는 1482년 1월 6일이란 특별한 날로부터 기인한다. 적군이 처들어오거나 왕이 내방하는 등의 역사적 이벤트는 없었지만, 그날 파리의 시민들은 들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축일인 ‘공현절’이었고, 민중이 성직자나 귀족 등 사회 지도층을 비웃고 조롱하고 풍자해도 되는 ‘광인축제’도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즉, 놀거리 이벤트가 겹친 셈!
그리고 그날은 피에르 그랭구아르의 연극이 무대에 오르는 의미 있는 날이기도 했다. 그랭구아르는 가난한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몽상가인데, 그에게 이번 연극은 매우 중요했다. 시청의 의뢰로 제작한 연극이 흥행해야 왕창 밀려버린 하숙비를 얼마간이라도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쫓겨날 판이니, 첫 데뷔작임을 차치하더라도, 여러 면에서 심장이 두근두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랭구아르의 공연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 첫째, 정오에 시작하기로 했는데, 15분이 지나도록 추기경 및 대법관, 타국 사절단 등 귀빈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군중의 성화에 못 이겨 연극을 시작했지만, 웬 거지가 적선을 요구하며 분위기를 흐리지 않나, 뒤늦게 등장한 귀빈 행차에 연극은 끊기기 일쑤였다.
🎭 둘째, 유명한 의복 상인 하나가 연극이 식상하다며 가장 흉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오늘의 교황으로 뽑는 ‘미치광이 교황 선출’이란 놀이를 제의했고, 신인 극작가에게는 불운하게도 군중은 그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공연해도 보는 관객이 없었다. 그 재미난 볼거리에서 오늘의 교황으로 뽑힌 게 바로 척추 기형 꼽추요, 안짱다리요, 눈가에 난 사마기 때문에 외눈이 된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였다.
🎭 셋째, 일련의 소란이 끝나고 남은 관중, 몇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 등을 대상으로 그랭구아르는 연극을 진행하려 했다. 그는 끝내 첫 데뷔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광장에 나타나 춤추는 어느 집시 여인으로 인해 남은 관객마저 연극은 내버리고 떠나버렸다.
오, 가엾은 그랭구아르! 불쌍한 거리의 시인이여. 이제 집도 절도 없어져 그야말로 진짜, 문자 그대로 길거리 시인이 되었구나!
그는 자신의 마지마 관객까지 앗아간 ‘에스메랄다’라는 집시 여인에게 짜증과 호기심을 품는다. 그리고 광장의 화톳불 가운데 춤추는 무희를 보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 저건 불도마뱀이요, 요정이요, 여신이요, 바쿠스 신의 무녀라고.
🔎 참고로 바쿠스 신은 디오니소스를 말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술, 정확하게는 포도주의 신, 연극과 춤, 연기 등 무대 예술의 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광기 등을 상징하는 신이다. 감성, 구속으로의 해방 등 진취적이고 자유로움을 표상하지만, 한편으로 욕망에 잡아먹혀 타락하거나 방종함, 무분별한 잔인함을 표상하기도 한다. 🍾🍷🍇
⛪️☦️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 성직과 애욕 사이에서 타락하는 인물
“저건 마술이다. 신이 무섭지 않은 게냐? 신을 모독하는 거냐?”
한편 그랭구아르가 동경하게 된 집시 여인을 사사건건 못마땅해 하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노트르담 성당의 부주교 클로드 프롤로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권유로 사제의 길을 걸어온 인물로, 젊은 나이에 학문적 성취와 명성을 이룩했다. 🕊️
그러나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남동생 장 프롤로를 부양하게 되면서 클로드 프롤로는 더는 속세와 떨어진 상아탑의 고고한 성직자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클로드 프롤로는 자신 역시 속세에 얽매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속적인 것을 경멸한다.
그렇기에 여자를, 특히 대중을 선동하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인 이교도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마뜩치 않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녀가 클로드 자신의 내면에 있던 욕망을, 애욕을 자꾸만 자극하고 끄집어 내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춤을 뚫어져라 지켜보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기 때문이다. 💘
🐐 그저 그녀가 염소 잘리와 함께 펼치는 쇼에 마술이니 신성 모독이니 운운하며 시비를 걸 뿐이다. 진정 그녀가 악마의 하수인, 마녀로 생각되었다면 그는 성직자로서 왜 그것을 공론화시키지 않는가.
하지만 그날에, 광인축제와 공현절이 겹친 그날 밤에, 스스로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프롤로 부주교는 납치를 사주하기에 이른다. 그의 수양아들이자 하인, 성당의 종지기인 콰지모도에게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습격하게 시킨 것. 👹🧿
마침 거리를 떠돌던 그랭구아르가 그 모습을 보고 막으려 하지만, 콰지모도의 주먹질 한 방에 거리 어딘가로 처박히고 만다. 과연 프롤로 부주교가 납치 다음에 어떤 일을 벌이려고 했는지는 의문이다. 알 수 없다.
때마침 거리를 순찰하던 헌병대 중대장 페뷔스가 에스메랄다를 구해냈기 때문이다. 그 와중 납치 사주범 부주교는 도망가고, 콰지모도만 현장에 남아 검거되었다.
그런데 헌병 중대장 페뷔스가 정의감으로 움직인 건 아니었다. 연약한 여인을 괴롭힌 것에 분노한 것도 아니었다. 페뷔스가 콰지모도에게 화를 낸 이유는, 그가 귀족들만이 해야 하는 일, 즉 여인을 납치하거나 취하거나 하는 등의 일을 감히 하찮은 서민 주제에 자행하려 했던 까닭이다. 즉, 자신과 같은 귀족은 이런 짓 저런 짓을 해도 되지만 하찮은 평민인 너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아니 무슨, 내로남불에도 신분제 따지냐!
🔎 이 대목에서 작가 빅토르 위고의 비판적인 시선이 드러난다. 그는 당대 사회와 신분제의 부조리를 지독하게 환멸했던 모양이다.
🔔👹 콰지모도: 서민, 부랑자의 상징,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
“물 좀 줘!”
1482년 1월 6일 그랭구아르의 연극이 망하고,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가 광인들의 축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고, 프롤로 부주교가 음험한 납치를 실행하고, 헌병 중대장 페뷔스에 의해 구해진 집시 에스메랄다가 사랑에 빠지는 등 만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1482년 1월 6일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랭구아르는 거리를 방황하다 우연히 거지와 집시 등 부랑자들의 아지트 술집 기적궁에 발을 들인다. 그곳의 우두머리 클로팽은 부랑자 무리에 속하지 않는 그랭구아르를 그들의 규칙에 따라 사형시키려 한다. 그러면서 말하길, 여기 여자들 중 너를 남편으로 원하는 이가 있다면 살 수 있단다. 🤵♂️
하지만 나서는 여자는 한 명도 없고, 그랭구아르는 세상 하직할 위기에 처한다. 바로 그때 에스메랄다가 나와 그를 남편 삼겠다고 말하는데, 물론 그건 그랭구아르를 구하기 위한 면피에 불과했다.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랭구아르가 납치 사건 때 자신을 구하려 했음을 기억하고 도운 게 아닐까? 🧚♀️
👰♀️🤵♂️ 좌우간 그랭구아르와 에스메랄다는 형식상 결혼하게 되고, 친구처럼 오누이처럼 지내게 된다.
한편 납치 미수범으로 검거된 콰지모도는 수레 바퀴 위에서 1시간 동안 바퀴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채찍을 맞고, 그다음 1시간 이상 공시대에 전시되는 형벌을 선고받는다. 그것은 합당한 선고가 아니었다. 그가 그 형벌을 받은 건, 여인을 납치하려 해서라기보다 귀먹어리 판사에게 귀머거리인 콰지모도가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 빅토르 위고는 이 장면을 통해 당대 프랑스 사법 체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풍자랄까.
하여튼 형은 집행되고, 콰지모도는 채찍질당하고 공시대에 구경거리가 되는 수모를 당한다. 마침 광장을 지나던 프롤로 부주교를 본 그는 신부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프롤로 부주교는 콰지모도를 외면하고 그는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부주교는 콰지모도를 거둬 길러준 부모요, 대성당이라는 안식처를 제공해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납치라는 불온한 지시에도 군말없이 따랐는데, 돌아오는 건 모른 척이라니 콰지모도는 얼마나 실망했고 좌절했을까?
🔔🧚♀️🕊️ 그러다 목이 말라 물을 줄 것을 호소하지만, 파리의 군중은 시궁창에 푹 적셔진 걸레를 던질 뿐이었다. 그때 군중의 야유를 뚫고 염소와 함께 템버린을 든 여인이 나타난다. 바로 콰지모도가 납치하려 했던 집시 에스메랄다였다. 그녀는 콰지모도에게 기꺼이 물을 주고, 자신의 추한 외모로 인해 늘 외면받아온 종지기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종보다, 성당보다, 자신의 세계보다 더 마음을 사로잡는 대상을 만나게 되었다.
🌷🌹 플뢰르 드 리스: 백합 여인, 명예와 부를 의미하는 귀족 아가씨
“이, 이 여자는 마녀가 틀림없어요!”
👸 광장 공시대의 사건이 있고 몇 주일 후, 소설의 장면은 어느 부유층의 집안 모임으로 이어진다. 드레스 차림의 영애들, 그중에 호스티스로 있는 귀부인과 그녀의 딸이 있다. 부인은 딸과 약혼한 상대, 즉 헌병 중대장이 꽤나 흡족하다. 딸인 플뢰르 드 리스도 약혼자 페뷔스 드 샤토페르가 마음에 든다. 요컨대 그 자리는 친구들에게 약혼자를 선보이는, 다시 말해 자랑하는 자리였다.
그 파티에서 즐겁지 않은 인물은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플뢰르 드 리스의 약혼자 페뷔스 드 샤토페르였다. 그는 허영심이 많았고 준수한 외모로 바람둥이 전선에서 적극 활약하는 인물이었다. 약혼녀에 대한 마음은 진즉에 식어 있었다.
🌹 그때 발코니에 있던 플뢰르가 춤추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보고 페뷔스가 그녀를 구해준 일을 떠올리며 그에게 집시 무희를 불러줄 것을 요청한다. 한마디로 말해, 여흥을 위한 기쁨조 역할을 시키려 한 것.
💃 그러나 에스메랄다의 등장은 파티 분위기와 더불어 플뢰르와 친구들의 자존감을 와장창 박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마디로, 에스메랄다가 너무 예뻤다. 귀족이고, 부유하고, 고급 드레스를 걸친 자신들보다 집시고, 거리의 부랑자고, 가난한 무희인 그녀가 더 아름다웠다. 요즘 말로 하면 생태계 파괴자.
그때 에스메랄다의 파트너 염소 잘리와 친밀해진 소녀가 어떤 비밀을 들춰내며 분위기는 한층 더 묘해진다. 다름 아닌 에스메랄다가 염소 잘리에게 가르친 재주, 알파벳 목각으로 단어 조합하기였다. 잘리가 목각 알파벳으로 만든 글자는 ‘페뷔스’였다. 🐐
🧙♀️ 플뢰르는 에스메랄다를 향해 마녀라고 부르짖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다른 말을 외쳤다. 이 여자는 연적이라고.
💂♂️⚔️ 페뷔스 드 샤토페르: 기회주의자 귀족의 상징, 질 나쁜 바람둥이
“아가씨, 나를 기억해준다면 고맙겠는데. 그런데 그날 왜 그렇게 갑자기 도망가 버린 거지? 내가 무서웠나?”
일련의 소동이 있고, 페뷔스는 에스메랄다의 마음을 눈치챈다. 적극적인 바람둥이가 사냥감을 놓칠 리 없다. 약혼녀가 있지만 바람둥이에게 그런 게 대수겠는가.
그는 집시 무희에게 달콤한 감언이설로 만남을 제안하고, 에스메랄다는 설레는 연심으로 그날 밤의 약속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페뷔스가 약혼녀 있는 남자라는 걸 몰랐다.
한편 에스메랄다가 떠난 광장에서 기묘한 만남이 이루어졌으니, 바로 거리의 시인이며 이제는 피에로도 겸직하게 된 그랭구아르와 프롤로 부주교의 마주침이었다. 사실 프롤로 부주교가 그랭구아르를 알아보고 먼저 불러세운 것에 더 가까웠다. 🤹♂️
💘 평소처럼 성당 탑에서 에스메랄다를 지켜보던 프롤로 부주교는 그녀가 어떤 남자와 함께하는 모습에 의아함과 분노를 느낀다. 당장 쫓아 내려와 보니, 뜻밖의 그 남자는 학문적인 옛 제자 그랭구아르가 아닌가.
그랭구아르는 옛 스승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연극이 망했고, 우연히 떠돌다가 거지들의 아지트에 들어가게 되었고, 생명의 위협을 당했고, 에스메랄다와 결혼하게 되어 겨우 살아남았으며, 현재 일단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그녀의 공연을 도우면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 그녀와는 남녀 사이의 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에스메랄다가 모종의 이유로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그저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 에스메랄다는 염소 잘리를 아껴서 이런저런 신기한 재주를 가르쳤고, 그중에는 알파벳 단어 조합하기도 있다는 것 등을 시시콜콜 늘어놓는다. 나 원 참, 무슨 남자가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말하는지.
🧿 프롤로 부주교는 그랭구아르가 에스메랄다와 함께 지낸다는 것에 분노하고, 그에게 그녀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 경고한다. 그리고 에스메랄다의 관심을 받는 ‘페뷔스’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격분한다. 그러다 프롤로는 자신의 탕아 동생 장 프롤로와 친근하게 대화하는 남자가 헌병 중대장 페뷔스임을 알게 되고, 그가 밤에 에스메랄다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는 것도 엿듣게 된다.
🏘️ 에스메랄다와 페뷔스는 한 노파가 운영하는 여관이랄지, 방을 대여해주는 듯한 장소에서 만나고, 페뷔스는 에스메랄다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려 한다. 누가 바람둥이 아니랄까 봐, 수작질이 아주 술술 나온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며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말한다. 그녀는 녹색 주머니를 목걸이로 만든 부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부모님을 만나게 해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를 위해 자신은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정조를 잃으면 부적의 힘이 사라질 거라며. 💃
그러나 우리의 바람둥이 페뷔스는 그러든 말든 상관이 없다. 그저 자기 욕망 충족할 생각뿐이다. 그가 그녀를 막 덮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나 칼을 휘두른다. 바로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였다.
☸️👑 클로팽 트루유프: 또 다른 왕, 새로운 질서 혹은 규칙의 상징
“대성당이 신성하다면 우리 누이도 신성하다. 누이가 신성하지 않다면 너의 성당 역시 신성하지 않다. 너의 성당을 구하고 싶으면 그녀를 우리에게 넘겨라!”
그 밤 이후로 에스메랄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기적궁 사람들은 그녀를 걱정하며 이 거리 저 거리 찾아 헤맨다. 그랭구아르는 집시 여인도 물론 걱정이지만, 그보다 염소의 행방을 더 궁금하게 여긴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예술성을 동경할 뿐 그녀를 여자로 보지는 않는다.
🔎 사실 결혼 후 초반에 살짝 친밀감을 표했다가 그녀가 꺼낸 비수를 보며 마음을 고쳐먹은 전적이 있다. 그 일 뒤 그랭구아르의 관심은 염소 잘리에게 더 쏠리게 되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염소가 부리는 돈 되는 재주에 더 끌린 것 같지만. 🐐🪙💰
여하튼 피에르 그랭구아르는 거리를 쏘다니던 중 우연히 재판소를 지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에스메랄다를 발견하게 된다. 무려 염소 모습을 한 악마와 함께 헌병 중대장을 살해하려 했다는 마녀의 혐의로. 👨⚖️
💃🐐 그날 밤, 에스메랄다는 놀라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페뷔스를 홀려 죽이려 한 마녀가 되어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춤과 노래는 요사스러운 마력으로 대중을 홀리는 무언가가 되었다. 템버린을 치는 것으로 시간이나 날짜를 맞추는 염소 잘리의 쇼는 악마의 마술로 변해 버렸다. 어떠한 논리적 근거나 증거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염소 잘리의 쇼가 광장이 아닌 재판장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유 하나로 그것은 악마의 마술이 된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자백마저 고문에 의한 것에 불과했다. 🧙♀️
🔎 이 부분에서도 프랑스의 사법 체계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빅토르 위고는 정말 사회상에 불만 많았구나 싶다.
어쨌든 에스메랄다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교수형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다음날 사형을 앞둔 그녀에게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가 찾아와 일련의 사건이 자신의 짓임을 밝히며 사랑을 갈구한다. 광장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에스메랄다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고, 욕망을 느꼈고, 신실함을 맹세한 사제 신분에 적절하지 못한 마음을 회피하려 부정도 해보고, 그녀를 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에 오지 못하게 하려고 납치하려 했다는 것 등등.
그러면서 프롤로는 도망을 제의한다. 그녀의 목숨을 담보 삼아 사랑을 호소한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사랑 페뷔스를 해친 신부를 거절하고 아침을 마지한다. 그리고 그녀가 사형대 앞으로 끌려가던 순간, 콰지모도가 나타나 에스메랄다를 구해 성당으로 은신한다. 그는 에스메랄다를 안은 채 성당에 발을 내딛고 이렇게 외친다. 여긴 성역이다!
🔎 당시 성당은 ‘성역’으로 지정된 공간이었다. 때문에 세상의 법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법과 왕실 등 속세가 판단한 죄인도 성당에 발을 들인 순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당을 벗어나면 법이 적용되었기에 어찌 보면 성당은 또 다른 형태의 감옥이라 할 수도 있었다.
성당에 피신하고,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는 우정을 쌓고, 그 관계는 어느새 사랑으로 발전해 둘은 어디론가 도망가 행복하게 사랐다고 끝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
애석하게도 이 소설은 비극이다. 그래서 왕실과 사법부는 에스메랄다를 기어이 마녀로 확정짓고, 그녀를 잡기 위해 성당으로 향하게 된다.
한편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는 에스메랄다를 구하려 한다. 그는 초반 페뷔스는 죽고 에스메랄다도 사형을 당한 줄 알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자책하고 번민하다가 성당에 돌아왔을 때 콰지모도가 그녀를 구해 성당의 보호 아래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살아 있음에 안도한 것도 잠시, 프롤로는 다시금 욕망에 사로잡혀 에스메랄다를 찾아간다. 물론 돌아오는 건 거절과 거부요, 콰지모도의 손에 내동댕이 쳐지는 꼴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프롤로는 깊은 방황 끝에 자신의 사랑을 위해 에스메랄다를 살려보려고, 기적궁에 몸을 의탁한 명목상 그녀의 남편인 피에르 그랭구아르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그랭구아르는 거지와 부랑자 무리가 성당을 습격하면서 그 난리통 틈에 에스메랄다를 슬쩍 빼내 도망시킬 계획을 세운다.
👑 거지들의 우두머리 클로팽은 에스메랄다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성당 습격에 찬성한다. 루이 11세가 파리에 머물고 있던 때라 누군가 우려를 표했지만, 클로팽은 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가족이자 식구인 누이 에스메랄다를 되찾고자 부랑자 무리를 이끈다.
글쎄, 그는 소설 중에서 왕실이나 종교, 기존의 사법 체계와는 또 다른 질서나 새로운 가치관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까.
💃💖 에스메랄다: 집시 여인,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어리석은
“왜 나를 구해주셨는지 말해주세요.”
문제는 그런 일련의 작전을 콰지모도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거사의 밤, 거지 떼가 노트르담 성당 앞으로 몰려왔을 때, 콰지모도는 그들이 에스메랄다를 잡으러 온 군중이라고 여기며 필사적으로 그의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아니, 그것은 혈투요, 사투였다. 👹
그렇지만 문자 그대로 피튀기는 격전 끝에 방에 돌아왔을 때 그를 마지한 것은 휑하니 텅 빈 공간이었다. 아가씨도, 그녀의 파트너 염소 잘리도 없었다. 두건 쓴 사나이의 도움으로 그랭구아르가 에스메랄다를 피신시키는 데 성공한 것.
하지만 그들이 배를 타고 샌강을 건너 반대편에 다다랐을 때 남은 건 집시 아가씨와 수상한 사내뿐이었다. 어느새 그랭구아르는 염소 잘리만 데리고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수상한 사나이가 두건을 벗어 정체를 드러내는데, 이미 아시다시피 그는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였다.
💘🧿 그는 자신의 사랑이자 증오이자 천사이자 악마인 아가씨에게 다시금 애원한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대신 용서를 해달라고, 아니 용서를 생각해보겠다는 말이라도 해달라고. 애원하고, 눈물로 호소하고, 그래도 에스메랄다의 반응이 냉담하자 너로 인해 자신은 귀족의 명예도, 성직자의 서원도, 마지막으로 노트르담 성당 습격 과정에서 피붙이인 동생까지도 잃었고, 이 모든 건 전부 너 때문이며, 이렇게 되었는데도 왜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느냐고 원망하기에 이른다.
한편 에스메랄다는 너를 선택하느니 차라리 교수대를 택하겠다며, 신부의 손 대신 형틀의 기둥을 끌어안는다. 그러면서 기어이 그녀의 사랑 페뷔스를 속삭인다. 그러나 에스메랄다는 콰지모도가 그녀를 구하기 전에 페뷔스와 눈이 마주쳤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있다. 어느 저택 발코니에 한 여자와 함께 서 있는 그를 보고, 그녀는 연인이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페뷔스는 뻔뻔하게 약혼녀와 함께 발코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 에스메랄다는 그런 모습을 접하고도 계속 그 바람둥이를 사랑한단 말인가. 사랑이 아무리 긍정적인 감정이라지만, 그것도 가치 있는 상대여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어리석은 사랑이었다. 에스메랄다의 불행은 어쩌면 그녀의 헛된 미망이 불러온 비극은 아닐까?
🛐🧎♀️ 자루 수녀: 구원받지 못한, 비극의 방점을 찍는 인물
“내 딸이 살아 있다면 꼭 네 또래일 거다. 난 15년 동안이나 그 애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내 아이를 훔쳐간 건 바로 집시 계집들이야. 그년들이 잡아먹었어!”
프롤로 부주교는 좌절에 휩사여 종장에는 에스메랄다를 구하려 할 때는 언제고, 다시 그녀를 죽음의 형틀로 몰아넣는다. 자신의 손이 아니면 된다 이건지, 집시라면 덮어놓고 저주하는 인물인 독방의 자루 수녀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 네가 증오하는 집시가 있으니 꼭 붙잡고 있으라고, 자신은 얼른 가서 사람을 불러오겠다고. 🧿
그 목소리에 지하 독방의 채광장 철창 틈에서 손이 튀어나와 에스메랄다를 억세게 봍들었다. 그녀가 광장에서 춤추고 노래할 때마다 욕설과 저주를 하던 자루 수녀 귀딜이었다. 그녀는 집시를 혐오하고 증오한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을 훔쳐가고, 웬 괴물 같은 사내애로 바꿔치기 했기 때문이다.
🔎 덧붙이자면, 그 괴물 같은 사내아이는 쳐추장애 꼽추에, 안짱다리에, 한쪽 눈가에 사마기가 있는, 그렇다. 바로 콰지모도였다. 훗날 그런 두 아이가 만나게 된 것은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
딸을 잃은 어머니는 바꿔치기 된 괴물의 아이를 성당 앞에 유기했다. 그리고 광장의 낡은 저택에 구도자를 위한 독방에 틀어박혀 딸을 만나게 해달라 기도만 올렸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광장에 나타나는 집시 에스메랄다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동이 틀 무렵까지 귀딜 수녀와 집시 아가씨는 실랑이를 벌였다. 내 딸을 훔쳐간 집시 중 하나인 너를 기어이 교수대로 보내고 말 거라는 자루 수녀는 자신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라고 항변하는 에스메랄다에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딸아이의 물건을 보여준다. 금실과 은실로 수놓인 분홍색 아기 신발을.
🩰 에스메랄다는 그 신발을 보고 놀란다. 그리고 자신이 목에 걸고 다니는 녹색 주머니에서 자루 수녀와 똑같은 분홍색 아기 신발을 꺼내 보인다. 서로 한 쌍인 분홍색 신발이 만났다. 그리고 15년간 떨어져 있던 모녀도 만났다. 어머니는 딸의 이름 ‘아네스’를 외치고,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어로 에메랄드를 뜻하는 에스메랄다가 아닌, 아네스가 그녀의 이름이었다. 💎
⚰️⚱️🪦 그러나 해가 떴다. 멀리서 기마대 소리가 들려온다. 죽음이 걸어온다. 도망갈 타이밍을 놓친 에스메랄다를 보호하기 위해 귀딜 부인은 독방 채광창의 창살을 돌배게로 부수고 딸을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만약 에스메랄다가 그 어둠 속에서 계속 숨을 죽이고 있었다면, 그녀는 어머니 귀딜 부인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 하지만 하필이면 때마침 들려온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사랑, 그 남자의 음성에 그녀는 불현듯 외치고 만 것이다. 오, 나의 페뷔스! 여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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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노트르담》 - 변화와 사랑, 숙명을 마주한 인간의 시선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의 시작을 여는 단어가 있다. 바로 ‘숙명’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이다. 성당 돌벽에 짙고 깊고 무겁게 새겨진 그 단어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 ‘숙명’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숙명을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기에 노력 여하와 운에 따라 피할 수 있지만, 숙명은 뒤로부터 날아오는 돌이기에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령, 죽음이라든가. 혹은, 사랑이라든가. 아니면, 변화라든가.
🎶 “대성당들의 시대가 찾아왔어 /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지 / 하늘 끝에 닿고 싶은 인간은 유리와 돌 위에, 그들의 역사를 쓰지 ... / 대성당들의 시대가 무너지네 / 성문 앞을 메운, 이교도들의 무리 / 그들을 성안으로 들게 하라 / 이 세상의 끝은 이미 예정되어 있지 / 그건 이 천년이라고”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1막 ‘대성당들의 시대’ by 그랭구아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중세 말이다. 활자술이 들어오고,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고, 경제적 능력을 얻은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때였다.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고, 새로운 기술이 들어오고, 단체로 향유하는 공동체 지식 대신 저마다 책을 만들 수 있는 시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종교와 교회의 권위가 빛바래고, 왕의 권력도 영주들로, 혹은 새로 등장한 계급인 부르주아 시민들에게 분산되었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 시대의 결론을 이렇게 예언한다. 책이 건축을 죽이리라. 📚⛪️
🔎 모두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어 수직화된 배움은 사라질 것이다. 대신 더는 공동체적인 지식도 없을 것이다. 석공과 유리 장인, 화가 등이 합세해 작업하는 일, 이를테면 성당을 짓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종교가 빛바래고, 새로운 가치관을 알게 되었기에.
소설에서 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게 외면받는 종교 예술이다. 초반에 그랭구아르가 야심차게 준비해 올린 연극 말이다. 그 공연은 대중에게 재미없다,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신 광장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거리의 예술가가 환호와 찬사를 받는다. 한 부분의 단편적인 예를 제시해 그 시대상의 변화를 은연중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변화는 숙명이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것. 이런 배경을 알고 나서 이 소설을 보니, 서두에 나온 그리스어 ‘숙명’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또 그런 이유에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노랫말이 한층 더 와닿았다. 시대상을 잘 반영한 가사 아닌가.
대성당들의 시대가 이교도 무리, 즉 이방 민족과 이국의 문화와 기술, 사상 등으로 인해 서서히 끝날 것이라는. 새로운 천년이 열릴 것이라는.
🎵 “보헤미안, 내가 온 곳을 그 누가 알까 / 보헤미안, 길 위에서 나는 자랐지 / 보헤미안, 결코 내일은 알 수 없어 ... / 보헤미안, 거부할 수 없는 내 운명”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1막 ‘보헤미안’ by 에스메랄다
한편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이 ‘숙명’은 적용된다.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가 신부로서의 직위를 버릴 만큼 애욕의 열병에 미쳐버린 것, 콰지모도가 자신의 세상이자 전부인 종과 성당과 신부를 저버릴 만큼 사랑에 빠진 것, 페뷔스 드 샤토페르가 약혼녀 있는 남자 주제에 욕망에 휩싸인 것, 피에르 그랭구아르가 물에 물 탄 듯 방관하며 사랑보다 자신의 영애를 위해 염소 잘리를 택한 것, 그리고 에스메랄다가 절절한 사랑에 눈멀어 버린 것.
이것이 만약 정해진 숙명이라면, 그야말로 비극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는 숙명은 ‘사랑’이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다. 결코 페뷔스의 욕망이, 프롤로의 집착이, 그랭구아르의 어중간한 방관과 동경이 ‘숙명’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이다.
🔎 에스메랄다는 운명적 혹은 숙명적으로 얽힌 남자들 가운데 페뷔스를 사랑했다. 그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칼을 차고, 발에는 황금 박차를 단,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방랑자, 집시였다. 자유롭지만 어딘가에 안주하길 은연중 바랐던 게 아닐까.
때문에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노랫말이 위와 같이 뽑히지 않았을까 싶다. 보헤미안은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라고 말하면서 춤추지만, 가사 깊은 곳에는 안주를 바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
🎶 “춤 춰요, 에스메랄다 / 노래해요, 에스메랄다 / 조금만 더 나를 위해”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2막 ‘춤 춰요 에스메랄다’ by 콰지모도
그러나 에스메랄다를 지켜준 건 그녀의 사랑 페뷔스가 아닌,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였다. 외모는 추할지라도 그녀를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애정한 건 소설 속에서 그가 유일했다. 🔔
작품 《노트르담 드 파리》는 묘지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사형을 당한 시체가 안치되는 그 공동 묘지에서 훗날 사람들은 어떤 특이한 시체를 발견한다. 호박 구슬 줄 끝에 녹색 주머니가 달린 목걸이를 걸고 있는 백골을, 등이 툭 튀어나오고 다리도 휘어진 형상의 또 다른 백골이 뒤에서 끌어안은 채 함께 매달려 있는 죽음을.
🔎 작가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의 낭만주의 부흥을 이끌었고, 그로테스크 기조를 창시했다. ‘그로테스크’란, 프랑스어로 기괴한 혹은 우스꽝스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공포나 기괴한 부분만이 강조되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 내면에는 풍자적인 면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는 그 인물처럼 되고 싶다든가, 그 캐릭터와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든가 하는, 다시 말해 본받고 싶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업다. 그랭구아르는 제3자 방관자요, 페뷔스는 한량 바람둥이 쓰레기, 프롤로 부주교는 뭔가 음험하다. 가끔 쓴웃음 나오고, 황당하고,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소설의 중심 인물 에스메랄다는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만, 그녀처럼 어리석은 사랑을 하고 싶은 독자는 없을 거다. 한심함에 역시 혀를 차면서 쓴웃음 나온다. 작가는 대체 왜 이런, 어딘가 꼭 하자 있는 인물들을 소설의 주요 캐릭터로 삼았을까?
📑 빅토르 위고가 유행시킨 ‘그로테스크’ 기조의 핵심이 바로 이 부분이란다. 인간은 다면적인데 어떻게 바람직한 면만 보여줄 수 있겠느냐, 그게 인간을 진실로 표현한 것이겠느냐는 것.
그러면서도 콰지모도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비록 추하고 흉한 외모를 가졌지만, 소설의 그 누구보다도 에스메랄다를 그녀 자체로서 사랑한 인물이니까.
인간은 누구나 일그러진 구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그 일그러짐 안에서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다. 일그러짐이 숙명이라 해도, 그 숙명을 어떻게 승화시킬지는, 그 운명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으니.
🧚♀️🕊️🔔 “Vox populi, Vox dei(민중의 소리는 신의 목소리다).” - 서양의 격언
한편 소설에는 중세 사회를 대표하는 세 계급이 등장한다. 사제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 귀족 페뷔스 드 샤토페르, 평민 콰지모도.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논평하기도 한다. 에스메랄다를 의인화된 예술로 본다면, 세 계층을 대표하는 이들이 ‘예술’을 대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볼 수도 있다고.
사제는 예술을 사랑하되, 종교적 해석과 가치관에 갇혀 끊임없이 검열하는 입장이다. 때문에 예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귀족은 잠시 예술에 매료될지라도, 결국 왕의 명령, 곧 명예와 사회적인 체면에 더 신경을 쓸 것이다.
그러나 민중, 즉 평민은 다르다. 예술 없이는 차라리 죽을 정도로 진정 예술을 아낄 수 있다고. 진정 예술과 문화를 사랑할 수 있는 건 권력자 아닌, 오직 민중뿐이라고.
상당히 맞는 얘기라서 이 감상문에 적어둔다.
📑 시대마다 선호되는 예술이나 장르, 문화의 흐름은 제각각이겠지만, 그 예술과 문화를 즐기고 향유하는 건 소수의 지도층이나 계층이 아닌 우리들 대중이다. 진중하지 않고 전문적이지 않고 고급스럽지 않은 문화를 흔히 B급 문화라고 칭하곤 한다. 참으로 오만한 표현이다. 다수가 향유하고 선호하는 것에 누가 감히 B급이라 폄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위의 격언을 가져왔다. 민중의 소리는 곧 신의 음성이라고.
빅토르 위고의 소설 제목은 《파리의 노트르담(노트르담 드 파리)》이지만, 실상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민중이다. 성당은 무대가 되었을 뿐이다.
대중에게 외면받는 종교, 예술, 그리고 조롱받는 사법까지 작가는 이런 모습을 통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민중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변화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노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
개인적으로 저기, 높으신 양반임네 하는 국회의원 작자들도 민중의 소리에 귀 좀 열었으면 싶다. 곧 선거철인데 꼭 그때만 귀지 파고 귀 기울이는 척만 하고 말더라.
🎵 “달, 희미해지는 너는 / 듣고 있는가, 지금 / 울려퍼지는 그 절규를”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2막 ‘달’ by 그랭구아르
이 감상문은 다음주에 함께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러 가는 우리 아버지를 위해 작성되었다. 기억에 익히라고 뮤지컬 노래 가사도 몇 곡 발췌해 첨부했다.
유튜브 등 영상을 찾아보면 노래를 들어볼 수도 있을 테지만, 공연을 직관할 것이기에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과연 이번 뮤지컬도 작년 12월에 직관한 뮤지컬 ‘레 미제라블’만큼의 만족감을 내게 안겨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