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에서 벗어나야 통을 굴릴 수 있다.
관념이란 허공과 같은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관념에 걸리기도 하고 사로잡히기도 한다.
허공에 걸려 넘어졌다거나 허공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면
모두들 웃을 일이나 실제로 그러한 일이 수도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자기 마음으로 막을 지어 놓고 그 막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는 막도 없고 걸려 넘어질 문지방도 없는 것인데
스스로 막을 짓고 문지방을 지어 놓고 있다.
누가 고정시킬래야 고정시킬 수 있는 게 본래로 없는데도
사람들은 마음으로써 대상을 고정된 것으로 인식해 놓고는
공연히 거기에 붙잡혀 있다.
통에서 벗어나야 통을 굴릴 수가 있다.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통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아 통을 굴릴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에서 훌쩍 벗어나 보면
그동안 애지중지 해오던 나의 생각, 나의 법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도 알게 된다.
마음이란 체가 없기에 우주로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니
넓고 지혜롭게 생각한다면 통에서도 벗어나고
굴레에서도 벗어나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벗어나지 못하고 어떻게 굴릴 수 있겠는가.
고정되게 붙들고 있는 관념을 부숴 버려라.
내가 죄를 졌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하는 따위의 관념을 다 버려라.
그것을 붙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벽인 것이다.
놓는다는 것은 번뇌뿐 아니라 ‘생각으로 짓는 모든 관념을 타파하라’는 뜻이다.
너니 나니, 높으니 낮으니 하는 관념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 자기가 지어 놓은 것들인데
그런 관념을 들고 있어서는 도무지 주인공과 계합할 수가 없다.
모르면 안으로 굴려 다시 놓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량적으로 이렇게 확답을 짓고
저렇게 결정을 내려 버리는 경향이 짙다.
그러한 버릇이 없어져야 한다.
모름지기 안으로 놓고 또 놓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무거운 짐을, 갈수록 더 짊어져 가면서 오른다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겠는가.
그와 같아서 ‘올라갈 때는 다 놓고 올라가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직 몰라서, 나는 아직 그만한 능력이 없어서,
내게는 어려워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라는 애착을 떨쳐 버려야 놓고 가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짐을 벗어 놓고 편히 쉬라.’ 하듯이
주인공에게 몽땅 놓아 버리면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받는
그 창살 없는 감옥에서 절로 풀려난다.
나뭇잎이 나오는 대로 그것을 따 버리고,
나뭇가지를 자꾸 잘라 낸다면 결국 나무는 시들어 죽게 되겠지만,
더러는 뿌리가 살아서 새싹이 나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뿌리까지 뽑아버린다면 그 나무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나’라는 자체, ‘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 다 공했으니 놓는 자리가 그 자리다.
머리로 공한 줄 알고 놓는다 하지만
앞설 것이 뒤서고 뒤설 것이 앞서니까
공한 줄 알면서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무지하여 무조건 들어가는 경우가 낫다.
생각나기 이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생각나기 이전은 생각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량심을 버리고
일체 경계를 다 본래 자리로 맡겨 놓으라는 것이다.
낳기 전에 이름 붙이는 것을 보았는가. 낳기 전으로 돌아가라.
낳기 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데
거기에 이름 붙을 사이가 있겠는가.
6식이 이렇다더다, 7식이 이렇다더라 하고 따지려 하면
그런 데 끄달려서 끝내 볼일을 못 볼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말 저런 말, 이런 이름 저런 이름 쑥 빼고
일체를 주인공이 내고 들인다 하며 바로 놓고 들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내고 들이고 하는 게 바로 인연법이니
그냥 일직선으로 쏜살같이 인연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왜 이다지도 망상이 많을까?
나는 왜 공부가 늦나?
나는 왜 참선하는 열의가 부족할까?
나는 왜 놓는 것이 잘 안되는가?
그런 모든 걱정, 겸손한 마음까지도 다 쉬어라.
그냥 믿고 놓으면 잘 가게 되는 것을
공연히 생각을 지어서 걱정하고 조바심하고 용기를 잃고 하니까
오히려 갈 수 없게 된다.
공부가 안된다고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생각도 놓고
편안히 자연스럽게 가라.
다리 많은 지네가 잘 가다가 문득 제 꼴을 보고는
‘아니, 다리가 이렇게 많은데도 어떻게 해서
서로 엉키지도 않고 잘 갈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다리가 서로 엉켜서 갈 수 없다고 한다.
“환으로 보아라.”하는 것도 실은 걸리는 것이다.
본래로 환인 것이니 환으로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놓아라.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