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 후원의 소영주(小瀛州) 괴석에 낙관(落款)과 소안원(蕭雁園)
일과를 마친 후 하루는 창덕궁 식구들과 원서동 부대찌개 집에서 저녁을 같이했다. 일전에 관람객 한 분(중국에서 공부했다는 분)이 낙선재 후원의 괴석에 각자된 글귀에 대해 질문이 있어 얘기 중 화재가 모아졌고 동료 한 분이 마침내 그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는 것이다.
얘기인 즉, 두실거사(斗室居士)는 “심상규(沈象奎)의 호”이고 호는 “정조가 하사”했으며 소안원은 “심상규(沈象奎)의 송현동 정원석”이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뻤던지 하루의 피로가 일거에 풀렸다.
사실 그동안은 질문을 하면 모르는게 당연하고 자랑이라도 하듯 “모른다”, “모르겠다”로 일관했다.
이 글의 소재는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 후원(後苑, 정원) 화계(花階, 계단식 정원) 앞에 소영주(小瀛洲, 작은 영주, 영생불사하는 신선들이 거주하며 불사약이 자란다는 전설상의 공간, 작은 신선계) 석분함(石分函, 괴석대(怪石臺)) 위에 괴석(怪石, 괴이할괴, 돌석, 괴상하게 생긴 돌 즉)이 놓여 있는데 괴석의 앞 면에 새겨져 있는 낙관과 후면에 각자된 석자의 한자 해독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한자에 문외한이고 게으름 탓으로 미상(未詳)으로 오랫동안 남아있던 것을 작년 연말에 고궁박물관 학술지에 S대 강사 분이 “소영주(小瀛州) 괴석(怪石)과 심상규(沈象奎)의 소안원(蕭雁園)”이란 논문이 등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논문의 목적은 소영주(小瀛州) 괴석에 전면의 낙관과 후면에 새겨진 각자(刻字,새겨진)를 해독하는 논문이다.
그동안 사료를 토대로 밝혀진 내용을 차례로 알아보겠다.
먼저 소영주(小瀛州)와 도교의 삼신산(三神山)에 대한 의문이다.
삼신산(三神山)은 중국 전국시대(약 BC 400년경 도가 사상가 열자(列子)”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 수억만리 떨어져 있으며 그 높이는 각각 3만 리,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이 늘어서 있고, 나무에는 옥으로 된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그곳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먹으면 사람들이 불로장생하며 모두 선인(仙人)들로서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한다(국가유산청).
소영주(小瀛洲)는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 금강산), 방장(方丈, 지리산), 영주(瀛洲, 한라산)산 중 하나로 영주산을 낙선재 후원에 옮겨 놓고 “작은 신선계” “신선이 사는 곳”,“선경”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 소영주 위에 괴석/두보의 시 운비옥립과 낙관 두실거사/양은석
둘째, 雲飛玉立(운비옥립)이다.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 ~ 770년, 호 소릉(少陵), 허난성 궁현)의 雲飛玉立”은 흰 매와 검은 매를 소재로 지은 두수 중 첫 번째 수 맨 앞 雲飛玉立盡淸秋(운비옥립진정추, 맑은 가을 다하도록 구름이 나는 듯하고 옥이 서 있는 듯하다) 不惜奇毛恣遠遊(부석기모홀원유, 기이한 아끼지 아니하고 멀리와 노님을 마음 껏 하다)란 싯구에서 인용한 글이다.
운비옥립진정추(雲飛玉立盡淸秋)는 두보(杜甫)가 자유에 대한 향수와 두려움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 시로 두보(杜甫)는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 ~ 762,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과 함께 중국의 최고 시인이다.
셋째 낙관(落款) 두실거사(斗室居士 말두 집실, 거주할(살) 거, 선비사)이다.
낙관(落款)의 두실거사(斗室居士)는 정조(이산, 1776,3,10 ~1800,06,28)가 당호(심상규 집)로 심상규(沈象奎)에게 하사한 “호”이다.
두실(斗室)은 작은 집(방)을 뜻하고 심상규(1666 ~ 1838, 본관 청송)는 경화사족(京華士族, 서울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특권을 향유하던 계층, 서울의 양반. 예) 안동 김씨 김조순, 풍양 조씨 조만영, 청송 심씨 심상규 등)으로 순조, 헌종(1834 ~ 1835, 06) 연간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조선중기의 문인이자 대문장가이며 4만여 권의 대장서가(서재 가성각(嘉聲閣)이다. 정치적으론 세도정치가 안동 김씨 김조순과 절친이고 노론 시파이며 현재 종로구 삼청동(구 송현동)에서 살았다.
넷째 후면에 각자(刻字)된 소안원(蕭雁園)이다.
저자는 소안원(蕭雁園, 쓸쓸할소, 기러기안, 동산원)은 심상규(沈象奎)의 송현동(현 삼청동. 경복궁 동쪽) 집 정원석으로 소안원(蕭雁園)의 출전은 당나라 중기 유우석(劉禹錫, 772 ~ 842, 유종원 백거이와 절친 )의 추풍인(秋風引, 가을바람의 노래)에서 인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심상규 저서 두실존고(斗室存稿)에서 찾을 수 있다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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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劉禹錫(유우석)의 오언절구 秋風引(가을바람의 노래) *
何處秋風至 하처추풍지(어디서 가을바람 불어와)
蕭蕭送雁群 소소송안군(쓸쓸히 기러기 떼 보내노라)
朝來入庭樹 조래입정수(아침에 뜰의 나무를 흔드는 바람)
孤客最先聞 고객최선문(외로운 나그네가 가장 먼저 그 소리를 들었지)
또한 심상규(沈象奎)의 소안원(蕭雁園) 정원석이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 후원(後苑)으로 移設(옮겨 설치시점)의 궁금증을 1901년 체코인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1860∼1932, 한국 방문인)의 '소영주小瀛洲) 괴석(怪石)으로 추정(推定)되는 기록 사진에서 찾고 있다.
* 참고 : 진민희, 2023, 창덕궁 소영주(小瀛州) 괴석(怪石)과 심상규(沈象奎)의 소안원(蕭雁園), 국립고궁박물관, 고궁문화
* 글과 사진 : 양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