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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그렇 듯, 봇짐 메고 서둘러 떠나는 발길에 흥분이 묻어있다.
몇 번을 벼르고 별러서 떠나는 길이지만 성주사지란 생각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먼저 알아채고 그곳의 그림으로 행복해져 온다.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먼 길이라 늘 마음만 품고 있었지만, 그러다 삼년 전인가? 가까운 벗님들과 우연한 기회에 들려서 감동 한 아름 받고, 그 처연한 가슴을 다독일 길 없어 보령 바닷가에 앉아 싱싱한 조개구이에 소주잔 기울이며 낙조를 바라보던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번엔 작정을 하고 떠나는 발길이라 벌써부터 채워둘 공간을 마련하고자 길을 떠난다.
기실 답사도 답사려니와 인연이란 묘한 감정에 휩싸여 들떠있는 나를 보았다.
깊은 내공으로 철학적 사고의 내면을 들추며, 간간히 정의로움을 굳이 감추지 않고 당당한 선생님 한 분을 만난다는 사실이 설레임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도시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보령으로 귀농하여 양송이를 재배를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인터넷에서 만난 벗님을 만나러 떠나는 길이다.
사람이란 만나기 전 늘 자신의 상상 속에 그림을 그려두기 마련이다.
내가 쭈욱 생각해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만 훌쩍 큰 키에 뒤로 묶은 희껏 한 머리, 카랑카랑 한 음성에 정겨움이 팍팍 묻어있다.
죄송스럽게 바쁜 농사철에도 나를 안내하여 성주사지로 달려간다.
한 때 꾀나 번창했을 탄광촌이라 탄광박물관을 지나 우리나라 벼루 중에 최고로 쳐 준다는 남포오석의 석재들이 주위 산 곳곳에 그 흔적을 담고 있으며, 더불어 하늘은 어둡고 바람에 습기가 묻어난걸 보니 아마도 비가 내려줄 것만 같았다.
왼편에 너른 터를 두고 앞으로는 작은 개천이 흐르며 유연한 구릉을 가진 안산(安山)이 편안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금 남아있는 구산선문 중 강릉 굴산사의 사굴산문과 창원 봉림사의 봉림산문, 해주 광조사의 수미산문과 더불어 폐사가 된 네 개의 산문중 하나인 성주사는 백제 때 오합사(烏合寺)란 이름으로 전해져 오다 통일신라시대에 성주사로 명명된 성주산문이 이곳이다.
잦은 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해 지자 백제 법왕이 왕자시절 그 민심을 달래고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랜다는 명목 하에 지어진 사찰이 오합사라고 한다.
그러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태종무열왕의 8세손의 무염국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곳 지방호족세력인 김양(金陽)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왕권강화만을 위한 귀족불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이념인 수행으로 득도를 하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을 이곳에서 펴게 된다.
무염국사는 진골의 신분에서 아버지 대에 이르러 육두품으로 강등되어 이미 제도권에서 멀리 밀려버린 신분이었으니 지방호족 세력과 궁합이 착착 들어맞게 된 것이기도 하다.
무염국사가 성인으로 추앙받자 이곳을 성주사로 명명하게 되니 한 때 그를 따르는 문도들이 수천을 이루었다 하며, 불전 80여칸 을 비롯하여 일 천여 칸에 이르렀다 하니 그 명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이어오다 이 성주사 또한 임진왜란의 화마를 피하지 못한 채 파괴되어 폐사가 되고 말았다. 다만 주위에 널려있는 석재들만이 그 흔적만을 간직한 채 함구하고 있다.
넓은 터를 오르자 평평한 평지 뒤로 성주산 자락이 낮게 깔려있다.
이곳 성주사지는 가람배치가 정적이며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하다.
앞으로 우뚝 솟아있는 석탑들과 금당터와 그 뒤로 작은 전각 하나가 쓸쓸한 역사의 뒤안길에 들어선 지금의 성주사지를 대변하며 서 있고, 그곳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처연한 가슴으로 낮게 깔린 하늘처럼 어두워져 있다.
거칠 것 없이 하늘을 지탱하듯 우뚝 솟아있는 오층석탑이 눈길을 가로막고 그 앞으로 석탑에 비해 너무나 작은 석등이 어우러져 금당터로 향하는 발길을 잡는다.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오층석탑이 한 때의 기상을 말해주듯 우뚝 솟은 위용이 당당하며 한 치의 흐트럼도 없이 하늘을 향한 상승감과 함께 단정한 모습이다.
4단으로 된 지붕돌의 층급받침 또한 점점 가늘어 지며, 몸돌과 지붕돌 하나하나가 점점 작게 축소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듯 잘 정리정돈 된 모습이며, 지붕돌의 끝마무리의 반전이 날카롭고 경쾌하여 하늘로 치솟는 느낌을 부채질 한다.
두 단의 기단위에 몸돌이 올려 있으나 일층 몸돌과 상기단의 덥개석 사이에 떡판처럼 굄석이 하나 더 끼워져 있다.
이것은 고려석탑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나 석탑의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선 신라하대에 세워진 석탑이니 아마도 고려석탑 양식의 시초가 되는 석탑이라 생각하여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된다.
기단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고, 몸돌에는 각진 모서리 부분에 우주만 돋아있다. 그리고 상륜부 부재는 노반만 남아있어 없어진 상륜부의 부재들을 상상해 보면 하늘을 찌르는 상승감에 더욱 멋있었으리라!
회색의 어스름에 흐릿한 석탑의 양감이 두드러지지 않으니, 이것이 흐린 날 석탑을 바라보는 매력이요, 하늘의 색상과 닮아 있으니 이 또한 화면 가득 채워져 있는 동질성의 그레이 바란스로 한결 분위기를 돋우기에 충분하다.
더불어 그 앞에 외소하며 아담한 석등이 양념처럼 놓여있으니 허전함이 덜하지만 높이 6미터가 훌쩍 넘는 석탑 앞에 서 있기에는 어딘가 어색해 보이나 그 석등 또한 2미터가 훌쩍 넘는 것이니 역시 어디에 어떻게 누구랑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그 이미지 역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르게 보여 질 수 있다는 것에 피식 웃음을 흘린다.
오층석탑을 뒤로하면 일직선상에 금당터가 커다란 석축위에 올려 져 있다. 아마도 금당터의 크기나 석탑의 위용으로 보아선 대단한 전각이었음이 틀림없지만 지금은 깨어진 연꽃좌대만 남아 삐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놓여있으니 바라보는 장똘뱅이의 마음 한켠에서 갈라진 틈새에 삶에 찌든 비굴한 미소가 배여나 온다.
연꽃잎 모양의 복련 조각이 문드러져 누군가 갈아낸 듯 마모가 심하나 그 크기로 보아선 그 위에 놓여있던 철불(鐵佛)의 모습이 경북 영천의 어느 시골마을 작은 전각을 무심코 열었을 때 눈앞에 화들짝 다가오던 철불의 눈매가 자꾸만 겹쳐져 떠오르며 당당했을 그때를 상상한다.
동행했던 님 께선 이 몸의 몸놀림이 지루했던 것인지 멀리 홀로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빈터의 또 다른 석재를 마주하며 있고, 갑자기 내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금당터 뒤를 내려와 낮은 토단의 강당터를 앞에 두고, 적당한 간격에 일 열로 나란히 반기는 세 개의 석탑을 본다.
고만고만한 세쌍둥이 삼층석탑이라 일 금당 일 탑, 일 금당 쌍 탑의 신라의 흐름을 이해한다면 세 개의 탑이 나란히 있는 것을 처음 접해보는 터라 신기하며 재미있고, 조성당시의 어떤 의지와 그 뜻을 헤아려 보지만 아둔한 나로서는 그저 단정한 모습들에 착한 범생이를 보는 느낌이니 천년을 내려온 그 단아함에 가슴만 뛸 뿐이다.
세 탑 모두가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을 한 모습이나 이 또한 금당터 앞의 오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일층 몸돌 아래 두터운 굄돌을 하나 더 끼워 넣음으로 고려석탑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일 층 몸돌 남쪽에 문비를 새겨 넣음으로써 더욱 세련되고 튼실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서로 문비의 모양은 틀리나 가운데 어떤 것은 둥근 석주를 조각해 놓았고, 귀면 손잡이를 조각해 놓아 더욱 견고한 문이라는 것과 세세하며 디테일 한 부분까지 정성을 다한 감흥을 받는다.
일층 몸돌이 훌쩍 커 단아하지만 상승감이 있고, 지붕돌의 맵시는 조금씩 틀리나 반전과 낙수면의 각이 비슷해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앞의 금당터와 지금의 삼층석탑 세 기가 있는 위치를 보면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홀로 상상속의 건물을 올려 보지만 어쩌면 좁은 공간에 답답해하거나 오밀조밀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전히 나는 생각의 한계가 너무나 뚜렷해서 편견도 심하고 편율 된 시각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깨닫고 만다.
미련에 사열하듯 도열해 있는 석탑을 “우로 봣!” 하며 한 바퀴를 돌고 뭬비우스의 띠처럼 그렇게 몇 번을 돌았다. 올려다보고 옆에서 보고 뒤의 강당 터에서 내려다보며 앞의 산세와 흐린 하늘과 그 속에 묻어있는 석탑들과 내가 한 몸이 되어 지나간 역사의 고된 흔적을 보았다.
폐사지는 황량한 바람만 불어오는 것이 아니다.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곳이며, 바람도 가끔 쉬어가기를 자처하며, 하늘에 구름도 잠시 머물다 공간을 허비하는 곳이기도 하다.
더불어 완전치 못함으로써 완전하며, 공허함 속에 꽉 들어찬 꺼리들이 있다.
무엇보다 그 속에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지나간 옛이야기를 들려주기에 고요한 수다가 있다.
동행님이 기다리는 전각으로 발길을 향했다. 날은 어두워 방금이라도 빗님이 내릴 것 같고, 어두컴컴한 전각 속에 흰 백색의 용머리 귀부가 날카로운 정으로 찍어낸 듯 갈라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용머리 옆 대각선으로 갈라진 그것을 빼고 나면 대단한 수작임이 틀림이 없다. 툭 불거진 눈망울과 머리에 돋아있는 외뿔과 힘 있게 벌린 입매무세가 대단한 정성을 쏟은 것으로 보여 진다.
비신은 어두운 날씨에 이곳에서 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더욱 알아보기 어려우나 자료에 의하면 신라의 명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동생 최인곤이 글씨를 썻다 고 한다.
비머리 이수는 전각 속에 묻혀있는 것처럼 좀체 그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고 있다. 다만 흐릿한 눈으로 연꽃위에 구름속의 두 마리의 용이 서로마주보며 노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은 공간에도 그냥 지나침이 없으니 원주 거돈사지의 부도비 처럼 등에는 육각의 무늬가 선명하며 비를 받치고 있는 비좌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안상 속에 또다시 꽃과 구름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이것이 낭혜화상 부도비이다. 그러나 정작 부도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하니 남아있는 부도비의 화려함 만으로 무염국사 낭혜화상의 그 높은 뜻을 미루어 짐작 할 뿐이다.(국보 제8호)
점점 하늘은 어두워지고, 그 어두움에 묻어 발하는 석불입상을 본다.
참으로 기막힌 인상이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서 그 느낌이 마음대로이니 이처럼 편 할까? 싶었지만 천만의 말씀,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방금이라도 웃음이 배여 나올 듯 하지만 음울한 인상 속에 막 울음을 터트리기 전의 모습이기도 하며, 바라보는 나를 비웃고 있는 듯, 속에 감춘 내면의 세상을 꾀 뚫고 있다는 자신 있는 모습이기도 하고, 불쌍한 얼굴을 하고서 동정을 한껏 바라는 어릿광대의 모습이기도 하며, 한을 가득 품고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황토색의 짙은 고단함도 보여준다.
어쩌면 비굴하게 또 한편으론 불쌍하게, 어둡고 고단함을 업보처럼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민초들의 대표적 모습일 수 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변하여 내 마음의 업장을 소멸시켜주는 미륵불이니 우리 민초들의 열망이 담겨 의도적이든 우연의 일치이든 이런 모습이 된 것일게다!
절터의 동쪽 한 구석에 처연히 서 있는 석불입상이다. 하반신 일부가 땅속에 박혀있고, 얼굴이 누구의 손에 깨어진 것을 또 누구의 손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물론 시멘트 땜질에 의한 것이지만 그로써 더 많은 이야기가 이곳 성주사지에 담겨있을게다.
아마도 이곳 폐사지의 굳은 일을 도맡아 하며 언제고 화려한 미래를 꿈꾸는, 없어서는 안 될 악세서리 같은 성주사지를 대변하는 석재가 아닌가? 덧붙이자면 석불이 있음으로써 성주사지에 꺼리가 있고 대화가 있고, 꿈이 있을 법 하다.
순 내 이기적인 심정으로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늘 그렇듯 더 깊은 내공을 갈고 닦아 청아한 마음으로 다시 찾아 올 때를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접는다.
동행한 님께서 아마도 마음이 바쁘신 가보다. 멀리서 나 이외의 또 다른 손님이 찾아 기다리는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통성명을 하고 소낙비 내리는 길을 뚫고 서산 바닷가 활어시장에서 횟꺼리와 매운탕 꺼리를 장만해 바닷길을 돌아 님의 집으로 찾아 들었다.
가는 길 내내 영화에서처럼 번갯불이 갈라지는 모습을 감상(?)하며 먹장구름 속으로 가는 내내 흥분이 묻어있음을 느꼈다.
십년지기나 된 듯 역시 그날의 밤을 지새우며 정겨운 대화 속으로 점점 함몰되어 갔다.
숲속의 풀벌레 소리와 더불어 보령의 명주 소곡주와 함께......
어줍잖게 스케치 해 보았습니다.
손꾸락 굳을까 워밍업 겹, 심심풀이 장난이오니 욕들 마시길~~
첫댓글 와~~~ 그림 잘 그리시는 분들은 언제 뵈도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글과 그림 잘 보고 갑니다... 하하하
초시님 글에 정겨운 단어들이 많이 나오네요 ^*^ 보령댐. 석탄박물관.소곡주.... 청지기의 본가가 그쪽 지방이라서 휴가때 내려 가면서 홍원항 들려서 짭쪼름한 바닷내음 맡고 부모님 모시고 보령댐 근처에 가서 식사하고 볼거리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풀벌레소리 벗아 동행한님과의 정겨운 일상들이 부럽습니다
깨어진 석불입상이 더 안따까워 발길 돌리는 내 내 잊혀지지않던 기억이 있던곳. 그림 조~~타
와 너무 이쁩니다... 사진과는 달리 특별한 맛이 느껴지네요.. 잘 봤습니다 ^^
글과 그림, 백뮤직까지 아주 잘 어울리네요.스크랩 합니다.감사합니다.
고요한 수다라...참 좋아요 ㅎㅎ
제가 처녀적에 잘 부르던 노래 돌아 오라 쏘렌토로~~음악에 취해 긴 글 언제 읽어 내려 갔는지...정말 섬세하고 그 탑의 모양새나 석불의 모양새가 그려지는 글...너무 좋았습니다.박초시님 스케치 오랫만에 대하니 넘 좋습니다...폐사지에는 황량한 벌판만 있는게 아니라 수 많은 이야기가... 수다가 있다는 말씀 공감~
고요하게 깔리는 쏘렌토로와 흑백스케치 ... 고요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 왔습니다.
멋진 남자......초시님.^*^진즉 만났어야 하는데...ㅎㅎ^*^
멋진 남자.....초시님..진즉 만났어야는데.(2)
참새야..이 언냐한티 양보해라
택두읍쓰~~~~~~~~~~~~~~~~~~~~~~~~~~ 나두 외로브요.
언니..동숭...난리치더니...이제 드뎌 戀敵으로까지.... 아흑
저희는 12일에 다녀왔는데 .... 언제 가신거예요? 만나뵐 뻔 했네요....
성주사지 이번 서천 갔다 오는 길에 들려볼까 했던 곳인데 초시님의 글과 그림으로 보니 직접 간 것 보다 더 좋네요. 그림 잘 그리는 사람하고 노래 잘 하는 사람을 제일 부러워 하는데 초시님이 모든 것을 다 갖췄으니 과히 삼절이라 할 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