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배려하는 마음
마성스님(동국대 강사)
많은 사람들은 남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른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대부분 자기밖에 모른다. 이를테면 함께 시청하고 있는 TV의 채널을 마음대로 돌리는 것, 여닫이문을 닫을 때 뒷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것, 주차장에 그어 놓은 차선을 무시하고 차를 세워 다른 차를 세울 수 없도록 하는 것, 밤늦게 샤워하거나 세탁기를 돌려 다른 사람의 안면을 방해하는 것, 출입문을 조심스럽게 닫지 않고 꽝하게 닫아 다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러한 것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시정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대중생활에서는 언제나 주위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혹시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야 원만한 대중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남을 먼저 배려할 때 우리의 주변은 훈훈한 정이 넘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늘 생각해야 한다. 우울해 보이면 무엇 때문에 그런지 물어보고, 몸이 불편하다면 자신의 능력껏 도와주어야 한다. 그 사람의 생활에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러한 조그마한 배려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나는 우리절의 신도와 가능한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한다. 개별적으로 가까이하게 되면 친소(親疎)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즉 친한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 혹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게 된다.
이러한 친소가 나중에는 말썽의 소지가 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러한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이름은 물론 직업과 재산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면 분별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저 만나면 인사하고 헤어지면 그뿐이다. 그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신도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모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이 부질없는 것이다.
한때 석가족의 마하나마가 붓다와 석가족 출신 비구들이 안거를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마하나마가 붓다께 여쭈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때 붓다는 마하나마에게 붓다와 친한 비구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늘 재가자로서 닦아야 할 다섯 가지 조건과 여섯 가지 공덕을 닦는다면 늘 함께 하는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붓다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즉 사무량심(四無量心)이란 자(慈)․비(悲)․희(喜)․사(捨)를 말한다. 자(慈)는 사랑과 우애의 마음이고, 비(悲)는 연민의 마음이며, 희(喜)는 남의 성취나 행복을 자기의 것처럼 기뻐하는 마음이고, 사(捨)는 안팎의 경계에 끌리지 않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되 욕심에 빠지지 않고, 연민하되 걱정에 빠지지 않고, 기뻐하되 홍소(哄笑;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 혹은 떠들썩하게 웃어 댐)에 빠지지 않는 중정(中正)한 마음을 일컫는다.
한편 사섭법이란 중생을 상호 결합시키는 조건이란 뜻이다. 즉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가 그것이다. 먼저 보시(布施)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남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물질적으로 베푸는 것[財施], 정신적으로 베푸는 것[法施],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無畏施] 등이 그것이다. 시여(施與)를 하되 법(法)에 맞게 하며, 준다는 생각도 떠나서 베푸는 것이 진정한 보시의 의미이다.
애어(愛語)란 따뜻하고 사랑스런 말로써 서로 대화하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는 언어의 공동체라는 지적처럼 인간관계에서 언어의 기능은 매우 큰 비중을 갖는다. 사실상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언어는 사회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는다. 여기서 말하는 애어란 남에게 기쁨을 주는 말[可喜語], 조리에 맞는 말[可味語], 환한 얼굴로 하는 말[和顔語] 등을 말한다. 이러한 애어의 반대말은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비난하는 말이다. 이러한 말은 자신을 망치게 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다.
이행(利行)이란 자신을 뒤로하고 남을 먼저 이롭게 하는 이타적(利他的)인 행위를 일컫는다. 요즘 표현을 빌리면 공익(公益)을 도모하는 것, 또는 사회봉사의 개념이 이에 포함된다. 자신의 삶을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보살이다. 우리 사회는 점차 자기 위주의 개인주의로 흐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이행의 정신이 요구된다.
동사(同事)란 남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한다. 즉 스스로를 단체에 동화(同化)시키는 능동적인 행동을 말한다. 그런데 남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의 장점을 보기보다 언제나 그 사람의 결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단체에 들어가도 언제나 말썽을 일으킨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전자의 사무량심은 자신의 거룩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자리적(自利的) 수행도(修行道)라고 할 수 있고, 후자의 사섭법은 원만한 사회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타적(利他的) 실천행(實踐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사섭법은 한마디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보시․애어․이행․동사의 행동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우리절의 어느 보살님은 법당에 들어올 때, 언제나 흩어진 신발을 가지런하게 정돈해 두고 들어온다. 그리고 스님의 신발을 나갈 때 신기 편하도록 돌려놓는다. 나는 신발을 신을 때마다 보살님의 작은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다. 작은 배려는 큰 감동을 가져다준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보살행은 시작된다.
출처 : 불교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