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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은 1810년 부인 홍혜완이 보낸 낡은 치마에 인생의 교훈을 담긴 글을 정성껏 쓴 뒤 서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냈다. 부인과 자식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담긴 서첩 이름은 ‘하피첩’. 하피란 노을 빛깔의 붉은색 치마라는 뜻으로 사대부 여인들이 입었던 예복이다.
하지만 문헌엔 있지만‘하피첩’을 본 사람은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졌다. 그 후 하피첩이 발견된 것은 2004년이었다. 당시 경기도 수원에서 한 남자가 우연히 자신의 건물 앞을 지나가던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범상치 않은 고서적을 발견했다. 그는 모아둔 종이박스를 가져와 할머니 손수레에 실린 고서적과 맞바꾸었다.
고서적의 실체를 몰랐던 남자는 2년 뒤 KBS의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그램에 들고나갔다. 책을 살펴 본 감정위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고서적이 다산의 하피첩(霞?帖)이었기 때문이다. 감정가 1억 원이 매겨졌다.
한 감정위원은 "저는 이 프로에 출연해서 오늘이 가장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피첩은 2015년 4월 서울옥션 고서적 경매에서 7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낙찰자는 국립민속박물관. 문화재청은 하피첩을 보물 제1683-2호로 지정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원이 발간한 '유물과 마주하다 - 내가 만난 국보·보물'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한 할머니가 발견해 참기름병으로 쓴 골동품이 나중에 국보로 지정된 일화가 소개됐다.
경기도 팔당에 살던 할머니는 야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흰색 병을 발견했다. 할머니는 직접 짠 참기름을 주워온 병에 담아 상인에게 1원(현시세로 약 1만 2300원)을 받고 팔았다.
상인에게 병을 산 일본인 골동품상은 조선백자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다른 골동품상에게 이를 60원에 팔았고 이후 백자는 나까마(전문 브로커) 사이에 돌고 돌다가 1936년 경매에서 1만4580원에 낙찰됐다.
낙찰액은 당시 경성 한옥 15채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1997년 이 백자는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으로 이름이 붙여 진뒤 국보로 지정됐다.
아무리 소중한 문화유물이라도 그것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다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홀대받거나 어둠 속에 방치된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다. 조선시대 말에 직지를 눈여겨 본 사람은 프랑스인이었다. 초대 프랑스 공사를 지낸 '빅토로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해 1907년 프랑스로 가져갔다.
그가 1911년 드루오 고서 경매장에 내놓은 것을 당대의 부유한 보석상이자 고서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가 단돈 180프랑(지금 돈 65만원)에 낙찰 받았다.
이후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된 직지는 수십 년간 고서 더미속에 방치됐다. 그 도서관의 사서였던 故 박병선 박사가 도서관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직지심체요절' 복사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현존하는 세계 첫 금속활자본은 독일인 구덴베르크가 1450년 찍은 '45행 성서로 기록됐을 것이다. 박병선 박사의 예리한 문화적인 안목과 노고(勞苦)가 잠든 문화재를 깨웠다.
금속활자는 고려가 당대 초일류 미디어 강국임을 증명하고 한국인의 우수한 문화적인 DNA를 상징하는 발명품이다. 직지 ‘활자본’은 우여곡절 끝에 그 존재를 드러냈지만 ‘활자’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만약 실존한다면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 금속활자는 과연 어딘가에 방치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숨겨놓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