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추리꽃 연가 - 아내에게 / 백남오
7월이 되면 지리산 노고단 일대에는 주황색 원추리꽃 무리가 화려하게 수 놓는다. 계절에 따라 수많은 야생화가 무리 지어 피지만 원추리의 그 강직함과 담백함은 꽃 중의 꽃일 만큼 마음 설레게 한다.
원추리는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 해 살이 풀로 나리와 많이 닮았다. 어린순은 나물로 해 먹고 꽃은 요리에 사용되며 뿌리는 지혈 소염제로도 쓰인다.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데도 효능이 뛰어나다 하니 만병통치약이라 할만하다.
아내는 유달리 원추리꽃을 좋아한다. 아내만 있으면 만사형통인 나 역시 아내가 꼭 원추리꽃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기다리는 마음이란 꽃말처럼 나는 언제나 원추리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꽃이 피면 지리산으로 허위허위 꿈을 꾸듯 달려가곤 한다.
돌이켜보면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28세에 한 살 아래인 아내를 만나 40년 세월을 살았으니 희로애락을 모두 나눈 동반자다. 결혼당시 파티마병원 5년 차 수간호사였는데 하얀 가운과 캡이 잘 어울리는 백의의 처녀였다. 직장동료의 외사촌 누나로 인연은 시작되었다. 가녀린 체구지만 단호함과 카리스마가 묻어났다. 이 여인이야말로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을 끌어당겼다. 피해 갈 수가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살아갈수록 그것은 거대한 하느님의 뜻이라 믿게 되었다.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안정되었다. 길고 가난한 자취생활로 이어져 온 나에게는 그냥 횡재라는 생각만 들었다. 일방적으로 주어야만 하는 아내의 입장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아내는 북면의 대농에 교장선생님 댁 2남 4녀 중 차녀로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으니 가난하고 척박한 산골 출신인 나와는 근본적인 문화의 차이가 있었다. 때로는 이 문화적인 충돌을 피해갈 수가 없었지만 이성과 사랑의 힘으로 극복해 가려고 노력했다. 집안의 종부로서 대소사를 돌보고 조상님 4대 봉제사까지 불평 없이 챙겨온 가정사는 고맙기만 하다. 간장, 된장, 고추장, 김장까지도 아직은 남의 손을 빌려본 적이 없다.
결혼은 내 삶의 일대 변혁을 가져다주었다. 사실상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누리며 설 수 있게 된 출발점이었다. 하루 세끼 밥 먹고, 하루 한 번 샤워하고, 철철이 새 양복으로 갈아입고, 집안에는 TV와 에어컨, 김치냉장고,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이 가동되었다. 결혼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년시절에는 주변의 따뜻한 사랑은 차지했으나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산골에서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며 자라왔을 뿐이다. 중학생시절부터는 객지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며 항시 먹는 것과 입는 것에 연연했다.
결혼은 가톨릭과의 만남이기도 했다. 나는 불교에 샤머니즘적 요소가 결합 된 토속신앙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께서는 부처님께, 천지신명님께, 용왕님께, 산신님께 온갖 치성을 드린 결과로 나를 낳으셨다고 들었다. 그러니 나 역시 그런 확고한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었음은 당연하다. 그런 내가 결과적으로 가톨릭을 선택했다. 천주교는 어린 시절 위기가 닥치면 무심결에 찾았던 그 하느님이었다. 보편되고 공번된 교회였으며 무엇보다 아내가 믿는 종교였다. 그렇다고 아내는 내게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내의 기도가 참 좋았다. 기도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었고 평화로움을 누렸다. 삶에 지쳐 힘이 들 때 묵주를 돌리며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는 손길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의 힘을 믿었다. 기도하는 아내의 모습은 평화로운 천사의 환영으로 다가왔다. 이 순간, 가정이 무탈하고 이렇게 건강하고 자유롭게 다양한 문학활동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음은 아내의 기도 덕분이라 생각한다.
영세 후 가장 큰 감동은 꾸르실료와 ME다. 대부님의 추천으로 무심결에 받은 꾸르실료 교육은 영원히 잊지 못할 하느님의 선물이다. 꿈결 같은 아내의 새벽방문과 사랑의 편지, 살아온 날들을 성찰하며 흘린 눈물들,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ME(Marriage Encounter)는 결혼의 참다운 의미를 발견하고 가정과 사회를 쇄신하려는 부부일치 운동이다. 2박 3일이란 짧은 교육기간 이었지만 함께한 다섯 동기 부부와 20년 동안 부부간의 내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ME에서 내가 배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결심하는 것이다란 진실이다. 이 명구는 웬만한 시련 정도는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지리산과의 만남도 아내 덕분이다. 지리산행 7년 차인 아내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지리산으로 들었다. 함께 겨울 종주를 했고, 5월의 대성골을 오르며 가는 봄을 아쉬워했고, 영신대의 신령스러움에 숨을 죽였다. 심마니 능선을 타고 올라 묘향대에서의 거룩한 밤도 지새웠다. 일출봉의 일출과 반야봉의 낙조도 더불어 감동을 나누었다. 회갑 날에는 문인들과 세석고원의 촛대봉에서 살아온 날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나는 지리산으로 작가가 되었다. 아내는 내 문학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요 지지자다.
숨 가쁘게 살아온 세월 속에서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성인이 되었으며, 생각만 해도 설레는 손녀와 손자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누구나가 겪는 일상이고 보편적인 일이라 하지만 우리에게는 특별하고 애틋하다. 결혼 시작부터 맞벌이를 해야 하는 신산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너무 힘겹고 아리게 키워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신혼 초부터 남녀평등이란 현실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왔다는 말이 옳다. 뿌리 깊은 유교적 환경에서 자라온 나로서는 다소 적응이 어려웠지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역사를 써야 한다는 신념으로 현실에 적응해 갔다. 똑같이 힘들게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고 집에 왔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가정사를 책임져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만족하지는 않겠지만 내 나름대로 노력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미안한 점이 더 많다.
아내는 자기계발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직장인으로서의 사명감도 투철했다. 간호사로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쌓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호스피스 전문교육과정을 수료했고, 정신보건간호사 과정을 이수하여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자존감을 키워갔다. 30년 가까이 근무한 종합병원 간호부장직을 마치고 지금은 부산의 한 전문병원에서 현직으로 일하고 있다. 통 큰 베풂 때문인지 따르는 사람도 많다. 부산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때늦은 주말부부가 되었지만 서로 간 존재의 확인과 일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조금 불편 함 정도는 인내해 내고 있다.
부부란 소유가 아니라 동반자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정이란 한 울타리 안에서 살지만, 각자 전문 분야에서 일하며 서로 응원하고 꿈을 키워주는 사랑의 공동체라 믿는다. 부부가 일방적인 소유의 관계라면 그 먼 인생길을 함께 가기란 어려울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지리산 노고단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지천으로 핀 노란 원추리꽃을 배낭 속에 고이 챙겨 오려 한다. 아직도 다 못해서 애틋한 사랑, 기다리는 마음 변함없길 바라면서 아내에게 원추리꽃 한 송이 바치고 싶다.
첫댓글 "부부란 소유가 아니라 동반자 관계야야 한다. 아직도 다 못해서 애틋한 사랑." 정말로 여운이 남는 글입니다.
누구라도 한번쯤 부부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교수님 너무 멋집니다.
송진련 선생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화려하게 핀 꽃도 예뿌고. 선생님 못 뵌지도 오래되었네요.
문학기행 때나 볼 수 있겠네요.
부회장님요^^
오른쪽 무릎에 자신이 없어서 신청 안 했는데.....
그날 오후~~~서원곡이나...무학산 어디선가는 만날 수 있을 듯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