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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외부의 영향(Foreign Influences)
Chapter 31. "나는 아프리카와 황금의 환희를 말하노라"("I Speak of Africa and Golden Joys")
15세기 초 동 아프리카 해안에 이른 중국 함대는 기린을 북경으로 가져 갔다. 같은 시기 포르투갈이 서 아프리카 탐험에 나섰다. 포르투갈인들은 황금을 찾아서 나섰지만 노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1441년에서 1446년간 아이들을 포함한 거의 1,000명의 남 여 흑인들이 포르투갈로 실려 갔다.
16세기 중반에 이르기 까지 유럽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은 성경이나 고대 역사가들이 전해 오는 것들이 전부였다. 기원 후 1세기에 플리니우스가 쓴 "고대 문화와 세계의 경이에 대한 개요(Summary of the Antiquities and Wonders of the World)에는 아프리카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이 책은 1556년 다시 출간되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다양한 모양의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으로 가면 코와 콧구멍이 없지만 얼굴은 멀쩡한 사람들이 있다. 윗 입술이 없거나 혀가 없어서 손짓으로 소통한다.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곳으로 숨을 쉬고, 귀리 지푸라기로 물을 마신다…. 결혼을 하지 않고 모든 여자를 함께 공유하며, 머리가 없이 입과 눈이 가슴에 붙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의 선원이나 상인들 가운데 실제로 아프리카를 방문하고 기록을 남긴 사람들도 있다. 스페인 출생으로 모로코에 살던 레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사람은 1509년과 1513년 두 번에 걸쳐 아프리카를 방문하는데, 그 경험은 1550년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출간되고 이어서 여러나라 말로 번역 되었다: "비록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교역도 없지만 흑인들의 땅은 여러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다. 나는 직접 15개 왕국을 방문하였고, 그 밖에도 많은 왕국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같은 책의 팀북투 편에서는 "질서있고, 번창하였으며, 학문과 무역을 중시하는 문명사회"로 소개하고 있다. 또 영국 상선의 선장 토마스 윈햄이 1553년에 베닌왕국을 방문하고 2년 뒤 책을 내서 소개한다: "우리는 창이 없고 흙벽돌로 된 대단히 크고 긴 방에서 왕을 만났다… 왕은 포트투갈어로 말했는데, 어릴 때 배웠다고 했다. 왕은 우리들을 앞에 세워놓고 방문 목적을 물었다. 우리는 장사를 하기 위해 왔으며 그들이 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우리가 가져온 물건들과 교환을 원한다고 말했다."
1554년에는 존 록이 서 아프리카로 가서 "400 파운드(180kg)의 금과 후추 낟알 36통, 상아 250개"를 가져왔다. 또 그는 이빨까지 달린 온전한 코끼리 해골(100kg)을 가져 왔는데 이에 고무된 출판업자 리차드 이든은 록의 경험을 다소 과장해서 재미있게 만든 책을 출간했다. 그 책에는 코끼리의 생김새와 버릇과 "찬 코끼리 피를 좋아하는 용과의 연이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 출간된 책들에 의해서 아프리카에 대한 오래된 믿음들이 차차 새로운 사실들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단히 느리게 진행되어서 과거의 편견들은 여전히 남아서 20세기 말에 와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럽이 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앞서 아랍인은 물론 중국인들이 먼저 교역을 텄다. 아프리카의 여러 교역 거점에서 중국제 도자기들이 발굴되었으며 10세기에는 아프리카의 물건들이 중국으로 팔려 나갔다.
14세기 말, 명나라(1368-1644)는 동부 해안 지역에 대양 항해가 가능한 배 1,180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화(鄭和)는 10살 때 거세된 환관 출신의 장군인데 1405년에서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인도양 및 아프리카 동부지역을 순방하게 된다. 처음 출정에는 63척의 대형 선박과 255척의 여러 종류의 작은 배들에 총 27,800명이 포함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95명의 군지휘관, 543명의 장교, 868명의 행정요원, 180명의 의사와 그 밖에 외교관, 수행원, 종복 및 26,000명 이상의 병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1405년의 첫 원정에는 인도와 통상로를 개척하였고, 2차(1407)와 3차(1408-11)에는 인도양에서 중국의 입지를 굳혔다. 4차(1413-15)와 5차(1416-19)로 중국은 아라비아 및 홍해와 직접 통상을 열게 되고, 6차(1421-24)에는 동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명 왕실과 직접 외교관계를 갖게 된다. 명나라 내부에서 나온 이견 탓으로 7차는 1431년에야 이루어 지는데 아라비아와 동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며 관계를 다진다. 그러나 먼 지역에 대한 중국내의 관심이 줄어드는데, 이 때는 정화의 나이가 이미 60이 넘어서서 그가 인도의 카리컷에서 사망하면서 중국의 대양항해의 시대는 종식되었다.
당시 중국의 선박 건조와 항해 기술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또 동 아프리카 해안은 물론 서 아프리카 해안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어서 원했다면 서쪽까지 진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양 무역만으로도 충분히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고, 나중에 내부에서 고립주의를 택하면서 끝나게 된다.
1415년 10월 북경에서 일어난 일을 그린 중국의 그림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기린(giraffe)이 등장한다. 정호의 4번째 원정에 함께 따라온 말린디의 외교사절은 아라비아와 인도에서 가져온 여러가지 귀중품과 함께 중국 황제에게 기린을 선물한다. 북경의 내궁 문앞에서 환호와 함께 기린을 선물받은 황제는 대단히 만족하였다고 한다.
같은 시절 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의 엔리케왕자(나중의 항해왕 엔리케)가 북아프리카의 슈타를 정복한다. (Ceuta: *지브롤터 해협의 포르투갈 맞은 편에 있는 북 아프리카의 무역항. 현재는 스페인령으로 모로코와 분쟁을 빚고있는 지역이다).
1430년대에 북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엔리케왕자는 포르투갈 본토에 있는 사그레스의 세인트 빈센트 곶에 자리 잡았다. 소박한 옷에 술이나 여자를 멀리하는 검소한 생활을 하였지만, 그 곳에 최초로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불과 3세대 안에 유럽인들이 전세계로 진출하는 길을 열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의 지휘하에서 포르투갈은 선박건조와 항해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430년 대에 포르투갈인들이 서아프리카의 튀어나온 부분을 항해하고, 1492년에는 컬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1521년 스페인인이 세계 일주를 하게 된다.
먼 바다에서 길을 찾는 것은 1760년 크로노미터가 발명되기 전까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위도(남-북)는 정오에 수평선과 태양의 각도를 관측해서 50km 오차범위 내에서 알 수 있었지만 경도(동-서)는 경험에 따른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엔리케의 해상활동에 대한 관심은 슈타에 있을 때 상인들이 사하라 저쪽에 있는 팀북투에서 금을 가져온 이야기를 듣고 일깨워 졌다. 사하라를 가로지르는 대상들을 대체해서 해상을 통해 직접 금을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프리카 반대편으로 간 전설의 기독교왕 Prester John을 찾아서 이슬람의 세력권을 에워 쌀 구상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 이슬람은 모로코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세력권을 이루어서, 아시아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 전에도 유럽인들은 모로코 연안의 해안과 대서양의 카나리제도 및 마데이라 섬까지 진출해 있었다. 1291년 제노아의 두 형제가 아프리카 일주를 선언하고 지브롤터 해협 밖으로 항해해 나갔으나 그 이후 소식이 끊겼다. 1336년 제노아의 항해가 란짜로테 말로첼로는 카나리제도의 가장 북쪽에 있는 섬을 발견하는데 지금도 란짜로테섬으로 불리고 있다.
란짜로테섬과 인근의 푸에르테벤츄라섬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약 80km 떨어져 있다. 모짜렐로가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구안체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약 2천년 전부터 옮겨오기 시작해서 AD 1세기에 끝났다. 구안체족은 곡물, 콩류, 염소, 개, 양 등을 들여 왔다. 토기를 만들었지만 천이나 금속도구는 모르고 있었다. 마르첼로는 구안테족과 함께 살면서 가죽, 염료 등을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1341년 포르투갈왕 알폰소 4세가 카나리제도를 포르투갈 영토로 선언하고 노예포획을 위한 원정대를 보냈다. 그 후 1세기에 걸쳐 유럽 여러 나라에서 노예포획을 했다.
당시 유럽은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흑사병(1347-51)으로 1/3이상의 농업인구가 줄어든 탓에 노예수요가 커졌다. 특히 남부지역은 설탕농장을 위한 노동수요가 높았다. 십자군 시대에 무슬림에게서 설탕을 재배하고 가공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1123년에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인 티레(Tyre)에 첫 농장이 들어섰다. 지중해를 넘어 서쪽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유럽의 설탕수요는 멈추지 않고 증가하였으며 항상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계속해서 더 많은 노예가 필요하였다. 처음에는 흑해연안에서 잡혀온 무슬림과 슬라브족(노예라는 의미, "slaves") 포로들로 구성되었다. 1404년 포르투갈 왕이 제노아의 지오바니에게 알가르브에 사탕농장을 허가했을 즈음 카나리제도는 노예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구안체족은 저항했지만 노예사냥과 전쟁, 질병으로 란짜로테의 인구는 1402년 300명으로 줄어 들었고 15세기 초에는 마침내 멸절되었다.
카나리 제도와 인근 마데이라에 정착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유럽에서 사탕수수를 들여오고 카 나리제도와 인근 섬들에서 공급된 노예들을 이용해서 설탕을 생산하였다. 1455년 70톤을 생산해서 1456년 잉글랜드의 가게에 처음으로 설탕이 팔리기 시작했다. 1472년에 200톤이던 것이 1,610년 경에는 연간 1,600톤으로 늘어 났다. 소위 문명세계는 설탕에 탐닉하게 되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1433년 까지는 카나리제도 인근의 아프리카 연안에서 200km 떨어진 보하르곶 이남으로는 아무도 더 내려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유는 당시의 기록이 설명해 준다: "그 너머로는 사람도 살지 않고 살만한 곳도 없다. 리비아의 사막처럼 모래만 가득한데 물도 없고, 나무나 푸른 것이라고는 없다. 바다가 얕아서 해안에서 5km까지 겨우 한 길의 깊이인데 조류가 험해서 일단 보하르곶을 넘어갔던 배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항해왕 엔리케는 거듭해서 탐험대를 파견한다. 1433년 첫 탐험대는 보하도르곶을 지나서 내려갔지만 앞서 말한 두려움 때문에 중간에 포기한다. 대신에 탐험대는 카나리제도에서 약간의 노예를 잡고 돌아온다. 1435년 이어진 두번째 원정에서 보하도르에서 250km 내려간 지점에 상륙한 탐험대는 "인간과 낙타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돌아온다.
1436년 서아프리카의 주민들은 포르투갈의 의도를 알아 차리게 된다. 새로운 탐험대가 보하도르곶에서 400km까지 남하한 곳에 상륙하였다. 항해왕 엔리케는 이들 탐험대에 두마리의 말을 딸려 보내는데, 선장은 17세의 젊은 선원 두명을 선발해서 내륙으로 타고 가게 한다. 그들은 35km쯤 들어가서 "19명의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은 별다른 공격용이거나 방어용 무기는 없이 짧은 창을 가지고 있었다." "두 젊은이가 칼과 창을 빼들고 돌진하자 사람들은 바위뒤로 숨었고 한 밤이 되어 배로 돌아왔다."
1441년에는 밤중에 두군데 작은 마을을 습격했더니 "주민들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4명을 죽이고 10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이 공로로 젊은 선장 곤사베우스는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포로들 가운데 특히 행실이 점잖은 자가 있어서 포르투갈어를 익히게 되고, "자신을 방면해 주면 5-6명의 노예를 보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비슷한 제안을 한 다른 두 명과 함께 방면된다. 8일 뒤 흰 낙타를 타고 온 한 원주민이 다음날 약속한 물품을 전달하겠다고 전하고 돌아 갔다. 이들은 약속대로 10명의 노예와 소가죽 방패와 타조알 외에도 약간의 사금을 몸값으로 전했다. 나중에 타조알을 먹고 항해왕 엔리케는 "사육된 가금에 못지않게 신선하고 맛이 있다"고 말했다.
곤사베우스가 포르투갈로 가져온 노예와 황금에 관한 소문은 상인들의 관심을 촉발시켜서, 그동안 냉소적이었던 상인들이 앞다투어 항해 면허를 신청하게 된다. 1444년 면허를 받은 란사로테는 6척의 무장 선단으로 230명의 노예를 잡아 온다. 이 원정은 아프리카 노예가 유럽 시장의 상품으로 등장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1444년 포르투갈 항구 라고스에 들여온 인간화물들에 관한 기록의 일부를 간추려 옮기면 대개 다음과 같다: "이른 아침 노예들이 배에서 내려 지는데 그 무리를 보고 연민에 사로 잡히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떤 노예는 고개를 떨구기도 하고 서로 바라보기도 하는데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비통하게 소리내어 울거나 하늘을 응시하기도 했다. 마치 자연신에게 빌듯이…. 아이들과 남, 여 등으로 분류해서 모을 때는 비록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간에 울부짖어며 헤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완연하였다…. 구경꾼이 운집한 가운데 노예들을 나누려던 작업자들도 난감한 모습이었다….
1441년에서 1446년 사이에 모두 927명의 노예가 포르투갈로 실려 왔다. 일부 몸값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바탕 싸우고 나서 잡혀 왔는데 저항하다가 죽은 수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포르투갈인들 가운데는 노예원정 동안에 3명의 선장과 30명 가량의 선원들이 죽은 것이 전부였다.
자료원(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bhuh123/221856039297
첫댓글 코로나 난리통에도
책은 여전하십니다.
장유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