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2. 주일예배설교
여호수아 5장 1~15절
요단강과 여리고성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의 의미
■ ‘폭풍전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커다란 일이 있기 전의 고요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실은 긴장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서 겪는 일 중 하나입니다. 이때, 만나는 심적 압박감의 정도는 개인차이긴 하지만, 쉽지 않은 부담감입니다. 이 부담감이 폭발 일보 직전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소란스러운 중에 폭풍전야를 지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람과는 달리 폭풍이 오기 전의 상태는 고요함입니다. 그러니 긴장의 정도가 소위, 장난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입니다. 물론 읽기에 따라, 폭풍전야보다는 당혹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인구의 절반가량인 남성의 할례받음, 40년 동안 내리던 만나의 공급 중단, 그리고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메시지는 긴장감이지만, 이보다는 당혹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긴장감으로 읽던, 당혹감으로 읽던, 이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공포조성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늘의 ‘선물’을 만나기 전의 사전정지작업용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선물과 함께 하늘의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는 메시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세 사건은 하나님이 꾸미신 거룩한 큰 세 걸음입니다. 과연 이 세 사건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난관은 요단강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요단강의 평소 규모는 시냇가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우기가 끝나면 강이 되는데, 이스라엘이 건너야 할 시기가 이때였습니다. 그러니 시작부터 큰 난관을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난관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난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을 지시하셨고, 이스라엘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무사히 건넜습니다. 물론 당연한 결과였지만, 내리신 지시를 그대로 순종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결과가 있었을 테니 당연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 엄청난 과업을 수행했다는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과제인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는 1절을 보면서 추측한 것입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어떻습니까?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다면, 여리고성 정복이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더 들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금 엄청난 기적을 경험한 데다, 이를 두고 가나안의 모든 왕이 넋이 나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용기를 잃은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소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사건을 터트리셨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인구의 절반가량인 남성을 가차 없이 할례받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40년 동안 변함없이 내려주시던 만나의 공급을 칼같이 중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은,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라며 여호수아의 신을 당장 벗게 하셨습니다.
저 같으면 이 용기 충만한 분위기를 타고 여리고성으로 달려가게 했을 텐데, 하나님은 일단 멈추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진을 빼놓으셨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셨을까요? 가속을 붙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오히려 진을 빼놓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 먼저, 할례 사건부터 들여다보죠. 놀랍게도, 이번 할례는 40년 만에 시행되는 할례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는 매우 중요한 의식으로 하나님 백성의 징표였고, 구원의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아이는 생후 8일이 되면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할례가 단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이집트로부터 탈출은 했으나,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라는 것이 늘 긴급 상황으로, 보따리를 싸야 하는 이동 명령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생 포피를 자르고 난 후, 그 당시 치료 기술로 볼 때, 그것이 아무는 시간이 한 달 정도는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긴박하고 예측 불가한 광야 환경에서 할례를 행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광야 생활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가나안 입국 초기 과정이니 여전히 안정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할례가 가능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더욱이 가나안의 모든 족속이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때문에 정신줄이 나간 지금의 상황이 할례를 받을 수 있는 적기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정신줄이 나간 가나안 족속이 당장 이스라엘에게 도전할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례의 적기라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핑계를 불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례를 지시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전적으로 시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할례가 왜 필요하고 중요했을까요?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바로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가 할례를 지시하신 이유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지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집트에서 살던 삶의 태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노예로 살던 태도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신 삶은 노예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해방된 자유인의 삶이었습니다. 이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라는 의미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이곳이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대손손 쭉 살 약속의 땅이니, 이제부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할례 의식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유와 함께 또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성취의 도취감을 제거해 버리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흥분에 들뜬 그들에게 오히려 고통을 안기심으로 흥분이 아닌 주님을 묵상하고 의지하게끔 하신 것입니다. 흥분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흥분을 가차 없이 제거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할례 사건은 복합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 두 번째로, 만나를 끊으신 사건을 들여다보겠습니다. 40년 동안 안식일을 빼고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베푸셨던 만나였습니다. 그런데 칼같이 끊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10~12절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이유는 단순합니다. 더 이상 만나가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정착하지 못한 유랑민에게 공급하시는 비상 상황에서의 양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정착지 가나안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니 만나를 공급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 하나님의 직접 공급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직접 공급이 아닌 간접 공급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만나가 끊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하나의 의미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무위도식(無爲徒食)의 나태한 의식을 제거해 버리시기 위한 만나 중단이었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여전히 힘든 사람에게는 만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수고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만나를 공급하지 않으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힘과 지혜로 먹을 것을 만들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간접 공급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자판기 취급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메시지는 만나를 공급하시든, 이를 중단하시든, 모든 물질 공급의 원천은 하나님이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고가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다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나 공급의 중단 사건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메시지였습니다.
■ 세 번째로, 여호수아의 신발을 벗기신 사건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갑자기 벗기신 것은 아니셨습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13~1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른 것은 다음 스텝이 여리고성을 함락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에게 엎드려 절하는 여호수아를 향해 내려진 지시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였습니다.
혹시 이 장면을 대하면서 이전에 이것과 유사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모세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장 5절) 이것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해방 지도자로 부르셨을 때의 일입니다. 대 역사를 앞두고 신을 벗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대 역사를 앞두고 신을 벗기신 것입니다. 더욱이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거룩한 일이니 ‘네 신이 아닌 내 신을 신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너는 내 거룩한 영역과 역사에 들어왔느니라!’
■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하늘의 ‘선물’을 만나기 전의 사전정지작업용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선물과 함께 하늘의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는 메시지라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꾸미신 거룩한 큰 세 걸음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과연 비전교회의 내일은 하나님의 어떤 단계가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는 말씀부터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의 안일함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다음 스텝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스텝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찾는 수고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다음 스텝이 여리고성 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