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4년 .
19세
동학군 토벌을 위해 일어난 진사 안태훈(안중근의사의 부친)과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고
구월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이동엽부대의
습격을 받아
패하였습니다.
◈ 1896년 .
21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
◈ 1908년 .
33세
안창호 등 애국지사 104명과 신민회 조직하여 참여.
안악에 양산학교
설립.
◈ 1909년 . 34세
신교육 운동과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배일운동을 전개.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 사건
관련자로 몰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 후
석방..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전념함.
◈ 1910년 . 35세
: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여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결의함.
◈ 1919년 .
44세
3. 1운동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
◈ 1926년 .
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 1927년 .
52세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으로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취임.
◈ 1932년 . 57세
이봉창의사로 하여금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함.
윤봉길 의사에게는 폭탄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함.
한국독립당 등 5개 단체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 1935년 .
60세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이사장으로
취임.
◈ 1940년 . 65세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됨.
또한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어
한국광복군을 조직 후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
◈ 1941년 .
66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5개항의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
◈ 1943년 .
68세
미국 O.S.S와 합작으로 국내침투를 위해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
3.1절 기념대회에서 <임정에 국제지위 주기를>
를 연설.
장개석과 회견 (7.26)
,
◈ 1944년 .
69세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
◈ 1945년 .
70세
해방 후 귀국하여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건국 포부와 방책을 밝힘.
(11.26).
모스크바삼상회의 소식에 반탁운동 전개.
<3천만에게 고함> 을 엄항섭 대독으로
방송.
◈ 1946년 .
71세
비상국민회의를 조직 후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취임.
대한독립청년단을 발족하여 부총재에
선출.
미국 하지 중장과 요담하여 좌우합작에 찬성,
좌우합작 7원칙 발표 ( 10.13
)
◈ 1947년 . 72세
우익반탁위원회를 구성 후 위원장에 취임.(1.26) ,
대동청년단 결성하여 부총재 취임.
(9.21)
◈ 1948년 .
73세
김구 선생 등 3영수 19일 하지와
북조선 정권수립설에 대해 요담.
(2.19)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에
남북회담 제의함.
(2.25)
◈ 1949년 .
74세
성금을 내어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설립.
(1.29)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피습을 받아
운명. (6 .26)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orldvisionmail.com%2Fimages%2F12_08_12-20.jpg)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hani.co.kr%2Fimgdb%2Fresize%2F2012%2F0812%2F134465975186_20120812.JPG)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신민들은
1945년
8월15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방송에서 히로히토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신민들에게 “견디기
어려움을 견디라”고 설득했다.
-민음사
제공-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hani.co.kr%2Fimgdb%2Fresize%2F2012%2F0812%2F134465975203_20120812.JPG)
패전국 일본 병사가 고개를 떨구고
쫓겨가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orldvisionmail.com%2Fimages%2F12_08_12-18.jpg)
아래 사진은
...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폴란드 바르샤바를 국빈방문 중에
1943년 2차 대전 당시 ...
폴란드의 유태인수용소 폭동사건으로 희생당한
유태인들을 기리는 기념묘역을 참배하던 중 ...
갑자기.... 예정에도
없이...
비에 젖어 있던 콘크리트 위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나중에 기자들이
왜 예정에도 없이 그렇게 했냐고
물었더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말 했다고
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orldvisionmail.com%2Fimages%2F12_08_12-02.jpg)
패전국 일본 병사가 고개를 떨구고 쫓겨가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orldvisionmail.com%2Fimages%2F12_08_12-18.jpg)
아래
사진은 ...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폴란드
바르샤바를 국빈방문 중에
1943년 2차 대전 당시 ...
폴란드의
유태인수용소 폭동사건으로 희생당한
유태인들을 기리는 기념묘역을 참배하던 중 ...
갑자기.... 예정에도 없이...
비에
젖어 있던 콘크리트 위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나중에
기자들이
왜
예정에도 없이 그렇게 했냐고 물었더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말 했다고
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orldvisionmail.com%2Fimages%2F12_08_12-02.jpg)
67주년
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전쟁범죄국.. 일본은 사죄와 반성은커녕...
해가
갈수록 노골적으로 더 뻔뻔해지고 있습니다.
이
뻔뻔한 일본놈들아... 이 사진을 보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죄를 하라 ...
저 독일 브란트 수상처럼-.
- 2015.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