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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을 보면 백제가 보인다
2. 풍납토성은 왕궁의 제사터!~ 여자형 건물지, 말머리뼈 출토!~
"이 건물은 풍납토성 미래마을터에서 발굴한 건축자재로 복원한 것입니다. 그동안 풍납토성 발굴 과정에서 기와가 출토된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하게 대형 기와 건물을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한곳에서 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된 것은 처음으로 확인한 새로운 사실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이런 고운 강자갈로 장식까지 한 이런 대형 기와 건물들이 있었다는 것은 풍납토성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례성이 이토록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는데 왜 그토록 멀리 찾아 헤매였던 것일까요?
자, 이 기록을 주목해주십시요. 백제의 첫수도 위례성을 묘사해놓은 삼국사기의 기록인데요.
"북으로는 한수를 끼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는 곳"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大海-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대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한 고려 시대에도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위례성 후보지로 거론된 곳이 한두곳이 아닌데요 바로 이러한 와중에 풍납토성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을 위례성이라고 본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지난 1999년 풍납토성 경당연립 발굴은 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대체 경당 지구에선 무엇이 나온 것일까?
발굴 당시 학계의 관심을 집중 시킨 유물. 그것은 말뼈였다.
한 구덩이에서 출토된 말뼈는 무려 아홉 개체. 이상한 점은 모든 말뼈가 다른 부위는 없고 모두 머리뼈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당시 말머리뼈를 출토했던 권오영 교수는 의도적인 폐기로 추정하고 있다.
"말의 머리 부분 중에서 아랫턱뼈, 하골입니다. 구덩이 하나에서 말머리가 아홉 개, 소머리가 한 개, 그래서 모두 열 개가 나왔습니다. 특징은 몸의 다른 부위는 보이지 않고 전부 머리만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을 죽여서 몸통은 다른 방법으로 처리를 하고 이 구덩이 안에는 머리만 묻은 것으로 그렇게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 권오영 교수, 한신대 국사학과
말은 고대 사회에서 함부로 죽일 수 없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그것도 말머리만 골라서 한 곳에 묻어둔 것일까?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이 말머리는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본 오사카 시조나와데시 박물관. 의문을 풀어줄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확인되었다. 이곳 조사 과장이 진열장에서 꺼내 보여준 것은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한 백제계 유물이었다.
이런 백제계 유물이 출토된 것은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초, 한성 백제 몰락 이후이다.
"475년에 백제의 한성이 함락 됐을 때... 그 때에 백제는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죠. 문헌에 나오는 475년이라고 하는 시기와 지금 일본의 시조나와데시 근처의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은 대체로 같은 시기일겁니다."
- 타나카 키요미 조사과장, 오사카시문화재협회
그 중에는 말머리뼈도 들어있었다. 일본학계에서는 말머리뼈가 한성 백제인들이 시조나와데시로 건너온 뒤 특별한 제사를 받칠 때 사용한 제사용 희생물로 추정을 했다. 백제인들이 시조나와데시에 남긴 유물을 통해 당시 백제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후 특별한 제의와 풍습을 전례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제의의 성격은 무엇이었을까?
"말의 희생을 수반하는 특수한 제사도 행해졌다고 하는 것이, 실제 개천에 있다든가, 혹은 우물안에서 그런 제사에 수반하는 것 같은 유물이 나온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러니까 농경 제사면서 희생양을 수반하는 무엇인가, 기우제와 관련되는 것 같은 제사였지 않은가 합니다."
- 타나카 키요미 조사과장, 오사카시문화재협회
말머리뼈가 출토된 풍납토성 경당 지구. 이곳에선 백제인들이 말머리뼈를 하늘에 바친 기우제와 같은 제의가 행해졌던 것이다. 발굴이 진행되자 제사터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발견됐다.
말머리뼈가 출토된 9호 구덩이 바로 옆, 한문의 여자형(呂)과 비슷한 건물지가 확인됐다. 일반 건물에선 볼 수 없는 폭 1.5미터의 도랑이 여자형 건물지를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은 숯으로 채워져, 당시 이 건물지를 신성시하고 보호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여자형 건물지를 복원해보자.
건물 주변으로 도랑을 파고 전돌을 깐 후 숯을 채운다. 특별한 권위와 위엄을 갖춘 이곳은 백제의 제사터였다.
"여자형 건물지와 말머리뼈 아홉 개와 소머리뼈가 함께 나온 9호 구덩이, 그리고 그보다 조금 앞 시기의 것이지만 또 하나의 제사용 구덩이, 그러니까 그 주변 일대가 3세기~5세기까지 계속 제사를 지내던 건물지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 건물지의 방향이 정남북 방향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계획적으로 남북 방향에 맞춰서 지었고, 계획적으로 제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생각이 됩니다." - 권오영 교수
경당터에서 역사학계의 관심을 주목 시킨 또 하나의 유물은 바로 '대부(大夫)'자가 새겨진 99년 발굴 토기였다. 그런데 최근 같은 모양의 토기인데 '정(井)'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됐다. '우물 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 곳은 '대부'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 곳과 같은 장소였다. 그렇다면 '대부'와 '정'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구려 아차성 유적을 발굴했던 서울대 박물관. 이곳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토기를 만날 수 있었다. 토기에는 뚜렷하게 '대부정(大夫井)'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같은 유적지에서 나온 토기들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접시에 공통적으로 새겨진 '형(兄)'자는 고구려 관직명으로 추정된다.
지도형, 염모형, 후부도( )형.
'대부정(大夫井)'도 처음엔 관직명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에 새겨진,
고구려와 똑같은 '대부(大夫)'와 '정(井)'자가 나온 것으로 보아 관직명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대부와 정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양국에 공통적으로, 또 사상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정(井)'이라는 글자는 글자도 되지만 '?' 같은 기호도 됩니다.
저런 기호는 고구려에도 있었고 신라, 가야, 바다 건너 일본에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호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오지 못하게 막는 그런 벽사적인 의미도 있는,
그런 종교적인 기운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 권오영 교수
고대 사회에서 제사 의식은 국가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자세한 기록이 묘사되어 있다.
'구수왕 14년, 4월에 가뭄이 들어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냈더니 곧 비가 내렸다'고 전하고 있고
'비류왕 10년조에는 정월 남쪽 교외에서 천지신명께 교제를 지내는데 왕이 몸소 희생물을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명성왕 묘를 세웠고 제사를 지냈고,
국모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천지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 외에도 여러 제사가 있었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이러한 제사는 왕국이 형성되고, 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제사가 되겠습니다.
경당지 유적은 어떠한 형태의 제사가 이뤄졌는지는 몰라도,
그 정도의 제사터라면 왕궁의 제사터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이종욱 교수, 서강대 사학과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기우제를 올렸던 백제의 제사터.
풍납토성 경당 지구, 이곳은 백제 위례성에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던 제의 공간이었고
풍납토성이 왕성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3. 풍납토성 밖 목조 우물, 백제인의 삶속으로!~
"풍납토성에서 제사터가 발굴되면서
백제의 첫수도 위례성이 마침내 우리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것이 기원전 18년,
그 때부터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불타버린 서기 475년까지,
백제 500년 역사가 바로 이 풍납토성에서 이뤄졌던 것입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풍납토성에서 성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풍납토성 동벽 부분입니다.
물론 이 동벽 역시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많은 부분이 헐리고 깍여 나갔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숨결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동벽 밖깥쪽에는 또 다른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지난해 2004년 10월 성벽을 방어하는 물길을 찾던 중 예상치 못한 유적이 발굴됐다.
풍납토성 동벽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 이곳에서 백제 목조 우물이 나온 것이다.
당시 목조 우물이 발견된 곳은 지하 4미터.
우물은 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목조 우물이었다.
순수하게 나무로만 만들어진 목조 우물이 발견된 것은 국내에선 처음 있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인은 무슨 이유로 성 밖깥에 이 같은 목조 우물을 만들어 두었던 것일까?
"우물이 지금 성 밖깥쪽에서 출토가 되었다는 것은
성 안쪽 뿐이 아니라 성 밖깥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한성 백제에 이처럼 제대로 된 우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당시에 목조 우물을 제작하는 방법이라든가, 어떤 두레박을 사용했는지 등
새로운 조사를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라고 볼 수 있죠."
- 이은석 연구원, 국립문화재연구소
경담문화재 연구소(전남 광주).
발굴 직후 우물은 해체되어 보존 처리 중이다.
1,500년 세월을 땅 속에 묻혀 있던 우물의 복원을 위해서다.
목재의 변형을 막고 영구 보존하려면 특수 약품을 섞은 물에서 깨끗이 세척을 한 후
형태가 변하지 않도록 경화 작업 과정을 거친다.
보존 처리 과정에서 백제인들이 나무로 우물을 만든 이유가 밝혀졌다.
우물 목재에 끼여 있는 펄에 그 해답이 있었다.
풍납토성 일대는 펄층이었고
나무는 펄층을 잘 지탱하는 소재였던 것이다.
"석조로 만들 경우에는 그 지반이 잘못하여 주저앉게 되면 석조의 벽이 무너질 염려가 있습니다.
특히 하부 구조가 단단한 그러한 큰 석재들을 놓아야 하는데 그러한 석재들이 조금은 힘들었던 것 같고,
오히려 우물을 목재로 만들면 그러한 지질의 구조에 잘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배영선 건조물 연구 실장, 국립 문화재 연구소
나무의 수종은 무엇이었을까?
샘플을 채취해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해봤다.
검사 결과 수종은 상수리 나무였다.
상수리 나무는 조직이 견고해 단단한 수종으로 알려져 있다.
"상수리 나무는 통칭 참나무로 알려져 있는 그런 수종입니다.
우리 산하에서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나무 중에 하나구요,
집을 짓거나 배를 만들 때도 상수리 나무가 많이 쓰였고,
그것은 상수리 나무가 물 속이나 다른 환경에서 잘 견디는 나무에 속했기 때문에 그렇게 쓰였기도 했고
또 비교해보자면 유럽에서는 오크통이라고 하는 것으로 술통을 만드는데
그 오크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참나무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 김익주 소장, 경담문화재연구소
보존성을 처리한 목재에는 내구성을 고려한 흔적도 있었다.
나무의 양쪽 끝은 암수로 다듬었다.
우물 정자로 결합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것이다.
나무의 양쪽 끝을 암수로 엮어 한단 한단 정교하게 짜아올린 목조 우물.
목재와 목재 사이에는 진흙을 발라 이물질의 침투를 막았다.
그렇게 엮어 올린 우물의 나무단은 무려 14단, 우물 높이는 2.5미터에 이르렀다.
"앞으로 목조의 가구들은 결구 수법입니다.
결구 수법은 백제의 석탑들, 미륵사지 석탑이나 왕궁리 석탑 등이 결구 수법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형되는 구조가 거기서도 보이고 있구나 생각됩니다."
-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고건축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우물 목재를 분석하던 중 특이한 홈들이 목재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건축에서 사용한 나무들을 재사용한 흔적들이었다.
"부재들에 보면 작은 장구 홈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홈들은 목조 건축에서 사용된 것들이구요,
그런 것들을 재활용해서 이 우물을 만들었는데,
아마도 주변에는 참나무로 만든 고상 주거나 귀틀집 같은 것이 주변에 있어서
그런 것들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배영선 건조물연구실장, 국립문화재연구소.
실제로 우물 목재에는 건물을 지을 때 생긴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우물 목재로 재활용 할 정도로 당시 풍납토성 밖에도 상당한 수준의 목조 건물이 분포해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인의 생활상을 짐작케 하는 유물도 나왔다.
목조 우물안에서 당시 사용한 다양한 유물이 나온 것이다.
목재 삼지창.
" 보시면 가지 부분을 그대로 살려 절취를 했는데 반대쪽에 끈으로 묶은 홈이 파 있고
그래서 아마 끈으로 묶어서 우물 안에 빠진 물건들을 건져 올릴 때 쓰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레박 걸이용으로 추정되는 목재품과 반원형의 나무 두레박.
물동이를 일 때 사용한 똬리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풀로 엮은 똬리는 직경이 10센치미터로
지금도 우리가 물건을 일 때 사용하는 똬리로 모양이 비슷하다.
우물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물동이용으로 보이는 항아리다.
풍납토성 성 밖에 거주한 백제인들의 삶의 한가운데 있었던 우물가 풍경.
풍납토성 동벽밖에서 출토된 목조 우물로 그들의 삶이 처음으로 조명된 것이다.
4.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서울속 백제의 모습은?~
"목조 우물로 풍납토성 밖에도 백제인이 거주하는 도시가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습니다.
발굴팀도 처음에는 왜 목조 우물을 만들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는데요
막상 분석을 해보니 지반이 펄층인 것을 고려한 백제인의 지혜가 담긴 우물이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우물가 풍경은 목조 우물과 함께 발굴된 유물들을 토대로 복원한 것입니다.
이 두레박은 나무를 만든 것인데요, 자세히 보니까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속을 파낸 모양입니다.
요즘 우리가 쓰는 두레박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죠?
그런데 이렇게 우물의 물을 깃다보면 물동이나 두레박을 빠트리는 경우도 많지 않았을까요?
그럴 땐 어떻게 했을까요?
삼지창 모양의 이 도구를 봐주세요.
우물에 빠진 도구들을 건질 때 사용한 것 같습니다.
아마 성 밖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식수원 역할을 하는 이 우물 근처에 보여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도 서울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백제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울속에 백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서울 일대의 백제 유적지를 재현한 가상 모습입니다.
풍납토성을 발굴을 시작할 때 첫 책임을 맡았던 조유전 선생님을 모시고 자세히 살펴보죠."
"안녕하세요 선생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풍납토성 아닙니까?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성이 어떤 곳이죠?"
"이것이 현재 올림픽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백제 시대 몽촌 토성입니다.
몽촌 토성은 풍납 토성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이전에 한성 백제의 유력한 도성으로 주목되어 왔던 곳이지요.
지금 항공 사진으로 보면 몽촌 토성과 풍납 토성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풍납 토성은 평지에 마련되어 있고
몽촌 토성은 구릉에다가 구릉을 이용해 산성처럼 만든 그런 토성이지요."
- 조유전 교수,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그러니까 성 안으로 들어오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애요.
그런데 여기 있는 이 무덤말이죠.
고구려 양식인 돌무지 무덤 같은데요?"
"예. 바로 이것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 돌무지 무덤입니다.
형태는 고구려 무덤(장군총)과 같습니다.
지금은 3기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일제 강점기엔 이곳에 80여 기가 흩어져 있었고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돌마을'이라고 불리워졌죠."
"그렇군요. 그럼 저 산성은 어떤 곳인가요?"
"한강 건너편에 보이는 저것이 바로 워커힐이 있는 곳인데 그 일대가 다 아차산성입니다.
남쪽으로 보면 그 유명한 남한산성을 보실 수 있구요.
지금 이 남한산성 일대에서도 백제 유물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백제 유물이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으로 빙 둘러서
산성들이나 성들이 외곽으로 퍼져 나간 것을 보아
우리는 풍납토성의 위치가 백제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왼쪽 맨위 워커힐 일대(아차산성), 그 아래 풍납토성, 그 아래 올림픽 공원(몽촌토성)
왼쪽 맨아래 서울 석촌동 고분, 오른쪽 남한산성>
5.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중심에 백제가 있었다!~
"오늘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펴보고 나니 서울 자체가 백제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참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풍납토성은 한강에 바짝 붙어 있는데요, 홍수가 범람하면 피해가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이유로 백제는 한강변에 수도를 정한 것일까요?"
풍납토성 경당 지구 발굴을 담당했던 한신대 박물관.
현재 이곳에선 발굴된 유물들을 정리하고 있다.
"이쪽은 토기들, 이쪽은 기와들입니다.
풍납토성 경당 지구는 1,000평 정도 되는 그렇게 넓은 지역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유물은 2만점 정도 됩니다."
- 권오영 교수
풍납토성 출토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토기류이다.
백제 토기로는 항아리와 단지류가 주를 이루었다.
눈에 확연히 띄는 백제 토기의 특징은 장식성보다 실용성을 강조한 토기다.
토기에 남아있는 두드림 양식 역시 오랫동안 이어진 백제 토기 양식이다.
그런데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선 백제 토기 양식이 아닌 토기류들이 상당수 출토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토기들.
그리고 암갈색의 이 토기 조각들은 색상과 형태로 보아 소가야 지역에서 제작된 토기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백제의 심장부 풍납토성에서 무슨 까닭으로 소가야 토기가 나올까?
"대개 이 소가야 토기들은 5세기 단계의 것으로 보이는데요,
5세기경 서부 경남 지역의 소가야 혹은 소가야 주변 세력과 백제 한성 세력이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교류를 했다는 증거는 되겠습니다."
- 권오영 교수
< 경남 산청 묵곡리 소가야 무덤군 80여 기 >
경남 산청 묵곡리는 5세기경에 조성된 소가야 무덤군이 발굴된 유적이다.
당시 소가야의 외곽에 속하던 이 지역에서는 80여 기의 무덤이 떼지어 발굴되었고
이들 무덤에서도 백제 토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묵곡리 무덤군을 발굴한 경상대학교 박물관 팀은
묵곡리 유적에서 백제 토기가 출토된 것에 매우 놀라워 했다.
묵곡리에서 나온 백제 토기는 20여 점,
소가야 외곽 산청 지역까지 백제 중앙 세력의 힘이 미쳤다는 증거다.
"백제 토기들이 상당히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처음에 예상치 않았던 것이고 백제의 토기가 출토되는 걸로 봐서
산청이나 함양까지 영향을 미쳤다고나 할까 교류가 있었던 거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이상길 교수, 경남대 역사학과
그렇다면 백제가 서부 경남의 작은 소가야와 교류한 이유는 무엇일까?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작은 토기 조각으로 그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토기 조각을 복원해보면 3세기부터 무덤에 등장하는 왜 식륜과 비슷하다.
이는 백제가 왜와 해상 무역을 실시한 흔적이다.
"일본 열도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좋은 항구를 직접 확보한다고 하는 이런 측면이 되겠지요.
그래서 백제 토기가 소가야 지역에서 나오는 이유도 그 통로와 연결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권오영 교수
당시 한강변에 위치 했던 한성 백제,
소가야를 중간 기지로 삼아 바다 건너 왜와 교류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중국과 백제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도 있다.
특이하게 동전 문양을 새겨 넣은 토기는 완형으로는 처음 출토된 것이다.
이 전문도기는 중국 진나라의 전형적인 도기로 알려져 있다.
"모양은 조금씩 다르고, 기본적으로는 다 시유도기인데,
중국에서 나오는 전문도 동전 가치가 계속 바뀌어 나가니까 동전 모양도 바뀌어 나갑니다.
그래서 제일 빠른 시기 동호 때 나온 전문도기들은..."
- 권오영 교수
이것은 중국 동진과 백제가 교류를 했던 증거인 것이다.
백제는 언제부터 중국과 교역을 한 것일까?
3세기말 동진의 수도였던 중국의 난징시.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양직공도>.
3세기 각국에서 모여든 사신들을 그린 그림엔 백제 사신의 모습도 보인다.
이는 백제가 이곳 동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곳과 백제와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3세기 안휘성 절도사를 지낸 주연가족묘 박물관.
전문도기는 3세기초 중국 전한 시기에 유행하다 4세기 동진대 점차 없어진 도기로 밝혀졌다.
특정 시기에만 유행된 전문도기는 귀한 유물이다.
동전 문양은 풍납토성과 비슷한 것으로 교류 시점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전시실에 전문도기가 발굴된 주연가족묘는 3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조성된 유적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중국과 교류한 시점은 이 범위 안에 들어온다.
전문도기를 연구해온 남경대 하운고 교수는 보다 정확한 시기를 제시한다.
그동안 두 나라의 교역 시점은 4세기말로 알려져 왔지만
그 교류 시점이 3세기초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헌에 기록된 것을 보면 백제와 중국 남쪽 정부가 직접 교류한 시기는 동진 시기라고 되어있습니다.
동진 말기 정도로 되어있지요.
그러나 한국에서 전문도기가 발견된 것으로 봐서
백제와 중국의 교류는 늦어도 동진초나 중기쯤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동호 시기 등 더 일찍 교류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 하운고 교수, 남경대학교 역사계고고학연구실
3세기 초 한성 백제가 중국과 교류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당시 어떻게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를 한 것일까?
"동해 황해를 거쳐서 교류하는 루트지요.
배를 타고 오면 중국의 산둥, 강소성이 가깝고,
장강을 통해 들어오면 되기 때문에 이 노선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하운고 교수, 남경대학교 역사계고고학연구실
일본에서 발견된 4세기 중국 진나라 때 관복 허리띠인 금동과대금구.
이것은 고대 한중일 국제 교류에서 백제의 역할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하지만 몽촌토성에 이어 풍납토성에서도 금동과대금구가 출도돼
우리 학계에선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중심에 백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4세기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중국과 직접 교역을 했지 백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라고 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풍납토성에서 오래전에 금동대금구의 장식 하나가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유물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출토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몽촌토성에서도 역시 한 점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4세기 야마토 정권이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한 게 아니라, 그 중간에 백제가 개재가 되어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4세기 국제 교류에 백제가 그 중심축으로 있었다는 말이 되지요."
- 권오영 교수
뱃길로 이어진 백제의 교역로는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백제는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중심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당시 백제 한강 유역은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중심이자 물류 기지였다.
그래서 백제 500년은 왜로, 중국으로 오가는 무역선으로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
5. 천오백년을 유지한 풍납토성의 비밀!~
2~3세기 백제는 이미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
"한강은 국제 교류의 동맥과도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지구촌 교역 현황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불러볼까요?
이 유리잔은 중국의 동진 유적지에서 발굴된 로마제입니다.
2세기경에는 로마 황제의 사신들이 직접 중국에 파견될 정도로
동서양의 문물 교류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동서양의 교류가 이루어진 대표적인 곳은 인도입니다.
이 불상은 인도에서 발견된 간다라 불상입니다.
불상의 얼굴을 자세히 봐 주십시요.
인도 사람 얼굴은 아닌 것 같지요.
바로 로마인의 얼굴을 닮은 불상입니다
동서양 문명 융합의 형태로 발생한 것이 바로 간다라 문명이었지요.
화려한 아치로 장식한 콜로세움 역시 로마 번영을 상징하는 유적입니다.
로마는 백제가 건국되던 기원전 18년 제정을 마감하고 공화정의 첫발을 내디뎠는데요,
당시 획기적인 기술로 동서 교역에 중심 자리를 잡았습니다.
로마의 폼페이에서 발견한 이 유물은 외과 의사가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 이미 외과 수술이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문명 교류가 활발해지자 전 세계적으로 기술 혁신이 일어났는데요
이 그림을 보세요 상품의 무게를 재고 있는 저울이 보이죠.
고대 이집트인의 발명품입니다.
여기 있는 것은 로마에서 발명한 콘크리트 제작 기술이 전세계로 퍼져 나간 것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이 시기 콘크리트로 도로까지 포장했다고 하니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고대인이 다 만들어 놓은 셈입니다.
그런데 풍납토성에서도 콘크리트 기술에 버금가는 축조 기술이 사용되었는데요
그 기술에는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복원할 엄청난 비밀이 들어 있었습니다."
현재 풍납토성의 성벽은 2.2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져 있다.
허물어져 나간 곳까지 계산하면 3.5킬로미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이 가장 잘 보존된 동벽은 폭이 20m이고 높이는 9m 정도.
흙으로 만든 토성이 1,500년 이상 지탱된 비결은 무엇인가?
지난 99년 성벽 축조법을 연구하기 위해 문화재연구소에서 성벽의 두 부분을 절개했다.
그 중에 한 곳이 동벽 구간에 이 지점이다.
그 때 절개했던 성벽 부분은, 원래 있던 성벽 부분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발굴이 끝나고 나서 여기를 보충을 했는데 많이 다졌지요.
많이 다졌는데 시간이 흐르고 비가 오고 하니까 가라앉죠.
이거는 판축 기법이 아니고 흙을 부은 상태에서 매립한 겁니다.
옆에 절개하지 않은 부분은 판축으로 되어 있고
매립한 부분은 앞으로 놔두면 더 더 들어가겠지요."
- 이형구 교수, 선문대 역사학과
성벽을 절개한 순간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벽에선 벽돌처럼 한층 한층 쌓아올린 판축 기법이 확인됐다.
정한 간격으로 나무틀을 대고,
그 안에 고운흙을 반죽해 부은 후 마치 벽돌을 찍듯이 한 층 한 층 다져서 쌓아올린 중심 토루와,
그 겉에 네 겹의 점토를 덧대어 완성한 판축 토성.
이것은 콘크리트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 중간의 갯벌층에서도 성벽 축조에 이용된 화학적인 공법이 확인됐다.
기반이 약한 갯벌층 사이사이에 식물유기체를 10센치 정도로 깔아 성벽의 접착 강도를 높인 것이었다.
"그 당시 그 구간의 토질이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완화하기 위해서 식물유기체와 점토를 교대로 깔음으로 해서
토층 자체의 유동성과 견고함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신희권 연구원, 국립문화재연구소
성벽 마무리 네 지점에선 석축이 들어났다.
3단으로 쌓은 석축을 보면 일정한 골을 남겨둔 것이 확인된다.
판축한 성벽이 한강의 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배수를 고려했다.
"돌과 돌 사이에는 물이 잘 흐르도록 점토를 발라놓고
그 사이에 골을 내서, 여기서 골이라는 것은 배수가 될 수 있도록 처리한 것으로 확인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로서는 이 풍납토성을 축조할 때에 아마도 미리 설계가 되어 있어서
그 설계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봅니다."
- 윤근일 소장, 경주 국립문화재연구소
성벽의 바닥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 뻗어 있었다.
그 규모는 발굴팀의 예상을 초월했다.
가장 밑면의 폭은 높이 43미터, 넓이 15미터.
사다리꼴로 중심을 쌓고 판축을 한 거대한 토성이었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에 들어간 물자와 노동력은 어느 정도일까?
한발대학교
현대공학의 수치 해석 프로그램으로 해석한 흙의 양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현재 밝혀진 전체적인 길이가 3,500미터 정도 되거든요.
토공량으로 보면 약 80만 입방 제곱미터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무게로 환산하면 150만톤, 10톤 트럭 기준으로 15만대 정도됩니다.
그 정도 양이라면 현대적인 장비를 가지고 한다고 해도 대단히 큰 공사에 속합니다."
- 김영묵 교수, 한발대 토목공학과
풍납토성은 연인원 100만 명 이상 동원되는 국가적인 대토목 공사였을 것이다.
따라서 풍납토성 축조 시기는 백제가 고대 국가로 발돋움 하는 중요한 시점을 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풍납토성 축조 시기와 관련해서 그 정도의 대규모 토성을 언제 쌓았느냐, 물론 시기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요,
그 정도로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국가적인 권력이 집중이 이뤄졌다라는 점에서
삼국 시대의 국가의 형성, 발전 시기를 다시 한번 재고하게 만드는 그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 권오영 교수
3세기의 한반도를 잘 묘사한 것으로 알려진 <삼국지 위지동이전>
백제는 성곽도 없는 부족 국가로 묘사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기록을 중심으로, 초기 백제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백제는 기원전부터 주변국들을 병합한 것으로 되어 있다.
3세기에 이르면 백제는 이미 충청권까지, 신라는 경북 일대를 통합하고 있다.
중국에서 집필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
두 역사서에 기록한 내용은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걸까?
"<삼국지 동이전> (삼)한조의 경우에는
삼한 지역의 제도나 사물이나 습속, 그 다음에 낙랑, 대방과의 원거리 교역 정도를 주로 이야기 한 책입니다.
그걸 가지고 백제의 정치사를 재구성 하다보니까 백제사가 은폐되고 축소되고 말살될 수밖에 없는거죠.
결국 삼국지 한(삼한)조를 가지고 백제사를 재해석한 것은 백제사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 이종욱 교수, 서강대 사학과
풍납토성 축성 연대만 밝혀진다면
백제가 일찍부터 고대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전하는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도 검증 받을 수 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목재의 탄소 연대 측정이 실시횄다.
탄소 연대 측정은 방사선 동위 원소를 측정해 유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연대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늦어도 2세기경에 백제는 풍납토성을 만들 정도로 고대 국가로 성장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 때 이미 한강(하남 위례성)을 중심으로
위로는 예성강(패하)과
아래론 금강(웅천), 춘천(주양) 일대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정치적인 상황이라든지 여러가지 정황을 통해서 보면 백제는 일찍부터 커다란 왕국으로 성장을 했고,
기원전 어느 시기에는 경기도 일대를 지배하는 왕국으로 성장을 했고,
그 증거가 바로 풍납토성의 축조이고, 풍납토성의 연대 측정 결과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 이종욱 교수
"이제는 시각을 좀 넓힐 차원의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시공에 걸친 역사가 다시 우리의 역사 기록으로 나타나게 되겠죠."
-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풍납토성은 한국 고대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풍납토성에 발굴된 면적은 극히 일부다.
풍납토성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우리 고대사는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나갈 것이다.
" 1,500년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백제의 첫수도 위례성은 먼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 풍납토성이었습니다.
비록 고층 건물에 둘러싸여 있지만 풍납토성은 잃어버린 백제 500년의 숨결과 표정,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조명할 블랙 박스임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제 막 그 베일을 벗고 백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요,
오는 2013까지 발굴이 진행되는 만큼 앞으로도 계속 메가톤급 역사를 쏟아낼 것이라는 기대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풍납토성 발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요,
풍납토성을 복원해가는 우리의 노력도 멀지않은 미래에는 역사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는 잃어버린 역사를 되살리고 복원하는 출발선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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