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으로 봄마중을 간다. 포근한 황토들녘엔 추위를 이겨낸 겨울배추들이 자라고, 마늘과 양파가 쑥쑥 싹을 내밀고 있는 해남은 겨울에도 겨울답지 않다. 이름처럼 늘 봄빛이 도는 곳이다.
#겨울 이겨낸 초록 배추밭
목포 귀퉁이에서 금호방조제와 영암방조제를 넘으면 해남길. 바구니를 엎어놓은 듯한 야트막한 산들이 푸르디 푸른 들판을 감싸고 있다. 산도 들도 둥글둥글하다. 모난 곳이 없어 해남땅을 처음 찾은 사람도 낯설지 않고 정겹다.
해남은 따뜻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해남은 겨울에도 초목이 시들지 않고 벌레가 움츠리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해남은 국내 최대의 겨울배추 산지다. 겨울배추의 70%가 해남에서 난다. 3,372ha의 밭고랑에서 30만3천t이 나온다. 보통 1월부터 출하해 3월말까지 이어진다. 겨울에 익은 토실토실한 알배추를 세 포기씩 묶어 푸른 망에 집어넣어 화물차에 싣기 바쁘다. 붉은 황토밭에서 배추를 수확하는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 보여 돈 좀 벌었느냐고 물었더니 농투성이 아낙네는 세상물정 모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앗따. 세상물정을 몰라도 한참을 몰러. 올겨울엔 중국 배추가 작년에 비해 두 배나 수입됐답니다. 그라믄 배추금이 오를 리가 있겄소. 농민만 죽어불지.”
올해는 배추값이 ‘껌값’보다 못하다. 1월말엔 겨울배추가 포기당 350~450원 정도 했다. 포기에 250원 받고 판 농민도 있다고 한다.
화원농협 김치가공공장 정영호 공장장은 8.5t트럭에 2,700포기를 싣는데 한 차에 1백50만원밖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 수송비, 인건비, 기름값이 1백만원이면 포기당 200원 수준. 비료비도 안 나온다고 했다. 생산과잉 때문이다. 해남땅에 겨울배추를 심기 시작한 것은 15년전. 겨울에도 싱싱한 배추를 맛볼 수 있어 처음엔 제법 수입이 좋았단다. 배추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무안, 영암, 장흥, 완도, 진도 함평, 고창, 강진까지 배추밭이 들어섰다. 결국 공급과잉으로 배추값은 곤두박질했다. 아무리 들녘이 평화로워도 농촌은 벼랑끝에 서 있다.
#절에 가는 길 ‘예인의 명소’ 유선여관
배추밭을 지나 대흥사로 향했다. 햇봄이 꽃으로 영근 것이 동백이다. 대흥사에선 1월 하순부터 동백이 피어 3월까지 이어진다. 대흥사 가는 길은 정겹다. 난대림과 솔숲이 적당히 섞여있는 대흥사 가는 길. 이 길을 옛사람들은 구곡장춘(九曲長春)이라고 했다. 동네 이름도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 굽이굽이 봄이 긴 계곡이란 뜻이다. 약 3㎞에 달하는 대흥사 진입로는 한걸음에 봄향기를 느끼고, 한걸음에 꽃내음을 좇는 그런 산책로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대흥사 입구 부도전 바로 앞에 유선여관의 문을 두드렸다. 예전엔 주인댁이 가야금을 꺼내 한가락을 들려주기도 했던 기억 때문이다. 유선장은 한때 예인들이 들락거리던 명소였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진돗개 누렁이가 등산객의 길안내까지 한다고 나와 제법 유명해진 곳이다. 한동안 문을 걸어잠궜는데 알고보니 주인이 바뀌었던 모양이다. 영화 ‘서편제’와 ‘장군의 아들’ 등을 촬영했던 집은 여전히 정갈하다.
#다홍빛 동백이 반기는 대흥사
대흥사 부도밭을 지나 처음 마주하는 천불전 바로 옆마당에서 동백을 만났다. 크지는 않지만 옴팡지고 단단한 나무에서 열린 홍동백. 꽃잎을 다 벌리지도 않고 똑 고개를 꺾어버린다. 정조 곧은 기생 같다. 동백꽃 필무렵 대흥사는 천지에 봄기운이 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대흥사는 바람이 봄햇살을 흐트리지 못한다. 산들이 꽃잎이라면 대흥사는 꽃술처럼 꼿꼿하다. 서산대사는 대흥사를 두고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명당’이라고 했다.
대흥사는 큰 절이다. 백제 때 지어졌고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했다. 선지식을 제외하더라도 대흥사처럼 많은 명사들이 흔적을 남긴 절을 찾기는 지금도 힘들다. 대웅보전의 글씨는 남도의 명필 원교 이광사가 썼고, 바로 옆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다. 의병을 일으킨 서산대사가 주석했고,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해 정조대왕이 표충사란 사당을 세우고 현판을 썼다. 다성 초의선사는 일지암에서 동다송을 남겼다.
추사와 초의, 원교에 얽힌 이야기 한토막만 해보자. 대웅보전이란 현판을 보면 힘이 넘친다. 운동으로 단련한 젊은이의 근육처럼 단단하다. 추사는 이런 원교의 현판을 보고 유치하니 떼어버리라고 했다. 해동 천재로 불리던 추사는 정적들에게 쫓겨 9년 동안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제주도에서 마음을 비우고 ‘세한도’를 그린 추사는 더 영글었나보다. 유배가 풀려 돌아오는 길에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라고 했단다. 제주도 귀향지까지 찾아왔던 초의에게는 명선(茗禪)이란 명작을 보냈다. 추사의 현판 무량수각은 둥그스름하지만 품격이 있고 아무렇게나 쓴 것 같지만 흐트러짐이 없다.
배추와 동백으로 봄이 영그는 해남땅. 들녘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봄햇살이 오글오글 모여있다.
▲여행길잡이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에서 빠져나와 해남 방면을 택한다. 고가도로로 내려가 두번째 신호등에서 1차선으로 옮겨 타면 국도 2호선. 방조제를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진도 방면 길이 보인다. 진도 이정표를 따라가면 화원반도. 배추밭들이 많다. 계속 달리면 해남 읍내로 이어진다. 읍내에서는 대흥사 이정표가 나온다. 대흥사매표소 (061)534-8072
▲숙박·먹거리
한옥으로 이뤄진 유선여관(061-534-3692)은 원래 신도들이나 수행 승려의 객사로 쓰였다. 40여년전 여관으로 바뀌었고 2000년 새단장을 했다. 3만원부터. 해남읍내에 있는 중앙정식당(061-535-5525/ 536-3264)은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백반집. 5,000원짜리 백반에 반찬이 10여가지가 넘게 따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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