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남들이 정해 놓은 ‘정답 인생’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입력 2022-11-18 03:00
“저희 병원에는 어떤 일로 오시게 되셨을까요? 저쪽 대학병원 기록을 보니 이미 진단도 잘 받고 치료도 다 잘 받고 계시던데요.” “남들이 그러는데 서울 큰 병원에 한번 가서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해서….”
꼭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증 환자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2차 의견을 구하러 오는 환자가 있다. 남들이 가보라고 하니까, 남들도 다 가니까, 나도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서울 큰 병원에 와보는 것이다. 이런 질문도 많이 받는다. “남들이 그러는데 ○○이 그렇게 좋다는데 저도 먹어야겠지요?”
소위 남들이 정해 놓은 ‘정답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어렸을 때는 멀쩡한 부모가 있어야 하고, 10대에는 ‘인 서울’ 명문대에 가야 하고, 20대에는 대기업에 취직해야 하고, 30대에는 번듯한 배우자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40대에는 서울에 아파트 하나 있어야 한다. 50대에는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아이가 인 서울 명문대에 가야 하고, 60대에는 노후 자금으로 ○○억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 프레임은 우리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세뇌되어 있다.
만약 이것만이 정답이고 정답을 못 맞힌 사람은 루저라면 사실 우리 대부분은 루저다. 확률적으로만 봐도 멀쩡한 부모, 명문대, 대기업, 아파트, 번듯한 배우자를 갖춘 데다 공부 잘하는 자식까지 둘 확률은 희박하다. TV 속 드라마에서만 존재한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오랜 관습과 체면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정답 인생 프레임은 우리를 경쟁과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남들 하는 대로 사는 일이 마냥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남들도 다들 힘들어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른 채 모두가 힘들게 사는 것은 자못 이상하다. 은연중에 타인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정답 인생을 강요하는 것은 때로는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남들의 욕망을 욕망하다 보면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는 둔감해진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억압하며 나 좋은 인생이 아닌 남 보기 좋은 인생을 추구하게 된다. 그렇게 남들이 정해 놓은 정답 인생을 바라보며 아등바등 살다가 덜컥 암에 걸렸는데, 암에 걸려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정답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을 보면 못내 안쓰럽다. 옆에서 ‘프로 참견러’들이 이거 해야 한다 저거 해야 한다 지적해대고, 그걸 안 하면 나쁜 보호자, 불량 환자 취급을 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남들이 정해 놓은 정답 인생. 그런데 정작 나도 그것을 원하는 걸까? 남 보기 좋은 인생이 과연 내게도 좋은 인생일까? 인생에 한 번쯤은 남들의 잣대와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를 위해서 나답게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내 인생인데 왜 나는 없고 남들만 내 인생에 있는 걸까?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 성찬례(성사론 가톨릭교리신학원 손희송 p92-94)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이 성사 안에 현존한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이 변화를 실체변화라고 표현해왔다. 이와 관련해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내어주시는 것을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교회는 항상 이러한 확신을 지녀 왔으며 본 공의회는 이를 다시금 선포하는 바이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써 빵의 실체 전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변화라고 불러왔다” (DS 1642).
12세기에 형성된 실체변화라는 개념은 당시의 철학 사상을 배경으로 한다. 즉 당시 철학 사조는 한 사물이 실체(實體)와 우유(偶有)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실체란 한 사물의 본질인데, 이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서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단지 정신으로만 알아볼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우유는 한 사물의 겉모양으로 이는 색깔, 냄새, 무게 등을 지니고 있어서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실체변화설은 미사 때에 빵의 우유, 즉 겉모습은 변하지 않지만, 빵의 보이지 않는 본질인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마술적인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실체변화설이란 말 자체는 실체와 우유라는 철학적 개념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실생활에서 드러나는 예를 통해 보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꽃집에는 거의 같은 모양의 장미가 많이 있다. 그런데 누가 장미 한 송이를 사서 애인에게 사랑의 표징으로 선사한다면, 그 장미는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이 된다. 즉 장미를 선사하면서 자신의 사랑, 자기 자신을 선사하는 것이므로 꽃 이상의 것,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주 귀중한 표징으로 변하는 것이다.
미사 때에 축성되는 빵과 포도주도 이와 비슷하게 변화한다.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피를 흘린 자기 자신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그 이상의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한 장미가 장미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듯이 빵과 포도주의 겉모습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그 장미는 보통의 장미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사랑을 담은 표징이 된다. 이와 비슷하게 성찬례에서의 빵과 포도주도 내용적으로는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표징, 그분 자신을 담은 표징이 되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의 우유, 즉 겉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본질인 실체는 변화한다는 중세신학의 의미는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능력, 즉 성령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미사중에 사제는 성체를 축성하기 전에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청원한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성찬기도 제2 양식).
* 목표를 설정하라. (230406)
목표의 목적은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분명한 목적을 갖기 전에는 목표 달성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
목표를 설정할 때 마술은 시작되는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는 바로 그 순간, 스위치가 켜지고 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성취하려는 힘이 현실화 되는 것이다.
-윈 데이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