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만(鄭淳萬)선생 생가 터
정순만(鄭淳萬, 1873(고종 10)~1911)은 독립운동가로 하동정씨(河東鄭氏)가 수백 년을 세거해온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에서 아버지 정석종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河東), 호는 검은(儉隱)이다.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5년 을미의병에 참가하여 민족운동의 길에 나섰다.
일명 왕창동(王昌東)·정양필(鄭良弼)인 그는 1896년 3월 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등과 함께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 유근(柳瑾). 나철(羅喆). 안창호(安昌浩). 남궁억(南宮檍). 양기탁(梁起鐸) 등 367명과 더불어 잡혔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재미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지도자로서 활약하였으며, 1905년 만주로 망명, 간도용정(龍井)에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키며, 독립군양성에 주력하였다.
1907년 안창호. 김구(金九). 이동녕. 양기탁·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헤이그특사의 여비 1만 8,000원을 한민회장(韓民會長) 김학만(金學萬)과 함께 그곳 교포로부터 모금, 전달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이범윤(李範允)·이상설·이동녕·이동휘(李東輝)·박은식(朴殷植)·안창호·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노령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 연해주(沿海州)지역에서 『해조신문(海潮新聞)』·『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을 발간하는 동시에 13도의군부(十三道義軍府)·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관일약(貫一約)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 운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1월 23일, 정순만이 민회장 양성춘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양성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정순만의 격정이 빚은 과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정순만이 고의로 양성춘을 쏜 것이 아니라 오발에 의한 사고였던 것이다.
당시 연해주한인사회는 출신지역에 따라 몇 개의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일제는 정순만을 이범윤·이갑·최봉준과 함께 연해주 한인사회의 '유력한 파의 수장(首長)'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서북파의 수장으로서 민회장을 지낸 양성춘이, 기호파의 수장인 정순만에게 피살당했다는 사실은 동포사회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1911년 2월 8일, 그가 1년 남짓의 옥고를 치르고 옥문을 나섰다. 곧 서북파가 정순만을 죽일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는 민족운동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 조국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5월 하순, 그는 홍범도 등 동지들과 함께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등 조심스럽게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6월 21일, 그는 양성춘의 미망인과 형 양덕춘에 의해 도끼로 처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격정의 민족운동가 정순만은 그렇게 비명에 생을 마감하였고, 조국 독립의 꿈도 꺾이고 말았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첫댓글 자세한 글 잘 읽고 갑니다
너무도 애석하고 가슴아픈 역사의 한페이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