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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식 기념 자활터 앞마당에 피어난 도라지꽃. 잡풀 속에서 오히려 싱그럽다. (사진/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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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의 아버지였던 선우경식 원장이 2008년 4월 21일 선종하고 나서, 요셉의원은 이문주 원장신부를 중심으로 그동안 운영되어 왔다. 그러나 노숙인들의 재활을 위한 선우경식 원장의 꿈을 담은 전북 고창의 '요셉의 집'에서 머물던 5명의 노숙인과 실무자가 이 집을 떠나면서 요셉의원의 운영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요셉의 집'을 나와 인근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독자적으로 마련하고 지난 2010년 봄에 '선우경식 기념 자활터'를 열었다.
요셉의원, 원장신부와 직원들 사이에 갈등 빚어
지난 2년 동안 요셉의원은 이문주 원장신부와 실무자, 노숙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빚어 왔으며, 최근엔 20년 이상 근무했던 김정선 사무장을 포함해 절반 이상의 직원이 병원을 떠나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선우경식 원장의 유족들마저 사태수습을 위해 나선 상황이다. 이들은 이문주 원장신부가 요셉의원의 설립취지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항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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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들의 자활공동체인 '요셉의 집'에 세워져 있는 선우경식 원장의 기념비(사진/한상봉 기자) |
선우경식 원장은 1987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요셉의원을 연 이래로 지난 20년 동안 의료진 20여 명과 일반봉사자 600여 명의 도움을 받아 노숙인, 행려자, 알코올 의존증 환자, 그리고 건강보험증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들 40여만 명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에게도 인술을 베풀어왔다.
이처럼 요셉의원을 찾는 이들 가운데는 가족이 없거나 거처가 일정치 않아 치료를 받고도 갈 곳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2000년에는 ‘성모자헌의 집’을 운영하여 일시적 쉼터를 제공하고,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을 위해 1996년부터는 '목동의 집'을 운영해 왔다. 그리고 2005년부터 준비하여 2008년에 전북 고창 '요셉의 집'을 마련했다.
유족인 선우효식 씨는 선우경식 원장이 "노숙인의 '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노숙인을 치료한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선 의료의 방향을 '자활'로 옮기면서 시작한 것이 자활터 건립"이라면서, "요셉의원에서는 노숙인의 육체적 질병을, 쉼터에서는 자활의지를, 고창의 자활터에서는 경제적 사회적 자립을 통한 전인적 치유를 설계했다"고 말한다.
본디 요셉의원은 사회복지법인 서울대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에 등록되어 있지만, 운영위원회를 통해 독립적으로 운영됐으며, 서울대교구의 이문주 신부는 사제, 의사, 변호사 1인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의 위원이었다. 그러나 선우경식 원장이 선종하고 나서 선우경식 원장의 어떤 언질도 없는 상태에서 요셉의원 원장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으며, 잇따라 요셉의원의 관리권이 가톨릭사회복지회로 이관됐다. 그러나 요셉의원의 가톨릭사회복지회 귀속은 선우경식 원장이 평소 원하던 바가 아님이 유족들과 직원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다만 선우경식 원장이 갑작스럽게 선종하여 열린 운영위원회에서 은퇴를 앞둔 이문주 신부가 운영위원장을 맡게 되었을 뿐이다. 선우 원장은 평소 요셉의원이 어느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당시에 이문주 신부는 운영위원회를 대표해서 당시 사회사목국을 맡고 있던 서울대교구 김운회 주교를 만나, 비록 요셉의원은 소유권은 가톨릭사회복지회에 있으나, 운영권과 집행권은 요셉의원 운영위원회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허락을 받아 낸 바 있다.
직원과 노숙인, 주인에서 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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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식 원장의 측근에서 일을 도왔던 김학배 씨. 목동의 집과 요셉의 집에서 실무책임으로 일했다. |
그 후 평소 선우 원장의 소망이던 노숙인들의 자활터를 만들고자 고창 요셉의 집을 2008년 10월부터 개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셉의 집'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이문주 신부와 김정선 사무장 등 직원들과 노숙인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목동의 집'을 책임지고 있다가 고창에 합류한 김학배 실장은 이렇게 말한다.
“고창 요셉의 집은 노숙인들이 평생을 두고 살기 위해 땀 흘려가며 가꾸던 곳이었다.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들어오고 나가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여기서 땀 흘려 농사짓는 이유는 여기만이 그들에게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문주 신부는 다른 복지시설처럼 기간을 정해 6개월이나 1년 이 지나면 나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적 위주의 입소자 회전 방침이다. 요셉의 집에 들어왔던 5명의 노숙인이 여기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문주 신부는 '요셉의 집' 식구들에게 미술치료, 음악치료 등 프로그램을 돌리고,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농사는 텃밭 수준으로 지으라며, 처음에는 노숙인들이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농기계 등을 사는데도 협조해 주지 않았다. 결국 농토를 가꾸며 장기적으로 삶터를 가꾸려던 노숙인들의 소망은 좌절됐다. 이들은 '요셉의 집'에서 주인이 아니라 얼마 후면 나가야 할 손님에 불과했다. 이는 선우경식 원장이 몇 번이고 재입원하는 노숙 알콜의존자들을 받아들이고, 자활의 의지를 키우고 자활공동체를 이루려던 꿈을 수포로 돌리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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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선 씨. 요셉의원 사회사업가로 일하다 선우 원장의 선종 직전 2년 여를 사무장으로 일했다. 지금은 선우경식 기념 자활터의 후원회장이다. | 이 즈음 요셉의원의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사무장이던 김정선(아녜스) 씨는 "예전에 없었던 원목실이 생기고 수녀들이 상주하기 시작하면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사제와 수도자는 교육하고 직원들과 노숙인들은 교육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요셉의원은 그런 전례가 없다. 수녀들이 요셉의원에 파견되었으면, 그들은 먼저 겸손하게 노숙인들과 함께 지내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지금 그들의 지도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김정선 씨는 "선우 원장도 생전에 성직자 수도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며, 선우경식 원장은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깍듯이 대했지만,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좌지우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선 씨는 "선우 원장은 늘 겸손했고 도드라지는 것을 싫어했다. 항상 환자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분이셨다. 그런데 신부와 수녀는 위에서 내려다봤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높은 사람들인지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왜 선우 원장이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을 불편해했는지 알 것 같다"고 말한다.
평소 선우경식 원장의 요리사 겸 운전기사 역할을 했던 김학배 씨는 "선우경식 원장은 평소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셨으며, '호암상'을 받아서 이름이 알려진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선우경식 원장이 선종하면서,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타게 되고, 결국 그 후로 요셉의원에 후원금도 상당히 늘었다. 김정선 씨는 “이때부터 요셉의원은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돈이 들어오면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선우경식 원장은 요셉의원을 운영하면서 국가나 교회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원을 받으면 제도에 얽매이게 되고, 노숙인이라면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문턱 없는 병원을 지키기 어렵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이문주 신부는 운영위원회의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결정해서 2008년 12월부터 다음 해 2-3월까지 요셉의원을 리모델링하고 직원들의 봉급도 올렸다.
요셉의원, 서울대교구와 사제들에게 주도권 넘어가
이 당시 요셉의원은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공동운영 하는 게 관례였다. 물론 서울대교구 사회복지회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명의만 빌렸을뿐 교구병원이 아니라 요셉의원은 독자적으로 운영위원회 자치에 따랐다. 그래서 운영위원들이 모여서 이문주 신부에게 운영위 재편을 제안했다. 새로 정관을 만들어 3명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20여 명으로 확대하고, 1천만원 이상을 지출하는 경우에 운영위원회의 결제를 받아서 집행하도록 규정하자는 것이다.
한편 선우경식 유족들에 따르면,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은퇴한 의사 신완식 씨가 요셉의원으로 오면서, 2009년 8월 25일에 이문주 신부의 동의하에 요셉의원 직원 및 상근 봉사자 14명이 원장실에서 의견 수렴회의를 열어 이문주 원장신부와 신완식 의무원장이 중심이 되어 꾸려간 1년 4개월 간의 활동을 평가해서 의견서를 제출했다. 여기서 합의된 내용은 예전의 관례대로 요셉의원 원장은 평신도 의사로 하고, 사제는 지도신부와 운영위원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문주 신부는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후로 김정선 사무장은 가톨릭사회복지회 담당 신부에게 불려가고, 결국 사직서를 써야 했다. 가톨릭사회복지회 담당 신부는 "사무장이 나를 병원에서 내쫒으려고 한다"는 이문주 신부의 말만 듣고 "엄연히 사제가 있는데, 평신도가 왜 나서느냐"는 입장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김정선 사무장은 “나는 운영위원회를 선우경식 원장의 유족과 의사 등으로 다시 구성하자고 제안했던 것들인데, 이문주 신부는 자신의 결재권을 빼앗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 한번도 결재권을 준 적이 없다. 신부는 본당의 돈이 다 자기 것이고 평신도는 그저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하소연 했다.
서울대교구 사제가 요셉의원의 모든 결정권을 갖게 된다는 것은 곧 애초에 김운회 주교와 약속한 것을 무효로 돌리고 가톨릭사회복지회가 요셉의원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김정선 사무장에 따르면, "선우 원장은 요셉의원에 들어온 돈이 사회복지회로 간다면 옥상에서 돈을 뿌리겠다고 했다. 이 돈은 행려병자, 노숙인들을 위해 써야한다는 것이 유언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사회복지회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고, 환자들을 위해 병원에 투자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신부는 다른 뜻을 지녔던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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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터가 소재한 고창 마을에 있는 진료실. 선우 원장은 이 마을에 올 때마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을 진료했다.(사진/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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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식 원장은 무엇을 원했나?
김정선 사무장은 "선우경식 원장은 노숙인들을 길게 줄 세워 밥 먹이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문주 신부가 책임을 맡으면서, 요셉의원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줄 세워서 노숙인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했다. 선우 원장은 요셉의원은 무료급식소가 아니라고 했다. 선우 원장은 노숙인들이 약을 먹어야 하는데, 너무 굶으면 속이 안 좋으니까,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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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식 원장 |
게다가 선우경식 원장은 노숙인들을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끝까지 그 사람을 책임지려 했다. 김정선 사무장은 봉사자로 일하다가 2000년부터 요셉의원에서 사회사업과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렇게 전한다.
“요셉의원은 완전무료 병원이기 때문에 들어오면 먼저 상담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주민등록 말소된 사람들이 있다. 사회구조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그런데 치료 차원에서 큰 병에 걸리거나 수술을 해야 할 경우 요셉의원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러나 선우경식 원장은 이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 병원이나 가톨릭 재단 병원 등 다른 의료기관과 연계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대부분 병원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들지 않았다. 요셉의원에 입원했던 환자들은 주민증 말소 등으로 일반 수가로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의료보험 청구를 할 수가 없으니 환자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성모병원 조차도 사제들이 추천한 환자는 받아도 요셉의원 환자는 받지 않으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2002년 즈음 사제 성화의 날에, 선우경식 원장 대신에 사제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맡게 된 요셉의원 봉사자 심명희(마리아) 씨는 여의도 성모병원이 ‘그들만의 잔치를 하고 있다’고 폭탄선언을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다.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환자를 거부했던 사례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 산모가 출산을 했는데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다. 아이를 데리고 여의도 성모병원에 갔는데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첫째는 출산전 진료를 성모병원에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질 수 없고 두 번째는 다른 신생아들이 오염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결국은 근처 개인병원인 성애병원에 아이를 입원시켰다. 성애병원에서는 원장이 보험수가 처리와 할인까지 해줘서 아이를 살릴 수 있었다.
요셉의원에서는 노숙인 암환자 같은 경우에도 가톨릭중앙의료원(cmc) 산하 성모병원이 아니라 시립병원에 입원을 시켜왔다. 그리고 2002년부터 행려자에 대한 진료에 대해 서울시청과 서울의료원이 공동으로 지원을 해서 서울의료원으로 환자들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또한 행려자는 장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노숙인이 암에 걸리게 되면 요셉의원에서는 그 노숙인의 주민등록을 갱신시키고, 목동의 집으로 등록을 시켰다. 그렇게 하면 장례비까지 지급받고,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다.
한편 노숙인들뿐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김학배 실장은 선우경식 원장을 이렇게 기억한다.
"원장님은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물을 떠다주셨다. 지난 10년동안 그분 곁에서 지내면서 한 번도 반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을 정말 배우고 싶다. 그런 작은 것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생전에 A.A(익명의 알콜의존자) 컨벤션이라는 전국모임이 있었는데, 원장님과 직원들이 함께 갔었다. 원장님은 아침이면 직원들 이불까지 정리하고 손수 라면을 끓여 일일이 떠주셨다."
노숙인들, 요셉의 집에서 나오다
선우경식 원장이 끝까지 노숙인의 자활을 돕기 위해 설립한 것이 '요셉의 집'이다. 고창에 마련한 '요셉의 집'에는 2008년부터 5명의 노숙인들이 농사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시작했는데, 농사도 짓고, 김장도 하고, 새로 조성되는 폐교 자리 ‘요셉의 집’ 조경에도 힘을 썼다. 당시 요셉의 집 책임을 맡고 있던 김학배 씨는 “기적같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서울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던 환자들이 시골에 와서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 분들은 밑바닥에서 죽음을 걷어차고 올라온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필요한건 미술치료나 음악치료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이분들에게 필요한 건 무조건 믿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땅과 농사일을 통해서 정직한 결과를 얻는 경험이다."
이들에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숙인들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기적이다. 김학배 씨는 "재활이 성공하는 시점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는 때"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고창은 마지막 삶의 터전이었다. 이미 가족들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여기 밖에 의존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일에 매달릴 수 있었다. 성공회 노숙인 다시서기센터에서 노숙인 인문학을 열었다는데, 귀농 프로그램 역시 노숙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2010년 2월부터 4월 사이에 모두 ‘요셉의 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 결정적 계기에 대해 김학배 씨는 "요셉의원 측에서 입소기간을 정해 일정 기간이 되면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집’은 노숙인들이 모여서 평생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다. 그렇게 나가게 되면 이 사람들은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김학배 씨는 다른 노숙인들과 더불어 ‘요셉의 집’을 정리했다. 그는 ‘요셉의 집’을 만드는 동안 임시로 머물렀던 농가와 주변 농지를 다시 임대해서 이 노숙인들과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고, 그 이름도 ‘선우경식 기념 자활터’라고 지었다. 선우경식 원장의 뜻을 올곧게 지키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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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터가 자리잡은 집 뒤로 블루베리 밭이 있으며, 그 너머로 산이 펼쳐져 있다. (사진/한상봉 기자)
| 이들이 '요셉의 집'을 떠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프로그램 문제였다. 김학배 씨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신자지만, 아침 저녁기도와 성무일도를 하라고 하는데, 글을 모르는 분들도 있다. 묵주기도 정도야 할 수 있지만 농사짓고 살다보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이 서울에서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다 할 수 없다는 입장이 강하고, 서울에서는 요구하고 갈등이 있었다. 이곳 생활을 포기하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러지 말고 나가서 힘들겠지만 우리끼리 한번 살아보자고 얘기를 했다. 그간 1년, 2년 정도 지내면서 자신감을 갖게 된 상태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국민기초생활 수급자 자격도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으니 밥은 먹고 살 것이다. 해서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이다."
이들이 독자적으로 만든 ‘선우경식 기념 자활터’는 기존의 ‘요셉의 집’ 바로 옆에 있다. 이들은 농가 두 채를 빌려 다섯 명이 나누어 살고 있으며, 최근엔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끼니 때마다 찾아와 밥을 해준다. 이들은 현재 유명무실해진 성 요셉의 집을 자신들에게 임대해 달라고 ‘요셉의원’ 측에 요청하고 있다.
김학배 실장은 "지금 농가에 살면서 아쉬운 것은, 집이 좁아서 각 집에 나눠서 살고 있는것"이라며 "가끔 저혈당 증세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그럴 경우 떨어져 있으니 위험한 상황이 많다. 공동생활 공간이 아쉽고 가장 큰 문제다. 아직은 괜찮은데, 앞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들어오면 서로 돌봐주고 술 마시는 것도 지켜봐야 한다."며 넓은 공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들이 비워두고 나온 ‘요셉의 집’은 이층건물로 넓은 마당엔 잡풀만 무성하다. 최근엔 그 건물을 전주교구에 판다는 소문도 돌았고, 김학배 씨는 "서울대교구 사회복지회에서 알아서 할 것"이라는 답변이 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김학배 씨는 "저 집은 환자들 것이다. 원장님과 환자들이 만든 것이다. 사회복지법인 가톨릭사회복지회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디자인만 전문가에게 맡겼지 모든 것을 우리 손으로 했다. 피와 땀이 어린 곳이다. 이곳은 전주교구도 서울교구에게도 필요 없는 곳이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그곳이 의미가 있는 공간인데, 관리를 하는 사람도 없고 관리할 수도 없어서 폐허가 되어 버렸다. 지금 76세인 이문주 신부의 형이 관리자로 와있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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