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집
박 용 섭
띠(茅) 풀로 이엉을 얹은 산막 추녀 끝
설익은 새벽이 오는 우듬지에서
깨어난 새가 한참 울다 푸른 하늘에 잠긴다
먼 산 어둡던 구름 걷혀 가면
이슬이 물봉숭이에 매달려 웃는다
거미는 긴 대들보를 걸고 격자문 창틀을 만들고
얼기설기 서까래를 걸쳐
하늘이 잘 보이는 집을 짓는데
쌀이 있어야 밥을 짓지
아내는 한숨 같은 바람을 울린다
굼벵이 같이 지하 셋방 9년째
시 뿌리를 캐보겠다고
높은 곳에 눈길 보내다
길 잃고 방황하는
하늘은 푸른 꿈으로 그렇게 있고
숭숭 뚫린 집으로
바람은 언제나 오고 간다
여기서 杜甫 얘기를 좀 해야겠다. 두보처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간 시인도 드물 것이다. 집안을 일으켜 가문의 체면을 세워보겠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가난과 질병은 두보를 따라다녔다. 오히려 그의 가난과 불행이 빼어난 시를 남기게 했으니 우리가 되새겨야 할 전범이다. 객지를 떠돌며 배를 채울 게 없었던 두보. 아들이 굶어죽었다. 피난길에서 떠돌다 홍수로 떠내려가는 배 위에서 먹을 게 없어 생을 마감했던 두보. 이백과 쌍벽을 이뤘던 두보는 그렇게 갔다.
우리 선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고산 윤선도, 서포 김만중, 다산 정약용, 송강 정철 등 이들도 유배지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면서 좋은 작품을 남겼다. 글을 읽고 시를 쓰면 추위와 배고픔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우리 시인들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포식해서 오히려 좋은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별장에서 명작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고 본다. 가난을 자초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보를 생각하면 역경 속에서 명작이 나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위의 박용섭 시인의 <시인의 집>을 읽으며 이 시인이 견뎌온 가난이 상상의 가난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여기 띠집은 이 시인이 경험한 것은 아닌 듯 하나 띠집을 둘러싼 설익은 새벽이나 한참 울다 가는 새나 구름 걷히는 산. 이슬이 매달리는 새벽이 전제되었다. 그리고 거미가 삶을 위해 집을 만들고 허공에 그물 집을 만드는 것인데... 화자인 시인의 본론은 쌀독에 쌀이 없어 밥을 짓지 못하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고 반지하방에 엎드려 시를 써보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고층 아파트를 쳐다볼 눈은 없다. 허공의 거미줄은 그래도 푸른 하늘을 가졌거늘. 한 편의 시가 가난하고 불편한 생활 속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겠는가. 가난을 원망할 게 아니라 공손히 받아들이는 겸손이 필요하다.
첫댓글 시집'내 책상에는 옹이가 많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