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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14:28-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14:28-33)
의심은 나쁜 것?
제 친구 중에 예수 믿는 자를 아주 싫어해서 아무리 전도를 해도 씨가 안 먹히는 자가 있었다. 그 이유가 조금 특이했다. 교인들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뜻이자 은혜이기에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좋은 일에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사업이 부도가 나도 병원에서 말기암 선고를 받아도 그런다는 것이다. 심지어 멀쩡한 아들이 길가다 음주운전 차에 치어 죽었는데도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믿는 맹신자로서 종교적 가식이 너무 심해 보인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설득하여서 전도할 자신이 있는가? 아마도 선뜻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실제로 그 친구가 불행을 당한 교인들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 왜 은혜가 되는지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하는 자가 없어 더 싫어졌다고 실토했다.
신자들이 이런 반발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가 기독교교리를 몰라서가 아니다. 신자 본인이 그 답을 소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안 짓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럼 현실적 풍요까지는 몰라도 고난이 겹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자꾸 생긴다.
그래서 목사님이나 주위에 믿음이 좋아 보이는 신자에게 상담해보면,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나쁜 것이니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라.”는 대답만 듣게 된다. 그 충고대로 몇 번 그렇게 해보려 노력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없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주위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이 적거나 없다고 판단할까 두려워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다.
본문에도 베드로가 처음에는 물 위를 신나게 걷다가 바람을 보고 놀라 물에 빠졌다. 그러자 주님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껏 의심은 믿음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의심이 생기면 무조건 없애라고만 배워왔다. 이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최소한 여러모로 따져볼 여지가 많다.
의심의 실상(實狀)
남편이 매일 야근한다고 말하면서 늦게 들어온다. 전화를 해도 매번 꺼져있기 일쑤다. 집에 들어오자 피곤하다며 샤워하고 자기 바쁘다. 왜 그리 바쁘냐고 물어도 회사 일이라고만 하고 도리어 짜증만 낸다. 아내로선 자연히 다른 여자가 생겼나보다 덜컥 의심의 생긴다. 그럼 의심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아주 좋은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쁘다.
그러다 정말로 남편의 부정을 발견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정작 믿음이 필요한 단계가 된다.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할지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없이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마5:32) 그렇다면 간음은 크리스천에게도 이혼의 사유가 된다. 다른 한 편 누가 잘못을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고 했다.(마18:22) 아이들 장래를 감안하여 진솔한 대화를 나눈 후에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받고 용서해줄지, 아니면 이참에 갈라설지 간절히 기도해서 결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의심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심은 믿음을 작동시키는 동기 내지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이 아무래도 용서 쪽에 무게 중심이 있으므로 부정한 남편을 끝까지 용서하기로 택했다면 그 아내의 믿음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도약한다. 단순히 부부 사이의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관점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폭이 넓어진다.
또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아내의 외출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화가 끄져 있는지 받지를 않는다. 어디 갔다 왔느냐 물으면 동창회나 아파트 부녀 모임에 갔다 왔다고 한다.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데 저녁은 더 정성스레 차려 준다. 혹시 바람을 피우는지 충분히 의심이 갈만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남편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면 남편이 바보이기 때문인가? 대개의 경우 그렇겠지만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2-30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아내의 성품, 인격, 신앙에 비추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는 전혀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남편이 몸이 아파서 회사에서 조퇴하고는 동네의 슈퍼마켓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아내의 고백인즉 남편 월급만으로는 아이들 과외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근무 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남편은 자기가 못나서 아내를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미리 허락을 구하지 않은 것에 용서를 빌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 것이다. 부부 간의 사랑과 믿음은 당연히 더 굳어질 것이다. 어떤 힘든 일도, 주위 사람들의 어떤 간섭도, 그 두 사람의 사랑과 믿음에 아무 장애가 되지 못한다. 이 경우는 진정한 신뢰 관계가 먼저 확고하게 형성되었기에 겉모습만으로는 어떤 의심도 생기지 않은 것이다.
그에 반해 2-30년을 결혼 생활을 했어도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남편이 있다. 낮에 전화 한두 번 빨리 받지 않았다고 그저 닦달하며 야단친다. 아예 아내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기에 아무 일이 아닌데도 무조건 의심하는 것이다. 살펴본 대로 믿음이 없고 흔들리기에 의심하게 되는 법이다. 또 자기도 모르게 의심하게 되면 그 때가 바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단계라는 것이다.
의심의 기능과 목적.
31절을 다시 보자.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음이 적은 자라고 먼저 지적한 후에 왜 의심하였느냐고 한다. 의심이 생기는 바람에 좋고 강했던 믿음이 적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다. 최대한 양보해도 믿음이 적은 것과 의심이 생긴 것은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의심이 발생해서 믿음이 없어지거나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제대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왜 의심하였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의 원래 의미도 힐문조로 야단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의심하느냐? 의심의 내용과 그것이 생기게 된 전후사정을 잘 따져보라는 충고다.
의심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모든 인간에겐 오감(五感)이 있다. 눈으로 보는 시각(視覺), 귀로 듣는 청각(聽覺), 코로 냄새 맡는 후각(嗅覺), 혀로 맛을 보는 미각(味覺), 손으로 만져 느끼는 촉각(觸覺)이 그것이다. 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 일차적으로 반응하는 기관이다. 그 기관들이 감지하고 인식한 자료를 뇌의 데이터베이스로 전송하면 이성은 분석, 판단, 선택, 결단하는 절차를 행한다.
한강에 얼음이 얼었는데 그 두께를 알 수 없으면 이 다섯 기관과 이성이 합동으로 작동하여 순간적으로 그 얼음이 내 체중을 견디어낼지 의심하게 된다. 큰 돌을 던져서 그 강도를 시험해본 후에 한 걸음씩 조심스레 살살 건너게 된다. 음식 색깔이 변해 있고 역겨운 냄새가 나고 맛이 조금 이상하면 곧바로 상했는지 의심하게 된다.
의심이 발생하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선택하여 결행하기까지 정말 1초도 안 걸린다. 순간적, 자동적으로 판단한다. 이처럼 의심은 자연발생적이다.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그렇게 되도록 창조해 놓았다는 뜻이다. 의심은 그래서 익사하지 말고, 또 식중독에 걸리지 말라는 경고를 형성하는 기능으로 너무나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한강에 살얼음이 얼었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걸어가면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야 하면서 무턱대고 발을 내딛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처음의 의심은 정확히 말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가치중립적(價値中立的)이다. 얼음의 두께에 의심이 생겼는데도 돌도 안 던져 보고 익사하면 부정적 결과를 낳을 것이며, 그 반대는 긍정적 결과를 얻는 법이다. 말하자면 의심에 좋은 가치와 의미를 심느냐는 신자의 몫인데 바로 그 때에 올바른, 무조건적 맹신적인 아닌,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또 믿음으로 올바르게 반응한다는 정확한 의미도 의심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판단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심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전후사정을 잘 따져서 정확하고 올바른 길로 가라는 것이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 더럽고 추한 흑암의 세력이 배후에 있는지 잘 분별하여 깨끗하고 의로운 생명의 길로만 걸어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심하라.
하나님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죽기 살기로 파고들면서 따져야 한다. 사업상 계약서는 구석에 깨알 같이 적힌 문구까지 변호사를 동원해서 따지면서 왜 영원히 살고 죽는 문제는 그러지 않는가? 인생을 정말로 진실하며 아름답고도 의롭게 살 수 있는 길은 왜 찾지 않는가? 성경을 열심히 묵상하며 읽고 체계적으로 교리를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받아 누릴 것 아닌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넘게 숱한 고생을 한 후에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밤새 씨름을 했다. 야곱은 그 사자에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면서 물고 늘어졌다. 창고에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현실적 축복을 부어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상당 양을 형 에서에게 보냈다. 당장 이 강을 넘으면 장자권을 사기 당해 빼앗겨 오매불망 절치부심하던 형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로 보호해 줄지 따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는 하나님께 더 중요하게 확인하고 싶었던 사항이 있었다. 이전에 고향을 등지며 혈혈단신으로 피신 길에 올랐을 때에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꿈꿀 때에 받았던 계시가 있었다. 하늘을 향한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인자로부터 그 땅을 반드시 다시 차지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유효한지 물었던 것이다.
그로선 그 언약에 끝까지 참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분의 권능과 은혜 아래 살며 믿음의 가문의 장자로서 그 믿음을 대대로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전에 베델에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고 믿고 있었지만, 막상 그 땅을 눈앞에 두고선 약속대로 이뤄질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더러 그 약속이 반드시 이뤄지게 해달라고, 다른 말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역사가 실행되길 간절히 소원했던 것이다. 자신의 장자권이 계속 유효한지 따지고 또 따졌던 것이다. 결국 사자로부터 “네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불어 이기었음이니라”(창32:28)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서야 그를 풀어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따지고 따져 완전히 해소한 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진정한 선조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의심이 들면 보이거나 들려 달라고, 혹은 말씀을 통해 심령에 분명한 확신이 들게 해달라고 매달려야 한다. 제발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르고 또 졸라야 한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도, 그분이 정말로 내 삶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간섭하시는지, 내 인생에 대한 그분만의 온전하고 거룩한 뜻과 계획이 있는지 의심이 들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의심이 나는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미주알고주알 아뢰며 답을 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당신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알고 싶다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 한다면 오히려 그분의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으로서 믿을 필요가 없다. 아니 하나님은 없는 셈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진정으로 깨달아 당신의 자녀가 되겠다는데 외면할 리는 만무하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의심이 드는데도 따지지 않는 것이 진짜 나쁜 것이다.
질투의 하나님
배우자의 부정을 의심하게 되면, 정확히 말해 의심을 해소하려고 사정을 파악했더니 사실로 판명 났을 때에는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질투가 불같이 끓어오른다. 밤새 잠을 못 이루고 골수가 썩는 것 같다. 이때의 질투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아주 좋은 것이다. 아내가 바람이 났는데도 질투하지 않으면 남자도 아니다. 인간으로 살 가치도 없으며, 질투는 활기차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질투가 정말로 좋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바로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출34:14) 인간을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다. 그럼 질투하는 당신의 성품도 닮게 하셨다는 뜻이다.
질투라는 감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사랑하는 상대를 끝까지 죽도록 사랑하라는 뜻이다.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아담과 이브 같은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창2:25) 서로에게 잘못하는 것은 물론, 숨기는 것 하나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만과 자존심도 전혀 개입되지 않는 그런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 주일 성수를 철저히 하라는 종교적 헌신과 의무를 요구하는 뜻이 아니다. 당신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당신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이 죄악에 빠져서 당신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절대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신만의 긍휼로 참을 때까지 참다가 그냥 두었다간 진짜 사탄에게 완전히 넘어가겠다 싶으면 이방을 통해 징계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당신의 품 안으로 돌려놓겠다는 선언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질투심의 표현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질투심도 마찬가지다. 저는 예수를 믿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저도 제 친구처럼 예수 믿는 신자를 죽도록 싫어했다. 당신의 원수가 되어 있는 그런 저를 당신의 무한한 긍휼 가운데 선택하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해주셨다. 결국에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이런 영광된 자리에 이르게 할 만큼 질투하셨다.
신자들더러도 하나님의 선한 목적대로 너희의 아내와 남편과 자녀와 성도와 이웃들을 질투하라고 즉, 죽기까지 온전히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교회 안의 대표기도를 잘하는 성도가 질투가 나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해서 자기도 그렇게 하면 된다. 괜히 뒤에서 그 사람의 약점을 알아내어 헐뜯지 말고 말이다. 또 구역장, 전도회장, 주일학교교사 등등 여러 직분을 맡아 정말로 성실히 봉사하는 성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럼 혼자 북 치고 장구 친다, 교회를 자기 집 안방인양 제 멋대로 군다고 말도 안 되는 험담을 하지 말고 본인도 무엇이든 맡아서 봉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특권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왜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한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정말로 살아계시는 한 분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는 어떤 인간에게도 없다. 모든 인간은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불신자를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들에 비추어 신자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삶과 인생의 전부가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질투의 권능 안에 언제 어디서나 붙잡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자 스스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독생자 예수의 피 값으로 사신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더러운 죄악과 어두운 사망의 세력에 더 이상 당신의 자녀를 빼앗기지 않으신다. 신자를 반드시 아름답고 풍성하고 거룩하고 선하며 진실한 자리에 되돌려 세우시고야 만다. 이 땅의 삶이 다하면 천국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완전한 계획과 판단 아래 필요하다면 때때로 징벌과 고난을 주어서라도 그 영광으로 이끄실 것이다.
만약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에 의심이 든다면 제대로 따져서 믿어야 한다. 그저 건성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말해선 안 된다. 은혜가 왜 은혜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기도 누리지 못하고 아니, 정확히 그 뜻조차 모르는 은혜라는 단어를 아무 때나 남발하니까 불신자들로부터 맹신자, 광신자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제대로 믿는 모습을 그들 앞에 보여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불신자가 “저 사람은 진짜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 같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또 “나도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다”는 시기와 질투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
처음에 예를 든 제 친구처럼 신자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뜻이자 은혜라고 말하기에 가식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주어야 할까?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일단 믿어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또 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답변을 하지 못해서가 절대 아니다. 그래봐야 못 알아먹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점이 기독교의 신비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신비하고 오묘하며 광대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신들은, 사실은 실존(實存)조차 하지 않지만, 거룩하고 경건하고 위대함만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높인다. 여호와 하나님처럼 스스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거기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사람들조차 저주 받은 죽음이라고 멸시하는 십자가에 직접 달리어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다.
말하자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질투심이 절정에 올라서 폭발한 것이다. 당신의 엄청나고도 아름답고 경이로운 사랑이 하나 아낌없이 온 세상에 온전히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며 엎드린 자에게 당신의 참 생명을 주신다. 또 이 사랑은 인간의 어떤 이성적 이해를, 의심은 당연히 포함되며, 초월한다. 인간 이성과 상충하지는 않되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도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현실의 고난이 겹쳐서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을 의심한다고, 오히려 목사님들이 야단을 치면 칠까, 하나님은 절대 야단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신다. 대신에 의심을 하면서도 따지지 않는 자는 야단치실 것이다. 어떤 의심과 불만이 생겨도 야곱처럼 따지고 또 따져서 반드시 해답을 얻어야 한다.
단, 하나님의 힘을 빌려 우선 고난만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로 그런다면 지금껏 겪어왔듯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해소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당신을 온전히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어떤 연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연단을 통해 자신을 정금같이 성숙시키겠다는 소망과 또 하나님이 완벽하게 그렇게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따지는 자에겐 하나님은 당신을 활짝 열어젖혀서 신자로 당신에 대해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14:28-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14:28-33)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음에도 수시로 믿음의 실수를 했다. 그래서 우리의 실수에 대한 변명이 되며 안도감까지 준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우리 생각만큼 결코 적거나 약하지 않았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라 오늘날의 신자에 비해 교리적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뿐이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의 열정에는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다.
본문 같은 상황에서 과연 우리라면 물에 띄어들 수 있겠는가?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이 다 죽게 되었다고 걱정할 만큼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었다. 그 캄캄한 밤에 물 위를 걷겠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꿈도 꾸지 못하는 짓이다.
“만약 주시어든”(28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그가 주님인지 아닌지 의심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미 “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주님과 함께라면 나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예수님의 크신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달라”, 혹은 “제가 뛰어 내릴 테니 주님이 저를 붙들어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 말씀으로 명령만 하시면 제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한 믿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어쨌든 그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졌다. 예수님도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했다. 또 그래서 지금껏, “아무리 위급하고 고통스러워도 그 환경을 보지 말고 환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라.”고 배워왔다. 이 진술만 따로 떼어 보면 분명히 진리다. 신자가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본문의 상황에는 부적합한 가르침이다. 원론적으로는 옳지만 깊이 따져볼 여지가 많다.
주께 시선을 붙들어 맨 베드로
우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힐난조가 아니다. 어떻게 물에 빠지게 되었는지 잘 따져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한번 잘 생각해보라. 그 무엇보다 베드로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 시선을 뗐을 리는 만무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조오련이나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 같은 수영천재라도 그 상황에선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물의 전문가는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 베드로가 한가하게 스포츠나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야말로 역사상 어느 누구도 걸어 가보지 못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 즉, 바다 위를 걸으려는 판국이다. 주위 경관을 쳐다볼 여유라곤 없다.
성경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다고 말한다. 바람은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캄캄한 바다에 파도가 치니까 순간적으로 예수님이 안 보인 것이다. 눈에 물이 튀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을 닦으려고 눈을 비비는 사이에도 주님은 안 보였을 것이다. 다시 보려니 또 파도가 치니까 주님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을 수 있다. 큰 파도가 좀 오래 치니까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이러다 물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을 것이다.
베드로는 한 번도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거나 돌린 적이 없었을 것이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수록 주님 쪽만 바라봤을 것이다.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변의 여건이 예수님을 향해 갈구하는 시선마저 가로막은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칠흑 같은 바다 위에 분명히 계셨다. 또 베드로 쪽을 향해 계속 걸어오고 계셨고,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베드로가 잠시 주님이 자기를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환난이 닥치면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강요나 권면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온다. 고난이 겹칠수록 하나님만 더욱 바라본다. 교회에 건성으로 왔다 갔다 하는 교인도 어려움을 겪으면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과 그 권능이 크심에 대해 의심을 하면 기도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자꾸 응답이 지체되니까 베드로처럼 주님이 지금 가까이 오고 있고 그 거리가 단축되고 있음에 대해 망각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환경이 커 보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아서 환경이 크게 보인 것이 아니다. 환경이 크게 보이니까 주님을 찾았지만, 자꾸 여건이 더 어려워지므로 주님을 더 찾아도, 응답이 늦어져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말하자면 물 위를 걷는 기적에는 지금껏 배워온 내용과는 조금 다른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다.
기적의 과학적 의미
기적을 과학적으로 따지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만물이 운행되도록 일정한 법칙을 부여해 놓았다. 또 그 법칙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꿀 때까지는 한 치의 어김없이 작동하게끔 되어 있다. 예컨대 해는 영원토록 동에서 떠서 서로 지지 그 반대로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인간은 절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법칙도 있다. 왜냐하면 중력(重力), 부력(浮力), 만유인력(萬有引力) 같은 물리적 법칙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이런 엄청난 법칙들의 작동을 그가 걸어가는 주위에만 일시적으로 중지시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기적에는 다른 기적들과 구별되는 특성이 또 하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근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기만 했다. 또 불치병이 낫거나, 귀신이 쫓겨 가는 이적도 거의 전부가 주님이 일방적으로 베푼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진 12년 된 혈루병 여인의 경우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었다. 그러나 베드로도 주님이 나를 물 위를 걷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밤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본문의 기적에선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또 그런 믿음이 있어야만 서너 가지 물리적 법칙을 중지시켜주셨다. 여전히 파도가 베드로 개인은 물론 배까지 삼킬 듯 흉흉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무협지 스타일로 공중 부양을 시킨 것도 아니요, 한 발이 빠지기 전에 다른 발을 움직일 수 있도록 발에 모터를 달아준 것도 아니요, 축지법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베드로가 반드시 믿음으로 순종하여 한 발자국을 떼야만 그 발이 디디는 부분만 딱딱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인의 믿음과 상관없이 줄지어 서서 마른 땅을 건넌 홍해나 요단의 기적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수님은 물리적 법칙 몇을 빼고 신자의 믿음의 법칙을 하나 첨부시킨 것이다. 인간 베드로의 믿음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권능이 반드시 톱니처럼 함께 물려야만 기적의 효능이 발휘하게끔 한 것이다.
배에 남아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서 베드로가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박수와 감탄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이 닫는 부분 외에는 평상시와 동일했다. 몸이 파도에 흔들려 기우뚱거렸을 것이다. 어쩌면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이 떨어져 물에 가라앉는 경우도 있었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파도와 바람을 잠잠케 하고 수면을 고요하게 한 후에 콘크리트 바닥처럼 만들어 모든 제자가 걸을 수 있게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베드로의 몸은 흔들거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했다. 차츰 두려움이 다가오자 그가 내딛는 발에 힘이 빠지고 그 밑의 물도 물컹물컹해지는 듯이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오직 베드로 개인의 믿음을 걸고 당신의 권능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두려움이 커지자 이 기적에 부여한 믿음의 법칙의 효력도 줄어들었다. 즉,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자 주님은 물리적 법칙을 조금씩 다시 가동시킨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는 그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든 것이다.
다른 말로 이 모든 상황을 지금 예수님이 주도하고 계셨다. 요컨대 베드로를 물에 빠트린 것도 예수님이었다. 그럼 그 캄캄한 밤중에 믿음을 걸고 엄청난 도전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너무 냉혹하고 야속하고 짓궂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성경 해석의 중요 원리
성경을 해석함에 아주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다. 한 기사나 한 문맥 안에 동일한 표현이나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포인트다. 물 위를 걷는 기적 기사인 마태복음 14장 22절에서 33절까지 정확하게 똑같은 표현과 내용이 두 번 나온다.
먼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자 제자들은 유령인줄 오해했다.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고 했다.(26,27절) 똑같은 내용이 오늘의 본문에도 나온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아 주고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30,31절) 제자들과 베드로는 무서워서 소리 질렀고, 예수님은 그 즉시 구원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신자가 힘들 때에 기도하자마자 응답해주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베드로에게 부여되었던 믿음의 법칙은 지금 효력이 다했다. 고난이 겹치고 또 겹쳐서 새벽기도에 나와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사방은 캄캄히 막혀 있다. 그래서 기도할 힘조차 나지 않고 하나님의 실존 여부마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고 신자의 기도를 듣고 신자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환난에도 당신의 자녀에게 피할 길은 열어 놓으신다. 아무리 사방이 완전히 다 막혔어도 하늘을 향한 위쪽은 항상 활짝 열려 있다. 무서울수록 끝까지 하나님을 소리 질러 불러야 한다. 주위에 믿음이 좋은 신자들이 고개를 흔들고 목사님조차 침묵하며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을 때에도 하나님의 권능은 손곱만큼도 줄지 않는다. 그분의 사랑은 오히려 무한대로 더 커진다.
신자의 믿음의 법칙이 산산조각이 나서 세상에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고 자기 인생이 완전히 끝이 났다고 여겨질 때에 하나님은 또 다른 법칙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 모든 허물과 고난과 실패를 바로 잡아주시는 하나님 당신의 은혜의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절대로 율법적, 기계적, 자동적, 인과응보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는 법칙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될 수 없다.
저도 목사이지만 목사님들이 너무 쉽게 주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권한다. 물론 틀린 말은 절대 아니지만, 고난 때에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오히려 평온하고 형통할 때에 그 시선이 더 쉽게 세상으로 향하게 된다. 저도 목사지만 힘들면 주님을 찾고, 더 힘들어지면 두렵고 염려가 끊이지 않기에 죽기 살기로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의 믿음이 약해져도 혹은 자꾸 두렵거나 의심이 들어도 넘치도록 부어지기에 은혜인 것이다. 믿음이 강건하고 전혀 의심이 들지 않을 때만 은혜를 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자 공로인 것이다. 인간의 어떤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부어주실 때에 은혜가 비로소 은혜다워지는 것이다.
믿음에는 법칙이 없다.
하나님 쪽의 은혜에 법칙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수 없다면, 인간 쪽의 믿음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초월하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어떤 위대한 일에도 정밀함에서 전혀 부족하지 않고, 아무리 세밀한 일에도 당신의 광대함은 함께 하신다.
믿음이란 그래서 광대하고도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가슴을 크게 열고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받아들이느냐는 차원이다. 인간 쪽의 수용의 한계를 넘어서 부어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믿음과 은혜의 상관관계를 어떤 공식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신자가 그 오묘하고 아름답고 광대한 은혜의 강에 완전히 빠져 현실의 삶에서부터 세밀하고도 풍성하게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라. 당신께서 모든 인간의 죄 값을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죄인을 구속한다는 진리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인들은 다 싫어하고 분노마저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사상, 철학, 도덕, 지혜, 종교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일단 성령의 거듭남으로 그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이 쌓아놓은 모든 자랑거리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오직 예수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하게 된다. 신자가 현실의 매일의 삶에서 실제로 그분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자 은혜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당시 최고의 믿음을 가진 자였다. 주님만 믿고 따르는 열정에선 역사상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베드로 혼자만을 위해서 해와 달과 바다를 움직이는 그 엄청난 물리적 법칙을 일시 중지시켰다.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베드로 쪽의 믿음과 순종의 행위를 보이길 분명히 요구하셨다. 반드시 신자의 믿음이 따라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위 여건이 너무 두려워서 그 믿음에 실패하자 징벌을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진짜 더 큰 은혜를 베푸셨다. “주여, 주여, 주여!”라고 교회 모임에서 결단력을 높이려는 의식 절차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너무 힘들고 두려워서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으로 주님을 부를 때에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주신다. 하나님만의 속력으로 달려오신다. 신자로 거의 빠질 뻔 하게는 해도, 완전히 빠져 죽게는 하지 않으신다.
위급할 때만 드리는 기도
시편 50편 15절을 보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여기까지는 너무나 당연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어 있는가?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한다”가 아니라,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다.
위급할 때만 겨우 기도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믿음이라도 하나님은 아주 기뻐하시고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니 너무나 엄청난 은혜 아닌가? 그것도 하나님이 기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기뻐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환난을 주고선 할 수 없어서 기도하게 하고는 짐짓 모른 척하고 구해주는 즉, 병 주고 약 주는 분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겪는 고난의 99%가 사실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 때문이지 하나님에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진심으로 부르짖으면 건져 주신다고 한다. 사방이 막힌 것 같은 고난을 겪도록 묵인하는 것은 당신을 더 간절히 찾아서 당신을 정확하게 바로 알라는 것이다. 아는 만큼 당신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에 당신과의 참 사랑의 관계로 초대 혹은 인도한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실제로 걸었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상하게도 유독 베드로의 이 실패만큼은 우리 모두가 심정적으로 굉장히 아쉽게 여겨진다. 이왕이면 끝까지 물 위를 걸어서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유유히 배에 올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련이 생긴다. 물론 그랬다면 베드로는 역사상 최고의 믿음의 영웅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조차 산산조각 났을 때에 즉시 달려와 구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는 실종될 것이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주도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에 빠트렸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베드로에게 동료 제자들 앞에서 자신을 높여보려는 소영웅주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그것까지 꿰뚫어보셨을 것이다. 그래도 주님은 그가 완전히 빠지기 전에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진정한 은혜라는 것이다.
기지도 못하는 아기가 일어나 걷겠다고 설친다고 치자. 뼈의 발육에 안 좋으니까 바른 부모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아기가 넘어져야 정상이고 또 부모도 넘어지도록 놓아둔다. 그러나 아기가 일어서려고 용을 쓰는 모습이 매우 안쓰럽기는 해도 너무나 귀엽고 예쁠 것이다. 나아가 아기가 억지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너무 힘을 주면서 버티면 부모로선 몸에 무리가 가겠다 싶어서 즉시로 손을 잡아주지 않겠는가?
위급할 때만 겨우 기도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도 하나님이 영화롭게 여기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 불신자들은 자연의 물리법칙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인생은 오직 그 법칙들에 의해서만 좌우된다고 믿는다. 기적은 당연히 믿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자신을 기계나 물체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기도 응답 받는 것도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연의 일치는 기도할 때에 훨씬 더 자주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자가 환난이 닥쳐야 겨우 기도를 해도 그 기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죄악과 술수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계획과 지혜만 믿고 행했더니 남은 것은 실패와 좌절과 상처와 고난뿐이었다는 실토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떻게 하든 그 어둡고 힘들었던 세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지배를 받고 싶다는 뜻이다. 신학적으로 그런 구체적인 의미는 몰랐어도 흑암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들어오고 싶다고 부르짖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
올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정말로 지난해의 묵은 실패, 분노, 상처, 고난 그 모든 것을 해결해달라고 주님 앞에 부르짖어 보라. 모든 짐을 그분 앞에 완전히 내려놓는다면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은혜를 반드시 누리게 될 것이다.
박진호 목사
첫댓글 지난달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후원이 없습니다 카페후원을 부탁드립니다
공과금도 못내고 지병인 당뇨합병증 치료받으러 병원도 가지도 못해요
후원 참여가 없습니다 후원으로 도와주셔서 용기를 주십시요...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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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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